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나는 잊고저/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 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고 죽음 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에 더욱 괴롭습니다.
복사꽃/ 허영자
복사꽃아
예쁜
복사꽃아
마침내
네 분홍저고리
고운 때 묻는 것을
서러움으로 지키거늘
네 분홍저고리
어룽져 바래는 색을
눈물로서 지키거늘
이 봄날
복사꽃 지키듯
내 사랑과 사랑하는 이를
한숨으로 지키거늘.
꿈/ 정호승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해거름/ 이외수
누이야
전생길 떠날 때 뻐꾸기 피울음은
이승길 돌아와도 뻐꾸기 피울음이지
개망초 무성한 수풀
햇살은 돌아눕고
한 걸음만 돌아서도 지워지는 눈썹 언저리에
날개 접는 부전나비
누이야
아무리 걸어도 길은 낯설어
물소리만 저 홀로 깊어가더라
너의 목소리/ 오세영
너를 꿈꾼 밤
문득 인기척에 잠이 깨었다
문턱에 귀대고 엿들을 땐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 고쳐 누우면
지척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매깃 소리
네가 왔구나
산 넘고 물 지나
해 지지 않는 누런 서역 땅에서
나직이 신발 끌고 와 다정 부르는 목소리
오냐 오냐
안쓰런 마음은 만릿길인데
황망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
내리는 가랑비
후두둑
꽃등/ 신석정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詩,
글은 노력하면 느는 법이지만, 시는 타고난 분들 밖에 쓸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뒤에 글에 교과서에 나온 시 모음이 있길래,시덕후인 저도 조심스럽게 풀어봅니다. 좋은 시들을 공유하고 싶어서 올리는데, 더 원하시면 다음에 더 많이 ㄷ들고 올게요. 공지....어긴 거 없죠? 첫 글이라 떨립니닥...공지 어긴 거 있으면 알려주세요. 개인적으로 요즘 너무 우울한 일이 많이서 그런지 오늘 올린 시의 시구 중에서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하는 부분이 참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