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된 카테고리 세븐틴
패스파인더를 사랑하다 못해 결국 이런 글까지 찌게 된... 나봉...
BGM만 보고 싶거나 아직 패파를 보지 않아 스포를 피하고 싶은 봉이 있을까봐 명장면 모아놓은 건 더보기로 줄여놨으니 역삼각형을 눌러서 하나하나 회상해주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혹시 브금을 안 켜고 읽은 봉이 있다면 한 번 브금이랑 함께 읽어보는 걸 추천해!!
작가님이 글 제목을 그 BGM 노래 가사로 해놓으셔서 글 읽을 때 분위기 몰입도 더 잘 되고 읽는데 가사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지지도 않아 정말루...
그리고 한솔이가 (패파 용어로) 승관이한테 삐지 깔았을 때 듣고 있던 노래가 그 브금이기도 해서...
선택은 각자 하는 거지만 난 브금과 같이 읽는 걸 강력추천해ㅎㅎ...
+
아 그리고 장면을 좀 크게 넣고 싶은데 여기에다 통째로 다 넣으면 가독성이 떨어질 것 같아서 대사끼리 붙이거나 장면만 딱 나오게 자르고 그런 게 있어! 내가 잘못 가져온 거 아니니까 편하게 읽어줘... ㅎ
모든 출처는 패스파인더 작가님의 티스토리.
http://cybertronics.tistory.com/
01 I'm the light blinking at the end of the road
-
Panic! at the Disco - Always ( https://youtu.be/uWiRW0uJKk4 )
| ▼▼▼ |
야자가 끝나가는 3학년 교실들은 정숙한 척 사실은 번잡했고, 해가 넘어간 빈 복도는 창마다 수레국화색 물이 들었다. 그 아래 성실히 0.9배속으로 걸어오는 최한솔 좀 보라지. 손에 들린 프린트 뭉치가 일어나 걸어와도 쟤보단 빠를 것 같다. . "그리고 너 사람 빤히 좀 쳐다보지마." 아, 내가 그래?" "어 니가 그래." . "난 원래 승관이 말은 다 믿어." 달이 네모라고 해도 승관이가 그렇다고 하면 그냥 아 그런가 보다 해, 난. 그러면서 너는 웃는다. |
02 Dancing in the moonlight
-
Ohashi Trio - Dancing in the moonlight ( https://youtu.be/lvd3dtf4gvM )
| ▼▼▼ |
"아 난 제주도 진짜 좋아. 제주도에 가서 살 거야." 내 고향은 박형우의 기약 없는 엘도라도였다.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분기마다 얘기해도 자긴 꼭 바닷가에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기타줄을 튕기며 베짱이처럼 살 거라고 말했다. 그럼 차경이 혀를 찬다. 제주도 해안가 부지가 평당 얼마나 하는지 한 번만 검색해보고 저런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오, 좋네." 꿈의 실현 가능성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은 최한솔이었다. 얜 절대로 남의 꿈을 비웃는 법이 없다. 아마 박형우가 다른 행성에 가서 사는 게 꿈이라고 얘기해도 최한솔은 이렇게 말했을거다. 오, 좋네. . 이 좁은 방 절반의 진영에선 디스전이 발발하고 나머지 진영에선 좀비게임이 한창인데, 옆방 애들은 부처인 걸까. 결국 나를 찾아낸 최한솔이 나를 일으켜 자기 티셔츠 끄트머릴 손에 쥐여준다. 자꾸 넘어가지 말고 계속 잡고 있어. 얜 내가 겁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동시에 그걸 티 내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단 사실까지 잘 안다. 사광으로 들이친 달빛에 네 옆모습이 비밀스럽게 흐릿했다. 잘생긴 새끼는 흐릿해도 잘 생겼구나, 그려도 저렇겐 못 그리겠다. 나는 입술을 맞물고 티셔츠 끝을 힐끗 내려다본다. 야, 여긴 감염되고 끝났는데 너넨 언제 끝나. . "간다." 최한솔이 싱겁게 한 쪽 볼을 툭 치고 멀어졌다. 나는 왠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아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린다. 좀 전까지 최한솔이 잠들어 있던 자리에 달콤한 냄새가 안 가고 아직 누워있다.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정전에 끝난 줄 알았던 밴드부 노랫소리가 멀리서 희미했다. 앰프도 없이 저 지'랄들이다. 왜 저럴까. |
03 I like me better when I'm with you
-
Lauv - I like me better ( https://youtu.be/ywFtslLnLTA )
| ▼▼▼ |
"너 또 내 위로 삐지 깔았지." "불러 봐." 벙긋대는 입모양만 봐선 무슨 노랜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좋은 것 같다. 사뿐하게 흔들리는 고개나 입술의 움직임 같은 게, 어쨌든 좋은 것 같다. 열린 복도창으로 늦은 봄바람이 불어 들었다. 끝내 가사를 읽어보려고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너와 눈이 마주친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내 안의 뭔가를 한 바퀴 크게 회전시키고 멀어졌다. 어 나 방금 you 알아들은 거 같은데. . 야자를 끝내고 온 기숙사 앞에서 최한솔이 캔음료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같이 내밀었다. 뭘 한꺼번에 두 개나 줘. 이거 왜, 어쩌라고. "내일 나 죽냐? "뭐래." "아님 너 죽냐?" . 그래, 사랑하는 어떤 것들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일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히 포기한 나머지마저도 사랑하니까. 아, 그나저나 생각났다. 작년에, 그러니까 우리가 미쳐서 우정으로 영원하길 꿈꿨던 그때. 너는 내게 이렇게 물었었다. 승관아, 나 계속 니 옆에 있을까. |
04 Yeah, I got issues and one of them is how bad I need you
-
Julia Michaels - Issues (Jason chen & Daniel Jang Cover) ( https://youtu.be/nqVTCbpf7jg )
| ▼▼▼ |
"상대방이 알아서 행간을 읽어줬으면 하는 기대는 모든 인간관계의 함정이야." "의사표시를 어중간하게 하면 그렇게 위험해지는 거야." . 순간 너로 비롯된 중력이 엄청난 값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이 와중에도 너는 여전히 사람을 빤히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나는 네 눈동자에 자주 어지러워지고. ... 내 호흡은 점점 짧아진다. 맥박이 빨리 뛰면 늘 숨을 끝까지 다 쉴 수가 없다. 도시라솔파미레도까지가 정상호흡이라면 이럴 땐 겨우 도에서 라까지만 뱉고 다시 올라가 얕고 분주한 오르내림을 반복하게 된다. 고장난 전투기 계기판처럼. 같은 구간을 정신 사납게 오르내린다. 예전에 배웠는데, 순환이, 빨라진, 혈액에, 산소를, 아 뭐랬더라 어지러워. 숨을 끊어 쉬었더니 머리가 핑 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네 입술 비슷한 걸 만지려는데 네 목소리가 먼저 나를 불렀다. "숨 쉬어, 부승관." "어?" "너 지금 숨 안 쉬는 거 같은데." 별안간 정신이 돌아온 나는, 라 까지도 내려가지 못하고 도 언저리에 멈춰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더라니.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난다. 도시라솔파미레도시라솔. 그리곤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며 음계의 끝까지 쭉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런 내 꼴이 우스꽝스러운지 최한솔 입술 끝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아 시'발 아까 숨 참은 김에 그냥 죽을걸. "아 이게 빤히 보면 좀 그러네." |
05 멈추는 법을 계속 모르고 싶어
-
offonoff - boy ( https://youtu.be/aeI0uWtlG54 )
| ▼▼▼ |
패드 불빛이 영사기 램프처럼 네 코끝이며 눈썹 끝에 희미하게 맺혔다. 그때부터 영화는 장르만 남기고 주연과 스토리를 전환한다. 우리는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깊게 고요하고 조금 뻔했다. 이번엔 정확히 손끝을 네 입술에 가져가본다. 약간 말랑하고 살짝 건조했다. 금방이라도 네가 깰까 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꽃잎 같이 파르르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깨닫고서 나는 뛰어내리듯 침대에서 물러섰다. 두어 번 헛손질 끝에 간신히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진짜 수상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건 나였는 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잠든 널 두고 도망치듯이 병동을 빠져나왔다. 신열 같은 밤공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퍼레이드는 끝났다. 아, 진짜 열아홉 시'발. . 사랑이 무수한 변용을 거쳐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이를테면 투정과 걱정과 시기와 호기심같이 사소하고 보편적인 감정들로 그 원형을 달리해서 나를 어지럽게 만들던. 그래도 나는 열아홉이었고, 그땐 그래도 됐다. 남을 속일 땐 다 자랐다 치면 그만이었고, 나를 속일 땐 덜 자랐다 치면 될 일이었다. 이래저래 열아홉은 속여먹기 좋은 나이였으므로. 나든 너든 그 누구든. 낮보다 밤이, 어제보다 내일이, 진실보다 소문이, 사랑보다 네가 좋던 시절이었다. |
06 You're dear to me and I know
-
Electric Guest - Dear To Me ( https://youtu.be/PIaGCr5DUuA )
| ▼▼▼ |
순간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지 못해 이 빠진 젠가처럼 와르르 책상 구석에 처박혀버린다. 어지러워서 머리가 빙빙 돌았다. 너 누구냐. 초점 나간 눈앞에 뭐가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굴길래 물었더니 실루엣이 나,하고 성의 없이 대답한다. 이름을 말하라고. 그래야 내가 니 이름을 호명하면서 구체적으로 욕을 할 거 아냐. 나,가 누군데. 네가 나,하면 내가 아 너구나, 해야 되니 최한솔 이 건방진 새'끼야. 눈앞이 희뿌옇게 빙빙 도는 이 와중에도 나는 앞자리에 마주 앉는 게 최한솔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알겠고. 그게 혼자 또 성질이 나서 눈을 콱 감아버린다. 절기상 소서랬다. 창가의 오래된 블라인드는 낮볕의 십자포화 앞에서 셀로판지만도 못했다. 쓰러져 눈을 감아도 햇살이 그대로 들었다. 그러다 잠깐 동안 슬라이드 화면처럼 짤깍짤깍 두어 번쯤 볕이 절었다. 멀리서 보내진 조난 신호처럼. 이내 조금 미지근한 손길이 소리 없이 눈꺼풀 위를 덮어와서 나는 순조롭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 여름볕도 거두는 손으로 오래 내 눈을 가리고, 쓸모없는 블라인드만 항번처럼 나부끼던 칠월 한여름이었다. 그래 알아, 이것도 최한솔이지. . "열아홉." 박형우가 말했다. 차경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니까 이렇게 말하면 약간 청춘영화 같지 않냐고 멍청하게 되묻는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여전히 맥락 없이 횡설수설하고 조금 서툴렀다. 대부분의 열아홉이 그러하듯이. "나도, 열아홉." . "너 내가 사람 빤히 보지 말랬지." "안 돼?" 하여간 남의 말 존'나 대강 듣는 새끼. 부러 못되게 받아쳤는데 내 말에 금방 내가 베인다. 너는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되물었다. "대강 듣는다고 누가 그래." "그럼 왜 계속 보는데." ... "왜 안 되는지 진짜로 보여줘?" 눈에서 떨어진 시선이 짧게 입술을 스치고 다시 빠르게 눈동자로 올라가 붙는다. 길게 눈, 짧게 입술, 다시 눈. 나는 네가 눈빛으로 보내오는 말들을 좀체 수신하지 못하고, 너는 끝도 없이 답신을 바라니까. 왜 안 되냐면. 나는, 너를. "승관이 넌 너무 겁이 많아." . "자꾸 쳐다보면." "어." "이렇게 되니까." "알아." 열아홉 부승관의 스위치는 최한솔이었다. 다만 되게 싫거나 되게 좋거나의 항목에서 되게, 이후에 붙일 말을 여전히 찾지 못했을 뿐이다. 원래 나쁜 짓이란 게 다 그렇다. 죄책감과 쾌감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절박하게 달아오른다.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이 상황이 끝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포화 같은 노을 밑에서 눈을 감고 내게 입 맞추는 최한솔이 너무 근사해서 아 그냥 이대로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한솔의 어깨너머로 그날의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해변에 두고 온 열아홉의 것들을 잠깐 빌려 네 옷자락을 더 간절히 끌어당겼다. 거 봐, 내가 그랬잖아. 얜 진짜 입시랑 상관없는 것들은 다 잘한다고. |
07 Do we swim or do we sink?
-
Michl - Die trying ( https://youtu.be/QMFoKkL0RbI )
| ▼▼▼ |
그때 네 눈을 볼 걸 그랬지. . "경아." "왜."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치킨을 먹으면. 그건 그냥 호기심 같은 거겠냐." "누가." "아니면, 딱 치킨만 좋아하면서 채식주의자로 사는 방법은 없겠지?" "야 애초에 치킨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채식주의자야. 너 땜에 정신 이상해질 거 같애. 뭐라는 거야." "그냥, 딴 거 말고 그것만. 걔만 좋아하면 되잖아." "그럼 굳이 채식주의자여야 할 필요가 있어?" 그 편이, 안전할 거 같아서. . "너는 늘 간단한지 모르겠는데, 나는 어려워." 일단 더 이상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거란 사실을 내 스스로 받아들여야 했고, 그 다음엔 그날 내게 입맞춘 너의 진심을 선고받아야 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내겐 쉬운 일이 없었다. "나는 진짜 다 너무 어려워. 전부 혼란스럽고 이게 다 뭔가 싶어." . 어른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셈하고 겁내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다가도 결국 애처럼 네 앞에 덜컥 주저앉아 버리는 게, 열아홉 로맨스의 문법이라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
08 Oh, I wanna be with you
-
검정치마 - International Love Song ( https://youtu.be/80nGOu5rCT0 )
| ▼▼▼ |
"최한솔, 나 여깄어." "그냥 나한테 와." 길 끝에서 전력으로 달려온 너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바통을 넘겨받을 순간에 그대로 쏟아지듯 내게 키스했다. 애타게 손을 내밀고 있던 나는 너무 놀라 눈을 질끈 감는다. 밤하늘이 미러볼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나를 파고드는 네 입술이 너무 뜨거워서 녹은 초콜릿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달고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야 너 그만하려고 수쓰는 거 다 알아,라고 하면서도 나는 네 목덜미에 두 팔을 감고 완전히 안겨버린다. 얘들아 포기해, 우리 반은 망했어. . 내 목소리 들었어? 어. 그래서 뛰어왔어? 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빨리 뛰어온 이 느린 남자애는 오래도록 숨이 가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네가 좋아서 아무래도 못 견딜 것 같았다. 형우야, 경아. 나 사실은 최한솔 진짜 좋아하나 봐. "다음에도 내가 부르면 그렇게 뛰어와." "어." 그럼 나도 약속할게. 네가 부르면 갈게. 그때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 있어도, 네가 나를 부르면. 결국엔 너한테 갈게. |
09 It's real love
-
The Beatles - Real Love (Owen Denvir) ( https://youtu.be/BoTpR2aROwQ )
| ▼▼▼ |
"나 지금 복숭아랑 키스하는 거 같다. 통조림 복숭아." . 사실 나는 네가 승관아, 하고 부르는 순간이 가장 좋았다. 특별할 것 없는 내 이름이 예쁘다는 걸, 난 네 입술 끝에서 처음 알았다. 정확한 발음으로 부르는 적이 별로 없어서 늘 조금 낯선 곳의 단어 같기도, 짧은 노랫말 같기도 한 그 부름이. 나는 몹시도 좋았다. 언제나 나를 몇 번이고 돌아보게 하는 말. 한솔아, 다정하게 부르자 네가 대답했다. "어, 승관아." . 수능이 끝나면 무심하게 선심 쓰듯 말해줘야지, 나도 네가 꽤 좋은 것 같다고. 봐서 먼저 입맞춤도 해주고, 겨울이니까 손도 잡아줘야지.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이렇게 네 이맛머리를 쓸어주고 싶던 나와, 얌전히 잠든 모양이 예뻐 꿈결에도 보고 싶던 너와, 이 모든 순간이 못 견디게 애틋해 억지로 곱게 접어서 갖고 싶었던 그 밤. 침대 아래로 떨어진 내 손을 네가 잠깐 잡아주는 것 같았는데 꿈이었으려나. |
10 Summer days far away
-
Rhye, Roosevelt - Summer Days (Roosevelt Remix) ( https://youtu.be/Yr40IRaJY8c )
| ▼▼▼ |
"같아 보여?" "뭐가?" "경이가 형우 볼 때랑, 내가 너 볼 때랑." 아, 짧게 탄식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손등으로 열감이 피어오르는 양쪽 뺨을 찍어냈다. . 시시한 농담을 던지며 기숙사 방문을 열자 나를 따라 네가 가볍게 몸을 밀어넣었다. 그리곤 나를 잡아당겨 재빨리 입맞춤했다. 한 손으론 여전히 바깥쪽 문고리를 잡은 채로. 발코니에 매달린 로미오처럼, 짧고 뜨겁게. 아아 고작 야식 따위로 학교담에 달라붙는 아류들을 셰익스피어 문학에 비유했던 지난날을 깊이 반성한다. 얘들아 잘 봐둬, 진짜는 이런 거야. 스위치를 켜려고 손을 뻗다가 도로 당겨져 온 나는, 캄캄한 방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복도 불빛에도 초조해 정신이 아찔했다. 불안해 어깨를 살짝 밀어내자 조금 탁해진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보던 네가 재빨리 방문을 열고 돌아서 길을 열어준다. . "수능 치러 안 왔어, 최한솔." 경로 이탈. 너무나도 현저한 경로 이탈. 심장이 금속추처럼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거 봐 내가 뭐랬어. 겁난다고 했지? 불안하다고 했잖아. 너 언젠가 이렇게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했잖아, 내가. |
11 생각처럼 맘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세븐틴 - 울고 싶지 않아 ( https://youtu.be/zEkg4GBQumc )
| ▼▼▼ |
별은 죽고 소년은 자란다. 어른은 헤어지고 사랑은 흩어진다. 모든 것의 모든 순간은 결국 끝으로 향하는 도정이다. . 단연코 내가 떠올린 그 어떤 가정 속에도 너는 있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예상 못할 변수가 되더라도 너만은 변함없이 내 미래 속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다른 모든 건 그대로였고 너만 없었다. 오로지 너 하나만.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뜬 눈으로 꾸는 악몽이라면 나는 차라리 네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 그 순간에도 나는 도저히 웃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너한테 물어보지 못한 게 많았다. 너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됐길래 내 이런 모습조차 가지고 있는 거냐고. 나는 그간 내 감정에 휩쓸리느라 바빴지, 이 마음이 거절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새삼스럽게 기억이 났다. 너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나 혼자 설레고 망설이고 밀어내고 다시 원했던 모든 순간. 너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 그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눈물이 질리게 많은 나로선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독하게 참아낸 이유는, 우는 순간 정말로 네가 없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 인정하게 될까 봐서였다. 내가 아무 일 없는 듯이 기다리면 너도 아무 일 없는 듯이 돌아올 것 같아서. 그래줬으면 해서. . 그래도 내일은 오겠지. 만약 내일 오면, 그래도 오기만 하면. 못 이기는 척 한 번은 용서해줄 텐데. 꾸역꾸역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온몸이 자꾸만 떨리고 아렸다. 그렇게 이 계절이 지나면 오겠지. 해가 바뀌면 오겠지. 한 해, 두 해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홀로 스물셋이 되었다. |
12 하지만 난 널 지울 수도, 널 가질 수도
-
신해경 - 모두 주세요 ( https://youtu.be/3vFge9L422U )
| ▼▼▼ |
내가 나를 재우는 밤들이 있었다. 모로 누워 건조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남을 재우듯 나를 재우는 밤들이 있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위안 받을 수 없어 나만이 나를 위로하는 그런 밤들이 있었다. 어떤 날은 네가 죽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고 빌다가, 차라리 서 생사라도 알게 해달라고 빌다가, 정말로 죽었다는 연락이 올까 봐 모르는 번호를 필사적으로 피하기도 하다가, 그래도 너일까 봐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날들을 끝없이 반복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헐어갔다. . '나 지금 복숭아랑 키스하는 거 같다.', '복숭아랑 해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날카로운 소음에 신경이 긁힌 사람처럼 질끈 눈을 감았다. . 부옇게 연기가 이는 초여름 바람에서 희미한 화약 냄새가 묻어났다. 달에 가면 이런 냄새가 난다고, 예전에 누군가 그랬다. 그러면서도 내가 달이 네모라 하면 그 말을 믿겠다던 멍청이가, 있었는데. . - 너 카톡 확인 왜 안 해. "왜, 무슨 일인데." - 나 지금 제주. "근데." - 내가 여기서 지금 뭘 보고 있냐면. "야, 너 지금 한라산에서 해태나 삼족오 둘 중에 하나 보고 있는 거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 나 지금 진짜로," 그때 차경이 내 말을 끊었다. 너 얘 한 대 칠 생각 있으면 알바고 나발이고 지금 와야 한다고. 그때 내가 누구를, 하고 되물었던 것 같다. - 최한솔. |
13 I hope you're hurting
-
Sonder - Too fast ( https://youtu.be/yQmjuaUAyj8 )
| ▼▼▼ |
그때쯤 등 뒤에서 문이 열렸고 나는 소리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기껏해야 차경일 줄 알았는데. 나는 순간 까마득한 저 아래까지 굴러떨어졌다. 너였다. . 난 그때 우리가 다 자란 줄 알았지. 그래서 여전할 줄 알았지. 진짜 어른이 되어 마주친 낯선 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절박하게 익숙한 것을 찾아 헤맸다. 키가 더 자랐고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아, 눈동자. 그래도 여전한 한 가지 앞에서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맞아, 저런 색이었지. 그렇게 끔찍이도 안 떠오르더니. 나는 그 눈동자에 매달려 입술을 뗐다. . 너는 차마 웃어보이는 내가 믿기지 않는지, 원래도 반응이 느리면서 영영 대답을 잃어버리고 만다. . 살면서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그때마다 수없이 많은 말들을 내 안에 쌓아두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끝도 없이 쌓였고 문장은 닳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안에 쌓인 말들의 무게가 어느새 나를 눌러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을 때쯤. 그때부터는 다시 버리고, 버리고, 하나둘 꺼내어 버리기 시작했다. 해서 그 끝에 남은 말이란 작은 나뭇가지처럼 볼품없이 가늘고 건조하고 메마른 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고통은, 네가 내게 사과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뿐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괜찮아." 나는 부러뜨린 말의 단면을 쥐고 너를 향해 그었다. 누구에게나 그랬듯, 적당히 친절한 얼굴로. 지금, 지나치게 무방비하고 애틋해 보이는 너를 향해, "이제 와 무슨 소용이라고." 그 순간 네 눈빛은 내 말끝에 깊이 베여 즉사하고 만다. |
14 Hey there bud, how'd it go last night?
-
Peach pit - Tommy's Party ( https://youtu.be/iMUbmiXlHww )
| ▼▼▼ |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사과 인사를 마무리 지을 필요가 없었다. 예전에 친구가 살던 집인데, 그 친구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나를 본다. 어떤 절대자에 의해 스톱모션이 걸린 것처럼 우리는 말을 잃고 까맣게 굳어져 서로를 응시했다.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겨우 「…야.」 한마디 뱉었을 뿐이었다. . 「…미안.」 「됐어. 너도 내가 니 팔 작살냈을 때 봐줬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지.」 「그러니까.」 「…….」 「너도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니까.」 . '아 난 제주도 진짜 좋아. 제주도에 가서 살 거야.', '오, 좋네.', '한솔아 나중에 넌 아무 때나 와도 내가 다 받아줄게. 밥도 공짜로 줄 거야.'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열아홉의 내가 열아홉의 너한테. 그렇게 말했으니까. . 그날 그게 부승관이 내 앞에서 최한솔과 보고 싶다를 병치시켰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주사였다. 그 새끼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봐. 내가 이렇게 귀여운데, 흐, 어떻게 안 보고 살지. 나는 그때 부승관이 결국 미쳐버린 줄 알았다. 비유적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너는 울면서 웃었다. 「어떻게, 안 보고 살아.」 . 혼자 장례만 두 번 치렀대, 그때 우리 열아홉이었잖아. 해 바뀌어도 스물, 고작 그때 우리가 뭘 알아. 너나 나나 그때가 제일 한심하고 멍청했는데. 뭐가 맞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왔잖아, 그러면 됐잖아. 그러니까 차경, 어? 우리 그냥 최한솔 봐주자. 「어? 경아.」 |
15 So come over now and talk me down
-
Troye Sivan - Talk Me Down ( https://youtu.be/kXlVoOTvdg8 )
| ▼▼▼ |
「괜찮아.」 아, 이거면 너를 무너지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게 사과를 하고 싶든, 다른 뭘 원하든. 이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자그마치 3년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너를 기다리면서. 내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었겠느냐고. 그러니 너는 나에게 섣불리 미안하다거나 이해해달라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내 말에 내가 무너져 내렸다. 너는 절대 함부로 내게 사과할 수 없다. . 가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쯤 있는데 오로지 그 하나가 내 발목을 잡는다. . 유사, 근사, 비슷, 같은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최한솔이 아니면 나는 절대로 면역될 수 없었다. 승관아. 나는 그 한 마디에 얼어붙었다가, 또 완전히 부서져내렸다. 언젠가 네가 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채도가 바뀌던 때가 있었는데. . 네가 아직도 보고 싶은 것 외의 나머지 것들을 다 지우는 열아홉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듯. 나 역시 아직도 차경이 지적했던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해 속을 들킬 것 같으면 먼저 발톱을 세운다. . 언제나 네가 승관아, 하고 소리내 부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돌아보고,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든 끝없이 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오늘도 이대로 딱 한 번만 돌아보고 싶어서, 첫걸음을 떼어내는 동안 눈을 감았다. 목부터 등허리를 타고 발끝까지, 최한솔의 시선을 받고 있는 온몸 전체가 아팠다. 그래도 숨을 참고 억지로 걸음을 떼어내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나타난 길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 꺼진 가로등이 쓸모없이 덩그랬다.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꿈일까 봐 종일 내 주위를 맴돌았단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떠났으면서 왜 내 꿈을 꿔, 그렇게 그리웠으면 네가 돌아왔어야지. 그때 나는 갈 곳도 몰라서 고작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발을 디딘다. 아직도 그런 눈으로 볼 거였으면, 네가 왔어야지. |
16 my love, 더 아픈 사랑이 내려
-
민채 - Rain ( https://youtu.be/9C1d3TMIs4w )
| ▼▼▼ |
오래전에, 최한솔이 흘려뱉은 귀엽단 말 하나로도 급식시간 내내 화자의 진의 운운했던 차경이. 그날 저녁 뱉어낸 내 괜찮다를 그대로 직역해 받아들였을 리 없다. 눈치도 빠르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저 새'끼 앞에서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책 위에 딸기잼이나 왕창 떨어져라. . "화해는 안 해도 되는데 안 보지는 마. 그러면 우리 진짜 답 없어." . "너 왜 아직도 이러고 있냐." 까탈스런 말투로 묻자, 너는 덜 아문 입술로 짧게 웃었다. "…나올 줄 몰라서." 내가 나오지 않을 거라서 기다렸다는 말이, 어딘가 앞뒤가 안 맞고 많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간 이유 없이 마음이 저릿해서 하려던 말도 잊고 쳐다만 보았다. |
17 Even fights were all better with you
-
This Wild Life - Better With You ( https://youtu.be/AaGGIkgYTsQ )
| ▼▼▼ |
달려가 두 팔로 네 어깨를 끌어안고 매달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때 머리 위로 풍성하게 일렁이던 여름 수목들, 그 사이로 밤송이처럼 삐죽삐죽 새어 나오던 햇살, 살짝 체온이 올라있던 네 목덜미, 꽉 붙든 내 손끝에 구겨지던 여름 체육복, 나를 힘주어 받쳐올리던 두 팔, 젖은 이마에 불던 바람, 맞닿은 가슴뼈 위로 쿵쿵 울리던 심장소리, 봤지? 내 물음에 어, 봤어, 내 귓가에 바짝 속삭이던 네 목소리. 연두와 초록 그 사이에서 무수히 빛나던 것들. . "비슷해. 내가 좋아하긴 했어." 근데 걔 말고 더 예쁜 애.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최한솔 얼굴이 담담했다. .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못 견디도록 좋아했는데,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해봤다. 그래서 가끔은 그때 우리가 한 게 뭐였는지, 혼자 곰곰이 되짚어보는 날도 있었다. 좋아했구나, 우리는. 이제서야 과거형으로 가져보는 오래된 동사에 잠깐 마음이 저렸다. . 언젠가 오늘 같은 거리에서. 못되고 독하게, 모두가 불행해지길 빌었던 적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억울해서 남들도 공평하게 행복 같은 건 몰랐으면 좋겠다고. 술김을 빌어 못돼은 바람을 소원한 적이 있다. 그래도 여지없이 바람은 좋았고, 거리는 붐볐고, 사람들은 웃었으며, 저마다 서로의 손 같은 걸 붙잡고 다녔다. 그러면 나는 그 복잡한 거리에서 나를 놔버린 채 우두커니 멈춰 서버리는 것이다. 어느 고단하고 무책임한 부모처럼, 그렇게 마지못해 아이를 놓치듯 인파를 핑계로 나를 잃어버리곤 했다. . "최한솔 너는, 나랑 뭐가 하고 싶은데." 대체 어쩌자고. "또 나랑 다시 뭘 어쩌겠다고." "뭘 어쩌지 못 하니까." "……."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해, 승관아." "근데 왜 또 그런 눈을 해. 사람 헷갈리게." . 세상엔 앞뒤 어느 걸 먼저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일들이 존재하는 반면, 순번이 틀어지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들도 있기 마련이다. 너는 후자의 불온한 전조를 감지한 거였다. . "내가 아프길 바란다면서 칼을 반대로 쥐고 있으면 어떻게 해, 승관아." "……." "그럼 네가 다치는데." . 누군가에게 달려가 안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의 부력을 기억한다. 무중력을 걷듯 지면에서 발끝이 붕 뜨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비단 그 사람이 나를 안아 올려서가 아니라, 그 사랑 자체가 나를 띄워 올리는 그 느낌을. 그래서 사랑은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것이다.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랑의 느낌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내가 그러하듯. |
18 Don't listen to anybody else but me tonight
-
HONNE - It Ain't Wrong Loving You ( https://youtu.be/SdKT7IG5pw4 )
| ▼▼▼ |
누군가에게 달려가 안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의 부력을 기억한다. 무중력을 걷듯 지면에서 발끝이 붕 뜨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비단 그 사람이 나를 안아 올려서가 아니라, 그 사랑 자체가 나를 띄워 올리는 그 느낌을. 그래서 사랑은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것이다.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랑의 느낌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내가 그러하듯. . 오래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볕을 가리는 손길이 너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았던 열아홉의 더운 계절처럼. 나는 나를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에 고분히 잠이 든다. 꿈결에 얼룩진 속삭임을 얼마쯤 더 훔쳐들은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 아침까지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너는 아직도 영 잠들지 못하고 오래오래 나를 재운다. . "내일치 미리 주는 거냐. 내일 나 죽어?" "뭐?" "아님 너 죽어?" 묻자 웃음이 먼저 터져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 웃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있으려니까 최한솔이 나더러 그 질문 열아홉에도 했단다. 씨, 내가 언제.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자 너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부승관 여전히 극단적이야. 나는 끝끝내 고민스러운 얼굴로 둘 중 하나를 골라내려 애썼다. . "개그냐 다큐냐, 출제의도 정확하게 해줘. 나 약간 헷갈리니까." "다큐면 이 새'끼야." "차경, 저어기 비양도 근처에 불빛 쭉 보이냐. 예쁘지?" "그게 뭐." "저게 한치잡이 배야, 경아." "어, 한치철이냐." "그래, 지금 너 잡으러 오는 거야." "아, 이 새'끼가 진짜." . "너 나 못 이겨." "알아, 나 너 못 이겨." 너는 금방이라도 나를 이겨먹을 것 같은 눈을 하고도, 최면에 걸린 맹수처럼 잘도 내 말에 고분고분하다. 말했잖아. 난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 대신 네가 원하면 뭐든지 해. 내가 최한솔 눈을 이렇게 오래 가까이에서 들여다 본 적이 있던가. . "이거 연애 아니야." 키스의 끝이 뭐가 될지는 알 수 없어도. 이건 연애가 아니라 그냥 키스인 거라고, 나는 맞물려 불확실한 발음으로 몇 번이고 되짚어 확인시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너는 알겠다고 말했지만 어쩐지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키스가 그랬다. 부정할 여지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내 키스도 그랬다. |
19 Cause I don't know how to love someone else
-
Martin Garrix & David Guetta - So Far Away (cover by Adam Christopher) ( https://youtu.be/hiRqIZcVkv4 )
| ▼▼▼ |
비밀스러워서 설렜고, 설레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겁이 났고, 겁이 나서 막막했다. 나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적당히 빛나고 적당히 희미한 인생이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부터 너로 인해 외롭고 불안정한 세계를 낯선 온도의 시선 속에서 헤매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책상 위로 동그랗게 굴러떨어진 얼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때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간혹 이렇게 울 일이 많아지는 건가 보다, 고. 난 쉽게 행복해지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완벽히 나의 불행을 통제하는 사람은 너뿐이었다. 누구도 너만큼 나를 절망케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너뿐이었다. 그때 알았다. 나의 유일한 절망.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구나. . "최한솔 니 옷 왜 이렇게 크냐." "부승관 귀여우라고?" "아침부터 싸울래?" . "그럼." "진짜야." "내가 널 몰라?" "승관이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겁이 많아." 그러면서 너는 다시 웃었다. 길이 어두워 그랬을까. 이번엔 어쩐지 농담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웃는 얼굴이 조금 애틋하고 많이 쓸쓸했다. "물론 이런 건 말고." 너는 턱 끝으로 꺼진 가로등을 가리켰다. . 형우야, 나는 걔랑 소주도 처음 마셔보고 싶었고, 면허도 같이 따고 싶었고, 극장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보고 싶었고, 스무 살 생일이니 성년의 날이니 뭐 그런 의미 없는 것들도 같이 맞아보고 싶었는데. 하나하나 속으로 되짚다 보니 눈물이 핑 돌아서 그만 히죽 웃어버렸다. 그래, 나는 너와 함께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야, 최한솔 그거 진짜 아니냐?" .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은 그 다음에야 벌어질 줄도 모르고." - ……. "어떻게." - ……. "어떻게, 그렇게, - ……. "말도 안 되게." - 승관아. "나 이제 너한테 사과 받아야겠어 최한솔." 저 멀리서 누군가 쏘아 올린 폭죽이 제법 높이까지 솟아올라 알록달록 번쩍였다. 동시에 눈물이 비처럼 무릎 위로 후두둑 쏟아져내렸다. "빌어." 우는 소릴 내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버리고 가서 미안했다고. 잘못했다고. 빌어." .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아 꾸역꾸역 북받친 서러움을 쏟아냈다. 맥이 풀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일으켜 돌려 안았다. 그리곤 오래전 언젠가처럼, 생애 가장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버거운 숨을 어쩌지 못해 내 어깨 위로 무너져 내렸다. "잘못했어." 그렇게 나를 안은 손이 떨렸다. 그러자 기적처럼 내 몸의 떨림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 그렇다. 살면서 저지르는 수만가지 행위에 대해 그 이유를 찾고 변명을 하고 까닭을 물을 때. 결국은 부질없이 진부하고 통속적이어도, 말이 안되고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어도. "나한텐 너 밖에 없었으니까." 사랑만이 전부일 때가 있다. 너 하나가 내 모든 이유의 전부가 되는 그런 서글프도록 초라한 순간이. |
20 최한솔
-
Lauv - Reforget ( https://youtu.be/hmlQOKVMOmk )
| ▼▼▼ |
사람은 너무 큰 슬픔에 매몰되면 자신의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서 아직 옆에 남아있는 나머지 것들을 보려 하지 않았다. 특히 나를. 그때 나한텐 엄마 밖에 없었는데. 어떤 날은 한 달도 넘게 말이 없다가 별안간 네가 나보다 아빠 얼굴을 좀 더 닮았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말해 나를 아프게 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엄마는 내 유년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짝사랑이었다. . 이후로 너를 지켜보는 게 제일 흥미로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너를 제외한 세상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네가 가진 높은 톤과 조금 빠른 템포가, 어지러운 동선과 분주한 감정의 진폭 같은 게. 가끔은 어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좋았다. 쉴 새 없이 반짝거리는 네가, 잘 웃고 잘 울고 잘 토라지는 네가, 바쁘게 움직이며 나를 웃게 만드는 네가 좋았다. 너는 몰랐겠지만. .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는 너와 떨어져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때 나는 네가 필요했다. . 「초등학교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서러울 일도 많네.」 「야 너 솔직히. 차경이 좋냐 내가 좋냐?」 「갑자기?」 「아 빨리.」 「…너.」 「아 대답 너무 느려. 박형우가 좋냐 내가 좋냐?」 「너.」 「그럼 차경이 좋냐 박형우가 좋냐」 「너.」 야 왜 넌 나만 좋아해. 부승관은 앞으로 크게 휘청이면서 웃었다. . 「승관아, 나 계속 니 옆에 있을까.」 그때 나는 네게 물었다. 어차피 네가 아니면 나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있어야지.」 「왜?」 「좋아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이쯤에서 세상이 그만 돌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별안간 모든 게 선명해졌다. 처음부터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이제는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고. 물론 네 대답이 내가 바라는 대답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달빛이 밝았다. 네가 하는 모든 말들에 속아 넘어가고 싶은 밤이었다, 심지어는 술김에 한 빈말과 허튼 말과 거짓말까지도. 「근데 저거 왜 저렇게 찌그러져 있어?」 「뭐가.」 「봐봐, 달 봐봐. 저기 찌그러져썽.」 너는 허공에 손을 뻗어 멀쩡한 달이 자꾸 찌그러졌다며 쓸데없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오늘은 추석이라고, 그래서 저건 보름달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문득 마주친 네 얼굴이 너무 갖고 싶게 예뻐서, 그렇다고,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도 같다고. 나는 뻔뻔하게 대답해주었다. . 나는 처음 터져 나온 감정을 어쩌지 못해 망가진 둑처럼 다 쏟아내 버렸다. 엄마는 그 잘난 사랑 때문에 나를, 내 유년기 전체를 버려뒀으면서 이제 와 나를 필요로 하면 그건 시기상 너무 반칙이 아니냐고. 이제서야 나도 조금 숨 쉴만 해졌는데. 나한테도 그런 게 생겼는데. 또 포기하고 옆에 있으라니. 나는 닳고 지쳐 너절해진 눈으로 물었다. 정말로 날 혼자 둘 수 없어서가 맞느냐고, 사실은 스스로 혼자인 게 무서워서는 아니냐고. 그때처럼. . 그 시절 너는 내게 구원인 동시에 죄책감이었고, 희망인 동시에 금기였다. . 너는 내게 이 감정이 쉽냐고 물었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단 한순간도 쉬운 적은 없었다고. 이유 없이 좋아할 땐 이유를 몰라서, 이유를 알았을 땐 그래보지 않으려고,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좋아하는 걸 숨기느라, 숨기고 있을 땐 그래도 사실은 원하니까. 나한테 와줬으면 해서. 매 순간 어렵고 버겁고 힘들었다고. 내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전체가 그랬다고. . 할머니는 늘 말했다. 행과 불행이 만나면 거개는 행이 불행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나는 늘 이 불행의 연대에 너를 끌어들이는 게 겁이 났다. 그럼에도 죽지 못해 깨어난 그날 아침에, 나는 너 하나만이 절실했다.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은 없었다.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해도. 나는 네 옆에 있고 싶었다. 외면받을 구원이라도. 나의 유일한 희망. 보고 싶어 승관아. |
21 It's so sweet knowing that you love me
-
Cigarettes After Sex - Sweet ( https://youtu.be/pZ31pyTZdh0 )
| ▼▼▼ |
수위 없는 버전에서 가져오느라 넣고 싶은 장면들을 못 넣었... (왈칵) ㅠㅠㅠ 작가님 홈에 수위 있는 버전까지 둘 다 있으니... 울지 말고 다들 티톨로 달려가기.... 나는 억울했다. 그럼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행복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우리가 떨어져 보낸 시간에 그럴만한 가치가 생기지. 우린 둘 다 떨어져서 각자 불행했는데, 그러면 이건 타고난 운이라 포장한다 해도 좀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지만 세상엔 의외로 당위성을 갖지 못하고 그냥 벌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내가 덜 행복하다고 네가 더 행복해지는 산법 같은 건 없었다. 불행은 그냥 불행이었다. "그래도 나한테 오지." . 우리를 흔들고 지나간 이 불운한 연애사를, 이제는 누구의 탓이라 해야 좋을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고, 그래도 누군가는 꾸준히 원망하고 싶고, 그런 너를 때리고 밀쳐냈던 게 떠올라 미안하고, 근데 나는 너무 서러웠고 또 지금도 서럽고, 다시 돌아가서 안아주고 싶고, 너무 힘들었다고 안기고 싶고, 근데 그래도 되나 잘 모르겠고, 그러게 뭐하러 우리는 서로를 선택해서 이 고됨을 겪었을까 싶고, 그럼에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봤자 나는 네가 좋을 것 같고, 너도 나한테 올 것 같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고. . 열아홉 그해에 딱 한 번 네게 약속하기로, 훗날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 있어도 네가 나를 부르면 반드시 너에게 가겠다고. 결국엔 그러겠다고 했었는데.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박형우더러 이걸 누가 설정했냐고 물었더니, 형우는 원래 집주인이 해놨는데 귀찮아서 그냥 쓴다더라 하는 최한솔의 거짓말을 믿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박형우도 꽤 순진하다. 아무리 걔가 귀찮은 걸 싫어한대도 집주인 비밀번호를 그대로 쓰는 세입자가 어딨어. 나는 내 고등학교 매 학년 출석번호를 차례로 누르고 빈집에 들어섰다. . 우리가 서로의 희망이건 절망이건 간에,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것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일 정말로 내가 너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 행복해지겠다고. 나의 절망인 너와 함께, 행은 불행 속에서도 행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 어제오늘 그리고 앞으로 매번 너는 내게 오래오래 지겹도록 사과할 테니. 이제 네게도 누구 하나쯤은 너의 지난날에 대해 가혹했다 안되었다 사과해주어야 할 텐데. 결국 너한텐 아무도 그래주지 않을 거라서,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끝내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한참을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러자 너는 손을 뻗어 내 젖은 눈가를 쓸어냈다. "사람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그리곤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디서 되게 많이 들어본 말인데. 눈물은 아직도 덜 그쳐서 감으면 그대로 쏟아지는데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네가 열아홉의 예민한 부승관을 흉내 내기에, 나는 열아홉의 무심한 최한솔처럼 되물었다. "내가 그래?" "어 니가 그래." 그리고 스물셋의 네가 말했다. "그래서 미치겠어." . 내 사랑은 독하게 길었지만 그다지 모진 것은 못 되어서 이렇게 나는 결국 또 네가 좋고, 그래서 애틋했다. 실은 내가 너를 죽을 때까지 미워하려고 했는데. 한 번은 나를 택했으니까. 열여덟의 네가 힘들게 나를 선택했으니까. 나에게 올 수 없었던 열아홉의 너를 용서해볼게. . 내 지나간 시간들은 오로지 둘로 갈렸다. 네가 미웠던 시간과 네가 그리웠던 시간. 언뜻 절반의 시간 정도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건 내 어떤 시간 속에도 네가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네가 미울 때나 네가 그리울 때나, 나는 널 만나 늘 이렇게 함께 있고 싶었는데. . 나는 재빨리 반대로 돌아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매끈한 배를 짓궂게 쓸어내렸다. 반응이 느린 강아지처럼 너는 이미 아무것도 없는 배를 한 번 봤다가 날 봤다가 했다. 아 너무 귀엽다 최한솔. 저 새'끼들 다 빨리 게하로 꺼졌으면 좋겠다. . 그때쯤엔 너도 나를 봤다. 그리곤 소란스러운 허공을 가로질러 내게 잠깐 웃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속에서 마주친 누군가를 향해 또렷하고 분명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돌아왔다." 보고 싶었어, 최한솔. |
22 처음 같은 곳으로 도망가자, 나와 함께
-
짙은 - 안개 ( https://youtu.be/u3_ujlb_rxI )
| ▼▼▼ |
최한솔은 창고에 물건들을 옮겨놓고 나오다가 잠깐 내 뒤에서 멈춰섰다. 미처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게 있었는지 바짝 몸을 붙이고 시집 사이로 손을 뻗는다. 그리곤 구십 번대의 시집을 엉뚱하게 칠십 번대 사이에 꽂으면서 동시에 내 목덜미에 짧게 입맞춤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 위로 잉크처럼 열이 번진다. 책등을 밀어넣는 손가락이 짧고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하여간 최한솔 얘는 진짜 겁이 없어. 놀라 돌아본 서점 안은 아직도 차경과 박형우가 각자의 사례집과 휴대전화를 붙들고 씨름 중이었다. 놀랍도록 자기들 관심사에만 바빴다. 현대 사회라는 게 의외로 이렇게들 남일에 관심이 없다. 바보들아 방금 얘가 나한테 뭐 했는지는 알고 그러고들 있니. 손바닥으로 배를 밀어내면서 이를 앙다물자 승관아 이거 잘못 꽂혔어, 알려주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 "들어 봐, 진실게임을 하는데. 각자 딱 정해진 한 사람한테만 얘기하는 거야." "나머지는?" "평생 모르는 거지." "달랑 한 사람만?" "질문은 없고 주제는 마음대로, 대신 존'나 쎈 걸 해야 돼." . 우리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비밀. 언제까지고 저 자리에 있을 네 비밀의 비밀. 그 순간 충동적으로 방을 빠져나와 닫혀있는 욕실문을 두드렸다. 아직 잠기운이 덜 가셔 느릿한 최한솔이 칫솔을 문 채 문을 열었다. 나는 다짜고짜 두 팔로 최한솔을 끌어안았다. 정말로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네가 두어 걸음쯤 뒤로 밀려난다. 티셔츠며 목덜미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승관아 왜, 하고 묻는데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난데없이 욕실까지 처들어온 내가 이상하겠지. 아침부터 못 볼 걸 봤을까 왜 이러나 싶겠지. 그냥, 내 비밀이 또 다른 비밀로 밤새 안 슬프고 잘 잤는지 보러 왔어. 작게 난 유리창으로 반투명한 아침볕이 곱게 퍼져들어왔다. . 아, 아무래도 이렇게 안겨있는 거 너무 좋다. 처음 봤을 땐 체격이 나랑 비슷했는데 언제 이만큼이나 커져서는. 나는 녹아내린 사탕처럼 못 이기는 척 다시 달라붙었다. 이따금 스파크 같은, 또 가끔은 불꽃놀이 같은, 더 가끔은 다 태울 불길 같은, 그보다는 더 자주 따뜻한 물속 같은. 나는 이 품이 너무 좋다고. 너한테 매일매일 안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전부 다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 김에 샤워 같이 하고 가든지." "또 싸우고 싶냐." "아, 싸우면서 하는 게 취향이야?" "너 갈수록 나한테 안 진다." . 신이 정말로 사랑했는지 어쨌는지 모를. 박형우 눈엔 다 가진, 그러나 내 눈엔 나 밖에 못 가진. 그래서 늘 애틋한 최한솔이 손에 뭘 쥐고 멀리서 걸어온다. 아, 약간 덜 애틋해졌다. 내가 박형우와 막걸리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최한솔은 라벨이 희한한 정체 모를 음료를, 차경은 라벨이 익숙한 보드카 한 병을 집어 들고 왔다. 와중에 박형우는 아직도 땅콩 막걸리에 미련이 남아 슬픈 표정을 짓고 섰다. 아 진짜 다 좀 꺼졌으면 좋겠다. 진짜 이것들 아직 너무 고삼 같고, 나 여태 반장인 거 같고. 머리 너무 아프고. 제발 누가 들 단체로 벌점 좀 왕창 때렸으면 좋겠는데. . "그냥 뛰어, 사람들은." 그제야 마지못해 조금 속도를 붙여온다. 너처럼 그렇게 불순한 동기가 아니더라도, 까지 말했는데 이미 내 앞에 도착했다. 그리곤 예고한 바와 다르게 가만히 서서 나를 보기만 했다. 나는 부승관이 부를 때만 뛰어. 마주 선 틈 사이로 달콤한 말이 스민다. . "대량 구매 선호하시나 봐요." "아뇨." "많이 사시던데." "하루에 필요한 만큼만 산 건데." "미쳤냐 너?" . 어느새 웃음기가 가라앉은 너는 이내 조금은 슬픈 듯이, 또 조금은 행복한 듯이 조용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사랑해." 나는 그만 힘이 풀려 쥐고 있던 수국 꽃잎들을 놓쳐버린다. 바닷 바람이 불었고, 떨어진 수국 꽃잎이 첫눈 날리듯 흩어지던 칠월 여름밤이었다. |
23 넌 내 모든 거야, 내 여름이고
-
검정치마 - Everything ( https://youtu.be/tcCvZ3MrCxk )
| ▼▼▼ |
이번편도 마찬가지로... 수위 있는 건 작가님 티톨에 있으니...ㅎ 천국이었다. 부승관 인생 첫 바다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단순 반복의 권태와 비효율을 깨달은 지금까지도, 바다를 떠올리면 아득히 포근한 감각에 둘러싸인다. 물론 숱하게 봐온 바다가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태풍이 이는, 사납고, 차가운, 캄캄한 바다도 무수히 봐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떠올리는 기억 속 바다가 막연히 평온한 이유는 바로 그 첫 기억 때문이다. 첫사랑, 첫키스, 첫 이별, 첫 경험. 처음이란 건 사실 특별한 게 아니라고. 다음 이전에 선행했던 평범한 경험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해롭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처음 그 자체로는 별것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의 처음을 준 사람들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드물게는 어떤 것의 처음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 내 숨길과 심장을 거쳐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까지 흘러내려 가는 네 손길을 느낄 때면 나는 완벽하게 네 것인 것만 같았다. 아닐 이유도 없었다. 나뿐인 너에게, 나 하나라도 전부 다 줄 수 있다면 그것 참 괜찮은 일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밤하늘에서 그 흔한 북극성도 찾을 줄 모르는 나와, 내가 짚어내는 모든 별들을 북극성이라고 말해주는 나의 너와, 무수한 별자리 아래 이 제주의 푸른 밤과, 내 영원한 여름. 사랑하는 나의 계절. . "나 최한솔이랑 연애해." 차경이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본다. 잠깐 멈칫했던 박형우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무릎을 삭삭 긁었다. 짧은 정적이었다. "최한솔이 연예인을 한다고?" 박형우는 자기 사고 안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문장으로 되물었다. 그래, 쟤 입장에선 우리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보다 최한솔이 연예인을 한다는 사실이 좀 더 그럴싸할 거다. 나는 초조하게 종이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연애, 해." "누가." "나랑 최한솔." "너랑 최한솔이 연애를 한다고?" "…어." "그니까 둘이 동시에 여자친구가 생긴 거야?" "아니. 우리 둘이 한다고." "뭐를." "연애를-" . 지금 나랑 박형우가 축하한단 말을 못 하는 포인트가 좀 달라. 박형우는 너희 둘이 연애하는 건 괜찮은데 너네 둘이 같은 성별인 게 심란한 거고, 나는 너네가 같은 성별인 건 상관없는데 하필 너희 둘인 게 심란한 거고. 나는 이대로 넷이면 돼,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같이 있겠다는 보장만 있으면 다른 건 큰 상관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는 사과가 아니라 약속을 줘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관계는 깨뜨리지 않겠다는 약속. . "경이 너는 언제부터 알았어?" 묻자, 차경은 오랜만에 예언이 적중한 은퇴한 예언가처럼 조금 홀가분한 얼굴을 했다. 쟤랑 얘랑 서로 좋아하는구나, 는 이번에. 그리고 쟤도 설마 얘를 좋아하나? 는 진실게임 때. 애초에 얘가 쟤를 좋아하는구나, 는. "최한솔 없어지고 바로." . "차경 너도 해." "뭐를." "최한솔 개'새끼." "그게 뭔데." "이 동네 유행어." "…뭔지 모르겠지만, 최한솔 이 개'!" "고마워." "개'새끼!!" "그만, 거기까지." 차경은 영문도 모르면서 하라니까 냅다 지르고는 철딱서니 없이 좋아했다. 저게 박형우랑 십여 년이 넘도록 단짝인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요새 최한솔이랑 너무 붙어지냈나, 왜 이렇게 감이 안 오지. 박형우가 왜 최한솔더러 난데없이 개'는지, 최한솔은 왜 그 말을 듣고도 웃고 마는지, 왜 차경까지 마저 하면 그랜드슬램이 완성되는지, 이 동네 유행어가 언제부터 최한솔 개'새끼가 됐는지. 도통 하나도 모르겠다. 근데 누가 최한솔더러 개'새끼래 나한테 뒤'질라고. (너야 승관아...) . 나 같은 애들은 생각을 복잡하게 하면 안 돼. "그래서 최대한 단순하게 했지." "어떻게?" "그래서 어쩔 건데, 안 보고 살 거야?" . "열아홉 내 꿈은 제주였는데, 최한솔 꿈은 부승관이었대. 진짜 딱 그거 하나뿐이었대. 그 말을 듣고 내가 더 이상 어떻게 뭐라고 해." 나도 오 좋네, 해주는 수밖에. 라고 박형우는 말했다. |
24 Blink back to let me know
-
Panic! at the Disco - Always ( https://youtu.be/uWiRW0uJKk4 )
| ▼▼▼ |
가서 전화할게, 입 모양으로 벙긋하자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귀신같이 알아챈 박형우가 나한테도 해, 하고 똑같이 벙긋거렸다. 그 꼴이 문득 귀엽고 우스워서 너한테도 할게, 하고 대답했다. 박형우는 그제야 새침한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 "빨리 와." - 보고 싶어? "야, 너는 택배 기다리면서 보고 싶어서 빨리 오라 그러냐." - 그럼? "쓰고 싶어서 빨리 오라 그러지." - …방금 그거 나한테 되게 야하게 들렸는데, 내가 이상한 거야? "뭔 생각해. 와서 내 짐 좀 챙겨달라고." …아. 반 박자 늦은 최한솔의 탄식에, 나는 폰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웃었다. 아 세상에서 최한솔 놀려먹는 일이 제일 재밌다. 아무래도 이거 죽기 전까진 안 질릴 것 같다. 얼굴 보고 놀리면 더 재밌겠는데, 보고 싶어 죽겠네. 나는 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한솔을 떠올린다. 네 눈, 네 입술, 네 턱선, 네 어깨, 네 손, 네 눈빛, 말투, 체온, 감촉, 향기, 전부 다. - 빨리 갈게. "짐 챙겨주게?" - 내가 보고 싶으니까. . 그리고 마침내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있는 최한솔을 발견하고야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른다. 눈이 마주친 네가 웃었다. 그래서 그대로 달려가 안겼다. 아,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국내선 청사에서의 재회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다소 유난스러운 광경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나는 마지막 승부차기를 막아낸 열일곱 부승관처럼 더워서 빨갛게 익은 볼을 최한솔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물론 그때처럼 훌쩍 다리를 올려감고 매달리지는 못했지만, 네가 나를 바짝 당겨 안아 발끝이 조금 들렸다. . 어댑터를 찾아오던 최한솔이 대뜸 영화 채널을 가리켰다. 승관아,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저게 뭐." "너 나랑 저런 거 보고 싶었다며." "내가 언제." 도무지 기억이 없어서 빤히 쳐다보니까 마주 보는 잘생긴 미간이 침착하게 구겨졌다. "야, 최한솔 그거 진짜 개'새끼 아니냐?" 어, 저거 내 말툰데. 최한솔은 언젠가 내가 했다는 말을 약간 건조한 투로 흉내 냈다.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언제? 술 먹고 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 그래서 최한솔 개'새끼가 그 동네 유행어가 된 거야? 몰랐는데 내가 유행시킨 건가 봐. 나는 티셔츠를 말아 넣으면서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근데 내가 대놓고 최한솔한테 개'고 했다고? 그건 잘 했네. 살면서 언제 한 번은 하려고 했던 말이야. . "내가, 뭐. 아닌데?" "교실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야, 나 이때 너 안 좋아했어." "난 너 좋아했어." 그래서 그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묻자, 너는 대답했다. 처음부터. . 봄이라 삼월 교정엔 여기저기 봄꽃이 지천이었다. 열린 복도 창으로 날아든 민들레 홀씨가 내 옷깃에도 앉아있었다. 그 애는 직접 떼어주려는지 느린 동작으로 손을 내민다. 무심코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그 애의 손등에 아랫뺨이 닿았다. 어딘가 불이 켜지듯 열이 번졌다. 그리고 그 순간 도저히 이름을 못 찾겠는 갈색의 눈동자가, 마치 개기식처럼 느리고 완벽하게 내 눈동자 위로 겹쳐졌다. 어쩌면 그때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저 애와 사랑하겠구나. 우정이나 연애 말고. 어쩌면 사랑, 하겠구나. . "승관아, 내 이름." "어?" "내 이름." "…최한솔." "다시, 천천히." "최…한솔?" 그 순간 동그랗게 말리는 음절 위로 가볍게 입술이 쪽, 닿았다 떨어졌다. "내 이름 뭐라고?" "안 해." "그럼 니 이름." "부," 또 마중 나가는 입술에 빠르게 입맞춤. 두 번 당하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진다. 나는 눈도 못 뜨고 찡그린 채 웃었다. 아 진짜, . 얄미워서 눈을 흘기려고 봤는데, 햇살에 비친 갈색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나는 그만 숨을 참는다. 유리창의 프레임이 네 한쪽 눈동자 위로 그림자졌다. 절반은 어두운 밤색, 또 절반은 밝은 갈색. 나는 최한솔의 얼굴을 당겨 완전한 빛으로 꺼내온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지나는 순간 빠르게 조여드는 동공. 장난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속눈썹 위를 쓰다듬자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뜨였다. 언젠가 내가 그랬다. 「모래에 파묻혀 죽어있으면 너 나 구하러 와야 돼.」 순간 마주친 갈색 눈동자의 주파수가 내 안의 수신체계를 어지럽힌다. 이제 내게 타전되어 오는 어떠한 싸인도 필요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홀로 이 갈색 동그라미를 분석하다가 죽을 생각이다. 그러니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좋아. . "패스파인더 알지." "화성 탐사선?" "어, 걔가 지구에 제일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뭐였겠냐. 왠지 넌 알 것 같아서." "…삑?" "오, 많이 웃겨졌어 최한솔." "농담 아니고, 진짜." "진짜라고?" "어." . 나는 삑, 보다는 좀 더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중얼거리자 최한솔이 못 알아듣고 한참이나 나를 들여다본다. 마주 보는 네 눈동자 너머로 그 날의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의 행성에 관한 마지막 신호를 기록한다. 무작정 너를 다 알고 싶었던 열아홉의 나와, 너조차도 어쩌지 못하던 열아홉의 너를. 그리고 그때의 우리를. "최한솔." "어?" 여전히 고장난 계기판처럼 옅은 숨을 내쉬며. 나는 손을 내밀어 최한솔의 두 뺨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만 미결된 탐사를 마치고 너의 비밀 어딘가에서 영영 잠들기로 한다. 지는 노을 아래, 나는 아주 오래 빤히 네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스물셋, 여름이었다. "내 이름." 나의 외로운 행성, 미지의 우주. 나의 최한솔. 이대로 너의 비밀 어딘가에서, 최후 통신. 최한솔의 패스파인더, 부승관으로부터. |
혹시라도 문제가 되거나 글 읽는데 불편했던 점(글씨 기울임이랑 색깔, 오타 등등) 있으면 댓글로 적어줘...!

인스티즈앱
비러스윗 정규오려면 몇년 있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