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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가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시대>로 처음 시리즈 대본을 썼다. 이후 〈유어 아너>는 장르도 극의 분위기도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 드라마 대본은 2016년부터 썼는데 스토리 퀄리티나 재미가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잘 풀리지 않았다. 히트작이 명확한 작가가 아니다 보니 편성이나 캐스팅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소년시대>는 이명우 감독님이 한다고 해서 대본을 좋게 보신 것 같다. 〈유어 아너>는 예전에 영화를 같이했던 김종현 테이크원컴퍼니 이사의 추천으로 하게 됐다. 제작사 사무실에서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표민수 감독님을 만났는데 “원작의 8회까지의 이야기를 4회 안에 모두 집어넣자”고 하시더라. 그게 해법이 됐다. 표민수 감독님은 작가가 갖고 있는 능력이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다. 작가가 마음껏 춤출 수 있게 멍석을 제대로 깔아줬다.

- 원작이 따로 있다. 각색 과정에서 어떤 점이 달라졌나.

= 원작 이스라엘 드라마 〈유어 아너>나 이를 리메이크한 미국 드라마 〈존경하는 재판장님>은 법정 분량이 많고 한국 시청자에게는 템포가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1~8회 이야기를 4회 안에 담으니 이야기를 빠르게 끌고 갈 수 있어서 재미있게 풀렸다. 5회부터는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창작했다. 원작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의 사회적 문제를 반영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한국판 〈유어 아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부성애를 다뤘다. 송판호의 부성애는 우리가 익히 느껴왔던 아버지의 본능적인 사랑이라면 김강헌의 부성애는 학습화된 부성애다. 사건의 시작은 비슷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이스라엘 사람과 한국인의 관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건이라는 작용에 반작용하는 모습 또한 달라진다. 한국인들은 좀더 감정적으로 즉흥적이고 격렬하게 반응한다. 두 아버지뿐만 아니라 검사, 경찰 혹은 폭력배 캐릭터들이 한국인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인물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 드라마 초반 송판호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오디오북으로 듣는 신이 나온다. 어떤 의미인가.

= 우선 판사라는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두 번째로는 〈유어 아너>가 단순히 사건을 은폐하는 판사와 이를 추적하는 조폭 출신 회장 이야기로 끝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성애 이야기 밑에 깔려 있는 죄의식과 죄에 상응하는 벌에 대한 이야기를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뒤로 가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등장한다. 이들 작품이 송판호의 감정을 대변하거나 전체 이야기 주제를 관통하기도 한다.

- 〈유어 아너>에서 가장 안타까운 이들은 권력자 다툼에 휘말려 아무 죄 없이 죽어나간 외국인노동자들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은 복수를 꿈꾼다. 일정 부분 〈소년시대>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남자고등학교의 권력관계를 약자의 시선에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은가.

= 불황일수록 가장 약한 존재부터 피해를 입는다. 극 중 정이화(최무성)의 대사처럼 착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다. 부성애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것은 약자다. 〈소년시대> 촬영 현장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 신인배우들의 간절한 눈빛을 봤다.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들 절실했고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고 했다. 그때 예전의 내가 생각났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심정이었지만 수많은 절망을 경험했다. 그때의 무수한 좌절 끝에 〈소년시대>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배우들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도 종종 만나서 술도 마시고 응원하고 있다.

- 시나리오를 쓰다가 시리즈물 작업을 하게 됐다는 이력이 믿기지 않을 만큼 드라마 특유의 호흡을 잘 아는 것 같다. 인물들과 사건이 얽히고설키는 관계 역시 촘촘하게 설정돼 있어 대본에 흡인력이 있다.

= 일종의 서비스 정신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감정을 관객이나 시청자가 느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만약 의도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성공한 거다. 〈유어 아너> 4회 마지막에 느껴지는 감정은 절망의 끝이기를 바랐다. 그에 맞춰 인물들이 움직이게 했다. 미리 이야기의 방향을 계산해 대본을 쓸 때면 작업을 망치곤 했다. 그래서 4회까지 이야기를 긴박하게 펼쳐놓은 뒤에 이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일까,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까, 그 결과 어떤 갈등이 생길까를 따라갔다. 그러자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답도 얻을 수 있었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감정에 집중하면 영화의 템포, 드라마의 템포는 사실 중요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법칙이 있어서도 안되고.

- 매체에 따라 작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 그렇다. 작법에 맞춰가는 순간 클리셰에 갇히면서 굉장히 뻔하고 재미없어진다. 좋은 고전극을 분석해 찾아낸 공통점이 작법이다. 때문에 작법은 시대가 지나면 낡게 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관찰했다가 문법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지금의 답 같다. 〈유어 아너>의 마지막회 또한 그렇다. 지금까지 썼던 스토리 콘텐츠 중 가장 사랑하는 엔딩이다.

- 원작과 엔딩이 다른가.

= 많이 다르다. 섣불리 보면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전달되는 감정 자체가 다르다. 처음부터 엔딩을 결정해놓고 쓰지 않았다. 예상 가능한 결말, 예상 가능한 감정을 주면 안될 것 같았다. 9회까지 진행된 이야기가 만들어낸 엔딩이다.

- 〈유어 아너> 남은 회차에서는 어떤 전개를 기대할 수 있나.

= 지금 시청자들은 송판호와 김강헌, 양쪽으로 갈려서 극을 보고 있지만 앞으로 송호영과 김상혁, 장채림, 강소영, 조미연, 이청강 등 다양한 캐릭터들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각자 이해관계가 복잡하지만 명확하게 갈리면서 대략 8개 진영으로 나눠서 싸우지 않을까 싶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작은 관념과의 투쟁이다. 우리는 정의나 부성애를 맹목적으로 숭배해왔다. 〈유어 아너>는 부성애 혹은 사회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얼마나 선함을 망치고 있는지 말한다. 시청자들은 무고한 사람의 희생이 더이상 없기를 바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선함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 시나리오작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태어나고 6개월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춤 좋아하고 화투 좋아하고 당시 돈 벌기 위해 악착스럽게 살던 엄마 밑에서 〈소년시대> 병태(임시완)처럼 컸다. 그러다 대학에 갔는데 좀 사는 집이 아니다 보니 이대로 공부해서 취업하면 다른 사람들만큼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려는 모험을 감행했다. 꿈을 접어야 하나 고민할 때쯤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례 감독의 〈화이트 케어>(실제 제작되지는 않았다.-편집자)라는 시나리오의 각색 의뢰를 받은 게 첫 시작이었다. 2002년 〈역전에 산다> 시나리오를 각색했고 일본영화 〈아무도 모른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아 〈세계일주>를 썼다. 〈고령화 가족>이 개봉하면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때 대위기가 찾아왔다. 그때 〈소년시대>와 〈유어 아너>를 작업했다.

- 시나리오작가로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한 것이 다른 드라마작가와 비교할 때 강점이 되는 것 같다.

= 20년 동안 영화를 하면서 모든 장르를 다 써봤다. 예전에 만났던 제작사는 대부분 신생이거나 한번 망한 곳이었다. 그런 곳은 이름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에게 원고료를 주고 작업을 시키는데, 제작자가 원하는 완벽함에 다가가기 위해 수없는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다 보니 아무래도 장르성을 뛰어넘게 됐다. (웃음) 한달에 한편씩 쓰는 것을 목표로 작업했다. 글밥으로 두 아이와 배드민턴에 빠진 와이프를 먹여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쓸 수밖에 없었다. 중도금을 받으려면 원고가 좋아야 해서 필사적으로 썼다. 그렇게 쓴 책들이 지금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잔뜩 쌓여 있다. 작업하다가 잘 안 풀리면 예전에 썼던 에피소드를 갖다 쓰기도 한다. 〈소년시대>와 〈유어 아너>도 몇편 끌어와서 썼다. (웃음)

- 차기작은.

= 내년 초 촬영을 목표로 로맨틱코미디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굳이 타임머신을 만들어 10년 전 연애를 시작하기 전날로 돌아가 그 연애를 막는 위대한 물리학자의 이야기다. 일본 드라마 〈10년 뒤에도 너를 사랑해>가 원작이다. 대본을 써놓은 지는 12년 정도 됐는데 〈소년시대> 〈유어 아너> 이후 이 대본을 다시 해보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호러 장르도 준비하고 있다.

다음 장면을 위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나는

= 사람들을 만나 술자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회적 위치와 가면을 버리고 ‘바보’가 되어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들도 진솔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때 여러 가지 소스가 나온다. 그때 이를 수집한다. 마감 3일 전까지. 결국 글은 위기의식에서 나온다. 마감을 위해 하루에 20장씩 3일 동안 죽어라 쓴다. (웃음) 글은 선입견을 버리고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했던 것을 과감히 포기할 때 나온다.

차기작에서 다루고 싶은 소재

= 대학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신입 개그맨들 이야기. 예능프로그램에서 몇몇 개그맨들이 공동 옥탑방 생활을 하며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대에서 혹은 무대 뒤에서 신입 개그맨들의 시련과 애환 그리고 이들의 코미디가 방송에 나가기까지의 이야기를 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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