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어제는 흥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집에 들어온 것은 새벽 네 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로 직행했다. 잠이 들었다는 기억은 없지만, 어쨌든 그 후 기억은 나지 않으니 아마 바로 잠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다 눈을 떴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한 걸 보니 분명 아침이었다. 깊게 잠들어 오후까지는 내리 잘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상하게 그때 눈이 떠졌다. 아직 잠에 취한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다시 느리게 눈을 떴더니 방 문 밖으로 무언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분명 여긴 혼자 살고 있는 집인데.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 집을 돌아다니고 있는 백색의 무엇이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술이 덜 깨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기이한 느낌이라고 치부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타쿠안] 환상 (그 해 여름) 타쿠야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열두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타쿠야는 침대에 멍하게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린 속을 붙잡고 부엌으로 가 생수병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겨우 목을 축이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제 귓가를 울렸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요? 죽은 줄 알았네.」 푸흡! 타쿠야가 마시던 물을 뱉었다. 타쿠야는 놀라 생수병을 든 채로 뒤를 돌았다. 자신보다 키가 살짝 작은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타쿠야는 두려움과 황당함에 뒷걸음질 쳤다. “누, 누구세요?” 「나 보여요? 다행이다.」 “아니, 누구냐고요. 여기 저희 집이거든요?” 「나는 당신에게만 보이는 환상 같은 거예요.」 그, 어쩌면 ‘그것’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분명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의 말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눌한 발음은 둘째 치고 마이크를 타고 들리는 소리처럼 웅웅 귓가를 울렸다. 그것이 내뱉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타쿠야는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고, 헛것도 아닌 것 같고. 아직 꿈인가? 타쿠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은 하얀 셔츠에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이한 모습은 빛을 내는 것처럼 반짝였다. 그의 눈은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이 있었다. 타쿠야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상이요?” 그것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내 말 아니면 누구 말 믿으려고 그래요.」 그것의 말이 맞았다.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의 말을 완전히 믿고 싶지도 않았다. 타쿠야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름대로 평범했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이 온 걸까. 타쿠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리는 안 아파요? 일단 좀 앉을래요?」 “아니, 그 전에 그쪽이 누군지 좀 얘기해 봐요.” 타쿠야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그것을 믿어야만 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것은 딱딱해 보이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선한 인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행동도 말투도 자신을 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타쿠야는 아직도 들고 있던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타쿠야는 판타지적인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좋게 말하면 수호천사.」 “나쁘게 말하면?” 「……귀신?」 “귀신은 어감이 별로니까, 일단 수호천사라고 쳐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그냥, 잠이 들었는데, 눈 뜨니까 여기였어요.」 타쿠야는 뒷목을 매만졌다. 어쨌든 분명한 건 타쿠야는 좋든 싫든 그것과 함께 지내야 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근데 그쪽, 이름은 있어요?” 타쿠야가 미덥지 않다는 말투로 물었다. 「장위안이요.」 그것의 이름을 들을 때, 타쿠야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 * * 타쿠야는 냉장고에서 어제 사 둔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위안을 돌아보았다. “먹을래요?” 타쿠야가 묻자 위안은 고개를 저었다. 「먹을 필요 없어요. 저 배 안 고파요.」 “지금 안 고픈 거예요? 아니면 원래 안 고파요?” 「원래 안 고파요. 배부른 거나 배고픈 거나, 둘 다 못 느껴요.」 “맛은 느껴요?” 「안 먹어 봤는데…….」 아직 열려 있는 냉장고 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더 꺼냈다. 하나는 자신의 입에 문 타쿠야가 남은 하나를 위안에게 건넸다. 위안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잡았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자신에게 준 건지, 위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타쿠야는 위안의 맞은편에 앉아,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뺐다. “먹어 봐요.” 위안은 타쿠야와 샌드위치를 번갈아 쳐다보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타쿠야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위안을 보았다. 위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샌드위치를 계속해서 씹고만 있었다. “어때요?” 「아무 맛도 안 나요.」 위안은 자신이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식탁 위에 놓았다. 타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샌드위치를 먹었다. 처음 위안을 봤을 때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고 하면, 이제는 조금씩 신기하기도 하고 익숙한 기분도 들었다. 위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소파로 향했다. 이곳에 여러 번 왔던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위안의 모습이, 타쿠야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타쿠야는 그렇게 점심을 대충 챙기고 위안의 옆에 앉았다. 위안은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 창을 통해 햇살이 위안을 비췄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의 뒤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타쿠야는 위화감이 들었다. “전생에 대해서는 아는 거 없어요?” 「전생이요?」 “네. 귀신이라고 치면 전생이 있을 거 아니에요.” 「중국인이었어요. 한국에서 살고 있었고. 여기서 죽었어요. 이 정도?」 “전생에 대한 기억은 있는 거네요?” 「그렇죠.」 “신기하다…….” 타쿠야가 중얼거리며 시선을 다시금 위안에게로 향했다. 위안은 자신의 팔을 매만졌다. 그가 어색할 때 하는 행동인 듯했다. 타쿠야 자신이 가진 습관과 같았다. 더 이상 말을 않고 가만히 웃었다. 혼자 살던 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상대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사람은 아니고, 짧게 정의하자면 천사, 혹은 귀신. 그런데 낯설지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그의 행동이, 그리고 그의 습관까지도. * * * “저 오늘 학교 가요.” 물을 마시던 타쿠야가 소파에 앉아 있는 위안을 향해 말했다. 위안은 타쿠야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타쿠야는 작게 웃었다. 위안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도르륵 굴렸다. 「휴학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잠깐 도서관 좀 가려고요. 같이 갈래요?” 「그래도 돼요?」 바라던 말이 나왔는지 위안이 환하게 웃었다. 타쿠야는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 지금 나갈래요? 위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밖에 나서자 위안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타쿠야는 가방을 고쳐 매고 위안의 옆에 섰다. 위안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 하고 계속 고개를 움직였다. 「오랜만이다…….」 “네?” 「아, 아니에요.」 타쿠야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대신 고개를 돌려 위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생물체는 아무리 봐도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처음에 봤을 때에는 사람보다는 그저 인영이나 그림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타쿠야에게 그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행동. 그리고 타쿠야는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1층에 다다라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타쿠야는 자신의 앞을 걸어가는 위안을 보았다. 주위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분명 처음 온 길일 텐데 자신보다 앞서 가는 위안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흰 긴 바지 밑에는 그만큼 하얀 그의 발이 있었다. “발은 안 아파요?” 「네?」 위안의 시선이 자신의 발로 향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느껴져.」 사실이었다. 그가 걷는 발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법했다. 타쿠야는 그럼에도 그가 신경 쓰였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을 신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위안은 뒤를 돌아 타쿠야를 보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네?”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저 아무 맛도 못 느끼는 거 봤잖아요.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동시에 어떻게 안 건지 의문이 들었다. 수호천사다 뭐다 하더니, 사람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사람의 마음 속 소리가 들린다는 드라마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온 학교에는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복도를 지나면 다들 지나가며 타쿠야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상하게 옆에 있는 위안의 눈치가 보였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위안을 투과하며 지나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안은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얼굴을 찡그렸다. 「타쿠야는 친구가 많구나.」 “미안해요. 사람이 너무 많죠?” 타쿠야는 조용히 말했다. 위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긴요. 오랜만에 사람 많은 거 보니까 좋네요.」 “긍정적이네요.” 「죽고 나니까 이렇게 되더라구요.」 “오늘 마트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요?” 「좋죠.」 그럴 리 없겠지만 많은 인파 속에서 그를 놓칠까 봐 타쿠야는 위안의 손을 잡았다. 위안은 놀라 타쿠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돌렸다. 위안의 손은 다른 사람들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음이 편한해지는 게, 기분이 좋았다. 타쿠야도, 그리고 위안도. * * * 연한 파란색의 이불을 덮고, 타쿠야는 잠들어 있었다. 침대 위 창에서는 깨진 유리조각에 비친 빛처럼 밝은 달빛이 타쿠야를 밝혔다. 그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위안은 조심스럽게 그의 앞머리를 쓸었다. 괜히 눈물이 돌았다. 감정도 없었으면 좋았을 걸. 위안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볼을 만졌다. 그에게서는 옅은 보름달의 향기가 났다. 「여전하구나.」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위안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새벽을 울렸다. * * * “이상한 꿈을 꿨어요.”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에, 위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는 머리를 만지며 아직 잠에 취한 눈으로 말했다. “꿈에 당신이 나왔어요. 우리가 이 집에 있었는데, 당신은 사람이었어요. 확실히.” 「아…….」 “계속 사람 같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가.” 거기까지 얘기하고 타쿠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위안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평소처럼 물을 꺼내 마시는 타쿠야의 옆에서 위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몇 번 달싹이기는 했지만 끝내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오늘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없어요.」 “할 일도 없구요? 수호천사면 뭐 미션 같은 것도 없어요? 드라마 보면 무슨 영혼한테는 49일 안에 눈물 받아 오라고 하던데.” 「그거 다 말도 안 돼요.」 위안의 반응이 귀여워 타쿠야는 웃음을 지었다. 타쿠야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틀었다. 어느새 옆으로 와 앉은 위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티비 화면 속에서는 영화가 한창 하고 있었다. 타쿠야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위안의 시선이 화면에서 타쿠야로 옮겨졌다. 타쿠야는 위안을 바라보며 멋쩍은 듯 자신의 팔을 만졌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거든요.” 「한국 영화잖아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우연히 누구랑 티비에서 이 영화를 봤어요. 그 후로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됐어요.” 「누구요?」 “그게 기억이 안 나요.” 티비 속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꽉 안고 있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분명 그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은 몇 조각이 사라진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에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깊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엔, 이 손 절대 놓지 마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향해 얘기하고 있었다. 「저도 이 영화 좋아해요.」 가만히 티비를 보고 있던 위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 * * 위안이 온 후로, 타쿠야의 꿈속에서는 매일같이 위안이 나왔다. 매일 다른 장면으로, 타쿠야와 위안은 함께였다. 무슨 연유로 꿈에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아쉬울 때도 있었고, 가슴 한편이 저릿해 올 때도 있었다. 가끔은 위안에게 꿈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위안은 접힌 눈으로 살짝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어딘가 슬퍼 보여서, 타쿠야는 더 이상 그에게 꿈 얘기를 하지 않았다. * * * 빗방울이 세차게 창문을 두드렸다. 따뜻한 물이 들어 있는 머그잔 안에 얼마 전에 구입한 커피 믹스를 넣고 저었다. 쓴 맛이 감도는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위안은 식탁에 엎드린 채로 타쿠야를 바라보았다. 타쿠야는 위안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지만 아닌 척하며 뒤를 보지 않았다. 「저도 커피 줘요.」 “아무 맛도 못 느낀다면서요. 괜찮아요?” 「비 오는 날에는 마시고 싶어서요. 기분이라도 낼래요.」 위안이 타쿠야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타쿠야는 자신이 마시려던 머그잔을 그에게 건넸다. 위안은 뜨겁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이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전부였다. 타쿠야는 다른 잔을 꺼내, 똑같은 방법으로 커피를 탔다. 위안은 자신의 손끝으로 식탁을 톡 톡 두드렸다. 자신의 커피까지 다 탄 뒤, 타쿠야는 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위안은 그제야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머그잔을 들었다. 타쿠야는 가만히 위안을 보았다. 햇살을 받아 빛이 나는 그의 형체는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적응이 된 뒤였지만, 그 모습을 자신만 담을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이 들긴 했다. 자신에게 위안은 이렇게나 선명한데. “위안.” 「네.」 “나한테 온 거, 위안이 선택한 거예요?” 「……제가 선택한 건 맞아요.」 “왜요? 혹시 전생에 날 알고 있었어요?” 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에 쥐어진 머그잔을 다시금 입에 가져다 댔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텐데 열심히 그것을 마시는 위안의 모습은 낯설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비 오는 날에는 마시고 싶어요.’ 자신이 커피를 건넬 때 말하던 위안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요 며칠 새에 이런 게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위안의 모습이 보이고 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지만, 타쿠야는 그를 안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 없는 그것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왜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은지 자신에게 물어도, 타쿠야는 대답할 수 없었다. 타쿠야는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인스턴트커피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꼭 한 잔 마시곤 했다. 우울한 날에는 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더 우울해지는 게 좋았다. 어느새 커피를 다 마신 위안은 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미동도 없이 타쿠야를 바라만 보던 위안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전생에 타쿠야를 알고 있었어요.」 “혹시 나도 당신을 알고 있나요?” 「내가 당신의 무의식을 알 수는 없어요.」 그의 말은 타쿠야가 이해하기에는 꽤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울적한 기분이 자신에게도 느껴져, 타쿠야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렸다. 타쿠야는 머그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안고 싶은 것도, 무의식인가요?” 「타쿠야도 나를 알고 있었나 보네요.」 위안이 웃었다. 그러나 울고 있었다. 슬픔의 겉과 속은 같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슬픈 것이 아닐까. 타쿠야는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안에게로 걸어가는 건 단지 식탁 하나 거리였음에도 길게만 느껴졌다. 위안에게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위태로웠다. 대체 왜 그를 안고 싶은 건지, 이해하지 못 한 채, 타쿠야는 그를 안았다. 흰 셔츠가 타쿠야의 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위안은 타쿠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울었지만 눈물이 타쿠야의 옷을 적시지는 않았다. 그는 예상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타쿠야는 위안을 따라 울고 싶었다. 그것이 타쿠야의 무의식이라면. 위안의 온기는 타쿠야를 다시 안아 주고 있었다. 그동안 정리되지 않던 머릿속을 정리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진 퍼즐 몇 조각 중 하나를 찾아, 퍼즐을 맞춰 가는 기분이었다. * * *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그나마 가장 멀쩡히 놓인 달력을 들었다. 오늘로 벌써 5일이었다. 위안은 고개를 돌려 타쿠야를 보았다. 잠이 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위안은 입을 열었다. 「타쿠야.」 그의 이름이 둘의 공간 속에서 천천히 번져갔다. 이곳에 내려온 것에 후회가 들었다. 이렇게 또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타쿠야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행복하게 지내 줄 수 있을까. 위안은 자신의 셔츠자락을 움켜쥐었다. 다 식어버린 낮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건 잘한 일일까?」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미소를 지은 타쿠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위안의 울음 가득한 질문은 목적지를 찾지 못 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위안은 무릎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은 타쿠야에게 내려앉았다. * * *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는 타쿠야를, 위안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 바빠 보여서 차마 말을 걸지 못 했다. 위안은 타쿠야의 뒤를 졸졸 쫓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타쿠야가 준비를 다 마쳤는지 고개를 돌려 위안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요?」 “시내 나가려고요. 서점도 가고, 산책도 하고.” 「아…….」 위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타쿠야는 웃으며 위안에게 다가왔다. 그의 팔을 끌자 위안이 놀라 일어났다. “같이 가요. 저만 보낼 거예요?” 「네?」 “수호천사라면서요. 저랑 붙어 있어야죠.” 「천사라고 꼭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타쿠야는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이 웃었다. 그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위안도 따라 웃었다. 평일 시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하고 조용했다. 타쿠야가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위안도 마찬가지였는지 지금까지 봐 온 모습 중에 가장 들떠 보였다. 타쿠야는 고개를 한 곳에 두지 못 하고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간지러운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어때요?” 「오랜만이라 좋아요. 사람일 때는 이런 평일에 시내 나오는 거 좋아했는데.」 “저도 이럴 때 나오는 거 좋아해요.” 그들은 길목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았다. 덥지 않고 적당히 비추는 햇살에 기분이 좋았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꽃도 보기 좋았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서점 간다고 했죠?」 “네. 오랜만에 책 좀 사려고요.” 위안이 제 발을 앞뒤로 움직였다. 선선한 바람이 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당신을 보면, 무언가 기억날 것 같아요. 잊고 있던 중요한 걸 만난 기분이에요.” 「…….」 “몇 피스가 사라진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 그 사라진 피스를 위안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퍼즐을 겨우 맞출 수 있게 됐어요. 그런 기분이에요.” 타쿠야의 진심 어린 말에 위안은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제가 감히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타쿠야는 확실히 좋은 사람이에요. 무엇도 아닌 제가 당신의 기억이 된 건 저에게는 고마운 일이에요. 어……,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좋아요.” 타쿠야는 위안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언제 잡아도 편안함을 느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의 온기에 자신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천사가 맞네요.” 「네?」 “아름다워요, 위안.” 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타쿠야가 일어섰다. 그를 따라 위안도 일어섰다.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 * 「넌 정말 그대로구나. 아름답다는 말마저도.」 위안은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타쿠야의 볼을 만지던 자신의 손은 더 이상 그를 만질 수가 없을 정도로 투명해졌다. 「타쿠야. 이제 정말 마지막일 거야.」 겨우 지탱하고 있던 몸이 어느 순간부터 다 스러져갔다. 흐릿한 연기로 변해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 이별이다. ‘후회하니?’ 누군가 위안에게 물었다. 그것은 타쿠야의 목소리도, 위안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가 힘들다면.」 * * * 침대 바로 위에 있는 작은 창에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마냥 마르지 않고 적당히 촉촉한 햇볕의 향이 부드럽게 타쿠야를 안았다. 타쿠야는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아침 햇볕은 타쿠야의 등에 내리쬐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침대 끝에 앉아 있을 그의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타쿠야는 몸을 일으켰다. 또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겠지, 싶어 거실로 나왔다. 그러나 익숙한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온기와 향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위안?” 아직 잠긴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거실을 둘러보아도, 부엌에도, 그의 침실에도, 심지어는 욕실에도 아무도 없다. 그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위안, 어디 있어요?” 한 시간을 넘도록 찾은 곳을 또 찾았다. 넓은 집도 아닌데, 숨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았는데, 그는 없었다. 위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타쿠야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타쿠야를 뒤덮었다. 위안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만큼 갑작스럽게 갈 것이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왜,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걸까. 그는 침실로 향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덮고 있던 파란색 이불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분명 이곳, 침대 끝에 앉아 있었는데. 항상 그렇게 있었는데. 이불과 같은 색의 커버가 씌워진 베개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분노와 슬픔이 섞인 묘한 감정이 타쿠야를 흔들었다. “꿈이구나. 다 꿈이야. 너무 깊은 꿈을 꾼 거야.” 타쿠야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 선명한 기억들을 단순히 꿈으로 치부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확실히 그는 없으니까. 그는 아무리 찾아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환상이라니, 말도 안 돼.” 어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타쿠야는 자신에게 외쳤다. 모든 건 꿈이었다고. 두통이 이는 머리에 타쿠야는 제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눈 앞에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타쿠야는 방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침대 위에 다시 그것을 올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신경 쓰지 않았던 협탁 위가 눈에 들어왔다. 뭐라도 해야 했다. 잠시라도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야 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책들과 물건들이 협탁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옛날 영화 DVD, 유명 배우 화보집, 이런저런 메모가 적혀 있는 수첩, 잘 쓰지 않는 필통까지. 물건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 놓았다. 이것저것 쌓여 있던 물건들의 가장 아래에는 의외로 탁상용 달력이 접혀져 있었다. “뭐야…….” 타쿠야는 달력 첫 장을 열었다. 2014년 1월. 아무런 무늬 없이 날짜만 정직하게 찍혀 있는 흰색 달력이었다. 그는 9월달이 나올 때까지 달력을 넘겼다. 그리고 9월을 넘기는 순간, ? 작은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쿠야는 연하게 바래진 그 사진을 들어 보았다. 자신과 한 남자였다. 사진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찍혀 있는 날짜는 2013.09.13 이었다. 타쿠야는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함께였던. 자신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바로 그 얼굴. “위안…….” 봉인 되었던 모든 감정들이 기억 저 편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 * “무슨 영화예요, 형?” 위안은 모니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 영화인 건 확실했고, 타쿠야가 고개를 들어 티비를 보니 영화는 거의 끝난 뒤였고,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내 인생이 힘들 때 언제나 당신과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고마워요…….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 줘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당신과의 여름이었습니다.’ “대사 좋다.” 위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타쿠야는 옆에서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진 건지, 위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타쿠야를 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위안은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는 형과의 여름이 좋아요.” “조용히 해. 분위기 깨져.” “와, 형 너무해.” 한참동안의 정적 후,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자 위안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한 자세로 앉아 있던 탓에 일어나면서 뚝 뚝 소리가 났다. 으아아, 위안이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하는 모습을 타쿠야는 가만히 보며 웃고 있었다. “형, 이 영화 제목이 뭐라구요?” 위안은 앉아 있는 타쿠야를 내려다 보았다. “그 해 여름.” * * * 모든 게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없었다. 그가 익숙하게 느껴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무의식은 이것이었구나. 그 사실을 알아챈 건 이미 위안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두 번째 이별, 두 번 모두 그를 맥없이 보내야만 했다. 어……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타쿠야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눈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 속에 회오리쳤다. 심장이 뛸 때마다 바래진 그리움이 온몸을 따라 흘렀다. 흔들리는 목소리는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뱉어내는 절규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절망감이었다. 사라진 기억의 파편은 멀리 있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퍼즐 조각은 이미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나 타쿠야는 그것을 찾지 못 했을 뿐이었다. 가슴이 아리도록 쓰렸다.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이 덜덜 떨렸다. 접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진을 뒤로 돌렸다. 뒷면에는 검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자국이 역력한 짧은 편지가 남아 있었다. [ 이번 일주일도, 전에 함께였던 일 년도 나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어. 내 사랑은 전부 네 것이었고, 타쿠야는 내 삶의 전부였어. ] 정성스러운 문장들의 나열. 그 뒤에는 몇 개의 글자 위에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뭐라고 써 있는지 잘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지워진 글자 뒤에, 선명하게 쓰여진 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 이제 다시 나를 잊어 줘. ] 아아…… 타쿠야는 흩어져버린 모래성처럼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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