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러치 히터 clutch hitter
타쿠야 장위안
그라운드 위 인조 잔디가 빛을 받을수록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그런 오후였다. 간단한 러닝과 워밍업, 타격 연습 따위를 했을뿐인데 다른 날보다 이른 땀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전광판 윗쪽에 박힌 시간을 보며 돌아오는 배팅 차례를 기다리는데, 코치님께서 느닷없이 주장을 불렀다. 주장이 더그아웃 쪽으로 뛰어가고, 더그아웃과 동떨어진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체력훈련 할 것 같냐? 니은니은, 그럴 것 같진 않음. 무언의 대화들이 눈짓을 매개로 오고간다. 도저히 들리지 않을 거리임에도 미련하게 귀를 기울이는 놈도 더러 있다. 다들 체력훈련만 아니었으면 하는 눈치다. 나 역시도.
- 다들 모여.
얼마 안 있어 코치님이 고함과 함께 휘슬을 불었고, 주장이 손짓했다. 우리는 배트를 내려놓고 그 쪽으로 뛰어갔다. 빨리빨리 안 뛰어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그 소리를, 오늘이라고 예외처럼 안 들을 리 없다. 아이씨, 다들 나직하게 중얼거린 뒤, 열심히 뛰어가는 척을 한다. 더그아웃에 다다른 우리는 코치님을 중심으로 둥그런 반원을 만들어 선다. 이것이 감독님과 코치님 말씀을 들을 때, 연습을 종료할 때, 작전지시를 내릴 때, 아무튼 여러 경우의 상황에 갖추는 기본 대형이다. 나는 학년순인 그 반원의 중간 쯤에 서 있다. 주장은 제일 왼 쪽에 선다. 그게 원칙이다. 나는 습관처럼 코치님 표정을 살폈다.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이 자꾸 뒤척이는걸 보니, 핸드폰으로 올 여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리시는거다.
- 오늘은 1, 2학년으로 팀을 나눠 모의 게임을 한다.
앗싸. 내 맞은 편 후배 하나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발음하는걸 본 주장이 눈짓으로 주의를 준다. 후배는 화드득 놀라 입을 꾹 다문다. 선배한테 혼나고서 주눅 든 모습이 귀엽다. 그렇지, 저게 본래 전형적인 후배의 모습이지. 대략 두 시간 전쯤, 내게 안아달라고 요구해오던 철판 두꺼운 후배 하나가 생각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이 좋아 후배지, 실상은 선배인 나를 엄청 깔보고 있을, 나쁜 자식.
- 대신, 게임만 할 순 없으니 진 팀은 게임 끝나고 트랙 20바퀴다.
- ...네.
- 1학년들, 선배라고 눈치 보면서 플레이하면 죽는다. 내 눈에 그런거 보이면 게임이고 뭐고 너희가 따블로 뛸 줄 알어.
- 네.
대답은 다들 네네 하고 있지만, 실제로 선배들 눈치를 안 보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후배들은 버젓이 쉬고 있고, 선배들이 트랙 스무 바퀴를 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내버려둘 선배들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벌써부터 트랙 스무 바퀴가 눈에 아른거리는 듯한 후배들의 절망적 표정은, 작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해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캐치할 수 있는 공도 놓치고, 엉성하게 도루했다가 아웃 당해버리고. 졸업반 선배들은 아직도 그 게임을 회상하면서, 나한테 고마워 절이라도 해야될성 싶다며 놀리기 일쑤다. 삭제하고픈 기억 중 하나다.
- 아, 그리고 1학년은 경식이 빠졌으니까 투수는 타쿠야가 서는 걸로.
코치님의 말에 일순간 이곳저곳에서 오오, 하는 반응들이다. 참고로 경식이는 부상으로 재활치료 중인 1학년의 주전 투수였다. 꽤 열띤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옆에 있던 동기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넌 매일 쟤랑 붙어다니면서 그것두 모르냐. 퉁명스런 동기의 대꾸에 나는 그저, 네 생각만큼 친한 거 아니다. 라고, 변명 투로 받아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사실이니까. 실제로 우리 사이는, 혀가 오간 적은 있어도 깊은 속얘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는 그런 얄팍한 류의 것이다. 어찌보면 한없이 가까운데, 다른 한 편으론 양극에 놓인 것처럼 멀다. 고로 우리의 관계는 들쑥날쑥하다. 불완전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 타쿠야, 중학교 때까진 투수를 봤대. 고등학교 와서도 투수를 하고 싶어했나본데, 투수는 경식이랑 포지션도 겹치고, 타쿠야는 타격감도 있다보니 지금은 그냥 타자로 뛰는거라드라.
- 아,
- 투수로도 잘했겠지. 그러니까 공 던지는거 보고싶어서 저 난리들 아니냐. 암튼, 나같았음 그런 상황 답 없는데, 타쿠야 쟤는 뭐든 다 잘하니까.
짤막한 가십 기사의 헤드라인을 읊는 것처럼 동기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마치 외국 유명 연예인의 섹스 스캔들이, 우리에겐 그저 먼 나라 얘기같이 느껴지는 그러한 비현실성과 닮아있다면 비유가 될 지 모르겠다. 나 또한 그저 나와 무관한 사람의 과거를 듣듯, 아아, 그러냐, 하고 말았다. 하지만 속사정은 여유롭지 못 했다. 이유없이 화가 났다. 아니, 실은 이유가 없는게 아니다.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는 그 이야기를 진작 나한테 해주지 않은 타쿠야가 이해되지 않아서 화가 난다. 물어본 적도 없고, 애초에 궁금해하지 않았던 내 탓은 하지 않은 채, 매일 나만 추궁 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매일 나만 모든게 다 까발려지는 일방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 *
가위바위보로 공수가 정해졌다. 상대 팀의 선공격이다. 수비 자리로 흩어지는 동안에도 동기가 해주었던 얘기를 곱씹었다. 그렇담 계속 투수를 하고 싶어했을까? 아직도 공 던지던 때를 그리워할까? 나는 경기에 하등 도움될 것 없는 그 애에 관한 잡념을 키우느라 집중력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 댓가는 참담했다. 내 쪽으로 빠진 안타 두 개를 모두 놓쳐버린 것이다. 투수진이 약한 우리 학년의 특성상, 안타가 빈번하게 나올 것쯤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난 집중하지 못 했다. 안타와 내 이름을 번갈아 부르는 동기들에 그제서야 아, 하고 초점이 돌아오면, 반박자 늦은 후였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정말 넋이라도 빠진 모양일 것이다. 별 소득도 없이 흰 유니폼에 흙만 냅다 묻힌 꼴이 됐다. 내 무의식을 점령해버린 타쿠야는, 이상하게도 경기내내 떨쳐지지 않는 끈질김이 있었다.
- 위안아, 이번 타자 타쿠야야. 정신 차려.
어느새 타석에는 타쿠야가 서 있다. 근처에 있던 동기들이 나에게 토킹하는 소릴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이 보인다. 오전내내 숙소에서 저 입술을 맞대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저 입술이 나에게 말했다. 먼저 안아달라고.
- 잡아, 잡아!
탕, 타쿠야가 치는 볼에선 언제나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가 끔찍이도 싫지만, 실은 알고 있다. 펜스 안팎을 웃도는 거리에 떨어진 공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걸. 거의 홈런이었다. 전광판은 잠깐 깜빡이더니 2점을 추가한다. 두 명이 잇따라 홈베이스를 밟았다는 뜻이다. 티는 못 내지만서도, 벤치에 있는 1학년 애들의 심히 기쁜 속내를 모르지 않는다. 나는 콧잔등을 훑었다. 그 새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열기에 의한 땀이라기보단, 식은 땀같은 느낌이다. 1회 만에 넉 점을 실점했다. 여기저기서 아자아자, 화이팅, 수비하자, 하는 동기들의 윽박이 들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1학년들의 사기를 돋구는 응원인듯 하다. 결국 1점을 더 내어주고서야 비로소 공수전환이었다. 벤치로 뛰어가는 동기 하나가 달려와 기운 빠지는 소리를 덧댄다. 야, 타쿠야는 진짜 넘사벽 아니냐? 넘사벽.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해주지 않은 채 벤치로 갈뿐이었다.
응, 그 한 마디의 수긍이 아직도 어렵다.
* *
- 2학년 너거들 똑바로 안 해? 이것들이 어디서 후배들한테 5점씩이나 헌납하고 있어?
고래고래 외치는 코치님의 말은 공중에서 잘게 분해되어 나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보다는, 그라운드에서 제일 높게 솟은 마운드를 밟고 있는 타쿠야의 모습이, 적어도 나에겐 더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 타자석에서 등번호 6번이 박힌 뒷모습만 보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물론 내 눈에는 그 광경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몸을 옆으로 비켜 서서, 글러브를 끼고, 다른 한 손엔 볼을 꽉 쥐어든 모습이 아무래도 낯설다. 본인 역시 오랜만에 서는 마운드 위의 공기가 어색한지, 모자를 자꾸 썼다 벗었다 한다. 평소엔 없던 습관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동기가 그 장면을 관람하듯 보더니, 모의 게임이 아니라면 언제 저 희귀한 장면을 보겠냐며, 팬의 입장에서 얘기하듯 그리 말한다. 나는 그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했다.
- 와...
그리고 타쿠야는 첫 번째 타자인 선배 한 명을 스트라이크로 보내버렸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정교한 폼에서 나오는 아웃코스의 직구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으로 그라운드 위에 섰겠지. 본 적도 없는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이없다.
- 역시 하나를 잘 하는 애가 모든 걸 잘 해.
이번에도 나는 굳이 동조해주지 않았다. 타쿠야가 세 번째 선배를 막 벤치로 돌려보내려던 그 찰나에, 코치님의 휘슬 소리가 긴장감 있게 흐르던 경기의 텐션을 꺾었다. 2학년,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 소리에 무슨 구원이라도 받은듯 반색했다. 실점만 잔뜩 내고, 득점도 없던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경기를 중단하라는 의미가 내포된 휘슬 소리가 반가울 수밖에.
- 야, 집합!
적어도 운동부에게 있어 집합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지만, 오늘만큼은 긍정을 뜻했다. 주장의 고함에 어영부영하던 동작이 일시에 멈추고, 우리는 코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아까보다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뛸 수 있었다. 빨간 빛을 내며 다소 맹렬히 스코어를 알려주던 전광판 불도 꺼지고, 그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트랙 스무 바퀴도 사라진 격이었다. 패색이 짙던 게임의 급작스런 중단이 반가웠다. 우리는 다시금 둥그런 반원을 만들어 섰다. 코치님은 우리가 그래도 나름 선배라구, 지면 체면이 안 설까봐 일부러 게임을 중단시켜 주신 걸까. 그런 추측을 불러 일으킬만큼 기막힌 타이밍이다.
- 감독님 전화 오셨다.
- ......
어설픈 예상은 늘상 빗나가는 법이다. 그럼 그렇지. 기뻐하던 표정에서 그늘진 표정으로 급속히 바뀌는 변화가 아주 적나라했다, 우리 모두. 심지어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대놓고 들렸다. 눈치는 더럽게 없고, 행동은 쓸데없이 큼직큼직한 1학년 애들 중 한 명의 소행이겠지. 하지만 주장은 아까번처럼 그 애를 찾아내 주의를 주거나 하진 않는다. 그럴 전의를 잃어서다. 우리는 더위에 입맛을 상실한 짐승들마냥 거무튀튀한 표정으로 코치님의 입에서 떨어질 말만 기다리고 있다.
- 감독님이,
- ......
- 오늘 너네들 여기까지만 하고 그냥 집으로 가라신다.
오예! 너나 할것없이 소리를 질렀다. 야구모자와 글러브, 야구공이 동시에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 *
오후 운동 시작 전, 낮이 되면 달아오를 인조 잔디에 호스를 통해 물을 뿌려둔다. 일반 학생들이나 운동부가 활동하다가 다치지 않게끔. 아직까지 물기를 머금고 있는 축축한 인조 잔디를 손으로 한 움쿰 쥐어본다. 몇 분째 그것만 잡고 씨름 중인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영겁같이 느껴지는 시간을 참지 하고 먼저 일어난다. 운동을 마친건 4시쯤인데, 전광판에 뜬 시간은 막방금 5시로 앞자리가 바뀌었다. 샤워를 마친 동기와 후배들이 한 데 모여 후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목격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 뭐해.
- ......
열 걸음쯤 앞에 있는 너의 굽은 등 뒤로 바짝 다가가, 먼저 말을 건 것은 내 쪽이다. 오늘은 일 년내내 쉴틈없이 혹사 당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올해들어 해산하는 분위기가 가장 화사한 날이기도 했다. 이런 날은 확실히 드물었다. 하지만 뒷정리를 다 끝내고도 너는 기어이 락커룸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라운드의 중앙에 못 박힌듯 주저앉아서 가는 시간을 보낼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왜인지 끄르던 야구화 끈을 다시 고쳐 묶었다. 들어가지 않을 거냐고 묻는 동기들에게 궁색한 변명을 해가며 먼저 가라는 말을 전했다. 등 굽은 너의 뒤에 너와 비슷한 자세로 한참 이렇게나 앉아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지금 일어난 것이다. 너는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올려다본다. 가까이서보니 글러브도 여즉 끼고 있다.
- 일찍 마쳐주는게 싫어서?
그래서, 여기 죽치고 앉아있는 거야? 목이 잠겨버려 뒷말은 생략했다. 하지만 다 알아먹었을거다. 너의 초점없는 눈이 나를 관통한다.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타쿠야는 정말이지 처음 본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공허하다. 타쿠야는 뒤늦게야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억지로 근육을 당겨 웃어주는 기색이 역력하다.
- 으, 아.
외마디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인조 잔디 위에 발라당 드러눕는다. 개운해보여야할 행동엔, 답답함만 잔뜩 끼어있다. 나는 타쿠야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 앉는다. 유니폼을 뚫고 스며드는 눅눅한 물기가 싫지만, 그래도 앉는다. 누운 상태에서, 타쿠야는 글러브 낀 손을 허공에 들어 그것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그런 타쿠야를 빤히 쳐다본다. 타쿠야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를 바라본다. 늘 그랬듯 웃고 있다.
- 선배야말로 일찍 마치는게 싫은가봐요. 안 가고 여기 이렇게 남아있는걸 보니.
- ......
너. 너때문이야. 그 말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있는 내 행동에 가로막혀 선뜻 뱉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입 안 어딘가에 걸려 몇 분간 떠돌다가 다시금 목구멍 아래로 가라앉을 말이다. 나에겐 그런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타쿠야는 이쯤되니 대답없는 내가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글러브를 벗더니 제 옆에 둔다. 타쿠야가 나에게 무언갈 말하려고 할 때였다. 찌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먼저 들렸다. 우린 놀라지 않았다. 꼭 이 시간쯤 되면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니까. 이 주변엔 나무도 많고, 진짜는 아니지만 인조 잔디도 있어서 저녁 쯤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찌르르 소리가 제법 익숙한 편이다. 타쿠야는 어, 하더니 풀벌레에게 선수를 뺏겼다며 웃는다.
- 전, 남한테 제 얘기 하는거 싫어해서 잘 안 하지만,
- ......
- 선배한테는 좀 투정부리고 싶어졌어요.
- ......
- 선배가 날 먼저 기다린거잖아요.
드러누워, 시선은 허공에 고정시킨 채 그렇게 말한다. 난 널 기다린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어딘지 고되보이는 타쿠야를 보고 있자니 그 억울함은 저절로 소각돼버리고 어느새 없다. 별안간 타쿠야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는다. 벗더니 그걸로 제 얼굴을 덮는다. 방금 전까지 웃던 표정이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의도인 것이다. 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그냥 잠자코 있어주었다. 실제로 타쿠야의 입에서 그 애의 이야기를 듣는건 처음이다. 아무에게나 넙죽넙죽 웃어주고, 줏대 없어보일 정도로 남에게 동조할 줄만 알던 애다. 천재성에 비해 고집이 있거나, 프라이드가 강하다거나, 까탈 떠는 성격은 못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을 콕 집어서 재수없어했다. 그 다정함이 하등한 나에게 베푸는 친절 한 조각 같이 느껴져서. 정적이 이어지다가, 타쿠야가 말한다.
- 선배가 들으면 또 삐질지도 모를 말이지만,
삐지다. 그런 표현은 싫다고 딱 잘라 말해줘도 기어이 제 맘대로다.
- 요즘엔 그냥 다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 ......
- 야구도, 나도, 미래도.
- ......
- 그리고 선배도.
나는 그 어떤 반응도 꺼내보일 수 없다. 마치 그러도록 타쿠야가 수작을 부린 것마냥 침묵을 지킬뿐이다. 듬성듬성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네가 무슨 마음인지 한 치도 헤아릴 수 없다. 너는 이미 우리 팀의 에이스이자, 여러 대학 팀에서 앞다투어 스카웃하려드는 천재이자, 탄탄대로의 미래로 점철된 길을 걷고 있는 이상적인 존재다. 나는 하두 보잘 것 없어서 선두에서 달리는 너의 속내를 재빨리 캐치할 수 없었다. 오늘은 연습 게임에서도 내 앞으로 오는 볼을 두 개나 놓쳤는데, 종국에는 네 의중마저 잡아내지 못하고 모두 놓쳐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건 그게 경기 중이든 아니든, 아무것도 없다.
- 공 던지는게 좋아서 시작한 야구였어요. 지금은 공을 치고 있지만.
- ...어.
- 자라면서 알게 됐는데, 난 내가 좋아하는걸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남들이 원하는걸 하고 있더라구요.
- 어.
- 나는 내가, 선배하고도 결국 그렇게 돼버릴까봐,
- ......
- ......
너는 끝끝내 그 문장을 종결짓지 못 했고, 나는 끝끝내 그 방백같은 말 끝에, 어, 한마디를 대꾸하지 못 했다. 고민같은건, 나같이 미래가 불투명하고, 가진 재주가 없고, 그래서 보통이라도 되려고 애써야 하는 사람들의 열등감이 뭉쳐 생겨난 것인 줄 알았다. 나는 줄곧 그런 줄로만 알았다. 축축한 잔디가 감겨오는 손이 따끔거린다. 하지만 꾹 쥔 손을 다시 펴기가 쉽지 않다. 뻑뻑한 인조 잔디를 더 깊이 잡고 있다. 마치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처럼. 모자를 덮고, 한가한 양치기 소년마냥 드러누워 있지만, 실은 생각이 많았던 너다. 주위가 고요하고 풀벌레가 유난히도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의 저녁이다. 나는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누워 있는 너에게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자세가 많이 엉성할까. 영화에서 보던 것만큼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는 잔디의 끄나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타쿠야의 모자를 들춰내, 진짜 너와 마주한다.
나는 일말의 틈도 주지 않은 채 네 입술에 키스를 한다. 벗겨낸 모자를 움켜쥔 내 손이 갈 곳없이 허공을 떠돌다, 비로소 네 몸 위에 안착한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요란하게 쿵쿵거리는 것은 이 세상일까, 네 머릿속일까, 아니면 내 머릿속일까. 만약 그 셋 다 아니라면 이건 네 심장 박동일까. 땀방울이 맺혀 갈라진 내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오는 손이 느껴진다. 타자로 경기를 뛰면서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공 던지는 일, 그것때문에 너의 손 마디마디에 생긴 물집까지도 내게는 다 느껴진다. 전부 전해진다. 너에게서 입술을 뗀 내가 중얼거린다.
- 땀 맛이 나.
너는 오늘따라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내 감정을 정리하기에도 바쁜 머릿속이라서, 지금 날 보는 네 눈이 어떤 감정으로 넘실대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저 너머의 풀벌레가 찌르르 하고 울고 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정말 솔직해지자면, 우리의 키스에서 땀 맛이 났는지조차 사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이끌려 한 번 더 허리를 숙인다. 이번엔 좀 더 긴 시간이 흐른다.
* *
장위안의 서툰 위로 ^_ㅜ 브금가사는 본문내용과 전혀 무관하고 단지 분위기만 맞춘겈ㅋㅋㅋㅋ
BGM - speak now , 테일러 스위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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