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과 오현민
임요환과 홍진호
김성규와 최창엽
【 V A M P I R E 】
血과 人의 상관관계
그 날 이후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밖으로 흘러나온 건 아버지의 피가 확실했으며, 그 속에 섞여 있는 죽음의 기운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밖에서 죽어 돌아왔거나 이곳에서 죽었다는 건데. 솔직히 어머니를 백이면 백, 신뢰하지 못 했던 탓에 확신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죽였다. 정말 슬픈 건지, 아니면 연기를 펼치는 건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뻔뻔하게 장례를 치르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호기심이 낳은 불신이었다. 나이 다섯 살에, 경훈은 믿음보다 불신을 먼저 배웠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혼잡한 집안 속에 홀로 동떨어진 경훈은 더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의 대상인 만큼, 또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치도록 침착했으며 미치도록 무서웠다. 이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온 몸으로 느껴왔던 만큼 경훈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닌, 남아 있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닫고 말았다.
한 달 동안은 폐인처럼 지내는 엘리를 옆에서 지켜보던 경훈은 해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에도 부모님은 늘 다투시곤 했다. 대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공통 주제는 늘 '인간'이었다. 뱀파이어는 번식을 위해, 자손을 낳아 혈족을 잇기 위해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착상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여러 번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수정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는 아버지와 몇 년 아니면 몇 개월이라도 붙어 있었을 텐데, 인간을 저렇게 싫어할 수 있나 싶었다. 지나가다가 얼핏 대화 내용을 들어봐도 엄마는 인간을 싫어했다. 어쩌면 사랑했을 아버지마저 단칼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니까 말이다. 인간에 대한 분노는 나날이 심해져 갔다.
아마, 엄마는 뱀파이어의 아이를 갖도록 하게 하는 주체가 인간이라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엘리는 미쳐갔고 그걸 견디지 못 한 케빈이 자살까지 시도 했었다. 하지만 엘리의 집착으로 그것마저 실패의 길을 걷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싸움 역시 나날이 심해져 갔으며 지켜보는 경훈이 미치지 않은 게 정말 대단할 정도였다. 그 과정을 견딘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이쯤 됐으면 끝을 맺을 줄 알았던 싸움은 폭력으로 치닫았으며 종국에는 살인으로 막을 내렸다. 이 모든 게 5년 안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엘리는 정말 날이 갈수록 상태가 이상해졌으며 주변인들도 말리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경훈은 너무 어렸다.
"블라디 레이 (Vladi Lay), 누구에게도 알려줘서는 안 되는 네 이름이야. 인간에게는 더더욱. 내 말 명심해라, 아가."
세대가 바뀌었다. '레이'라는 이름을 묻어두고 '경훈'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처음에는 왜 이름을 숨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그래서 경훈이라고 부를 때면 못 알아듣는 게 잦았다. 이제 막 열 살을 넘겼을 때, 인간에 관한 엄마의 교육이 시작 되었다. 이미 기억 저 끝에 박혀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의 혈족이 위대하다는 걸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인간과 같은 공기도 마시면 안 된단다. 마시면 너도 그들에게 오염이 돼. 이제 컸으니까 엄마 말 이해할 수 있겠지? 그들은 악(惡)의 기운을 가지고 있단다. 경훈아. 너는 절대 인간과는 상종하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교육은 필요 없었다. 엘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을 알고 조금의 이득이라도 더 보기 위해 교육을 맡겠다며 다가오는 친족들을 전부 제거해낸 엄마는 그저 너는 이것만 알면 된다면서, 세뇌 교육을 시켰다.
"인간이…싫어.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 결과 경훈은 완벽하게 세뇌를 당했다. 이제 막 1차 성인기를 보낸 그에게 인간에 대한 적대는 커져만 갔다. 세뇌의 힘은 무서웠으며 강력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엘리는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경훈은 그녀의 행방이 궁금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훈은 밖에 나가면 죽음이라도 당하는 듯이 늘 불안감에 떨며 살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불안감을 알지 못 했다. 엄마가 혹시 죽지는 않았을까, 오늘은 살아 돌아왔지만 내일은 영영 볼 수 없으면 어쩌지. 믿음이 낳은 불신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엘리는 경훈에게 최고의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잠시 동안 미쳐 있었던 건 그저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의 감정이 복합 돼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진정한 엄마 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또다시 불안감을 낳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진행하고 있는 일이 너무 방대한 범위의 일이어서, 경훈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그 속에서 경훈은 나날이 작아져만 갔다. 이제 믿을 사람은 누구도 없다. 불안감이 낳은 외로움이었다.
엘리가 무얼 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회사원도 아니었으며 선생도 아니었다. 연구원도 아니었으며 군인도 아니었다. 어떠한 직업도 갖고 있지 않은 그녀인데, 하는 일은 무척이나 많았다. 의심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이제 2차 성인기를 앞두고 있는 경훈에게 엄마라는 존재의 크기는 상당히 컸다. 엄마를 찾아야 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경훈은 그저 문 밖에 있는 모든 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몸은 점점 아파 왔고, 그 징조는 일종의 신호로서 성인기가 찾아온다는 거였다. 얘기를 들은 바로는 '사냥'이 주된 목표라는데, 정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탓에 모든 게 그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을 감시하라는 경호원들을 간신히 말린 경훈은 천천히 잔디 위에 놓인 돌을 밟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모든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대문 밖에 바로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 탄 그가 운전기사를 향해 물었다.
우리 엄마 어디 있어요? 어린 아이의 순수한 물음은 쉽게 거절하지 못 하는 성향이 다들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한 경훈이 속으로 미친 듯이 웃어대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에 담아낸 경훈이 감탄사를 금치 못 했다. 사진과 직접 보는 건 차이가 꽤 컸다. 실물이 더 낫다. 입술을 삐죽이며 좀 더 자세하게 보고 싶은 마음에 창문을 내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창문이 올라가고 그대로 경훈은 팔이 껴버리고 말았다. 압박해서 올라가는 유리창 탓에 유리는 연한 살을 뚫고 들어갔고 결국은 붉은 피가 시트를 적셨다. 하지만 아프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뭔가에 막힌 듯 올라가지 않는 창문에 고개를 돌린 기사만이 깜짝 놀라 차를 세워버리고 말았다. 뒤에서는 클락션이 울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흐르던 피는 경훈의 옷자락을 적셔왔고 그제야 문제점을 발견한 그가 깜짝 놀라 창문을 내렸다. 뱀파이어들은 회복력이 좋다. 하지만 당장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이 상태로 엘리에게 간다면 무조건 꾸짖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차 돌려주세요. 집으로 가죠. 집에는 전용 주치의가 있었으니 이 상처도 금방 나을테고 엄마도 끝까지 모르겠지. 그때는 몰랐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정말 모든 능력치가 월등할 줄은.
"도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팔이 이 모양이 된 거야?"
"왜? 멀쩡하잖아. 헛것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네 눈에는 이게 그저 헛것으로 보이니?"
상처는 분명 지워졌다. 흉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가 손가락을 몇 번 튕기자 사라졌던 흉터들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경훈은 심각하게 눈을 찌푸려대었다. 아프다고, 아파! 어린 아이답게 그녀의 팔을 찰싹 때리며 능력 발휘가 그치기를 바라던 경훈은 서서히 사라지는 흉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이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자신이 혼나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경훈은 엘리에게 물었다. 엄마. 이런 건 어떻게 한 거야? 나한테도 알려줘.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능력은 모두가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의료 쪽을 건드린다는 게, 기능치 면에서는 최고로 좋았지만 좋은 만큼 안 좋은 점이 훨씬 컸다. 그래서 배우고 싶다면 사정을 해서 절대 배우지 않기를 권장하는 능력이었다. 왜냐하면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제 수명이 깎이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사용을 한다면 크게 소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뭔가 칼을 들고 실을 들어야 할 때 그때 능력을 발휘한다면 능력치는 두 배, 세 배 혹은 더 감소되고 만다. 능력이 좋은 만큼 수명이라는 가장 무거운 게 걸려 있어 능력을 쓰는 방법을 알아도, 쉽게 사용하지 못 하는 능력이었다. 그건 비밀. 알려준다 하더라도 넌 너무 어려. 엘리는 못을 박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경훈은 2차 성인기를 맞았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아직도 밖을 두려워하던 경훈에 눈에 밟힌 것은 다름 아닌 엘리의 방이었다. 수많은 비밀이 잠들어 있는 곳. 경훈은 호기심이 차올랐다. 엘리는 예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심지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잦았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은 매우 심심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통해 세상 정세를 파악하는데 바빴다. 문명의 발달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었다. 네 개의 나라 중 가장 발달이 빨리 된 나라는 노블이었으며 이제 근대시대로의 출항을 앞두고 있는 중세시대 막바지였다.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집은 시내로 나가려면 한참을 이동해야 하는 곳에 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유일한 정보통은 신문이었는데 요새는 많이 검열돼서 나오기 일쑤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바깥의 세상'에 대한 불안감은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아무튼 엘리의 방에 발을 들인 건 성인기 주기가 끝이 나고 몇 년 뒤부터 였다ㅡ수면욕이 상당히 강한 뱀파이어는 한 번 잠에 들기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일주일은 넘게 잠을 잤다. 거기에 대해서는 경훈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최고 기록은 세 달이다. 뱀파이어의 시간은 빨리 갔다. 하지만 경훈은 그 속에 적응하지 못 했다. 어쨌든 엘리의 방의 문고리를 잡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경훈이 마침내 문을 열었을 때는 확 들어차는 여성의 향기에 코를 막았다. 남자의 표현을 빌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지독하고 지독했다. 아름답고 예뻐야 마땅한 방 안을 표현해낼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경훈은 그 날 이후로 향기가 계속해서 코끝에 머물어 있어, 한동안 그녀의 방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차라리 잠을 자자는 생각을 해내고 결국 그는 한 달 내내 잠만 잤다. 어린 아이의 인내심은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방의 문을 열었을 때는 몸이 성숙해진 만큼 정신도 단단해졌다. 나름 괜찮은데 왜 그때는 버티지 못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뱀파이어는 외관으로의 성장이 빨랐다. 벌써 성인 남성의 키를 내다보고 있는 경훈은 어느새 제 몸에 딱 맞는 셔츠를 입을 나이가 되었다. 아직 성인기는 다 끝나지 않았지만 성장한 신체가 말해주고 있었다. 가끔 집에 들어오는 엘리도 많이 변한 경훈의 모습에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많이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처음 경훈은 그녀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놓치는 게 있을까봐 아주 사소한 것까지 둘러보았다. 평소에 붉은색을 좋아하는 엘리는 방 안을 흰색과 붉은색으로 조화를 만들어냈다. 정신 병원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 공간에 붉은색의 가구들로 예상치 못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옷장을 열어본 경훈은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는 옷들을 보며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엄마라면 이런 공간에 인간의 머리 같은 걸 숨겨 놓을 줄 알았는데. 청소년기의 청소년답게 발상은 신선했다.
뱀파이어들은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진다.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기를 끝마칠 때까지를 청소년기로 나누고, 이후부터 400년까지는 청년기라고 부르며 인간과 비교했을 때 갓 스물을 넘은 후부터 대부분 직장을 갖기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또 600년까지는 성년기라고 부르며 인간의 결혼 적령기를 말한다.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이 시기를 통해 번식을 하게 되며, 다른 말로는 번식기라고도 한다. 성년기와 성인기는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해 성년기는 번식이 증진되는 시기이며 성인기는 청년이 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며 성인식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후 800년까지는 중년기이며, 인간도 그렇듯이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시기와 동일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는 장년기로 구분된다. 시기에 따른 뱀파이어의 외관 상 변화는 크게 없다. 불멸의 종족인 만큼, 외관에서도 변화는 크게 없지만 장년기에서 자연사를 앞두고 있을 경우 피부가 심하게 곪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자연사를 한 뱀파이어는 없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유는 자신의 얼굴이 망가지는 게 보기 두렵고, 무서워서 스스로가 다른 뱀파이어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하기 때문에 자연사는 드물다고 한다.
신선한 사실이었다. 베개 밑에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한 경훈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빛냈다. 엘리의 글씨체가 단연 돋보였다. 장수는 꽤 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게 적힌 건 제일 첫 장인 듯 보였다. 내용을 보아하니, 뱀파이어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엄마가 왜 이런 걸 적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 궁금증이 하나 더 피어올랐다. 대충 원래 있던 자리에 종이를 두고 화려한 장식이 붙어 있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경훈이 더이상 이곳엔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걸 장담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구는 침대와 옷장, 화장대가 전부였다. 여기를 더 둘러볼 바에야 서재로 당장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방에서 나오면서 제 냄새를 지우는데 성공한 경훈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대문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엄마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거실로 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엄마가 눈치 채지 않기를 빈다.
"오랜만이네. 아들, 그동안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너무 심심해서 잠만 오랫동안 자는 거 빼고는 말이야."
"어떻게, 친구라도 하나 붙여줄까? 이 넓은 집에서 아들 혼자는 너무 심심할 것 같아."
"그걸 이제 알면 어떡해?"
내심 좋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오묘하고 복잡한 표정을 숨기려 팔로 얼굴을 가린 경훈이 입 안쪽 살을 살짝 깨물었다. 최대한 어린 아이를 데려와 달라고 해볼까. 나이가 어릴수록 지능은 어려진다. 즉 다루기 쉽다. 뱀파이어는 여성보다 남성이 능력치가 훨씬 월등했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우세한 면도 있었다. 일반 뱀파이어 보다는 코모시 친족이, 친족보다는 혈족이 더 월등했으며 우수했다. 그럼 경훈은 친구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보다 우세하게 된다. 기억을 지우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완벽한 일처리를 위해 시간을 늦추는 것도 필요하겠지. 씻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엘리를 확인한 경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아직은 혼자 있는 게, 그래도 좋아요. 혼자가 익숙해져서. 오랜만에 엄마 오셨으니까 제가 밥해드릴게요. 엘리를 따라 일어난 경훈이 자연스레 주방으로 걸음을 뗐다.
나름 경훈의 애교가 통한 걸까. 엘리는 네게 맞는 인물을 데리고 오겠다며 시간이 좀 걸릴 것을 일러두었고, 경훈은 안심을 했다. 언제 온다는 기약은 없이 다시 집을 나선 엘리의 뒤로 경훈은 그녀의 서재로 향했다. 색채 대비가 확연했던 방과는 다르게 지금 시대에 맞게 꾸며진 서재는 간간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방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은 빈 곳이 많았다. 확실히 제본 기술이 아직은 왕성하지 않을 때라 책이 얼마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럼 책장은 볼 게 없을 거고, 그 전에 이 근처였던가. 비밀 공간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피가 이쯤에서 흘렀는데. 아리송했지만 충격이 큰 기억은 오래 남기 마련이다. 잘 정렬된 책장 사이로 작게 튀어나온 책장을 옆으로 밀어본 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확신을 할 순 없었지만 촉이라는 게 있었고 그 촉은 결국 정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꼼짝도 않는 책장은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뭔가 있다. 뭔가가…있다.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제 자신이 허무했다. 순간 풀린 다리에 바닥에 주저앉은 경훈이 허탈한 듯 웃었다. 이게 뭐야. 결국 능력 부족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경훈은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못 했다. 한 달 간격으로 집에 찾아온 엄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경훈에 모습에 걱정이 돼서 방문을 두드렸고 모습을 드러낸 경훈은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이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다. 능력치가 한계에 다다르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경훈의 팔을 잡아당긴 엘리는 뼈밖에 잡히지 않는 팔목에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능력을 다 써버린 거지. 엘리는 의심이 갔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우선은 그에게 뭐라고 먹어야 했다. 아무런 의욕도 없는 그를 끌고 나온 엘리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했고 먹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말랐어, 그동안 뭘 했니. 그녀의 물음에도 숟가락만 열심히 움직이던 경훈이 세 그릇 정도 더 먹고 나서야 물을 들이켰다. 더불어 싱싱한 인간의 피까지 마셨다. 사냥을 하고 왔는지 엘리의 몸에서 인간의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왔더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아들, 요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그냥. 코모시인데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아서. 연습 좀 했어. 그리고 밖에도 좀 나가 보려고."
"그런 건 안 해도 돼.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그래? 엄마가 아들 친구 찾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서재의 비밀 공간은 실패다. 그렇다면 미처 보지 못 했던 책상이 하나 있긴 있었는데. 조금씩 얼굴에 살이 붙는 걸 확인한 엘리가 경훈의 볼을 손에 쥐었다. 기억해둬. 뱀파이어는 능력을 과하게 사용해도 죽어. 그러니까 절대 다시는 그러지마. 내 유일한 희망은 너야, 레이. 힘을 많이 준 탓에 실핏줄이 터져 흉한 눈을 마주하던 경훈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엄마에게 남은 건 나 하나뿐이라는 걸. 아버지도 자기 손으로 죽인 마당에, 아들까지 사라져 버리면 분명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목을 매는 이유도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거니까. 능력이 회복되기 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 기간 동안 휴가를 내겠다며 밖을 나가지 않는 엘리의 모습에 조급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끽하는 부모의 정(情)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살기(殺氣)는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꿈같았던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더 있고 싶었지만 일에 차질이 생긴다며 집을 나선 엘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경훈이 젖어있던 추억에서 나왔다. 현실을 마주할 때가 됐다. 아마 누군가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읽히는 능력을 지닌 건 경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역대 뱀파이어의 역사에서도. 엘리가 마지막으로 등을 보일 때, 느껴졌던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어떤 것에 대한 분노일까.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요한 일상에서 그녀에게 분노가 느껴질 만한 일은 없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그녀의 서재에 들어간 경훈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고 있는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거친 책상 위에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외엔 깨끗할 뿐이었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액자를 세운 경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를 쓸어 내렸다. 무슨 사진이지.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고민은 고민의 꼬리를 물었다. 그 결과 경훈은 능력을 써보기로 했다. 어떤 물건을 통해 그 물건을 사용했던 사람이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 형상화 되어 눈 앞에 보여지는 그런 능력을 말이다. 처음에는 몇 번 실패했었지만,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성공을 했다. 이번에도 됐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지만, 엘리의 능력을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눈앞에 보이는 선명한 감정과 추억에 잠시 눈을 감았다.
- 엄마는 아빠를 사랑해?
- 응. 엄마는 아빠랑 레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 나도 엄마랑 아빠가 제일 좋아.
- 당신, 나를 그렇게 좋아했던 거야?
- 그럼 당신은 아니에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둠 속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일말의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액자를 다시 덮은 경훈은 눈꼬리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환상에 비춰진 우리는 찬란했다. 책상 서랍을 차례대로 연 경훈이 중세 시대의 느낌이 가장 잘 담겨 있는 노트를 꺼내 들었다. 표지를 넘기자 'SECRET'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엘리의 방에서 본 종이 뭉치가 떠올랐다. 무심하게 넘어갔던 마지막 부분에 적혀있던 문구가 번뜩 떠올랐다. 비밀. 이쯤되니 수상한 행동의 증거가 많이 보이는 엘리가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이 사람을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떠오르는 건 그저 의심밖에 없었다. 한장, 한장 넘어갈 때마다 보이는 낙서와 그 외 정보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다가 어딘가 중심을 벗어난 내용을 발견해냈다.
· 특정한 인간에게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 인간은 약하다.
· 인간은 지배자가 될 수 없다.
·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 / 뱀파이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해하려고 했다. 모든 말의 뜻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 했다. 결국 그는 오늘도 엘리를 이해하지 못 했다. 혹시라도 생길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종이에 써진 내용들을 전부 머릿속에 담은 경훈이 자물쇠를 걸었다. 이 내용은 오직 나만 아는 내용이 됐다. 경훈은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방에서 빠져나온 경훈은 항상 눕는 그 소파에 다시 누웠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며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에게 엄마는 아직도 이해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언제가 되면 이해가 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미궁 속에 있었다.
/H/
새들도 눈을 뜨지 않은 새벽, 현민은 캐리어를 현관에 두고 동민의 방을 찾았다. 방문을 노크하는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자고 있지는 않을까, 자고 있다면 어떡하지. 초조해서 손톱을 깨물던 것도 잠시 안에서는 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오늘은 노블로의 출국을 하는 날이었으며 어머니의 기일인 날이기도 했다. 혼자서 준비를 하고 있을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급해진 현민은 그저 빨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고리를 돌려 고개만 빼꼼 내민 현민은 쉽게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어깨를 틈 사이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난 동민이 손에 쥐고 있던 편지와 봉투를 건넸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현민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고요한 이 시간, 동민은 졸음을 꾹 참고 어서 가라는 손짓을 건넸다. 간신히 동민에게 물건을 전달받은 현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둠 속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박히고, 그는 알았다며 문을 어서 닫기를 권했다.
편지와 봉투는 누가 봐도 아버지를 위한 것들이었다. 동민이 형 글씨 진짜 못 쓰는데. 읽어 드려야겠다. 잠시 동안 떠나있어야 하는 집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 현민이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노블이었으며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또한 어머니였다. 벌써부터 울컥거렸다. 매일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어서 매우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공항 안으로 갔을 때는 한적한 공간에 마음을 놓았다. 사람이 많은 건 굉장히 불안했다. 일종의 공포증이랄까. 현민은 사람이 무서웠다. 단지 그거뿐이었다. 아무튼 노블로 향하는 비행기를 예매한 현민은 짐을 맡기고 대기 의자에 앉았다. 새벽 5시. 모든 건 평온했다.
동민에게 문자를 보내놓고 비행기에 올라 타 잠시 눈을 감은 현민은 오래 걸리는 게 아닌 걸 알지만 쌓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다. 명색이 뱀파이어 헌터인데, 그동안의 실적이 없어 정부에 요구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됐던 터라 증거와 단서를 조합해내는 지금이 최고로 바빴으며 기분이 좋았다. 일할 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바쁜 일상이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라 신이 났다. 하지만 그에 따른 피곤함은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떠보려고 노력한 현민은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약 한 시간에 걸쳐 도착한 노블은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많이 변해 있었다. 세상 참 빠르게 돌아가는 구만. 스무 살 답지 않은 한탄은 제법 웃겼다. 핸드폰으로 아버지 댁의 주소를 입력해서 나온 노선으로 발을 옮기던 현민은 눈 앞에 바로 오는 버스에 올라 탔다. 대중 교통을 앞으로 몇 번 더 이용해야 간신히 아버지의 댁이 나왔다. 하지만 그 전에 꽃이라도 사갈까 하는 마음에 첫 번째 경유지에서 내린 현민이 근처 보이는 꽃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네고 꽃들을 살펴보던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나같이 다 예쁘다.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구경하게 되는 모습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해하는지 멀리서 지켜보던 주인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 죄송해요. 혹시 백국…있을까요? 백국이라 하면 흰 국화 꽃이었다.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걸. 하지만 보통 그 사람이 좋아하는 꽃을 많이 들고 가던데, 정석의 꽃을 들고 가려는 모습이 신기했다. 몇 송이 드릴까요? 자꾸만 내려오는 안경을 추켜 올린 주인이 그의 옆에 다가섰다. 한 다발로 주세요.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신 터라, 이렇다고 내놓을 만한 추억이 없었다. 엄마가 무슨 꽃을 좋아했더라. 떠올려봤자 기억 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은 포장에 들어갔고 가만히 다른 꽃을 살펴보던 현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아들이 이렇게 멍청하네. 벌써부터 울면 안 되는데. 애써 눈물을 참았다.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주인은 예쁘게 포장이 되었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꽃을 건네면서 말했다. 좋은 곳에 계실 거예요, 분명.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작은 위로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현민은 기뻤다. 예쁘게 입 꼬리를 올려 웃은 그가 천천히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 일어섰다. 돈을 지불하러 주인을 따라가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딸랑.
훤칠한 키에 흰 셔츠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맨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현민이 눈썹을 찡그렸다. 잿빛의 머리가 눈에 띄었다. 더불어 노란 눈동자가 이목을 끌기에 쉬웠다. 어디서 봤더라. 타국에서는 용기가 많다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으려던 현민이 그만 들고 있던 꽃다발을 놓쳐버렸고 동시에 그걸 밟은 남자가 깜짝 놀라 걸음을 내딛었다 뒤로 뺐다. 얼마나 힘이 센 건지 꽃은 이미 밟혀버려 생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버린 일이라 아무런 말도 뱉을 수 없었던 현민은 그저 바닥에서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을 조심히 손에 그러쥐었다. 놀란 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주인이 달려와 바닥을 치울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못 했다. 네 나라가 화폐를 통일한 게 아니어서 환산한 돈은 정말 얼마 없었다. 게다가 네 나라 중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가 노블이어서, 돈에 관한 거라면 현민은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였다. 게다가 꽃을 다시 사야 했고 망가뜨린 것에 대해 물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는 돈은 굉장히 적은 돈이었다. 난감했다. 조금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본 현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뭐라고 따지려던 그를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남자였다. 남자가 선수를 쳤다. 현민은 기가 차, 감정을 섞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의를 살피지 못 한 불찰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무슨 꽃 사셔야 됩니까?"
"……아, 괜찮아요."
"아닙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꽃을 사셔야 합니까?"
좋은 기회였고 좋은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처음이라 그저 어색할 뿐이었다. 계속되는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 꽃의 이름을 토해낸 현민이 이상하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피부가 창백한데, 너무 예민해서 헛것이 보이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그는 이어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백국…백국이라 하면 추모할 때 건네는 꽃이 아닌가요?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오고 가는 말은 상당히 격식이 차려져 있었으며 묘하게 긴장감을 조성해 왔다. 그런 둘 사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주인은 그저 자신이 끼어들 순간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어서인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쁜 분이셨다는 건 확실하게 기억이 나네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뭔가 익숙한 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걱정도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거겠지.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현민을 향해 말했다.
"백국도 좋지만, 저는 꽃말이 인상 깊은 물망초를 추천해요. 백국에 물망초를 섞어 넣으면 예쁠 것 같습니다."
"물망초요? 제가 꽃말을 몰라서 그러는데, 뭔가요?"
"'나를 잊지 마세요' 예요. 그쪽이 어머니께 전해드리는 말도 될 거고, 반대로 어머니가 그쪽에게 하고 싶은 말도 되겠죠."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말이었다. 적어도 현민에게는. 남자가 말한대로 꽃을 달라고 주인에게 말을 건넨 현민이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손을 건네 악수를 요청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좋은 꽃말 알아가요.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묘하게 실려있는 것 같아 보고 있던 주인은 그저 온 몸이 떨릴 뿐이었다. 단정지을 수도 없이 오묘한 신경전은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싱싱해서 예쁜 꽃다발을 다시 건네받은 현민의 뒤로 계산을 하던 남자는 비록 제가 샀어야 할 꽃은 사지 못 했지만 나름 홀가분한 마음으로 꽃집을 나섰다. 근데 왜 빈손이세요? 꽃 사러 오셨던 거 아니셨어요? 아까부터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왜 내 것만 사주고 자기 거는 안 살까.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 발동이 되어 물어본 거였다. 그쪽 거 사느라 돈을 다 써서. 사실 돈은 있었다. 하지만 왠지 현민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남자는 대충 둘러대며 잠시 얘기를 할 것을 권했다. 그쪽이 사주신다면 얘기야 몇 백번이든 더 하죠. 그런 능청스러움은 현민도 남자 못지 않았다.
근처 카페로 들어간 두 사람은 각자 취향대로 주문을 시켰고 결국 계산은 또 남자가 했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휘말린 기분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저 얻어먹는 것에 기분이 좋았던 현민은 해맑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차마 그 모습에 악한 말을 건네지 못 하겠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하지 못 했던 말인데,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줄은 몰랐네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시도한 현민에게 집중된 하나의 시선은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적당했다. 음료 위에 올려져 있던 휘핑크림을 먹으면서 시간을 끌던 현민을 이해한 남자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공감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리븐에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음…계속 하세요."
"연구원이셨어요. 프리븐 최대 연구소의 연구원. 꽤 높은 직위를 갖고 계셨던 걸로 기억해요."
기억이 나는 거라고는 정말 엄마의 웃는 모습 밖에 없었던 현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정말 기억하는 게 없어요. 전부 아버지께 전해들은 이야기거든요. 정말 그랬다. 너무 어려서, 또 충격이 커서. 현민은 모든 걸 잃었다. 엄마는 출장을 갔는데, 그 날 이후로 만날 수 없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단체로 실종이 된 거더라고요. 엄마가 오지 않은 날들 저는 계속 울기만 하다 결국 병원에 갔다고 해요. 탈진이랬나. 이후에 뉴스가 나왔는데…그 뉴스가 엄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뱀파이어니 뭐니, 얘기가 나왔는데 솔직히 그때는 아무것도 안 들렸거든요. 초자연 현상이 어떻게 실존을 하는가도 궁금했었고 안 믿었었죠. 하나 제일 억울한 건, 아직도 우리 엄마 사라진 사건이 그저 단체 동반 자살로 위장 됐다는 거예요. 분명 타살이 확실한데 말이죠. 모든 걸 털어놓는 현민의 눈빛은 슬펐다.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남자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경훈의 핸드폰이 울리고 나서야 대화를 잠시 멈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공감을 못 했을 이야기에 반응을 하는 남자가 현민은 신기했다. 혹시, 정말 확률이 적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네요. 아,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전화번호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죠.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경훈이에요. 그쪽은?"
"오현민입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에요."
"……스물여덟이에요. 나중에 연락 할게요. 언제 한 번 밥 한 번 같이 먹어요. 저 내일 프리븐 가거든요."
정말요? 와, 그럼 그때 봬요. 안녕히 가세요. 좋은 인연이라 생각했다. 딱히 자신에게 있어서 악(亞)의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현민이었다. 먼저 등을 보이고 가는 경훈을 향해 손을 흔든 현민은 아버지 댁으로 가기 위한 버스에 올랐다. 두세 번의 경유지를 거처 도착한 곳에는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혀 왔다. 아버지, 저 왔어요. 반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벌써 유골함에 다녀오신 건지 집 안에서는 제사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오늘 일찍 다녀오셨나 보네요. 뭐 좀 하느라 좀 늦었어요. 내년에는 같이 가요. 아버지는 무뚝뚝했다. 어서 손부터 닦고 오라며 손짓을 하는 아버지를 보다가 이내 웃음을 지은 현민이 거울 속에 비춰지는 제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벌써 점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경훈과 보낸 시간이 꽤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핸드폰에 이미 와 있는 여러 개의 문자를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화장실에서 나와 식탁으로 다가간 현민이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나바로 씨. 오늘의 날씨는 비가 오시는 가요, 햇빛이 쨍쨍하신 가요?"
"그 중간이다, 이 놈아."
"오랜만에 본 로아 씨의 모습은 어떠셨나요."
예뻤다. 됐냐?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대답을 한 아버지가 결국 웃음을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웃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해준 밥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써 눈가를 꾹꾹 눌러가며 울음을 참던 현민이 설거지를 마치고 허리를 숙였다. 요즘 일이 바빠서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아요. 엄마 찾아뵙고 바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다음에 휴가 때 꼭 여기로 올게요. 그땐 제가 밥 차려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아버지. 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늙은 아버지의 모습에 입술을 깨문 현민이 집을 나섰다. 마지막 행선지였다. 그는 익숙한 곳에서 버스를 탔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무거웠으며 간절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 됐으며 억울함은 쉽게 풀지 못 했다. 그저 타살이라는 추측만을 남긴 채 어머니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한 것 같아 죄책감이 항상 가득했다. 너무 어렸던 탓일까. 버스에서 내리는 발걸음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유골함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착잡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제게 다가온 현실은 너무 비극이었으며 아팠다. 비록 어릴 적이라고 해도 그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은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금방 다녀가신 유골함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어릴 적 찍은 사진과 현민이 마지막으로 노블에 있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프리븐으로 떠난 이후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안에 들어 있었다. 모든 걸 꺼내서 추억을 회상하던 현민의 손에 잡힌 건 낯선 종이였다. 초대장 같이 생긴 외관이 궁금증과 불안감을 더해주었다. 검은색의 종이를 꺼낸 그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종이를 펼치기도 전에 좋지 않은 내용이라는 걸 직감한 현민이 입술을 깨물며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길게 써져 있을 거라던 예상과는 다르게 글씨는 간결했으며 강렬했다.
「 R E T U R N 」
되돌아 오다…. 머릿 속에는 오로지 리턴, 두 글자가 지배를 해왔다. 현민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 상황에 눈을 감았다. 불길함이 온 몸을 감싸왔다.
/V/
대저택의 금요일은 한산했다. 또한 다양한 유형의 뱀파이어들이 소란스러움을 더해주었다. 새벽까지 재미를 즐기다 이제 잠에 들거나 이제 일어나거나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오랜만에 이곳을 직접 찾아온 인간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 그들은 밤새 파티를 벌였고 그 탓에 이제 잠에 드는 상민이나 수진, 경란, 연승이 있었다. 어린 애들은 빠지라며 나이 먹은 사람들 기(氣) 충전해야 한다고 먼저 잘 것을 권한 탓도 있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게 된 창엽은 4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서 1층으로 공간을 이동해 경훈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 일찍 깨어달라더니,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귀찮지만 문을 연 그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경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갔지. 분명 지금은 10시인데, 경훈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외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훈의 서재에도 가보고 골방에도 가봤다. 또 거실과 서재를 왔다갔다 거리며 그를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라는 가설이 맞아 떨어졌다. 확실히 요즘 들어 경훈은 이상해졌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창엽도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래서 군주가 될 수 있겠어. 한숨이 나왔다. 어서 빨리 정신을 되찾기를 바랐다. 창엽은 그 책에 눈독을 들인 이상 읽어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결국 'VAMPIRE' 책을 갖고 방으로 들어가 첫 장을 넘겼다. 주인을 잃은 책은 새로운 주인에게서 재탄생 된다. 먼지가 쌓인 책의 표지를 유심히 살피던 그는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Vladi Blooad (블라디 블라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익숙한 이름인 건 맞았다. 불길했다. 하지만 결코 잡은 책은 쉽게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 했다. 창엽은 첫 장을 넘겼다.
때로는 그가 이 집안에 없는 게 기회가 될 때도 있었다. 실패를 거듭했던 정문은 고요한 집 안을 살피다 다시 동물로 변신했다. 이번엔 고양이로 변신을 해, 최대한 발소리를 줄여야 했다. 복도를 조심히 걸어 계단을 올라간 정문은 경훈의 서재에 들어가는 순간 발자국을 지워냈다. 그리고 다시 그 원형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책장을 밀었고 그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혀를 빼내었다. 나이스. 기분이 좋았다. 한 편, 왠지 모를 촉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상민이 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밀을 좋아하는 그인지라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투명인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한 층 올라가 물을 마시던 상민은 아무도 안 나왔나 하는 심정으로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경훈의 서재로 들어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웬 고양이지. 피를 주식으로 먹고 사는 이곳에 동물이 들어올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능력의 관할이라는 건데.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최정문이었다. 마시던 물이 아직 남아 있는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상민은 서재로 들어간 정문이 어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쩌면 타이밍도 그렇게 잘 맞는지. 상민이 컵을 놓으러 몸을 돌린 사이 자취를 감춘 정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문소리가 그녀의 행방을 말해주었다.
몸을 감춘 상태로 정문이 들어갔다 나온, 경훈의 서재로 들어간 상민이 능력을 멈췄다. 원래대로 돌아온 몸을 확인하는 것도 잠시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확신을 내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정문이 여기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모든 책은 서재에 있었으며 굳이 경훈의 서재에 들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책들은 많았다. 근데 굳이 여기에 들어왔다는 건, 또한 능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이곳에 들어왔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라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을 들어보기도 하고, 책장 사이에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책상을 뒤져보기도 한 상민은 도무지 나오지 않는 어떠한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이 차올랐다.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해보려던 사이 방문을 연 누군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이 방의 주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경훈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가슴에 손을 얹은 상민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뭐, 그냥. 찾는 책이 좀 있어서. 서재에 갔더니 둘 다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 좀 와봤어. 있을까 싶어서. 둘러대는 데에는 세계 최강일 것이다. 상민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경훈이 속아서 넘어가주길 바랐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경훈은 다른 건 다 상관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연회가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추궁이 시작되었다.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다짜고짜 묻는 경훈에 능청스럽게 상황을 무마 시키려던 상민은 단호한 그의 표정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연회가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냐구요.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빠져나가지 못 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아니, 그냥. 어디서 들은 거야, 그거. 버벅 거리는 말투에 이미 한 번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민은 이대로 밀고 가야겠다고 느꼈으며 대충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정말 어디서 들은 거야. 나는 몰라 그런 거. 연회니, 뭐니."
"……형 지금 발뺌하시는 거예요?"
큰일 났다. 경훈의 눈동자 색이 점점 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숨을 가득 참으며 애써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이 오싹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알았냐구요, 그걸. 상민은 코모시의 혈족도, 친족도 아니었으며 고작 나이가 많다는 거 하나로 경훈에게 대적하고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월등한 그의 앞에서 상민은 그저 궁지의 몰린 한 마리의 쥐일 뿐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각성 되겠어. 결국 한숨을 내쉰 상민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책에서 봤어. 책에서. 어쩌면 너한테도 소중하고, 나한테도 소중한 책에서. 됐지. 살기 (殺氣)에 더이상 못 버티겠다. 상민은 보폭을 크게 해서 서재를 빠져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오랜만에 책이나 볼까.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였지만 그가 말하는 그 책은 상민이 보는 유일한 책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경훈의 서재 바로 옆에 있는 제 방으로 들어간 그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답답했다, 이 모든 상황이. 경훈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꽃집에서 꽃을 사길 포기한 경훈은 현민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자마자 집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 달콤한 냄새에 머리가 아찔 거렸다. 며칠 전, 마트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동일한 냄새였다. 그 향이 이미 중독 된 경훈은 쉽게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 사람이었다. 결국 현민이었다. 결국…인간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가는 길에 꽃 집 보이면 잠시 세워주세요. 결국 그렇게 됐다. 경훈은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일이 연회라는 것밖에는. 그리고 현민과 다시 만난 다는 생각과 또다시 그 향기를 마음에 담아야 한다는 것밖에. 경훈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은 그러했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잠시 멈췄고 내일 연회에 가져갈 꽃다발을 구입한 경훈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도착하면 깨워줘. 상당히 도시 외곽 깊숙이 있는 집까지 가는데 시간인 꽤 걸렸다. 복잡한 생각을 조금 정리해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꽃병에 꽃을 꽂는 거였다. 비록 내일이면 자리가 다시 빌 꽃병이었지만 오랜만에 꽃이 있는 모습은 꽃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감상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서재로 가려고 걸음을 돌렸을 때는 이상한 낌새가 머릿속에서 경보를 울렸다.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속도를 올린 경훈은 서재의 문을 열었고 예상대로 상민이 있었다. 추궁을 통해 얻은 답변은 두 번째 경보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책. 경훈에게 있어서 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위험을 주기에 충분했다. 순간 엘리가 쓴 책이 떠올랐다. 경훈은 마음이 급해졌다. 비밀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경훈은 빠르게 서랍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책을 찾기 시작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경훈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W/
오늘 최고치 분량인듯 하네요 (ㄷㄷ;)
그럴 수밖에..콘티를 짜놨는데 그거에 맞게 하려다 보니까 한글로 10포인트 했을 때 13페이지가 나왔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은 글이어서 소장본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다섯 편밖에 안 됐으면서 62페이지나 나오고 말았어요..
원래 목표치를 한참 넘은...
오늘 이거 올리고 잔다고 아직도 뜬 눈이네요.
드디어 경훈이랑 현민이랑 만났어요! 세상에! 어머나! 그리고 맨 위에 부분은 과거고, H는 드디어 나타났네요.
뱀파이어 헌터의 약자, H였습니다.
나름 복선을 깔아 놓긴 했는데 완벽했으면 좋겠고, 앞으로 남은 뱀파이어도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찌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내 사랑 찌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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