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에 피바람이 불어왔다. 궁에는 늘 전장의 소리만이 가득했고 백성들은 더 이상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길거리에 나가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할까 매일 걱정을 하며 문을 틀어 잠그고 또 잠갔다. 벌써 두 번째 왕이 승하했다. 독살, 사람들 입에서 조용히 오르내리는 단어가 혹여 지금 왕의 귀에 들어가면 또 큰 피바람이 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길기만 하던 하루가 가장 조용해지는 날, 달빛이 내려앉았다. 백아가 조심스레 궁을 빠져나와 늘 혼자 머물렀던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나무의 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쓸쓸한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홀로 매달려 있었다. 후, 작은 한숨을 뱉다가 자리에 앉아 가만히 달빛을 바라보던 백아가 품 안에 있던 오늘도 전하지 못한 머리꽂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나비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달빛에 반짝이다 백아의 손안에서 빛을 감췄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아의 뺨을 훑고 지나간 바람이 저 멀리 사라지고 천천히 예전의 추억들이 백아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황자가 그리 힘이 없어서야 되겠어?'
그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머리꽂이를 쥐고 있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생각이 났다. 생각하지 않아야지 하는 거조차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힘이 없어서, 그래서 자신은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연모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손으로 구하고 싶은 이가 자신의 손으로 인해 더 밀려났다는 걸 알면서 모른 척했다. 바들바들 떨려오는 입술에 백아가 아랫입술 감춰 물었다. 다시 눈을 뜬 시야에 또다시 쓸쓸한 달빛이 걸렸다. 언제까지 자신은 이리 힘없는 사람으로 남아야 하는지, 언제까지 자신은 제가 연모하는 이들을 다 보내야 하는지 자꾸만 겁이 나고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했다.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자꾸만 섞여서 그래서 더 많이 힘들었다. 내일이면, 정말 모두 보내주어야 한다. 내일이면, 다시는 누이라고 부르지도 또, 다시는 혼자 찾아가 같이 차를 나누지도 못하겠지. 내일이면, 황제의 사람이 될 테니까. 온몸의 힘이 풀렸다. 손에 쥐여진 머리꽂이가 애처롭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선을 내려 머리꽂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백아가 다시 손을 뻗어 머리꽂이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마지막이 된다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과, 도망가지 않겠냐고.

"숨어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이리 나오너라."
연화의 말에 책장 사이로 숨어들었던 그림자가 천천히 연화의 앞에 다가와 섰다. 연화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리다 곧 웃음을 띤 얼굴을 되찾았다. "그래,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로..." 연화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 아니 백아가 연화의 손목을 잡았다. 말없이 연화를 끌어 방을 나선 백아가 급하게 걸음을 옮겨 후원으로 향했다. "백아, 백아 이거 놓거라." 뒤에서 들려오는 연화의 말에도 그저 묵묵히 앞서 나가던 백아가 다시 한 번 불리는 제 이름에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연화를 돌아보고 선 백아가 손목을 힘없이 놓자 제 손목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린 연화가 백아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도 백아는 그저 연화의 눈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들려오는 질문에도 한참을 연화를 바라보던 백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말을 뱉었다. "나랑, 도망가요 누이." 바람 소리가 조용한 연화와 백아의 사이를 시끄럽게 만들고 사라졌다. 놀란 듯 백아를 바라보던 연화가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왜, 그래야 하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연화와 마주한 백아의 눈꼬리 끝이 붉게 물들었다. 떨려오는 손을 애써 숨기려 주먹을 쥐어도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 했다.

"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시잖아요, 형님은 누이를 그저 이용하려고 한다는 거."
"그런데, 그 이유로 내가 너와 떠나야 하는 거야?"
"...누이, 저는 압니다. 누이께서 무슨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누이께서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저는."
"아니. 백아, 너는 몰라."
"..."
"예전의 내가 했던 말들은, 우리가 어렸으니까. 그때는 세상을 몰랐으니까 그래서 내가 네게 말했던 것이다."
"...누이."
"더 이상, 너와 나는 같을 수 없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다시 어깨를 짓누르는 정적이 가득했다. 말을 잃은 백아는 그저 입술을 물고 연화를 바라봤고 연화는 그런 백아와 시선을 맞추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이런 무례한 행동은 없었으면 해, 백아."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서는 연화의 뒤로 뻗어졌던 백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떨어지는 눈물이 옷자락을 적셔와도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멈춰 서서 눈물을 삼켜내던 백아가 힘없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연화가 있는 궁에서 멀어질수록 온몸에 힘이 풀려왔다. 애써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낸 백아가 제 처소로 돌아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달빛은 모습을 감췄다.
날을 변함없이 밝았다. 예정대로 혼례식은 진행되었고 햇빛은 유난히 더 밝게 그들의 길을 밝혔다. 차마 나가지 못한 백아의 처소에도 창을 뚫고 햇빛이 들어왔다. 힘없이 벽에 기대앉아 멀거니 벽을 바라보던 백아가 손에 들린 머리꽂이를 던졌고 작은 소음을 내며 떨어진 머리꽂이 위로 그림 한 장이 날아 앉았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 앞을 가렸다.

"아마, 누이는... 제가 힘이 있었다 해도 제게 마음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해지지 못한 말이 힘없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없이 울음을 죽이던 백아의 귓가로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헛웃음이 터졌다. 저 음악 소리에도 웃을 수 없는 제 꼴이 웃기고 한심했다. 일어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몸을 눕힌 백아가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억지로 백아에게 몰려온 잠의 먹구름은 백아를 예전 기억이 가득한 악몽으로 이끌었고 시간이 흘러 낮을 보내고 밤을 가져온 하루의 끝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어두움만이 세상에 잔잔히 내려앉았다.
엄, 풀자면 예전의 어렸을 적 연화와 했던 약속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백아와 그 약속은 이미 세상 앞에서 무너졌고 더이상은 백아에게 돌아가지 않으려는 연화... 가 보고 싶었어...ㅎㅎ 망했다. 백아 연화 사약길은 멀고 험하지 그럼 그렇지.... 사약 같이 마실래?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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