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물론 음악, 미술, 체육등에 특히 일본친구들보다 앞서갔던 나와 동생 성욱은
인기 만점이었다. 세인트 메리스 인터내셔널 스쿨시절 이 학교의 외국 인선생님들은
"코리안 보이, 나이스 가이"라고 우리형제를 불렀다.
우리 '키무'형제가 인기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다리 길고 똑똑하며 전학 온 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유행하는'롱다리'라는 말처럼 하반신이 길며 공부 잘하고 또 전학 온
학생은 왠지 신비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당시 일본여학생들에게는 최고의 남학생 상이었다.
외국인 학생들은 김치를 많이 먹어 키가 장대처럼 큰 줄 알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 김치를
얻어가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그렇게 기다리던 동경한국인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지 5년만에 한자리가 빈 것이었다. 같은 핏줄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롱다리', 똘망똘망해 보이는 외모에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짧은 머리인데 비해 긴 머리였던
나는 이곳에서도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전학간 첫날 교문을 들어서자 교실
창문으로 많은 학생들이 머리를 내밀고 수군 수군 대고 있었다.
교실로 들어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장에 신발을 집어넣고 있는데 여학생 하나가 쫓아오더니
"너 몇 학년 들어가니. 악수 한번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손을 잡았더니 그 여학생은
"꺅"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당시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그것은 너무 좋아서 감격에
겨운 나머지 한 행동이었다.
"오늘 전학 온 학생인데 서로들 잘 지내라" 교단에 나를 불러 세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동경한국인학교에 옮긴 첫 날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담임선생님이 길게 이야기하지 말고 한마디로 줄여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들어가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해 진짜 한마디로 끝을 낸 것이다. "야" 고함한번 지르는 것으로 인사말을
대신하자 아이들은 물을 끼얹은 듯 잠시 조용해 졌다가 약 5초 약속이라도 한 듯
교실이 떠나가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도 너무 의외의 일이 벌어지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한 친구만 유독
웃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빈자리를 찾아 앉으라고 지시했는데
마침 그 친구가 옆자리를 비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이규석.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규석은 아니다.
선수끼리 알아본다고 그 친구가 나를 쳐다본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화였다.
그 친구는 그림 그리는데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고 나 역시 그림에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친구와 나란히 앉은 날부터 경쟁적인
만화전쟁이 시작됐다. 그냥 단편으로 시작했던 우리 만화가(?)들은 경쟁이 치열해 지자
연재만화로 까지 접어들었다.
수업시간에 공부는 않고 책상 밑으로 열심히 만화를 그려댔다. 우리 연재 만화는
고정독자 들도 많이 생겼다. 만화를 만들고 있으면 친구들이 모여들어 기웃거렸다.
"다음 회 좀 보여줘라" 동경한국인 학교에 전학간 1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일본인 학교를 다니며 치르던 '김의 전쟁'은 동경한국인학교로 옮겨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냥 참고 지나칠래도 도저히 눈꼴사나워서 볼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동경한국인학교로 전학해 만화 그리며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하나 터졌다. 아침에 학교교문을 들어서는데 머리 노랗게 물들인 일본 학생이
"도와우(바보이라는 뜻)"하며 우리 학교학생의 머리를 '딱'소리가 날정도로 때리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그저 "왜 그래"하고 항의할 뿐 다른 말을 못했다.
무슨 이유로 맞았냐고 물어보니 근처 일본학교에 다니는 불량학생인데 싸움을 잘하고
가끔씩 우리학생들을 괴롭힌다고 말했다.
가슴에서 열불이 났다. '이 자식을 가만 놓아두나 보자.' 노랑머리의 얼굴을 잘 기억해둔
나는 그 아이가 잘 지나다닌다는 전철역 앞에서 기다렸다. 노랑머리의 얼굴이 보이자
아무 말 없이 다가가 한 30분을 두들겼다. "너 한국학생 건드리면 죽인다." >
그 이후로 노랑머리는 우리학교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노랑머리말고도 조금이라도 우리학생들을 우습게 보거나 괴롭히는 일본학생들은
나의 목표물이 되었다. 나중에는 일본학교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일본학생들을 상대로 함께 '전쟁'을 벌이던 홍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콤비는
지금도 동경한국인학교에 가면 전설적인 존재로 학생들 사이에 이야기되고 있다 한다.
"너 이리 와봐. 이 학교 머리가 누구냐." 일본인학교 앞에서 기다리다 불량끼 있어 보이는
아이만 보이면 붙들고 시비를 걸었다. 대개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겨가며 저항해오지만
오래 걸려야 1분 정도면 제압이 돼 그 학교의 우두머리급 학생을 불러오곤 했다.
일본인학교 앞에서 못된 녀석들만 골라 붙들어 세우고 무릎을 꿇렸다. 결국은 그 학교의
어깨급이 교문 앞이 소란하다는 전언을 듣고 걸어나왔다. "너 뭐 야." >
인상 한번 더럽기 짝이 없는 놈이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나오더니 말을 던졌다.
말이 필요 없었다. 무릎 꿇고 앉아있는 일본친구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깨부쉈다.
"너희들 잘 들어, 앞으로 우리학교 아이들 보면 인사해라." 이 다음부터 일본 학생들은
우리학교 앞을 지날 때면 어깨를 움츠리고 가야했고 한국인학교의 태극배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동경외국인학교는 태극배지를 상징적으로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도 특이하고 커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태극배지는 나중에
잎사귀 모양으로 바뀌게된다. 일본에는 단 한군데인 한국인학교에 비해 조총련계열의
학교가 여러군데 있는데 그러다 보니 태극배지가 이들의 공격목표가 되곤 해 쉽게 식별이
안되는 평범한 모양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일본학생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알려져 거의 유명인사가 돼있을 무렵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복싱을 한다는 일본 친구하나가 도전을
해온 것이었다. "자식 간도 크지, 감히 나한테." 항상 함께 행동하는 홍규라는 친구와 함께
만나자는 장소로 나갔다. 홍규가 먼저 그 친구와 한판 뜨겠다고 말했다.
태권도를 하는 홍규와 복싱을 하는 그 친구의 싸움은 서로 스텝이 틀려 잘 어우러지질 않았다.
홍규는 그 친구를 한대도 때리질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간간이 잽에 얻어맞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할 것 같았다.
기합소리와 함께 복싱스텝을 밟는 일본친구에게 발차기를 하며 달려들었으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하고 내내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대 두대씩
맞는 것은 정말 약이 올랐다. "야 이자식아." 뒤에서 바통을 물려주고 지켜보고 있던
친구 홍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옆에 있던 각목을 쥐어들고 달려들었다.
비겁하지만 2대 1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때 마침 문을 열고 나온 근처 식당아저씨가
싸움을 말렸고 우리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틈을 타 두 사람을 상대하기 벅차다고 생각했던지 일본친구가 달아나기 시작 했다.
약이 잔뜩 올라있던 우리는 "야 거기 서"하며 악착같이 쫓아갔다. 그러나 발빠른 그 친구는
경찰서가 눈앞에 보이자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판정패였다. 둘이서 한 놈도 해결 못하다니.
나는 며칠동안 약이 올라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서는 그 동안 혼내준 일본학생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까지 겪었다. 6명 정도로 기억되는데 집 앞 골목에 숨어 기다리고 있다가 각목으로
마구 패고는 달아나는 것 아닌가. 다 막고 피하고 하다가 허리부근을 한대 맞은 것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하며 쓰러졌고 더 이상 저항을 못했다. 사실 그때부터 허리가 안 좋아져
현재 활동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맞고 가만있을 내가 아니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나를 때린 일본아이들을 잡으러
다녔고 결국 본때를 보여줬다. 고1말 아버지가 다시 서울 본사로 귀환하게 돼 나는
파란만장한 6년간의 일본생활을 마감하고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서러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한국소년의 힘과 자존심을 심어주고 왔다는 자부심은 아직도 갖고있다.
http://www.sj-sw.co.kr/ 김성재 김성욱 꿈꾸는
김성재 에세이 (2) - 일본에서 인기 최고의 남학생|작성자 파란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