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대학교 3학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10월을 선고 받았다.
시위를 벌인 결과로 구속되어 동시에 학교에서도 제적된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잘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문재인은 "만약 자신이 운동권이 많은 서울 법대소속이었다면. 적당히 중간에 끼어 따라다녔을것"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당시 경희대학교의 학생운동은 활발하지 않았기에 누구든 용기를 내서 결단해야 했다.
"누군가가 앞장을 서 줘야 하는데 따라다닐 사람은 많지만 앞장서 줄 사람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됐다"라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경찰서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검찰로 이송되었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됐을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고 문재인은 말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제일 먼저 이루어진 ‘강제징집’은 1971년 교련반대시위 주도 지도자급 학생 200여 명을 강제 입영시킨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 주도자급은 신체검사 등급에 상관없이 전원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하는 정치공작을 벌입니다. 한쪽 눈이 실명한 사람도,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의 소아마비 장애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히 만 19세 이하로 현역 입영연령이 되지 않아도 무조건 군대에 보냈습니다.)
문재인은 출소 이후 시위 주도로 바로1975년 8월 강제로 징집되어 1975년 8월 입대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은 육군신병훈련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특등사수','선임분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훈련을 마친후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되었고
여단장은 준장 전두환,대대장은 중령 장세동이었다.
주특기는 '수중폭파'
군복무 중에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상을 받았고, 전두환 여단장에게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31개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제적생 신분이었던 문재인은 1980년 봄,
경희대학교 법학과 4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다.
복학 조처로 학교를 되돌아갔지만 전두환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또 다시 경찰에 체포 된다.
그리고 이때 문재인은 사법고시 합격 통지서를 유치장에서 받게 된다.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하루 전 비상계엄에 따른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됐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2차 시험을 보긴 했지만 준비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경험이나 쌓자는 심정으로 치른 시험이었다.따라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시위와 구속을 거쳐 유치장에 갇혀 있을 무렵에는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합격 직후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과거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지만 문재인은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합격 취소를 각오한 말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노모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온다.
그런 문재인은 부산에서 사시 동기 박정규씨의 소개로 노무현 당시 변호사 사무소를 찾아가게 된다.
박정규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합동법률 사무실을 운영할 생각이었지만 박정규씨가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사시 동기인 문재인을 대신 소개 한 것이었다.
이때의 만남을 문재인은 '운명'이라 규정한다.
온갖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운명적 수순처럼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문재인은 그 만남에서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그동안 내가 만났던 법조인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부산 부민동에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조금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 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 한뒤 짧은 판사 생활을 마치고 1981년 독서모임 학생과 시민등이 빨갱이로 조작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첫발을 떼던 때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1982년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문재인 보다 사법시험
5년 선배였고 6살 위였다.
그럼에도 갓 사법연수를 마친 후배를 자신과 동등한 조건으로 대우했다.
문재인은 변호사 생활 할 때에 노 전 대통령에게 항상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는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한번 해보자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당시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단칼에 끊어버렸다. 판검사에 대한 접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수입이 줄긴 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자연히 주변의 법조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고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동료로서 존중하여 결코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리 사무소가 부산 경남 울산의 노동인권 사건의 센터처럼 변해버렸다. 재야운동에도 자연히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문재인은 부산 신접살림도 노 대통령이 살던 부산 광안리 삼익 아파트 단지 내의 전셋집에서 시작했다
87년 노무현 변호사를 기다리는 권양숙 여사, 문재인 변호사
이렇게 문재인은 노무현,김광일등과 함께 영남 지역 인권,노동 변호사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1988년 김영삼은 노무현,김광일,문재인 3명에게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하게 되지만,
이 3명중에서 문재인은 거절을 하고 홀로 영남 지역의 인권 노동 변호사로 남게 된다.
"노무현 변호사가 초선의원으로 5공 청문회의에서 맹활약을 보이는 등 정치인으로 성장해 갈 때 나는 부산에 혼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에 매달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늘 행복했다. 일이 많아 힘들었지만 내 삶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나의 개인적인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의무감이 나름대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노대통령이 취임후 문재인은 민정수석으로 임명된다.
그는 대선 직후 노무현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올때도 비닐봉지에 속옷 뭉치와 서류 몇 장만 달랑 들고 왔다고 한다.
문재인이 민정수석에 정식으로 취임한 후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이 물었다.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했던 청와대행을 왜 택했습니까?” 문재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노 대통령 혼자 외로울까봐…"
노 전 대통령은 문 이사장에 대해 “술잔을 기울이면서 심경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가끔 꿈에서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운명 같은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