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공지가 닫혀있습니다 l 열기
문빈이ll조회 574l 1
이 글은 7년 전 (2017/2/26) 게시물이에요

한겨레, 허지웅의 설거지) 엄마, 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4절지 갱지를 가로로 세번 접고 세로로 두번 접는다. 접힌 면을 따라 자른다. 이걸 몇차례 반복한다. 잘라진 종이들을 모아 한쪽 면에 스템플러를 박는다. 스템플러를 박는 과정에서 정렬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최대한 체중을 실어 종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눌러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연필로 이야기를 썼다. 구상을 한 건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썼던 것 같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그때는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고딕 호러소설의 주인공들과 웰스의 <우주전쟁>같은 SF소설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히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등장해서 싸우는 이야기를 썼다. 정확히는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싸우다가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에 맞서 협력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것과 제본의 순서가 거꾸로 된 것 같지만 변명을 하자면 나는 열살이었다. 방학이 오면 내내 그런 걸 여러편 썼다. 여러편을 썼지만 독자는 늘 한사람이었다. 엄마였다.

그때는 엄마가 참으로 거대한 사람이었다. 이걸 써서 엄마에게 읽어주고, 엄마가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걸 듣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늘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쓴 건 <터미네이터 2>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썼던 <터미네이터 3>였다. 기체 터미네이터가 등장하는데 화산으로 끌고가서 증발시킨다. 이미 기체인데 어떻게 증발시키는지에 관한 과학적 검증 과정은 없었다. 나중에 고쳐쓸법도 했지만 당시 아버지와 다투고 난 직후였던 엄마가 내 소설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소설 쓰는 일을 집어치웠다. 아마 이건 엄마도 모를 거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내게 정말 거대한 사람이었다.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장난감을 사달라 졸랐고 조금 크고 나서는 책을 사달라 졸랐고 너는 왜 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는 놀림을 당한 이후에는(퍽 더 팔학군) 옷을 사달라 졸랐지만 한 번 안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속만 상하지 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엄마가 책을 사주지 않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책 없이 살지 못하는 아이가 된 건 엄마 탓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나이가 기억나지 않을만큼 어렸을 때 엄마가 이야기 성서라는 걸 몇권 사왔다. 그런데 그걸 아버지랑 상의하지 않고 산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상의하지 않고 뭔가를 사는 걸 싫어했다. 몇 번 큰소리가 오고 간 이후 엄마는 장롱 안 깊숙히 책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을 때만 읽으라고 신신당부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까지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게 책을 읽는다는 건 늘 큰 일탈이었다. 해선 안되는 일이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었다. 초인종 소리만 나면 후다닥 책을 치워 장롱에 집어넣고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게다가 내용도 만날 신이 화를 내고 벌을 내리고 멀쩡한 남의 아들을 제물로 내놓으라 하고 그걸 진짜로 하나 안하나 간을 보면서 애정투쟁을 하지를 않나, 사람들을 싹 다 잡아 죽이니 신명이 났다. 그 뒤로 나는 내내 책에 미쳐 살았다.

언젠가 한번은 엄마 지갑에 손을 댔다. 그걸 엄마가 알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나갈 채비를 하더니 나를 붙잡고 터미널 앞에 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 파출소에 들어가 자수를 하라고 말했다. 자수를 하라니. 그 사람 많이 오가는 광장의 파출소 앞에서 나는 설마 그냥 겁만 주는 거겠지, 생각하고 그냥 서있었다. 그러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거기 네시간 동안 서서 울다가 간신히 엄마의 용서를 받고 은촛대를 받은 장발장의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고속버스터미널 앞에는 겁이 나서 잘 가지 못한다.

그렇게 엄마는 늘 거대했다. 두 형제를 혼자 맡아 키우게 되면서 그녀는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독립하면서 엄마의 거대함이 희미해졌다.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나는 가족끼리 서로 폐끼치지 않고 살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래도 없었다.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더 이상 엄마는 거대하지 않았다.

지난 정권,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광장 위에 있었다. 밤이었다. 그날은 집회 규모가 꽤 컸다. 나는 혼자였다. 당시 촛불집회의 쉼터 같은 역할을 했던 광화문 앞의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내 팔을 콱 움켜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아 보았다. 그건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에 가장 현실 같지 않은 순간이었다.

엄마가 웃으면서 서 있었다.

엄마는 하도 뭐가 문제라고 하길래 한 번 나와봤다고 말했다. 누가 들으면 요 앞에 사는 사람이 작은 집회 구경나온줄 알겠지만 사람들은 종로를 가득 메울만큼 많았고 엄마는 수원에 살았다. 나를 어떻게 찾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보이길래 잡았다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그때 기억을 되집어보면 엄마는, 엄마는 작았다. 엄마는 작고 나이 들고 약했다. 나는 화를 냈다. 아직 택시 할증 안붙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를 두고 내 갈 길을 갔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어딘가에 기고한 글을 읽고 여기 나온 것이 분명한 엄마를 보는 게 고통스러워서 도망쳤던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작고 나이 들고 약한 사람이 여기 있는 게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작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큰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청계천을 가운데 두고 빌딩 뒤쪽으로 돌아가는데 함성 소리가 크게 들리고 난리가 났다.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개중에는 다치는 사람도 보였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건물 사이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진압이 소강 상태에 이르렀지만 엄마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저 앉아서 기계적으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수신음 소리가 뚝 끊기더니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엄마는 하도 시끄러워서 전화 온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 일이 종종 떠오른다. 엄마가 너무 작았다.

그녀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 생각을 하면 나는 늘 조금 울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엄마 무릎 위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허지웅 


http://ozzyz.tumblr.com/post/148394135010/%EC%97%84%EB%A7%88-%EB%82%98%EC%9D%98-%EA%B0%80%EC%9E%A5-%EC%B9%9C%EC%95%A0%ED%95%98%EB%8A%94-%EC%A0%81

추천  1

이런 글은 어떠세요?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카테고리
  1 / 3   키보드
닉네임날짜조회
정보·기타 한소희측, 프랑스 대학 합격 "사실로 확인돼”232 NCT 지 성05.01 22:23111244 7
유머·감동 가정 화목한 집 특 .jpg287 qksxks ghtjr05.01 19:41111624
정보·기타 헐..지드래곤 인스스 쓰레기 봐..JPG158 act305.01 20:11118701 15
유머·감동 곧죽어도 이 케이스만 쓰는 사람들 있음...jpg125 실리프팅05.01 22:2489565 7
팁·추천 쿠팡에서 많이 구매하는 베스트 조합105 Jeddd05.01 21:4095727 15
???: 네 여친집 돈 받고 빌려주면 떼돈 벌겠다4 푸밥오 12:25 4984 1
슈카월드 나와서 테슬라 주가 상승 예견한 걸그룹 멤버 유리115 12:17 948 0
일본에서 춤으로 TOP 7 뽑힌 아이돌 철수와미애 12:16 1253 0
현재 반응핫한 영화 상영시간 논란.JPG12 우우아아 11:29 13967 0
전 여친 폭행해 숨지게 한 대학생 "공부해서 더 좋은 여자 만날 것" 뻔뻔7 피지웜스 11:26 5699 0
휴대전화 전면 금지!?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필살기라고 11:22 2076 0
이경제의 '화타'급 진찰에 비명 가득한 촬영 현장, 한혜진-박나래-풍자-엄지윤의 건.. 즐거운삶 11:20 1144 0
'아이랜드2', '데뷔 문턱' 12인은 과연 누구? a+b=cd 11:14 450 0
육성재 'D-7' 첫 콘셉트 포토 공개1 me+you-I 11:02 1489 1
최근 여러 매체에서 보도한 드웨인 존슨의 만행7 판콜에이 11:01 10513 1
'정자교 붕괴' 6·8급 구청 공무원이 책임?…전·현직 성남시장 '중대시민재해' 면죄부..1 원 + 원 10:53 5511 0
논란의 고속버스 공지문.JPG51 우우아아 10:32 21274 1
패스트 라이브즈 이민자의 은은한 선민의식이 느껴져 언행일치 10:30 3475 0
[단독] 윤 정부 '국가 비상금'…1순위는 용산 이전과 해외 순방이었다19 곽덕용 10:27 10645 11
중국 자율주행 택시 장미장미 10:15 2860 0
"야구선수 남친, 상습적으로 손찌검…팬 무시에 원나잇까지" 폭로글.gisa 125664return 9:35 5916 0
어도어(대표 민희진) 공식입장 전문112 t0ninam 9:27 30921 35
동국대 대나무숲 "형, 그때 왜 안아줬어요?”323 우우아아 8:56 34113
공포스러운 현재의 기후 변화 뭐야 너 8:39 2428 2
갈색병에 담긴 칠성사이다 나온다…'칠성사이다 레트로 에디션' 출시4 키토제닉 8:29 13061 1
급상승 게시판 🔥
전체 인기글 l 안내
5/2 12:52 ~ 5/2 12:54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