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중국과 일본에서는 농사에 유용하게 활용된 수차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일까 ?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누어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세종 때의 김종서가 지적했듯이 우리나라의 지형과 자연조건이 수차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수량이 비교적 풍부한 우리나라는 천수답으로도 충분히 농사가 가능했으며,
가뭄이 심한 때는 아예 수차를 사용할 만한 물조차 말라버린다.
또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부터 보나 제언 등의 관개 시설을 발전시켜 이용했기 때문에
수차는 평소에 그리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수차 제작에 쓰이는 목재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았다는 점도
수차 보급이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에 속한다.
둘째, 수차는 제작해서 설치하고 작동시키기까지 그 효과에 비해
경비와 수고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먹고살기에 급급한 백성들에게 관에서 주도하는 수차의 보급은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셋째, 가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가 수차의 제작 보급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닥치면 일단 기우제부터 먼저 준비하거나 음양 사상에 의존하는 등의 전통적인 자연관이 강했다.
여기에다 기술을 천시하고, 타국의 기술을 들여오는 데 앞장서는 사람에 대한 거부 의식 등이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장치 등 정교한 수차의 기술개발에서
조선의 기술자들이 실패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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