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이날 이후 일본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다. 지진해일의 영상이 공포감을 주었다면 파괴된 원자력발전소의 기이한 모습은 SF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일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수군댄다. 이제 일본은 끝났으니 일본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데 되돌아보면 3·11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똑같이 말했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세기이니 일본은 배울 필요 없다고. 정치·경제적으로 몰락했고 방사능까지 오염된 일본을 뭐 하러 연구하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면 이렇게 답한다. 그런 얘기는 일본의 미래에 대한 한국인의 희망사항을 반영하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고. 설령 일본이 극동의 소국으로 전락하더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존재감을 상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국력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일본은 중국과 함께 한반도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상수(常數)임에 변함이 없다.
'징비록' 첫 대목에는 신숙주가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친을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당시 일본 국력은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고, 조선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안심하지 말고 언제나 일본을 관찰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신숙주가 전하려 한 바였으리라. 하지만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며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었다는 성찰에서, 류성룡은 '징비록'에 신숙주 유언을 실은 게 아니었을까. 일본에 대한 평가절하가 합리적 판단인 양 유통되는 지금이야말로, 신숙주와 류성룡이 후세에 전하려 한 바를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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