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이상한 습관은 한자폐지의 영향?
문재인 정권의 폭주가 속도를 더하고 있다.
위안부문제 한일합의를 뒤집는 것에 더해, 해결된 사안인 징용공 개인청구권까지 용인하였다.
일본정부는 이것에 항의하였고, 한국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중남미협력포럼 외무부장관회의에
가노 외무성 대신에게 초대장이 도착했으나, 일본은 결석하기로 했다.
왜 한국은 나라와 나라의 약속을 지키지않고, 한국 사람들은 이상한 습관이 있는 것인가.
저널시리스트 사쿠라이씨가 그 배경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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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조선반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매우 어려운 관계를 지속해왔습니다.
온화한 나라, 일본이 대외적인 분쟁에 끼어들때는 대부분, 조선반도 문제가 원인이 되어 왔어요.
좀 멀리는 663년, 이미 멸망한 백제의 부흥을 돕기 위해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패배하였습니다.
13세기에 두번에 걸친 우리나라를 침략한 몽골과의 전쟁은, 몽골이라기 보다 고려와의 싸움이었죠.
청일전쟁은 조선반도를 지배권을 넓히려는 청국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러일전쟁도 러시아가 남하할 위험에 대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게 마찬가지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북조선이 폭주하면 일본에도 불똥이 튀어옵니다.
본래라면 한미일이 연계하여 북조선, 그리고 배후에 있는 중국과 대치해야하지만,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완전히 그 반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에 의한 대륙간탄도미사일실험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강화 움직임을 보면,
북조선에 다가가 "남북공동으로 강제동원피해 실태조사"를 제안하는 따위의 상황이 아님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문재인대통령은 "반일"을 친북정책에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이 북조선에 사실상 지배당하여,
38도선이 쓰미마해협(대한해협)까지 후퇴하는 것도 일본은 각오해야만 합니다.
◆ 한국의 "悪意(악의)"
문재인씨는 국제적인 룰을 완전히 무시하고, 골대를 옮겨버릴 뿐아니라, 국가간의 결정사항을 모두 뒤집으려고 합니다.
8월 17일, 청와대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문재인씨는 일본통치시대에 동원되어 일하였던 징용공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개인청구권이 "없다"란 것은, 1965년 일한국교정상화 시절에 체결된 일한청구권협정에서 명확히 나타납니다.
이 문제는 완전한 해결 완료에요.
좌익 노무현대통령은 2005년 일한구교정상화교섭에 관한 전 자료 36,000쪽을 공개했습니다.
자료를 상세히 조사한 결과, 일본측이 "한국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하겠다"라고 제안한 것에 대해,
한국측이 "국가로서 청구하겠다"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할 예정"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노무현씨도 "이미 일본에서 받은 돈에 개인보상분도 포함되어 있다"라며,
징용공 개인청구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12년, 한국의 최고재판소가 "개인처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라는 놀랄만한 판결을 내려,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배상명령이 차례차례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강제연행, 징용공 강제동원도 사실무근으로 일본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누명이죠.
그러나 한국은 국가전략으로서 역사를 날조하여 그것을 전세계에 선전하고 있습니다.
유교사상에 근거한 왜곡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인에게 있어서
일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 "폄하의 대상" 이며,
지금은 "돈을 가진 나라"인 것이죠.
상대를 이해하고 다가가려고 하는 것은 일본인의 미덕이지만,
그 전에 한국이 "악의"를 가지고 일본을 비하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문재인씨는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는,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시에는 "몰랐던 문제이다"라고도 설명하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주장했던 말도안되는 사실이 진정 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는 것일까요.
타쿠요쿠 대학 국제학부 교수인 고젠카(오선화)씨는 한자 폐지에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합니다.
일한병합 당시, 한국에서는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였고, 서민은 대부분 읽기쓰기를 못하여 문맹률이 95%에 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은 학교를 (병합시에 비해) 59배인 5960개로 늘려, 서민에게 한글을 가르켰습니다.
한글은 일본어로 말하자면 히라가나, 카타가나와 같은 것으로서 한자와 한글을 섞어쓰는 방법을 보급 시킨 셈입니다.
후쿠자와 같은 인물들의 노력에 의해 조선인의 문맹률은 1943년에는 78%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은 한자를 폐지하여, 한글만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인의 사고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음을 지적하는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연구자들조차 한자를 읽지못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자료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때문에 한국인은 자신들 나라의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에 맞는 "망상"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젠카(오선화)씨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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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 노가타무비자
주의 : 일부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