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 6~A.D 57
즉위: A.D 25~57
1.출생
본래 한미한 전한(前漢)의 방계 황족으로 경제의 막내아들이자 무제의 이복동생인 장사왕 유발의 후손이며 남돈령(南頓令)으로 남돈군에 추증된 유흠(劉欽)의 아들,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執金吾),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陰麗華)(仕官當至執金吾, 娶妻當得陰麗華)" 라는 정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다니던 평범한 종실의 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행동이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므로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음려화는 나중에 광렬황후가 된다. 명제(明帝)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2.거병
왕망이 찬탈을 통해 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건국하였다.(A.D 8),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 집행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급기야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게 된다. 남쪽에서는 녹림군(緑林軍), 북쪽에서는 적미군(赤眉軍)이 그 기세가 강했다고 한다. 지황(地皇) 3년(A.D 22) 겨울, 유수의 형 유연(劉縯)도 거병, 처음에는 생각처럼 병사가 잘 모이지 않았지만, 신중한 성격에 평판도 좋던 동생 유수가 합류하자 유수의 판단을 믿고 민란에 참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타고 다닐 말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유수는 민란군 지휘에 소를 타고 다녔으며, 녹림군에 합류한 뒤에야 신나라 군대로부터 노획한 말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녹림군은 한(漢)을 부흥코자 유현(劉玄)을 황제(更始帝:경시제)로 삼고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세력을 늘려나갔다.
3.전설, 곤양대전(昆陽大戰)
그러나 왕망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왕망은 급히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병사 42만명을 모아서 곤양성으로 향하게 한다. 이 때 유연이 녹림군의 주력을 이끌고 완성을 치러가, 곤양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9천명에 불과했다.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하지만 적군을 피해서 도망치면 마침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군이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수는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하고, 그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을 탈출하여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하였다.
한편 왕읍, 왕심은 압도적인 병력을 과신한 탓에 부하로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성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따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나, 녹림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함락하지 못하였다.
▶곤양대전도
6월 초하루 유수는 1만 여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성으로 돌아왔다. 유수가 직접 지휘한 1천여 명의 선봉대는 왕망의 군대와 4,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쳤는데, 왕심은 병력 수천 명을 보내어 공격했다. 유수는 선두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천여명의 적을 죽이고 왕심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유수는 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곤양성은 물론 왕망의 군영에도 퍼뜨렸다. 이에 성내의 수비병들은 사기를 얻었고 왕망의 군대는 사기가 흔들렸다. 이어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왕망군의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여 본진을 강습한다. 왕읍과 왕심은 바로 각 부대에 위치를 사수하게끔 명령하고 스스로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하였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는데 유수가 이끄는 정예부대가 용맹하게 싸워서 왕읍, 왕심의 군대는 열세에 몰리고, 각 주둔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하였다.
결국 왕망군의 중심부는 무너지고 왕심이 전사, 이 마당에 곤양성의 수비군까지 밖으로 나와 적군을 공격하니 왕망의 군대는 협공에 당황하여 도망을 치다가 폭우가 내려서 불어난 강물에 물에 빠져죽은 자가 만 명이 넘었다. 결국 왕읍은 겨우 수천 명만을 데리고 겨우 낙양으로 도망쳤다. 과장이 섞였을지라도 40만이라 칭하던 대군이 고작 1~2만여 명의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궤멸당한 것이다.
곤양에서의 승리를 전후해 유수의 형 유연도 완성을 함락시키고 이렇게 유연,유수 형제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녹림군은 낙양과 장안으로 진격, 왕망을 죽이고 신 왕조를 멸망시킨다.(A.D 23)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왕부지
4.경시제 유현의 견제와 하북 평정
그들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경시제는 두 사람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어느날, 앞서 경시제의 즉위에 반대했던 유연의 부하가 경시제의 관작 부여를 사양하자 경시제는 그를 반역으로 몰아 죽이려 했고, 이 때 유연이 부하를 옹호하고 나서자 경시제는 이를 트집잡아 유연도 죽이고 말았다. 이 사건에 즈음해 유수는 완성에 도착하여 경시제에게 형의 결례를 사과하고, 형을 위해 상복도 입지 않았으며 조문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사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 등 자신도 재앙에 휘말리는 일이 없게 하려 애썼다.
왕망이 망하고, 다시 한나라(현한:玄漢)가 세워졌으나 유수는 그 명성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위험 인물로 취급되어 당시 군벌인 왕랑이 황제를 자처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평정하도록 보내진다. 물론 적은 수의 병력만을 준 채로...
경시 원년(A.D 23) 겨울, 유수는 화북으로 향했다. 이 때 유수가 한단(邯鄲)을 떠나 북상할 무렵, 왕랑은 유수의 목에 10만 호의 상금을 걸고 유수군 수색에 나섰다. 이에 유수는 등우(鄧禹), 왕패(王覇), 풍이(馮異) 등의 가까운 부하를 거느리고 화북을 떠돌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난의 행군으로, 맹추위까지 겹쳐 풍이가 가까스로 땔감을 모으고 등우가 가져다 불을 지펴 콩죽이나 보리밥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딜 정도였다고 한다...
▶광무제 하북 평정도
그러나 이후 왕랑에 맞서 유수의 비호를 요구한 신도태수(信都太守) 임광(任光)과 그 휘하의 이충(李忠)과 만수(萬脩), 화성군(和成郡)의 태수 비동(邳彤) 등이 유수를 불러들였고, 지방 호족이던 유식(劉植), 경순(耿純)도 유수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임광, 이충, 만수, 비동, 유식, 경순은 후대에 운대 28장(雲臺二十八將)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수는 왕랑의 부하로 10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던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楊)에게 공작을 펼쳐, 유양의 여동생이 호족 곽창(郭昌)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즉 유양의 외조카)인 곽성통(郭聖通, 훗날 폐황후 곽씨)에게 장가들어, 유양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왕랑과 대치하는 와중에 오환(烏桓)의 정예 돌격기병을 거느린 어양군(漁陽郡)과 상곡군(上谷郡)이 유수군에게, 후세의 운대 28장이 되는 오한(吳漢), 갑연(蓋延), 왕량(王梁), 경단(景丹), 구순(寇恂), 경감(耿弇) 등의 장수들을 보내 유수와 합류했다. 이로써 기세가 더해진 유수군은 왕랑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여름에 한단을 함락시켰다.(A.D 24) 왕랑은 도주하던 중에 잡혀 죽게 되었다.
유수의 세력이 커져가는 것을 두려워한 경시제는 유수를 숙왕(蕭王)으로 봉하여 군사를 해산시키고 장안으로 불러들이고자 하지만, 유수는 화북의 평정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고 자립하는 길을 택한다. 그 후 동마군(銅馬軍)이라는 지방 세력군을 끌어들여 그 병력까지 손에 넣은 유수는 병력 수십여 만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운대 28장(雲臺二十八將): 광무제의 창업 공신들 28인, 비슷한 사례로 훗날 당 태종의 능연각훈신(凌煙閣勳臣) 24인이 있다.
5.즉위, 그리고 천하통일
화북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즉위하라는 상주를 받았다. 유주(幽州)에서 개선하는 도중에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세 번째 요청에 "생각해보겠다." 고 대답, '적복부(赤伏符)' 라는 참문(讖文)을 부기한 네 번째 요청으로 즉위를 수락하여 6월에 즉위, 연호를 건무(建武)로 정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였다.(A.D 25) 이 해에 경시제는 서쪽으로 온 적미군에게 항복한 뒤 살해되었다. 그 후 적미군은 장안 및 그 주변을 약탈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산둥으로의 귀환을 꾀했는데, 건무 3년(A.D 27), 광무제가 파견한 대사조 등우,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이가 적미군을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패배했던 풍이가 군사를 정비해 적미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의 퇴로를 끊고서 동쪽 의양(宜陽)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무제의 군은 병량이 다한 적미군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건무 6년(A.D 30), 산둥을 평정하고 건무 9년(A.D 33)에는 농서(隴西)를 공략하여 현지의 지배자 외효(隗囂)는 병을 앓다 굶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외순(隗純)은 건무 10년(A.D 34)에 항복하였다. 건무 12년(A.D 36) 촉 땅의 공손술(公孫述)을 멸망시켜 즉위 11년 만에 중국 통일을 달성한다.
*적복부: 유수가 전에 장안에 있었을 때 동사생(同舍生) 강화(彊華)가 관중(關中) 으로부터 적복부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다.
"유수가 군사를 이끌어 무도한 자를 토벌하니, 사이(四夷:사방의 오랑캐)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용(龍)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전한이 건국된 지)이백이년 째 되는 해에 화덕(火德)으로 천자가 되리라."
-광무제의 정치-
●민정,재정●
1. 전한 말 이래의 혼란으로 중국은 극도로 피폐해져, 전한의 전성기 때 약 5천만여 명에 달하던 인구가 광무제 시대에는 2천만 명 정도로 감소해 있었다. 광무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소에는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지역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다.
2. 백성의 신분에 대한 정책으로는 앞서 언급한 노비 해방령 외에도 건무 11년(A.D 35),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性、人爲貴)" 는 문구로 시작하는 조(詔)를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하였다. 또한 이보다 앞선 건무 7년(A.D 31)엔 매인법(売人法), 13년(A.D 37)에는 약인법(略人法)을 공포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였다.
3. 조세에 대해서는 여지껏 신 왕조의 재정 부족을 이유로 수확량의 1/10을 거두던 것을 건무 6년(30년)에 전한의 제도와 같은 1/30로 하여 인민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감세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물론 둔전제의 시행으로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다.
4.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 뒤, 건무 15년(A.D 39)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인민 통치의 기초를 다지고 국가 재정을 확립하였다.
5. 왕망이 화폐 제도를 혼란시킨 바람에 후한 초기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이에 건무 16년(AD40), 과거 한 무제 이후의 오수전(五銖錢) 주조가 재개되어 화폐 제도도 안정되었다.
●통치 체제●
1. 지방: 군국제(郡國制)를 채용, 그러나 제후왕(諸侯王)과 열후(列侯)의 봉읍은 전한의 비해 줄어들었다.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功臣)을 후(侯)로도 봉했지만 그것도 몇개 현(縣)만을 봉해줄 뿐이었다. 왕망이 폐했던 전한의 제후왕으로 광무제가 즉위하면서 지위를 회복한 자들도 건무 13년(A.D 37)에는 열후로 격하, 이후 광무제 시기에 제후왕으로 봉해진 것은 황제의 동족이었던 남양 용릉 유씨 일족과 황자들 뿐이었다.
2. 중앙정부: 대사도(大司徒),대사공(大司空),대사마(大司馬)의 삼공(三公)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었다. 실무상에서는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尙書)가 중용되었다. 그밖에 관제나 군제에서는 역소(役所)를 통폐합, 필요없는 관직의 삭감을 실현하여 건무 7년(A.D 31)에는 지방 상비군이었던 재관(材官), 기사(騎士) 등을 없애고 노동력 부문의 민간 전환을 실현하였다. 혼란기에 임명되었던 장군도 대부분이 해임되고 소규모 상비군만을 준비하는데 그쳐 재정 부담의 경감을 도모하였다.
또한 재정 기관의 재편성으로 전한에서 황실 재정을 맡고 있던 소부(少府)의 업무를 국가 재정 기관인 대사농(大司農)으로 이관시켜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키거나, 대사농 직속이었던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관인 염관(鹽官)과 철관(鐵官)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
●유교 진흥●
건무 5년(A.D 29) 낙양에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유학을 강론하게 하고 14명의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각지에 사학(私学)이 마련되어 현지의 학자가 문하생을 모아 경서를 강의하게 하였으며 또한 관리 등용제도인 향거리선(鄕擧里選)에서 효행, 청렴, 결백을 취지로 하면서도 특히 효렴(孝廉)이 중시되어, 건무 12년(A.D 36)에는 삼공 등이 매년 일정한 수의 효렴을 천거하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건무중원 원년(A.D 56)에는 낙양에 교화,제사 시설로서 명당(明堂), 영대(靈台), 피옹(辟雍)이 설치되었다.
광무제가 통치의 근거로 삼은 유교는 전한 후기 이래 성행했던 참위설(讖緯説)과도 결합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예언 등의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짙게 가미되어 있었고 왕망도 이것을 이용하였다. 광무제는 즉위하면서 '적복부' 의 예언에 따른 것 외에도 삼공의 인사와 봉선, 시행의 근거로서 참문을 쓴 사례도 있었으며, 참위설을 비판한 유학자는 등용되지 못했다. 만년인 건무중원 2년(A.D 57)에는 도참(圖讖)을 천하에 선포할 것을 명하였다.
*참위설 신봉은 광무제가 비판받는 점이죠...
●대외 정책●
1. 동쪽으로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점거하였던 한반도 북부의 낙랑국(낙랑군이라 하기도 합니다.)을 건무 6년(A.D 30)에 다시 쳐서 평정하고 군현제를 통해 직접지배하였다. 한편으로 한반도 동쪽의 수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였으며 한반도 남부로부터 조공하러 온 사신들을 받아들여 낙랑국에 속하게 했다. 왕망이 후(侯)로 격하시켰던 고구려가 건무 8년(A.D 32) 후한에 조공하자 광무제는 다시 왕호(王號)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2. 건무중원 2년(A.D 57)에는 왜(倭)의 노국(奴國)에서 온 사신에게 금인(金印)을 하사, 훗날 에도 시대에 시가 섬(志賀島)에서 한왜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3. 건무 11년(A.D 35)에 침략해온 강족(羌族)을 마원(馬援)을 시켜 물리치고, 항복한 자들은 천수(天水), 농우(隴西), 우부풍(右扶風) 내의 군으로 이주시켜 군현 관할 아래 두었다.
4. 건무 16년(A.D 40)에 교지(交趾)에서 일어난 쯩(徴) 자매의 반란을 마원을 보내 진압하게 하였다. 마원은 무력 행사와 함께 성곽 복원, 관개수로 정비를 통해 농업을 진흥시키고 군현제를 정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화의 풍습만을 강요하진 않았다. 현지의 습속도 존중하였다고 한다.
5. 북쪽에서는 과거 왕망의 강경 외교 정책에 반발한 흉노가 세력을 더하고 있었고, 건무 6년(A.D 30)에 광무제는 화친 사자를 보냈지만 흉노의 침략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건무 24년(A.D 48) 흉노가 내부 항쟁을 겪어 남북으로 분열되고 이 중 남흉노가 후한에 귀순하였다(이 분열로 오환과 선비족도 흉노에서 이탈하게 된다). 광무제는 이듬해인 건무 25년(A.D 49)에 오환의 추장을 후왕(侯王)에 봉하고 선비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북흉노는 남흉노를 약화시키고자 건무 27년(A.D 51)에 후한에 사자를 보냈지만, 광무제는 화친을 인정하지 않고 한편으로 북흉노를 토벌할 방안도 마련하지 않은 채 비단 등을 주어 회유하는 선에서 그쳤다.
-후계-
아들인 명제(明帝)는 아버지의 방침을 그대로 계승, 그러나 북방의 외교면에서는 광무제의 소극적인 정책을 고치고 서역에 반초를 내보내어 전한의 무제 이후로 잠잠해진 서방진출을 재개했다. 그의 치세는 아버지인 광무제, 아들인 장제와 대등하였다 하며, 후한의 안정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마지막은 사기재상의 사기황제 평가....
"한나라 고조의 개국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개국공신들보다 능력이 높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 공신들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상황이 적었던 것 뿐이다."
-제갈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