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엔 산성 가득한 빗물에 서서히 부식되지며 쾌쾌한 냄새가 나는 연립 주택과, 그 사이사이 즐비한 보통 상가들. 몇층에는 임대, 혹은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피씨방. 어느 하나 될 곳 없다. 주변 고등학교 양아치들이 골목 거리를 자릿세 탓하며 내앉고 있었고 어른들은 쯧쯧 혀를 차며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청소년 무섭다고 덤비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안타까움이었다. 이곳, 낙원구 행복동 주민들은 마치 푹푹 퍼진 시금치마냥 그랬다.
동네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다 풀어헤친 셔츠에 손은 교복 바지에 쑤셔넣고 꾸역꾸역 골목을 오르던 창근의 주변에 세워진 구멍가게 최 할아버지는 예쁜 손녀가 있었다. 참한 머리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해맑게 웃으며 할아버지께 항상 조를 때면.
“할아부지, 배고파요. 고기 사 주세요.”
할아부지, 할아부지. 앞니 빠진 요만한 입으로 잘도 떠들어댔다. 손녀의 칭얼대는 목소리에 지긋한 흰머리를 바람에 맡긴 채 애써 입가 근육을 위로 올려버려고 하지만 그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꼭 사줄게. 언제 사 주실 거에요? …우리 손녀 꼭 고기 사줄게. 어여 들어가. 대화는 더도 덜도 말고 항상 거기에서 그쳤다.
그 날 동시에 창근의 학교에 모처럼 찾아보기 힘든 전학생이 왔다. 그 동네에 그 학교지 뭐, 하는 입소문은 거짓이 아닌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학교 전방에서부터 스며오는 쾌쾌한 담배냄새에도 지레 짐작 가능했다. 그런 학교에 제 발로 기어들어오는 건 두가지였다. 돈 날려서 왔거나, 빚을 져서 왔거나. 결론은 쌩거지 알거지가 되어서 들어온 어리석은 새주민이었다.
동네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녹슨 나무판대기 앞문을 거칠게 열고선 선생이 들어왔다. 그 뒤를 이은 새 얼굴. 궁금함따위 없었다, 호기심을 가질 바에여 철거 반대 운동과 앞으로 어떻게 먹고 벌고 살지가 더욱 궁핍한 실정에 녀석의 동글한 볼이라던가, 눈에 담을 겨를이 아니었다. 녀석은 깨끗한 교복에 비싼 메이커와 누렇게 헤진 제 운동화완 반대의 외제 실내화.
“손흥민이라고 해.”
재수 없었다. 없을 녀석이 있는 것마냥 둔갑을 해댄 것부터. 손흥민은 담배 냄새는 일절 맡아보지 않은 듯 매쾌한 향에 미간을 좁혔고 반 아이들은 주목 아닌 주목을 해댔다. 쟤, 뭐냐? 낸들 아냐. ㅆ팔, 재수 없어서.
손흥민과 이창근의 첫번째 대면이었다.
“넌 어디서 굴러들어 왔냐?”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됐다, 창근은 담임의 부탁으로 제 옆에 앉은 흥민에게 붙이려던 말을 집어 넣었다. 흥민이 퍼피면, 이창근은 도그였다. 흥민은 창근따위 같은 무리가 아니었다. 창근은 팔에 고개를 묻었다. 재수 없다. 가난을 다시 직면할 수 있는 오늘의 소중한 기회였다. 창근은 제 누렇게 헤진 운동화를 바라보다 흥민의 새하얀 실내화를 바라보았다. 단추는 두어개쯤 떨어져 실이 튀어나온 못난 창근의 교복을 바라보다, 단정히 흰 단추가 달려진 흥민의 교복을 바라보았다. 왜, 왜 또. 잘 버틸만하면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