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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짙게 깔린 꿈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느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걸음이 원체 느린 나는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잡아야 하는데, 붙잡아야 하는데……. 안개는 더욱 깊어졌고 그 사람은 이제 보이지도 않을 저 멀리에 있었다. 우리 둘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리는 너무 넓고 컸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놓아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눈이 뜨였다.
가만히 숨을 고르자 꿈이 꼭 현실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마가 축축했고 뺨에는 눈물이 흘렀던 흔적이 있었다. 바보 같은 웃음이 흘렀다. 어제 케이블 채널에서 삼류 단편 영화를 봤던 것이 떠올랐다. 그걸 보고 이런 꿈을 꾸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걸까? 꽤 잔 것 같은데. 알람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이상했다. 더불어 얼마 후면 또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지겨워졌다.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지만 핸드폰은 잡히지 않았다. 어디 갔지? 내가 어제 핸드폰을 엄마 집에 두고 왔던가? 더 길게 뻗어보아도 잡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이 감촉은…….
이불을 젖히고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기숙사가 아니다. 딱딱한 침대가 줄을 맞춰 배치되어 있는 내 기숙사가 아니었다. 옛날 전통식으로 꾸민 방 안엔 사극 드라마에서나 봤던 빗접과 농이 있었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덮고 있던 이불도 두툼한 솜이 채워져 있는 비단보였다. 이게 대체 뭐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직 꿈을 꾸고 있다거나 내가 미쳐버렸다거나. 둘 중 하나였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살이 비치는 속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채였다. 당혹스러움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단발이었던 머리칼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길어질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인기척과 함께 미닫이 식의 문이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팍을 가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 크흠……. 죄송합니다. 의원을 부를 터이니 어서 채비를 하시지요. 드디어 깨어나신 겁니까?"
남자는 내 비명에 깜짝 놀라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문 밖에 그림자로 살며시 비치는 남자의 등판이 낯설었다. 남자는 거기서 계속 말을 이었다.
"꼬박 사흘을 앓으셨습니다. 보세요, 제가 아직 물 놀이는 이르다고 충고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셔서는."
"…저기…."
"그럼 대감마님께 깨어나셨다고 아뢰겠습니다."
"……저기!"
"……."
"…잠깐만…. 들어와주세요."
"……왜 갑자기 저한테 말을 높이시는지요?"
"…빨리 들어오기나 하라니까요! 지금 뭔가 잘못됐다고요!"
다급한 내 외침에 남자는 슬쩍 문을 열어 빼곰 고개를 방 안으로 넣었다. 그러기를 단 몇 초, 남자는 화악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누…. 누구 놀리십니까? 아직 옷도 다 여미시질 않으시고서……."
"됐으니까 들어오라고!! 나 지금 진짜 멘붕이거든요? 미치겠다고!!!!!"
일부러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거기에 계속 서 있기만 했다. 나를 보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서 이불로 몸을 감싸자 그 때가 되어서야 조금 표정을 풀었다.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상한 꿈을 꿨고, 눈을 떴는데 갑자기 머리가 길어졌고 기숙사가 아닌 이상한 방 안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꼭 옛날 무사처럼 복잡한 복장을 갖추고 나한테 말을 높인다. 내가 사흘 동안 아팠다는 소리는 또 대체 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꿈이라면 깨어날 요량으로 뺨을 찰싹 때렸는데 남자가 그런 나를 기겁하며 나무랐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손 내리세요."
"…꿈이 아니야……."
"…예?"
"이거 꿈 아니죠……? 난 몰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씨, 대체 왜 그러십니까."
"……아씨?"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너무 오래 앓으셔서 잠깐 현기증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난 서울 사람이라고요! 서울 사람! 학교 다니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인데 하루 아침에 눈 뜨니까 이 상태인 걸 나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야! 악! 몰라!"
"아씨! 진정하시고 장난도 정도껏 하세요. 이젠 혼인도 할 몸이신데 어째 이러신답니까."
뭐? 혼인?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아무튼 의원과 같이 다시 오겠습니다. 향단한테 깨어나셨다고 고한 뒤 옷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머리가 복잡하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이경규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몰래카메라였으면…. 하지만 연예인이 아닌 나를 상대로 몰래카메라가 진행될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건 꿈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그냥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진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혼란스러운 마음은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대뜸 아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복을 입고 있는 꼴이라니? 도저히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남자는 누구지? 어린 나한테 존대를 쓰는 걸로 봐서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여기가 조선이라도 된다는 소리인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인이 있는 세상은 역사로 따지자면 조선이 마지막이자 전부였다.
갑자기 조선에 와버렸다. 그것도 양반으로 추측되는 집으로. 이럴 수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인 줄 알고 봤더니 비치는 몸집은 아까보다 훨씬 작았다. 좀 전에 남자가 말했던 향단이란 사람일까?
"아씨!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성미가 급한 사람인 것 같았다. 감쌌던 이불을 내리며 어색한 얼굴로 향단을 바라보자 그녀는 왠지 울음이라도 터뜨릴 마냥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자 향단이 품에 안고 있던 두루마기를 더욱 꽉 쥐며 내게로 달려왔다. 덕분에 미닫이 식의 문에 살짝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밝았다. 아침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햇살이 있었고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지자 작은 산맥들이 솟아나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나를 꽉 안는 향단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그런 그녀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향단은 잔뜩 울상인 얼굴로 다행이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아씨,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습니다. 이젠 정말 괜찮은 것 맞으시지요?"
진심이 담긴 얼굴에 차마 직접적으로 내가 놓인 상황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고갤 끄덕이며 잠자코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향단은 부드럽고 앳된 얼굴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씨가 지원이랑 같이 강에 가신 날, 그 날 밤부터 아씨 상태가 나빠지셨어요. 지원이가 사색이 되어서는 의원을 부르러 갔었는데……. 거기까진 기억이 나시죠? 왜, 그 궁에서 내의원에 계셨다는 그 분이요. 하여튼, 그 분이 오시고 맥을 짚는 순간에 아씨께서 까무룩 잠에 드셨어요. 급기야 다음 날에는 아주 정신을 놓고 내내 주무시기만 했다니까요? 그게 며칠이신 줄 아세요? 꼬박 사흘이에요, 사흘!"
"…지원?"
"네, 지원이요. 아씨의 호위무사."
향단은 그 말을 하며 이상하게 조금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지원이라면, 아까 그 사람일까? 대체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호위무사까지 붙어있는 거지?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향단은 조금 둔한 편의 사람인 것 같았다.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어도 이상한 기류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향단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잔뜩 부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어제는요, 그 분이 아씨를 보러 왔다가 가셨습니다."
"……그 분이라면?"
"네에, 맞아요. 아씨의 남편이 되실 분이요. 어휴, 부러워라! 저는 언제가 되어야 그런 분을 만나 사랑을 할까요?"
다시 마음이 복잡해지고 심란해졌다. 이 나라에서, 나는 벌써 혼인을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빨리?
"저기, 향단아. 그 분이 뭐라시던?"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저, 열 때문에 잠에 빠지신 아씨 얼굴을 한참이나 걱정스럽게 바라보시고 가셨습니다."
향단은 여전히 부럽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멍청한 내 머리로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이불을 정리하려는데 향단이 깜짝 놀라며 그런 나를 꾸짖었다. 그런 건 저가 하겠다며 야단을 떨어서 나는 조금 민망하게 서 있었다. 노련하게 이불을 정리하고 농에 집어넣은 향단이 그 안에서 새 한복을 꺼내고 가져온 두루마기를 펼쳤다. 환한 노랑으로 색깔을 맞춘 한복이었다. 향단은 능숙하게 옷을 입혀줬다. 나는 이 아이랑 대체 몇 년을 이렇게 지내온 걸까? 궁금했지만, 물으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 그러지는 못했다.
"아씨,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향단은 세심한 솜씨로 옷 고름을 정리하다가 그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어 나갔다. 향단이 나가고 아까 그 남자, 그러니까 지원이 어느 예쁘장한 남자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지원은 딱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럼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지원마저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렸다. 여덟 평 남짓으로 보이는 방 안에는 초면의 남자와 나, 둘만이 전부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그냥 살짝 웃기만 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궁에 급한 용무가 있으셔서 제가 이렇게 왔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듣던 대로 미인이십니다."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송윤형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 봬도, 요즘엔 아버지보다 저를 찾는 환자가 많아졌습니다."
"……."
"농인데 웃질 않으시는군요. 아직까지 많이 아프신가요? 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그냥 가벼운 감기 기운이 조금 길어졌다는 것 같았는데."
내가 앉을 것을 권하자 윤형은 살며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는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저렇게나 환자에게 신경을 쓰는 의사라니, 서울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외간남자가 이렇게 방으로 직접 들어와서 불편하시지요? 죄송합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혜민서에서 상태를 봐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아직 밖으로 나오시는 건 마님께서 염려가 되신다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쪽, 아니, 의원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닌데요."
"다음엔 혜민서에 꼭 한 번 들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네에."
"그럼 맥을 좀 짚겠습니다."
그 말에 저고리를 걷어 팔뚝을 내보이니 윤형은 왠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맞다, 여기 조선이지……. 나는 뒤늦게 어색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어, 음, 저도 농을 조금 보여드린 것인데, 보기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아,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크게 웃었어야 했는데."
윤형은 여전히 부드럽고 친절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착하고 얼굴도 멋진 사람이 의원이라니. 세상이 너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윤형은 그렇게 말하며 갑작스럽게 내게 바짝 다가왔다. 놀라 숨을 들이키자 윤형이 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가까이 다가와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가까이서 봐도 참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이 바로 앞에 숨을 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왔다. 잠시 맥박을 확인하던 그가 이내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손으로 다시 이마를 짚어, 열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미열이 조금 있습니다만 맥박과 호흡은 모두 정상입니다. 당분간은 외출을 금하시고, 혹여나 나가게 되신다면 꼭 무사나 몸종을 대동하셔야겠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윤형은 밖으로 나가려는 준비를 했다. 입고 있는 두루마기를 살피고, 나는 그런 윤형을 따라 일어섰다.
"곧 혼인을 하신다지요?"
"…아, 예."
"안타깝습니다. 한양에 미인이 한 분 사라지신다니. 저도 이제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
윤형은 그런 말을 하며 미닫이 식의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나도 서둘러 그렇게 하였다. 예의가 잘 갖춰진 사람이었다. 고작 몇 분을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아까 내게로 바짝 다가왔던 그 눈이 감긴 얼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조금 멍하게 가만히 서 있자 지원이 밖에서 말했다.
"이제 마님을 만나셔야지요?"
마님? ……엄마?
"사흘 동안,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요?"
"아씨, 아직도 장난이십니까? 왜 자꾸 저한테 말을 높이시는지요."
지원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래. 엄마를 만나면 무언가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작은 희망을 생각하며,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 지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