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쿠야의 점심식사 메뉴엔 늘 변함이 없다.
노릇노릇히 구워진 계란후라이를 올린 오무라이스에 후식으로 사과 반쪽, 내겐 드럽게도 맛이없었던 녹차라떼.
그 단조로운 도시락을 마지막 남은 한 스푼까지 깔끔히 비워내고 나면 남자 고등학생 치곤 드물게 화장실에 양치질을 하러 향한다.
양치질까지 개운히 끝 마치고 나면 남은 점심시간은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는 개뿔. 모범생이라 그럴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점심시간 내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길래 호기심에 학교를 뒤집다시피하며 찾아보니 학교 뒷마당 한켠에 자리잡은 아담한 텃밭에 이름모를 씨앗을 열심히 심고 있더라.. 이름만 허울좋게 원예부지 실상은 일진 친목 도목 클럽이나 다름없어(다른 부들도 별반 다를건 없다) 텃밭에 식물이라곤 커녕 대마초나 안기르면 다행인 텃밭이었다.
그런 텃밭을 우리학교 아이들도 아닌 난데없는 동양인 전학생이 농부에 빙의해 땀 흘리며 열심히 가꾸니 이 뜬금없음에 원예부는 물론이요 교장선생님까지 어안이 벙벙해져 무어라 말못하고 그저 넋 놓고 구경만 하는 일이 매일 지속되다 보니 어느순간부터 그 텃밭의 소유주는 자연스레 타쿠야가 되었고 행여라도 그 텃밭을 건든 놈들은 훗날 타쿠야의 크고 작은 보복에 시달려야만 했다.
.. 내가 왜 이 새끼 점심시간 루트까지 파악할 정도로 예의주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타쿠야는 흑백 배경에 유일히 색채를 입힌 듯 혼자만 튀기 그지 없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그친 뒤 질퍽질퍽한 진흙탕 천지인 운동장에서의 체육시간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수가 없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해서 그냥저냥 어울려 하는 것이지 농구나 배드민턴 따위를 하라 했으면 꾀병을 핑계로 양호실에서 내리 죽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개새끼들마냥 지치지도 않고 떼거지로 우르르 공에 몰려가 환장하는 놈들을 마냥 보고 있자니 운동은 지지리도 못하는 나로썬 감탄보단 질색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으으.
저런 놈들과 몸 맞부대끼며 축구할 자신이 없어 산책이라도 하면서 공기라도 쐴 겸 나름 운동장을 주위를 천천히 걷고 있는데 나대길 좋아하는 줄리안이 축구가 한창인 무리에서 이탈해 나와 내게 깐죽댄다.
" 벌써 지친거야? 다니엘 너 그렇게 안봤는데 은근히 체력이 딸린다? "
야 이 놈아 침 튀긴다..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그대로 여과없이 내뱉을려다 또 줄리안이 지딴엔 귀엽답시고 상처받은 시늉을 하며 토라질까봐 눈물을 머금고 도로 집어삼켰다. 줄리안은 주댕이가 아주 고급진 새끼라 화해하는데에 만만찮은 거금이 깨졌다. 사내자식 주제에 까탈스런긴, 그걸 다 받아주고 친구먹는 로빈이 새삼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아, 로빈도 또라이니까 그럼 쌍방과실인가.. 별 시덥잖은 생각에 히죽 쳐웃고 있는데 로빈이 그새 외롭다며 줄리안을 훌쩍 데려가 버렸다. 우씨, 나도 심심한데. 나도 맘 먹고 축구나 해볼까하고 운동장쪽으로 가보니 니가 반칙했네 너가 반칙했네 그깟 축구에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으르렁 대며 싸우는 녀석들탓에 스리슬쩍 끼기도 다소 눈치가 보였다.
양호실이나 가서 자야징. 체육 선생 눈치를 보다 재빨리 학교 건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질펀히 한 숨 잘 생각에 양호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룰루랄라 가볍다.
이미 보건실실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드나든 터라 이미 안면을 튼 보건쌤은 없고 누군가 곤히 자는 듯 새근대는 숨소리만이 나를 반겨주더랜다. 훗, 누군지 안 봐도 뻔하다. 나와 오랜 양호실 전우인 샘 임에 틀림없다.
발걸음을 소리죽여 사뿐사뿐 걸어가 평소의 샘 답지 않게 침대에 결계처럼 쳐져있는 커튼을 남자다운 거친 솜씨로 막힘없이 걷으니 그곳에 샘은 웬 걸. 샘 대신 타쿠야가 잠자는 숲 속의 왕자마냥 업어가도 모를만큼 깊은 숙면을 취하는 중이였다. 오잉. 그러고 보니 영 운동장에서 안 보인다 싶더라니.. 좁아 터진 양호실에 침대라곤 오직 하난데 그것마저 타쿠야가 차지해버리니 깊은 숙면을 취하려던 내 소중한 계휙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르륵..☆
단정히 눈을 감은 채 색색 대는 타쿠야를 내려 보고 있자니 내심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희고 투명한 피부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도톰한 연분홍빛 입술에, 턱에 볼록히 제 존제감을 과시하는 애교스런 점 하나, 그리고 동양인인 탓인지 하얀 시트위에 흐트러지게 펼쳐진 머리칼은 밤하늘처럼 짙어 흰 피부를 더 희어 보이게 만들었다. 잠결에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새근새근 아기처럼 잘도 잔다.
아니, 어쩌면 잘생겼다는 말보단 청순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그렇게 빠진 곳 없나 찬찬히 다시 한 번 살펴 보고 있는 와중에, 순간 내가 무심코 낸 기척소리에 타쿠야가 부릅 눈을 떴다.
" 왔더 퍽!!!!!!!!!!!!!!!!!!!!!!!! "
자고 있는 사람을 남몰래 훔쳐보았다는 겸연쩍음보단 자고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눈을 뜨니 정말 꼼짝없이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보건실을 가득 메움은 물론이요 온 학교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나는 타쿠야의 멀뚱멀뚱한 시선에 이성이 돌아온 그제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파도처럼 몰려오는 쪽팔림을 감당해야 했다. 이건 특급 이불킥감이다.. 쉬발.. 타쿠야를 훔쳐본 내 눈알을 뽑아버리고만 싶었다.
비속어 섞인 비명을 지르고 나니 보건실 안에는 그간 의식하지 못했던 숨이 막힐 듯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달랑 둘만 남으니 평소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던 사이인지라 뻘줌하기 그지없더랜다. 날 뚫어버릴 듯 빤히 응시해오는 타쿠야의 시선도 한 몫 했다. 무어라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어색할 것 같았다.
흠흠, 난데없이 애꿎은 헛기침을 하며 그대로 자연스럽게 유턴해서 보건실 밖으로 나설려는 찰나..
" 다니엘 자커버스 스눅스 (Daniel Jacobus snoeks). "
타쿠야의 낭랑한 목소리에 그대로 내 발걸음이 붙들렸다. 뜬금없이 왜 남의 이름은 말하고 그런담? 더군다나 내 풀네임은 내 친구들도 잘 모르는데.. 옴마야, 나 소름돋았어. 저 새끼 뭐야..
동상처럼 딱딱히 굳어 간신히 고개만 그 쪽으로 돌리니 태연히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타쿠야가 보였다. 저 새끼.. 범상치 않은 줄만 알았더니 또라이가 분명하다..
" 나.. 알아? "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묻는 내가 웃겼던지 타쿠야가 말간 웃음을 자아낸다.
" 이쁘니까 기억해뒀어. "
....?
.....?
......?
내가.. 이쁜 얼굴이었던가?
아니, 오히려 흔하면 흔한 얼굴이지 결코 이쁜 얼굴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나 식구들조차 입을 모아 넌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라 말하겠는가.
근데 이쁘단다.
이쁘단다.
내가, 이쁘단다.
보건실 옆 벽 면에 붙은 거울이 당혹스러워 하는 내 얼굴을 비추는 것이 빤히 보였다. 오늘 아침과 변함없는, 여전한 내 얼굴인데..
" 이뻐,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제일. "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말을 재차 내뱉으며 타쿠야는 마냥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