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사는 도부자
10
알아가기
(※필독: 글 중 여자 주인공의 친구인 최안나는 여러분들의 여자사람친구 중 친하고 소중한 인물 한명을 떠올리면서 읽으시면 아주 좋소! )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커플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 참을 수가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공식적인 솔로인 나에게 커플이란 용서 할 수 없는 존재다. 이 분노를 나누기 위해 같이 알바하는 박찬열과 커플들을 저주하려고 했는데
그럴려고 했는데..
분명..
그럴려고...
했는데...
" 음~ 그렇구나 "
뭐가 그렇구나야... 그 말에 등 쪽부터 정수리까지 오소소 돋는 소름
원래 내가 커플들은 다 사라져버려야햇! 이라고 했다면 맞아 커플들을 다 쥬깁시다! 라고 맞장구쳐줘야 할 놈이었다. 평소에 핸드폰 잘 붙잡고 있지도 않았고 시종일관 싱글거리지도 않았고 내가 병신짓을 하면 온갖 욕을 날려줬을 놈인데 이상하다. 정말
이건 진심이다.
" 열이 존나 약 쳐먹었니?"
그래! 이럴때엔 충격요법이지! 빨리 화 내라고! 화! 내! 하지만 내 거친 말에도 박찬열은 아랑곳않고 입가에 인자한 미소만 띄웠다.
" 그런가봐~ 열이 약 많이 먹었나봐~ "
...
주말동안 도같은 걸 닦았나?
아니 대체 어..어떤 약을 먹으면 저렇게 성질을 죽일 수 있는걸까, 그 약 나도 좀 먹고싶습니다만? 박찬열에게 약 구입처를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녀석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 사랑의 약~ "
뭐래
저 놈 새끼 저거, 보통 정신 나간게 아니다. 또라이조 톡에서 가장 말 많이하는 놈이 저 놈인데 요즘 톡도 잘 안하고 해도 맨날 천사 누나~ 천사 누나~ 거려서 대체 천사 누나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리터소프트 고객지원 부서에서 사원인 26살 누나라고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다.
그 천사 누나가 내 생각에는 카페에 왔었던 그 언니 같은데, 아마 저 상태가 시작된게 그 언니를 봤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무튼 애 상태가 굉장히 메롱이 됐다는 건 확실하다. 저런 거지같은 상태로 일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다른 일꾼이 필요하다. 좀 더 성실하고.. 제대로 된...
" 약은 그만 쳐드시고 오세훈 오늘 학원 가? "
" 으음~ 훈이 오늘 학원 안 가~ 그리고 요즘 학원 막 빠지던데~ "
오호라 오세훈 딱 걸렸다. 더이상 박찬열과 말 할 가치가 없어 등을 돌리고 재빨리 톡을 했다.
역시 종강맞이 잉여는 톡을 보내자마자 확인했다.
니 친구 열이가 그럼
나이스, 까짓거 하루종일 카페에 붙어있을텐데 시간 남으면 해주면 되지
박찬열보다 더 쓸만한 일꾼이 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모한테 박찬열말고 오세훈 쓰자고 할 걸, 애초에 영어학원 다닌다고만 안했으면...
쓰레기통을 비우라고~비우라고 했건만 우리 열이는 이렇게 탱자탱자 놀고있네~ 열이 받은 나는 손님 앉는 테이블에 앉아 싱글벙글 거리는 박찬열의 머리를 조금 세게 밀었다.
" 내가 쓰레기통 비우라고 말했지 찬열아 "
어금니를 물고 낮게 말해줘서야 말귀를 알아들은 박찬열이 ㄱ..그랬었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 비우고 니가 거기 안에 들어가면 되겠다
눈을 쫙째고 박찬열이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고있는데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손님이 물 밀듯이 들어왔다. 내가 눈을 때는 건 불안하지만 손님이 이만큼인데 양심이 자취를 감추고 증발하지 않는 이상 농땡이는 안피우겠다 싶어 나도 다시 바쁘게 커피를 내렸다.
그렇게 한참 주문을 받고 정신없이 커피를 만들어낼 때 였을까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지 않은 채 주문을 받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이요 "
점심시간에 이렇게 찾아오는건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웬일, 내심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말을 했다.
" 점심 먹고 시간내서 왔어요, 점심 때도 바쁘네요 "
" 어쩌면 저녁 때보다 점심 때가 더 바쁠지도 몰라요 "
우리 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만 보면 실실 웃었다, 아마 오세훈이 이 꼴을 봤더라면 박찬열과 다름없다 했겠지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여기서 10분이고 1시간이고 이렇게 마주보고 서있을 수 있지만 다른 손님들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다는게 아쉬울 뿐이다.
주문하고 나서도 테이크 아웃이라 그런지 매일 앉던 고정석에 안가고 가만히 카운터 옆에 서서 커피 내리는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도경수 씨
" 다 되면 불러드릴게요 "
" 아뇨, 전 이게 좋아요 "
뭐, 자기가 좋다는데 굳이 가라고 할 이유가 없이 빙그레 웃고 말았다.
조금씩 회사원들이 모두 빌딩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카페에 손님이 줄어들 때 도경수 씨 또한 들어가보겠다고 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잠깐이지만 얼굴 본게 어디야,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구나
근데 왜 오세훈은 안오지? 혹시 날 엿먹이려고 오겠다고 해놓고 안오는ㄱ
" 야!!! 박찬열!!! "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오세훈, 심장이야;;
오세훈은 평소에 인사 대신 하던 훈이 왔어도 안하고 곧장 홀을 청소하고있는 박찬열에게 달려가 무자비하게 놈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맞은 박찬열은 오세훈한테 얻어터지면서 찌질이같이 구석까지 밀려갔다.
" 뭐야! 갑자기 오자마자 왜 때려! "
" 니가 말했지 나 오늘 학원 안간다고 "
지가 커피에다 와플주면 온다고해놓고선 기껏 와가지고 저 지랄이야
" 훈이 오세훈이 진정해 "
내 말에 오세훈은 입을 비죽 내밀고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는 내게 훈이 왔어, 라고 인사했다.
그래 인사가 너무 빨라서 눈물이 나는구나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오세훈은 몸 좀 녹이라고 냅두고 멀대같이 오세훈을 흘겨보는 박찬열을 불렀다. 코를 찡긋거리며 강아지마냥 달려오는 박찬열이 이제는 커피 만드는 것에 대해 더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내가 안나왔을 때 이모가 고생하셨다고 하시더라
.
.
.
.
" 오오~ 박찬열 이제 좀 하네 "
몇시간에 걸친 커피 뽑기 강연의 끝 드디어 박찬열은 에스프레소는 가볍게 내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커피는 내가 내린 커피보다 맛이 없지만
당근과 채찍, 그동안 온갖 질책을 하며 채찍을 줬다면 지금은 당근을 줘야 할 때 겠지, 잘했다는 뜻으로 박찬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럼 또 박찬열은 좋다고 헤헤 거리며 자기가 뽑은 커피는 자기가 먼저 마셔보겠다고 후룩 넘기는데
" 악! 뭐여 이게! 존나 써! "
" 조용히 해, 손님들 계신데 "
당연히 에스프레소가 쓰지 이 병신이...
박찬열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열심히 잡일을 해주었던 오세훈을 테이블로 불러앉혔다. 몰래 사다놓은 재료로 만든 샌드위치, 항상 먹던 카라멜 마끼아또와 함께,
오늘은 비교적 힘든 창고 정리를 했을테니 많이 고단했을것이다. 예상대로 오세훈은 와아! 하며 테이블로 뛰어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 진심 나 오늘 개힘들었거든,보상은 이걸로 절대 안되지 "
하긴 그렇다. 그런건 박찬열을 시켰어야하는건데 오늘 커피 내리는 걸 배우느라 많이 돕지도 못하고 알바도 아닌 애꿏은 오세훈이 다 떠맡아 해줬으니
" 나중에 치맥 쏠게 "
그제야 오세훈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쪼로록 마셨다. 역시 다른 남자애들 같았다면 돈으로 달라고 할텐데 전봇대 브라더스는 친해서 그런가 먹을 걸로도 쉽게 해결되니 참 좋은 일꾼들이다.
이만 퇴근시간에 임박할 때가 된 것 같아 카운터로 돌아가려고하자 오세훈이 에헤이~ 하며 나를 붙잡았다.
" 경수형하고는 어떻게 돼가? "
지 연애도 못하는게 꼭 남의 연애에만 관심이 많아요.
" 그냥 그렇지 뭐... "
" 무슨 대답이 그래, 서로에 대해 관심이 더 깊어졌다든가 그게 아니면 서로에 대해 더 알게되었다든가 "
... 관심이 깊어지긴했지... 알게된 건...모르겠다.
내가 도경수 씨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내가 아는 거라곤 이름이 도경수라는거 그리고 .. 리터소프트 사원이라는 것? 또또 벤츠를 타고 다닌다는 거, 그리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도경수 씨에 대해 아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그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 왜 아직 아는게 이것 밖에 없을까
" 야 장난이야 장난!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그러냐 "
오세훈은 심각해진 내 표정에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는 진짜 심각하거든,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사람에 대해 아는게 없다는 건 심각하지않나
하하 웃고는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오세훈은 내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않자 이만 창고 좀 마저 정리하러 가야겠다고 자리를 떴고 나는 한참동안 가만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퇴근시간을 맞아 밀려들어올 손님에 준비하기 위해 카운터로 겨우 걸음을 옮겼는데 주방 쪽에서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렸다. 귀를 찌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더니 열심히 오세훈과 같이 창고 정리를 하는 박찬열의 핸드폰 되겠다.
" 박찬열! 너 전화온다! "
박찬열은 빼꼼 창고에서 머리만 빼고 말했다.
" 누군지 확인해주라! "
내가 착하니까 해준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잡아채 액정을 들여다보니 익숙한 이름이 화면이 띄워져있다.
[ 최안나 ]
안나? 요즘 연말이라 남친이랑 깨가 쏟아지게 여기저기 쏘다니는 그 안나? 얘가 갑자기 왜 이 시간에 박찬열한테 전화를 걸었지
" 누군데 그래 "
박찬열은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박스를 옆에 두고 자신의 핸드폰을 채가서는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우리 둘이 핸드폰만 보고 어리둥절해있으니 오세훈까지 합세해 왜그래 하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끊길 것 같아 빨리 받아보라고 재촉하자 박찬열은 검지를 입술 중앙에 가져다 대고는 일순간 정적을 만들어냈다.
" 여보세요? "
전화를 받았지만 말이 없는 안나, 우리는 숨을 죽이고 전화 너머로 들리는 잡음에 집중했다.
" 최안나? "
「 ㅎ..ㅡ...흐... 박찬녈... 」
작게 들리지만 분명 안나의 목소리는 간절히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박찬열이 마저 말을 이어갔다.
" 최안나? 너 왜 그래? "
「 나는.. 모르겠다.. 내가 걔를 많이 알았던건지...」
걔?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니 오세훈도 몰라 라고 입모양으로만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 안나를 울렸을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안나의 말을 들었다.
「 나는 걔를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그 새끼가 나한테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줄 알았는데... 」
이제야 뭔가 조금씩 알 것 같다.
「 나는 걔한테 다 줬는데... 진짜..다...ㄷ.. 」
" 야! 정신차려! 너 어디야? 어딘데! 갈게 "
안나의 흐느낌이 멎어가고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옆에 있던 오세훈이 대신 소리쳤다. 아무래도 오늘 도경수 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할 것 같다. 빨리 박찬열이 매고있던 앞치마의 매듭을 풀어주고 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 너네 일단 먼저 가, 나는 퇴근 시간 끝나고 갈게, 안나가 어디라고 했지? "
" 종로 3가역 쪽이라고 했는데 일단 출발하면서 안나한테 한 번 더 전화해보게, 너 올 때 우리한테 전화해 "
그렇게 애들을 보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들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주문을 받으면서도 커피를 내리면서도 마음은 이미 종로 3가역에 가있었다. 대체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길래 안나가 이러는걸까, 카운터 앞에만 서있으면 항상 머릿속을 가득메우던 도경수 씨가 오늘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모가 없는 카페 모든 일을 다 소화하려다보니까 살짝 힘이 버거워진다. 손님들이 줄어드는게 눈에 보이고 슬슬 빨리 마감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만 더 조급해졌다.
오늘 도경수 씨가 차라리 야근을 해서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으니까, 앞치마를 벗고 마지막으로 받은 손님의 커피를 다 만들었을 때,
" ○○씨, "
도경수 씨가 카페에 도착했다. 평소와 다르게 손님없는 한적한 카페의 모습에 당황한 도경수 씨의 표정
" 바닐라 라떼 나왔습니다. "
손님이 커피를 받고 나가는 모습까지 보고나서야 카운터에서 나와 도경수 씨에게 말했다.
" 미안해요 도경수 씨, 오늘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빠서 먼저 들어가보셔야 겠네요 "
나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려던 그의 손이 뻘줌하게 내려갔다. 그 새끼 손가락 꼭 잡고 싶은데 지금은 여유가 안되네요 미안해요.
그 후 아무말 없이 그는 카페에서 나와 내가 카페 문을 잠그는 것 까지 지켜보았다. 결국 먼저 걸음을 옮겨버린 건 나지만, 바쁜 마음에 어떤 말을 듣고 싶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은 탓에 도경수 씨가 섭섭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전철에 몸을 싣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꺼두었던 핸드폰을 키자마자 보이는 부재중 전화 7통, 모두 안나였다. 그것도 박찬열에게 전화가 왔을 때보다 훨씬 전, 많이 힘들었겠구나
괜히 울컥하려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오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디 긴 연결음 끝에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시끌벅적한 주변 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는 애들이 있는 곳이 식당임을 알게 해주었다.
" 어, 나야 이제 카페 마감하고 종로 3가로 가는 중인데 안나랑 같이 있는 거 맞지? "
「 ...같이 있는 건 맞는데.. 빨리 와야겠다 너 」
" 나도 지금 빨리 가고 싶은데 환승까지 해야돼서, 근데 왜? "
「 최안나 지금 없는 정신 있는 정신 겨우 붙들고 너 찾는데 여기가 15번 출구쪽 ☆☆포ㅊ...야!!! 박찬열 얘 좀..!! 」
오세훈의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헤롱거리는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 ○○야!!!!!! 나 지금 속쌍훼!!!!!! 너무 서뤄워.. 그니까 빨리 와서 내 얘기 점 드러줘..... 훌쩍 」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겨버렸다. 다행히도 15번 출구 ☆☆포차라는 건 알아냈다. 남은 건 빨리 그곳으로 가서 안나를 달래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뿐, 그저 덜컹 거리는 전철 안에서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시간을 재촉 할 수 밖에 없었다.
" 아, 드디어 오시네 "
가게 가장 구석자리에 기빨린 얼굴을 하고 있는 오세훈이 보였다. 술은 안마셨는지 용케도 제정신을 붙들고 있네
옆에 있는 박찬열은 자신이 있다는 존재감을 알려주 듯 으악! 소리치며 술에 취에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안나를 때어내기 바쁜 모습이었다. 나는 한숨돌리고 박찬열에게 안나를 토스 받았다.
" 안나야, 나 왔어 "
사다코 처럼 치렁치렁 얼굴을 가리는 앞머리를 걷어 내주며 말을 거니 먼저 내 얼굴을 본 안나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 흐으윽 ○○야... "
대학와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여자친구로서 나는 안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존재라는 걸 알고있다. 그래서 더욱더 전화를 안받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심하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안나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며 안나를 달래니 순식간에 잠잠해진 상황에 전봇대 브라더스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네들은 여자 다루는 기술이 부족해, 연애는 멀었다 이것들아
" 나 헤어졌어... 그 새끼가 나는 진짜.. 존나 점잖은 새끼인줄 알았어... "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안나, 역시나 이별 문제다. 안나의 남친, 아니 전남친은 도경수 씨와 같은 회사원이었다. 봉사 활동 때 만난 인연을 이어 온 사람으로 CC는 안된다는 안나에게 걸맞는 남자친구였다.
" 진짜 좋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 했거든? "
푸후, 술기운을 내뱉는 안나의 뒷말에 우리는 모두 귀를 기울였다.
" 성실하게 일도 하고 차도 있고 데이트 비용도 다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하고 나는 그냥 대기업에 다니니까, 그래 그럴 수 있겠다 했어 "
"... "
" 그런데 나 그새끼 전여친 만났어, "
갑자기 웬 전여친인가 싶어 테이블 위에 놓여진 골뱅이 무침을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 나보도 참 안됐다고... 왜 어린 애가 그런 쓰레기를 만나냐고... 막 그러더라? 나는 모르는 년이 그러니까 빡쳐서 니가 뭔데 그러냐고 화냈지 "
" ... "
" 말해주더라고... 다 말해주더라구... 그 새끼가 먹는 거... 입는 거...타고 다니는 거...하나하나 다.. 빚내서 산거래.. "
아까 전 안나의 눈물이 볼 위를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던 거라면 지금은 뚝뚝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떨어졌다. 전봇대 브라더스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번에 얼굴 한 번 마주쳤을 때는 그냥저냥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서글서글한 얼굴 뒷면에 그런 모습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 근데 또 왜 빚낸 줄 아냐? 다 여자 꼬실려고!!! 나말고 여자가 더 있대! 나도 안 믿었어!안 믿었는데... 안 믿을려고 했는데...내가 봤어..오늘... 그새끼 이거를!!! "
안나는 새끼 손가락을 거칠게 흔들어 보이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그리고나선 테이블 위에는 안나의 흐느낌을 제외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그 어떤 말을 해줄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가장 최선일까,나는 말로 하는 대답 대신 콩알만한 소주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한 잔, 두 잔, 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횟수가 늘어나자 박찬열이 미간을 찌푸리고 손에 있는 잔을 뺏어갔다. 친구라고 또 걱정은 해주네, 취기가 올라 알딸딸 해진 기분에 옆에 있는 안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내 친구 울지 마
" ○○야... 내가 진짜 너 소중히 생각해서 말해주는거야... "
" ... "
" 너 요즘 만나는 남자.. 진짜 잘 알아보고 만나... "
요즘 만나는 남자... 도경수 씨...
" 너도 나같은 상처가 없었으면 좋겠어... 너는.. 좋은 친구니까... "
그리고 안나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안나의 반응이 없어도 나는 계속 토닥토닥, 이 곳에 나와 안나밖에 없는 것 처럼 주변을 다 지워버리고 한참을 조용히 토닥토닥,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오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찬열에게 눈치를 주고는 내게 속삭였다.
" 늦었다. 최안나는 우리가 데려다 줄테니까 바로 앞에서 바로 택시 잡고 들어가고 "
박찬열은 익숙하게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안나를 업었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 계산하는 오세훈, 힘없이 축 쳐진 안나, 그런 아이들이 포차를 나가는 모습만 지켜보기만 하던 나, 술맛도 떨어졌겠다 이만 집에 들어가야하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도경수 씨였다. 톡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지고말았다. 우리 엄마도 연락을 안하는데
사근사근 숨을 쉬며 멍하니 액정을 들여다보기를 한참, 화면이 꺼지려고 할 때 또 도경수 씨에게 톡이 왔다.
내가 답장을 할 틈도 없이 바로 도경수 씨에게서 온 전화에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딱 5번이었다. 술기운에 불규칙해진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는데까지 전화가 5번 울렸다.
「 왜 봤으면서 답장을 안해요 」
살짝 상기된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터져나오자 그동안 꾹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남자친구한테 차인 건 내가 아닌데
「 집이죠? 잘 들어간 거 맞죠? 」
" ... 지금 종로 3가역.. 15번 출구에요 "
도경수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데리러 와달라는 소리에요. 아니면 택시타고 가구.. "
「 빨리 갈게요. 기다려요 」
그는 딱 그 말만하고 전화를 끊었다. 처음해본다. 도경수 씨하고 전화는 이게 처음인데... 어떻게 이렇게 끝나...
거기다 여기저기 도란도란하게 떠들고있는 사람들사이 궁상맞게 혼자서 테이블 하나 차지하고 있다니 나도 참 처량하다 처량해
분명 애정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외로움을 타는 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정신차리자는 의미의 도리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온다고했으니까 빨리 가야지, 가서 기다려야지, 도경수 씨는 맨날 나 기다려줬으니까
추운 줄도 모르고 15번 출구 앞쪽에 쭈그려 앉아 도경수 씨를 기다렸다. 연말이라서 그런가 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가 각자의 연인을 만나고 추억을 만든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뭘하는 걸까, 의문이 들 때였다. 보도블럭에 꽂힌 내 시야에 새까만 그림자가 하나 멈춰선 건
" 일어나요 "
빨리 왔네요. 좀 걸릴 줄 알았더니, 헤헤 웃으며 다리를 일으켜세워 급하게 나온 티가 줄줄 흐르는 도경수 씨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악수를 건내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예요, 23살이구 히터대 3학년이에요. 엄마는 가정주부시고 아빠는 회사원! 차장이세요 또 저는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그 카페는 이모꺼에요! 이모가 예술하셔서 돈 짱짱 잘 벌거든요! 또또 ... "
" 가요 "
내 팔목을 이끌며 자기 차로 데려가려고하는 도경수 씨의 손을 아프지않게 쳐냈다.
" 제 소개 했으면 그 쪽도 알려주셔야죠 "
" 갑자기 왜 이래요 "
말문이 막혔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럴까,
시선을 아래로 하고 한동안 눈만 꿈뻑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나는 도경수 씨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러는 거에요? "
" .... "
도경수 씨는 말이 없었다. 거봐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잖ㅇ
" 도경수, 27살 리터소프트 기획부 사원이에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시고 아버지는 리터소프트 사장님이세요. 그리고 강남구 도곡동에 살고 위로 형 하나 있는데 형은 외국에서 정치외교학 공부하고 있구요. 또 어떤 걸 알고 싶은데요. 초등학교 때부터 말하라고 하면 할게요 "
술술 풀어내듯이 말을 하는 그를 보니 이야기를 꺼낸건 나지만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술기운? 아니면 혼란스러움? 다시금 도경수 씨를 바라보자마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흉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자 조심스럽게 내 팔을 잡아 내리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 너무 다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 ... "
"우리는 지금도 알아가는 중이고 앞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 갈 시간은 많잖아요. "
도경수 씨의 말에 내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그는 따뜻하게 양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아주었다.
" ○○씨 펑펑울면 달래줘야한다는 부탁 이제 들어주네요 "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토닥여주다가 이렇게 위로를 받으니 더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눈물에 잠겨 입 밖으로는 못꺼내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고마워요 라는 한 마디
"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집에 데려다 줄게요 "
처음 안긴 그의 품은 따뜻했다.
*
경수는 그 날 잡았던 새끼 손가락의 감촉이 잊혀지지않았다. 자고 일어나서도 새끼 손가락을 들어보고 그녀 생각, 밥 먹다가도 새끼 손가락만 보면 그녀 생각
빨리 이 연애의 진전을 종인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준비해 회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 출근하지 않은 한적한 시간에 사무실로 들어서면 항상 옆 책상에는 종인이 있었건만. 요즘 들어 종인의 출근이 조금씩 늦어졌다. 생각해보면 딱 어느 순간부터 인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은 그 때부터 종인의 성격이 급격히 까칠하게 변했고 같이 점심먹으러 가자며 귀찮게 경수를 조르지도 않았다. 경수의 연애사에도 무관심 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 민대리가 부르면 민대리님~ 민대리님~ 하던 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로봇처럼 딱딱해져 주변 여사원들에게서 뒷말이 나오기 일쑤였다.
원래 점심정도는 혼자 먹었던 직장 내 왕따인 경수가 함께 점심을 먹자며 졸라대던 종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버려 서로를 기다리면서 까지 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하는게 어느새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는데 요즘의 종인은 점심 시간만 되면 홀연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런 종인 덕분에 경수는 회사만 가면 기분이 꽁기꽁기해지고 만다. 먼저 친해지고 한게 누군데
혼자 먹던 사람이 동료와 함께 먹는건 어렵지 않지만 여러 사람과 같이 먹던 사람이 혼자 먹는 건 어렵다고 오랜만에 구내식당에 혼자 가니 괜히 머쓱해져버린 경수는 빠르게 밥을 먹고 남은 시간동안 그녀를 보며 힐링을 해볼까 했다.
퇴근 시간에만 카페에 사람이 많은 줄 알았더니 점심 시간에도 사람이 장난이 아니다. 우리 ○○씨 많이 힘들겠다. 가서 주문해도 되려나 하고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얼굴이 보고 싶은 걸, 두어명 있는 줄에 서 열심히 주문 받으랴 커피 만드느랴 정신 없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오늘 찬열군은 열심히 청소하고 있고, 음, 서로 붙어있지 않는 모습! 굉장히 마음에 든다.
가만히 서있다가도 발을 동동 구르며 차례를 기다려서까지 겨우 얼굴을 마주하는데 워낙 정신이 없는 터라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받는 ○○ 씨
"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이요 "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나 좀 알아달라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점심 먹고 시간내서 왔어요, 점심 때도 바쁘네요 "
" 어쩌면 저녁 때보다 점심 때가 더 바쁠지도 몰라요 "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밝게 웃는 모습으로 맞아주는 ○○씨
... 점심 때 카페 오는 건 자제해야하나..시간이 시간이라서 지금 많이 말 못하니까 이렇게 보고만이라도 있어야지
" 다 되면 불러드릴게요 "
" 아뇨, 전 이게 좋아요 "
그녀가 주문을 다 받고 바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자하니 멍하게 빠져든다. 앞으로 자리에 앉지말고 이렇게 서서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기가 무섭게 민대리로부터 빨리 들어오라는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김종인 씨가 딱딱해지고 나서부터 자기한테 아부 떨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이 모양이다. 전에만 해도 자기는 메뉴얼에 있는 지정 점심시간 5분,10분씩 늦게 들어왔으면서...
짜증을 꾹꾹 누르고 아쉽게 ○○씨에게 인사를 건냈다.
" 이만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저녁에 봐요.
때마침 회사로 들어가려 하자 앞서 가고 있는 김종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요즘들어 축 늘어진게 영 보기가 좋지않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뒤로 살짝 다가가 김종인 씨, 라고 불어보았지만 이어폰 때문에 들리지않는 건지 대답이 돌아오지않았다. 김종인 씨는 분명 곁눈질으로도 알아볼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땅만 쳐다보고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나란히 엘레베이터를 타고 사무실까지 와서도 김종인 씨와 나 사이에는 정적만 흐르고, 답답하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다녔지만 주변 사람 하나가 아무 이유없이 이렇게 돌아서니까 숨구멍도 없이 답답한 느낌, 그냥 빨리 회사가 끝났으면 좋겠다. 보고온지 얼마 안됐지만 빨리 그녀가 보고싶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경수는 오늘도 신나게 민대리에게 까였다. 자잘한 실수였다. 그냥 따끔한 말 한마디면 될 정도로의 실수, 그런데 오늘은 홍보팀에 있는 김준면 대리도 와서 경수를 깠다. 이유는 사장 아들이라서,
사장 아들이 죄였다. 다른 사람들은 죄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니 뭐니 하지만 사장 아들이라는 이유로 다른사람들은 편견을 갖고 자신을 대하기 쉽상이었으며 심지어 태어나서부터 그냥 돈이 많으니까 다 즐기고 살 수 있는 놈들이라면서 자신을 멸시하는 눈초리도 받을 수 있었다. 다 돈 때문이었다. 돈 때문에 경수는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틀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어놓았다.
하지만 그 틀을 깬 사람은 고등학교 때 친구인 지금 연락하는 몇 안되는 친구가 있었고 또, 지금 옆에서 빠르게 퇴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는 종인이 있었다.
이제 김종인 씨는 인사도 안한다. 회사에 출근하면 왔네 도경수 씨! 퇴근 할 때면 잘가 도경수 씨! 적절히 선을 그으려 존댓말을 하자고 했지만 무참히 씹어버리고 반말을 하던 정겨운 김종인 씨의 인사는 없어졌다. 급우울해진 나머지 괜히 팀원들의 눈치를 보다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빨리 ○○씨 보러가야지
" 미안해요 도경수 씨, 오늘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빠서 먼저 들어가보셔야 겠네요 "
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왠지 카페에 들어오는데 맨날 서너명 씩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한 명만 달랑 있더라니 거기다 찬열군도 없었다. 나는 그냥 마감을 좀 빨리 하는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대체 그 바쁜 일이 뭐길래 ○○씨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면서까지 다급해 하는 걸까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그냥 뒤를 쫓아 졸졸 그녀를 따라가기만 했다. 카페 문을 잠그고 내게 가볼게요.라고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냐고, 혹시 조금 먼 곳이라면 데려다 줘도 되겠냐고,
○○씨 태우려고 히터도 완전 뜨겁게 틀어놨는데... 운전석에 앉아 히터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대 손을 녹이다가 이내 확 꺼버렸다. 그녀가 없으니까 의미가 없다. 기름 아깝게,
오늘 내 주변에는 이상한 일만 있는 것 같다. 김종인 씨는 나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나 ○○씨는 오늘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가버지질 않나 이러니까 나까지 우울해져버린다. 핸들을 잡는 손길이 무기력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기분탓일까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마치 감기 걸리기 전 증상같이
" 나왔어 "
경수는 거실에 있는 자신의 엄마에게 대강 인사만하고 바로 방에 들어가버렸다. 항상 이쁘게 웃으며 집에 들어오던 아이였는데, 경수의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풀썩 침대에 누워버린 경수는 혹시나 해서 먼저 핸드폰을 살펴보았지만 톡은 커녕 깔끔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씨도, 김종인 씨도
연락없는 핸드폰만 붙잡다가 신경질적으로 저 구석에 던져버렸다. 이렇게 외로운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다. 한 번 사랑을 알고 정을 알고나니 새삼 주변의 관심이 없다는 건 사람을 처량하게 만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도 조금씩 아파오고 얕게 기침도 나오기 시작했다. 차에서부터 으슬으슬하다 했더니 정말 감기인가보다. 안되는데,
○○씨 옮는데....
그렇게 잠이 든 경수가 깨어났을 때에는 완전히 하늘이 깜깜해졌을 때였다. 쳐봤자 3시간도 못잤지만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경수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그녀였다. 이렇게 밤이 되도록 집에 안들어간 건 아니겠지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들어 눈을 찌르는 환한 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씨에게 톡을 보냈다. 다행히 바로 톡을 확인하는 그녀에 조금 안심이 되려고 하는데 웬만하면 확인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는데 오늘은 확인의 의미인 1만 사라지고 답이 없다.
순간 혹시 납치된 건 아닐까 사고라도 당한 걸까 하는 여러가지 상황이 머릿속에 지나가다가 말이 씨가 된다고 생각조차 지워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불안감에 손톱까지 딱딱 뜯으며 기다렸지만 계속 1만 사라질 뿐, 참지 못한 나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순하고 연속적인 컬러링 끝에 연결된 전화에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 이렇게 받을거면서 왜 답장을..!
" 왜 봤으면서 답장을 안해요 "
그동안 그녀에게 이렇게 쏘아대 듯 말한 적이 없는데 너무 조급한 마음에 말이 날카롭게 나가버리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고 아무 소리 없는 그녀에게 집중했다.
" 집이죠? 잘 들어간 거 맞죠? "
제발 대답 좀 해줘요.
「 ... 지금 종로 3가역.. 15번 출구에요 」
평소같지 않게 살짝 꼬인 발음으로 대답하는 ○○씨,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말 할 걸 왜 바보같이 그거 하나 못 말해서... 감기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데리러 와달라는 소리에요. 아니면 택시타고 가구.. 」
" 빨리 갈게요. 기다려요 "
진작에 이래야 했을 걸, 띵 한 관자놀이를 몇번 꾹꾹 누르다가 끊어진 전화에 바로 일어나 점퍼를 챙겨입었다. 더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운전하는 내내 아픈 머리는 둘째치고 추운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경수의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신호에 걸릴 때마다 연신 시계를 보고 출발하고 또 신호걸리면 시계만 쳐다보다가 출발하고 그러길 한참 어느새 그녀가 말한 종로 3가역 15번 출구에 다다랐다.
근처에 대충 차를 세워놓고 뛰어다니며 그녀의 그림자를 찾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이 시점 놀러나온 수많은 사람들 중 ○○씨는 어디에 있을까,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겨우 저 멀리 쪼그려앉아 바닥만 보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저릿해져왔다. 무슨 일로 왜 저러고 있는지 나한테 알려줄 수 없는 그런 일인지
" 일어나요 "
○○씨에게 한발짝 다가갈 때마다 억지로 나오려는 기침을 삼키고 말을 했다. 그녀는 내가 말하자마자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해주었다. 정말 화내려고 했는데, 진짜 연락 안받아서 미워서 화내려고 했는데... 화도 못내겠다.
○○씨는 문뜩 내게 악수를 건내고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예요, 23살이구 히터대 3학년이에요. 엄마는 가정주부시고 아빠는 회사원! 차장이세요 또 저는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그 카페는 이모꺼에요! 이모가 예술하셔서 돈 짱짱 잘 벌거든요! 또또 ... "
" 가요 "
그녀에게서 잔잔히 풍겨오는 알콜 냄새, 하루종일 힘들게 카페에서 일했으면서 술마시고 얼마나 더 힘들려고, 속상한 마음에 손목을 이끌고 차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쳐내며 말했다.
" 제 소개 했으면 그 쪽도 알려주셔야죠 "
" 갑자기 왜 이래요 "
미안해요 오늘은 몸이 안좋아서 말이 이쁘게 나가지 않아요. 기운없는 목소리로 ○○씨에게 되물으니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 나는 도경수 씨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러는 거에요? "
그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얼마나 알고, 그래, 얼마나 알고
" 도경수, 27살 리터소프트 기획부 사원이에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시고 아버지는 리터소프트 사장님이세요. 그리고 강남구 도곡동에 살고 위로 형 하나 있는데 형은 외국에서 정치외교학 공부하고 있구요. 또 어떤 걸 알고 싶은데요. 초등학교 때부터 말하라고 하면 할게요 "
○○씨가 알고 싶은게 이런 거에요? 나는 이런게 아닌데, 나는 그냥 사람 자체를 알고싶고 지금 천천히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씨는 그게 아니였나요? 나는 나름대로 ○○씨를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였나요? 대답 좀 해봐요.
그녀는 이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마 그녀가 알고싶었던 것도 이런 건 아니였을 것이다.
" 너무 다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도 알아가는 중이고 앞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 갈 시간은 많잖아요. "
우리 부모님도 서로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세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잘 알 수가 있겠어요.
우리 사이에는 적막이 가라앉고 ○○씨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언젠가 그녀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펑펑 울면 도경수 씨가 달래줘야해요 ' 슬픈 영화를 보거나 그런게 아니라면 울게 만들 일은 없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건만, 작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안았다.
" ○○씨 펑펑울면 달래줘야한다는 부탁 이제 들어주네요 "
토닥토닥, 내가 미안해요. 도경수가 나빴네, 여자나 울리고,
조금씩 잠잠해지는 그녀를 아직은 놓기 싫다. 나를 더 알고싶어 했던 것 뿐인데 얼마나 알고 이러는 거냐는 말이 서로 모르면서 왜 이러고 있냐는 말로 들려서 멋도 모르고 화가 났어요. 미안해요.
이렇게 ○○씨를 안고있으니 지끈거리던 머리도, 몸을 휘감았던 무기력함도 낫는 것 같다. 평생 이러고 싶다.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좋은데
그런 의미로
"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집에 데려다 줄게요 "
*
길디 긴 포옹의 시간이 끝나고 차 안, 찬바람,그리고 눈물과 함께 씻겨져 내려간 술기운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경수 씨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계속 목을 큼큼 거리는 도경수 씨
" 감기 걸렸어요? "
" 회사에서 옮았나봐요, "
감기 걸려서 아픈 사람을 불러내다니...○○○..!! 넌 천하의 나쁜년이야!!!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도경수 씨의 눈치를 보게됐다.
" ..미안해요.. 아픈데.. "
운전을 하던 그는 픽 웃고는 말했다.
" 아뇨, 전 오히려 이렇게 나와서 ○○씨하고 안아도 보고 좋은 시간이었네요 "
" 무슨 소리에요! 그냥 저 역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빨리 집에들어가서 약먹고 쉬어요 "
ㅁ..무슨 말을..!!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에 입을 가리고 대답했다. 도경수 씨는 앞만 보던 눈을 내 쪽으로 슬그머니 굴리더니 또다시 웃었다.
" 또 안아주면 나을 것 같은데, 아픈데 이렇게 ○○씨 데리러도 왔는데 ... "
도경수 씨 이렇게 사람 약점 찌르기 있기 없기....
결국 집 앞까지 데려다 준 도경수 씨와 인사 대신 포옹으로 헤어졌다는 건 안비밀
소심하게 스킨쉽 욕심 내는 능글 도부자 X 그런 스킨쉽이 나쁘지만은 않은 카페 노예
*
사담
하이 여러분 리히터예요! 이번 편도 늦게 돌아왔네요..^... 돌은 달게 받겠습니다...핰...
이번 편은 혹시 느끼실 수 있으신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필력에 조금 집중했습니다. 오늘 분위기도 분위기인만큼 전체적으로 글을 가볍게 만지고 싶지 않더라구요ㅎㅎ 그래도 제 로코본능은 어쩔 수 없다능!! 고로 끝부분에서 그 본능을 승화한다!
근데 저번 편 여러분 반응 진짜 대다녜!!!!!!!!!!!!!!!!!!!!!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댓글 받아본 적도 처음이라 일일히 답댓글 달면서 웃음을 감추질 못하겠더라구요ㅋㅋㅋㅋ 진짜 저는 여러분들 댓글하고 반응 먹고 삽니다 ㅠㅠ
맞다 참고로 종인이가 오랫동안 안나왔죠, 사실 경수도 그렇고 종인이도 그렇고 절대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은 인물들이에요. 따라서 다음화는 경수의 이야기도 부분적으로 들려드리면서 종인이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들려드리는 편이 될텐데 다음화에 절대 여주,경수 행쇼! 설렘주의 달달주의!가 없다는 거 알아두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짧게 말할게요 다음 화는 분명 강남 사는 도부자 : 그 남자가 살아온 세상 을 연재 할 예정입니다! 사실 도부자 초반부터 설정했던 이야기고 웬만하면 읽어주셨으면 하는 편입니다.
또 요즘 연말에다 컨디션 난조로 연재텀이 조금 길어지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다시 사과의 말씀 드리구요.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중간중간 도부자와 상관 없는 단편 업로드하고 곧바로 도부자 업로드 하는 식으로 여러분들이 너무 심심치않게 하려고 합니다!!!
무튼 우리 독자님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감기 조심하시고 빙판길 진짜 진짜 조심하세요! 저 머리 찢어져서 병원가는 사람 이번 겨울 들어서 꽤나 봤거든요 진짜 조심!!!!!!!
여러분 사랑해요!!!!!!!!!!!우리 강남 사는 도부자 많이 사랑해주시떼!!!!!!!!!!!!!!!!!!!!!!!!! ㄷ독자님들 메리크리스마스!!!!!!!!!!!!!!!!!즐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글 중 최안나는 사실 제 실제 친구 이름이에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 연예인 이름을 넣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넣어본 결과 영 아니고 여주 주변에 이쁜여자말고 평범한 여자를 넣고싶어서 결국 이렇게 된겁니다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들은 대체 최안나가 누구여 어떤 인간이여 이러지마시구 그냥 글 중 가상친구라고 생각해주세요!!
[암호닉]
너구리걸님/면하트님/우비님/망고님/카페알바생님/아메리카노님/정수정수연님/바닐라라떼님/굔듀님/뽑뽀님/됴됴륵님/종순이님/몽구님/복숭아님/핫초코님/첸스님
모나리자님/쀼님/2평님/맴매맹님/꽯뚧쐛뢟님/이웃집여자님/제인님/베이비파우더님/데후니님/안녕님/안열님/랭거스님/6002님/사랑둥이님
암호닉 신청 계속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