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온도, 37.9°C
"백현아!"
농구공을 튕기며 코트를 휩쓸던 찬열은 저 멀리 스탠드에 앉아있는 백현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어두운 그늘이라 제 모습이 잘 안 보일줄 알았던 백현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찬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찬열은 멀리서 저에게 손을 흔드는 백현을 보며 양 팔을 크게 흔들며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나 응원 해. 백현은 꽤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찬열의 의도를 알아 들었는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찬열은 그런 백현을 보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농구공을 들고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찬열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벌써 세 골째 넣고 있었다. 온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찬열은 숨을 헉헉대며 여전히 스탠드에 앉아 구경하고 있는 백현을 쳐다보았다. 찬열은 농구 코트를 둘러보던 백현과 눈이 마주치자 세차게 소리 질렀다. 백현아, 나 봤어?! 백현은 여전히 경기 중인 코트 앞에서 저에게 소리치는 찬열에게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찬열은 환한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농구공이 찬열의 머리를 세게 치고 바닥으로 굴렀다.
"아으…"
"야, 괜찮아?"
찬열은 옆 머리를 짚으며 쭈구리고 앉았고, 경기를 하던 아이들은 생각보다 크게 난 소리에 놀라 찬열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그늘 진 스탠드에 노곤하게 앉아 경기를 관람중이던 백현도 화들짝 놀라며 찬열에게 달려왔다. 찬열은 저를 둘러 싼 아이들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일어나려고 무릎을 폈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괜히 엄살을 부리는듯 해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찬열이다. 백현은 저보다 큰 아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찬열에게 다가갔다.
"찬열아, 괜찮아?"
"응, 괜찮아."
"진짜? 안 아파?"
"어… 좀 아픈 거 같기도 하고…."
"조금만 쉬었다가 해. 응?"
"그럴까?"
찬열은 점차 나아지는 머리에 다시 경기를 하려 했지만, 제 앞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백현의 모습을 보니 경기를 재개할 마음이 사라졌다. 찬열은 우르르 몰려있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쉬었다 온다고 말을 하고는 백현을 데리고 스탠드로 향했다. 백현은 제 어깨에 둘러진 팔을 흘끔 보며 저도 손을 들어 찬열의 허리를 살짝 감아 안았다. 허리에 닿아오는 손길에 찬열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왜 한 눈을 팔아, 바보야."
"너가 있는데 한 눈 안 팔게 생겼냐, 바보야."
"그런게 어디 있어, 이 바보야."
"여기 있다, 이 바보야."
찬열과 백현은 서로 바보라고 우기다가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진짜 바보같다. 둘은 짙게 그늘이 진 스탠드 가장 안 쪽에 붙어 앉았다. 저 멀리 보이는 농구 코트에서는농구공에 머리를 맞은 찬열 때문에 중단 된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땀 범벅인 찬열은 상의 가슴쪽을 잡고 펄럭이며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 백현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 붙은 찬열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손 부채질을 해주었다.
찬열은 제 얼굴 앞에서 파닥거리는 백현의 손을 내린 뒤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껴 잡았다. 잔뜩 열에 오른 찬열은 차갑게 식어있는 백현의 손을 매만지며 허벅지를 베고 벌렁 드러 누웠다. 백현은 무릎을 통통 튕기며 찬열의 앞머리를 쓸어올린 뒤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누구 애인인지, 이마까지 잘 생겼네.
"시원하다."
"바람?"
"아니, 네 손."
찬열은 눈을 감고 이마에 올려진 백현의 손을 제 눈커풀 위로 옮겼다. 완벽하게 시야가 차단 된 찬열은 오른 손에 쥐어진 백현의 손을 꼭 잡으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여름을 알리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 * *
백현이 감기에 걸렸다. 속된 말로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백현이 그 여름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내리쬐는 햇볕에 더워 죽는다며 항상 집 안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놓고 아이스크림까지 거침없이 먹어치우던 백현이었다. 찬열은 언젠가 한 번 백현의 집에 놀러 가서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선풍기를 두 대나 강풍으로 틀어놓고 에어컨 온도를 22°C로 맞춰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팔을 입은 탓에 팔뚝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은 찬열은 제발 에어컨과 선풍기 둘 중 하나만 끄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백현은 절대 안 된다며 강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찬열은 10분도 안 되서 백현의 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찬열은 코를 훌쩍거리며 재채기를 하는 백현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내가 너 에어컨이랑 선풍기 막 틀었을 때 부터 알아 봤다. 백현은 무어라 잔소리를 하는 찬열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냈다.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옆에서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찬열이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백현이다. 백현은 양 쪽이 다 막혀버린 코를 킁킁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에어컨 앞으로 향했다. 찬열은 에어컨 전원을 트는 백현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후다닥 달려가 재빨리 전원을 꺼버렸다. 백현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찬열을 향했다.
"씨이… 나 더워 찬열아아…"
"안 돼. 너 감기 안 낫고 싶어?"
"아니이…"
"그럼 조금만 참아. 나중에 감기 다 나으면 틀자."
"…더운데."
찬열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토라진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더위를 심하게 타는 백현을 아는지라, 마음 같아서는 에어컨이든 선풍기는 빵빵하게 틀어주고 싶지만 호되게 감기에 걸려버린 백현을 보며 이번만큼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찬열이다. 절대 틀면 안 된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찬열의 모습에 백현은 결국 몸을 축 늘어뜨리며 소파에 철퍼덕 엎드렸다. …더워.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집 안의 온 창문을 열어 놓아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백현은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과 소파 앞에 앉아 티비를 보며 히히덕거리는 찬열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박찬열 미워.
한참이나 티비를 보던 찬열이 고개를 돌려 백현을 쳐다보았다. 많이 더운지 혀를 빼꼼 내밀고 헥헥거리는 백현이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찬열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틀기로 했다. 집 안 가득 열린 창문과 방 문을 닫은 찬열이 소파 밑에 쳐박힌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켰다. 에어컨은 전원을 키자마자 시원한 바람을 내뿜었다. 백현은 그제서야 살겠다는 듯 잔뜩 찡그리고있던 표정을 풀었다.
"으아 시원하다…."
"시원해?"
"으응… 진짜 시원하다…"
백현의 말 꼬리가 힘 없이 죽죽 늘어졌다. 찬열은 24°C까지 온도를 내리고 소파 위로 올라가 앉았다. 소파 밑 쪽으로 꾸물꾸물 내려가 찬열이 앉을 자리를 내 준 백현은 고개를 들어 찬열의 허벅지를 베고 똑바로 누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축 늘어진 강아지같던 모습의 백현은 이제야 좀 생기를 찾은 듯 했다. 여전히 코를 훌쩍거리고 가끔 기침을 하는 백현에 리모컨을 들었다 놓았다만 반복하던 찬열이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5분 뒤에 끌거야."
"안 돼애… 진짜 안 돼, 나 더워…."
"그럼 어떡해. 너 감기 걸렸잖아."
백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대답을 뜸 들였다. 어떻게 하면 에어컨을 트는데 감기에 나을 수 있을까? 기어코 에어컨을 못 끄게 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던 백현은 무언가 생각 난 듯 손뼉을 치며 찬열의 허벅지에 베고있던 고개를 들어 상체를 바로 했다.
"찬열아."
"응?"
"우리 키스 할래?"
"뭐?!"
식탁에 놓여있던 미지근한 오렌지쥬스를 마시던 찬열은 백현의 말에 사레가 들린 듯 헛기침을 해댔다. 백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이 벌겋게 물든 찬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찬열은 손에 들린 쥬스 컵을 내려놓으며 가슴을 턱턱 치고는 들썩이는 몸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키스 하면 막 몸의 온도가 올라간데!"
"…근데?"
"그러면 에어컨 안 꺼도 덥잖아! 그럼 감기 안 심해질 수 있어!"
"……"
찬열은 이어지는 백현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얘가 어디서 터무니 없는 말을 듣고 와서는 이러는거야? 찬열은 아까와는 다르게 생기를 보이는 백현의 눈동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근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키스는 커녕 뽀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처음 사귀고 얼마 안 됐을 때 영화관에서 하고, 또 한 번 놀이터에서 한 것이 끝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백현에게 입을 맞추고싶었지만 저도 혈기왕성한 청소년인지라 몸이 주인의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다. 백현과 오랜 시간 키스를 할 때 마다 제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끼던 찬열은 그 때부터 백현에게 입을 맞대지 않았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지만, 키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키스를 하자며 저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백현을 찬열은 어찌 해야할지 몰라 난감할 뿐 이었다. 이번에 키스를 하면 백현이 보는 앞에서 화장실로 달려가 풀고 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해야 해?"
"찬열아아 나 진짜로 더워. 응? 에어컨 끄지 말고, 키스 하자. 응?"
"…너 진짜 후회 안 하지?"
"무슨 후회?"
"아니야, 아무것도."
찬열은 그대로, 저에게 상체를 들이밀고 있던 백현의 뒷목을 잡고 입술을 머금었다. 백현의 입 안 가득 오렌지 향이 퍼져나갔다. 백현은 점점 저를 눕혀오는 찬열의 목에 팔을 걸어 당겼다. 찬열은 저를 끌어당기는 백현의 턱을 잡아 입을 크게 벌려낸 뒤 혀를 더 깊게 집어 넣었다. 백현의 입에서는 막힌 신음이 울려퍼졌다. 찬열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며 뒷 목을 감고있던 손을 내려 백현의 민소매를 들춰내었다.
불타는 여름, 두 청춘도 점점 불 타오르고 있었다.
소야 |
잔망 터지는 백현이ㅠㅠ 말도 안 되죠 갑자기 폭풍키스 ^^;; 원래 이 내용이 아니었는데 도저히 글이 안써져서 내용을 바꿨어요 ㅠㅠ 제가 항상 제목 옆에 쓰는 온도는 찬백이들의 연애 온도입니다 :) 다음 편은 더 높아질거예요 아마도 ^0^ 암호닉 남겨주신 사탕 민트초코 햇님 수녀 감사해요 하트하트 다음편에서 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