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 OST - 은월각
부Period
: 1. 기간, 시대
2. (역사적) 시대, (특정한) 시기
3. 끝, 말기, 종결
4. 마침표, 생략점, 종지부
둥둥둥-
북소리가 경복궁 근정전에 크게 울려퍼지고, 궁중 악단들이 태평소와 해금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오늘은
바로 일년에 한 번,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는 날이다.
중요한 날인 만큼 온 나라가 새벽부터 분주해졌다.
백성들은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길 옆쪽으로 쭉 비켜서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이곳, 근정전에는 신하들이 가장 아래쪽에 각을 맞추어 열을 지어 서 있고
계단 꼭대기에는 왕이 서 있었다.
왕은 매년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우리 조선이 명나라의 속한 나라, 그러니까 사대 관계 라는 것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화려하게 준비하는 것이 마치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피폐한 귀족인 듯 싶어서였다.
국고가 바닥 날 정도로 해야 하는 게 사신 맞이이니….
"전하-, 곧 사신이 경복궁 근처에 다다른다고 하옵니다."
"…알았다."
이번에 올 사신은 명나라에서 촉망받는 이들이라고 들었기에, 자칫 잘못 대접하다가는 명나라 쪽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을 게 뻔했다.
…아무리 싫다고 하지만, 외교 관계를 위해서라도 사신들이 긍정적인 인상을 받고 돌아가야 할 것이다.
왕이 생각에 빠진 도중. 사신들이 말을 타고 저 멀리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자세를 고쳐잡아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이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
"…예?"
"말 그대로요. 조선에 빼어난 기생이 있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신들을 대접하는 장소로 옮겨가,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쯤 나온 한 사신의 말에, 왕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미모도 빼어날 뿐더러, 글과 그림 솜씨도 대단하고, 가무에도 능하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 계집이 기가 세다는 것도."
"…지금 그 말씀은,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소문까지 우리 명에 흘러들어가는 건지, 내 몹시 궁금하오."
묵묵히 애꿎은 술만 마시고 있는 왕 대신에, 영의정이 대신 물음을 표하자
그 사신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비록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뭐라 해도 우리 조선 사람인 여자를 만나고 싶다니.
그녀는 이미 조선에서는 유명한 기생이었다.
저 사신의 말처럼 모든 분야에 능한데다 상대가 고위급 자제라도 절대 만나주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명나라에서 온, 임금 국가의 사신에게 대접을 하게 해 줄까.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명나라에 안 좋은 소문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기에
왕과 신하들 모두가 벙찐 상태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소."
"……."
"최대한 빨리."
어쩔 줄 몰라하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말을 꺼낸 사신을 포함한 명나라 측은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단 한 명의 사신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신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
명월각.
밤마다 달이 밝게 뜨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곳.
조선에서도 유명한 기생들이 모여있는 곳이지만,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정상이라는 기생이었다.
미모도 북쪽의 양귀비를 닮아 아주 예뻤고 글 짓기와 그림 그리기는 왠만한 서예가들을 울게 만들었으며
가무도 왠만한 궁중 무용수보다도 더 잘해 한 번만 그녀를 본다면 소원이 없으리라, 하는 양반집 아들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정상을 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녀의 대쪽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양반집에서 태어난 귀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할아버지가 반역죄로 참수를 당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을 감추고 이름을 바꾸어 기생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과거 때문에, 그녀는 행동 자체도 조심스러웠고
어떠한 이들이 대접을 요구해도 대차게 거절해왔다.
소문으로는 좌의정 대감 아들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면서까지 애원했는데도 매몰차게 대해 좌의정에게까지 망신을 주었다고.
명월각에서도 깊은 곳에 위치한 그녀의 침소 안,
오늘도 그녀는 열심히 자수를 놓고 있었다.
"…상아, 들어가도 되니?"
"…아! 네, 어머니."
침소 밖에서 그녀가 어머니, 라고 부르는 사람이 들어오려고 해 그녀가 재빨리 놓던 자수를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방문을 열었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녀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어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인 행수를 그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언제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행수가 자리에 앉자 그녀도 자리에 앉고는 무슨 말을 하실지 기다렸지만
행수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어 정상은 의아함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무 말도 없으신거지?
"…상아."
"네, 어머니."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뗀 행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떤 말을 하시려고 이렇게나 조심스레 이야기하시는 것일까.
"내일, 명나라에서 온 사신 분들이 우리 명월각을 방문한다고 한다."
"네? 그렇게나 높으신 분이 왜 우리 명월각을…."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찮은 기생집에는 왜 온다고 하는 건지, 정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너를 보기 위해서다."
"…예?"
"부디 해가 없도록, 잘 모셔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명나라의 사신들을 대접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상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무에게나 웃음을 흘리며 노는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명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라니.
"…어찌 저보고 명나라에서 오신, 다른 나라 사람을 대접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듣자하니 명나라에서 요구해왔다고 하구나.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나라는 명나라의 신하국이라는 것을."
"…하지만 전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께서도 알지 않사옵니…."
"시끄럽다! 자칫 잘못하면 이건 크게 번질 수 있는 일이란 말이다."
애써 거절해보려 했지만 행수의 호통에 정상은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조선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는 일이라는 걸까.
"…상아."
"……."
"너에게는 정말 크나큰 시련이겠지만, 우리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라 나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호통 후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듯, 천천히 한 글자씩 말하는 행수의 모습에 정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려버렸다.
그리곤 잠시 후, 결심한 듯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행수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
"……."
"…하겠습니다, 수청.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그녀의 말로 인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
"호호호, 어서오세요~ 이쪽입니다."
약속대로 다음 날,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명월각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기생들은 한껏 꾸민 몸으로 웃으며 사신들을 맞이했고,
사신들은 최고의 기생을 볼 수 있을거란 기대감에 부풀어오른 듯 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하는 치장이 어색한 정상은 침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긴장감과 슬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공존해 차마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상아. 그분들이 너희를 부르실거다. 가야금을 들고 안쪽 큰 방으로 들어오거라."
"…네, 어머니."
어제 그렇게 결심을 했건만….
"상아, 가자."
"…네."
보다못한 행수가 겨우 그녀를 일으켜 큰 방 앞 문으로 데려갔지만
행수도 그녀도, 차마 쉽사리 그 문을 옆으로 밀지 못했다.
"들어가거라."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들어가라는 말을 해 준 행수에게 까딱. 조그맣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문을 열어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
"하하, 역시 제일의 기생답구나!"
자리가 익을 무렵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는 정상이 들어와 가야금 연주를 마치자 여기저기서 칭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미모가 빼어나군. 우리 명으로 데려가고 싶구만."
"껄껄, 농담도. 어디, 다음 곡을 연주해보거라."
그런 사신의 말에 정상은 화답하듯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신들이 서로 웃으며 말을 꺼내는 사이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한 명의 사신, 장위안은 그저 그녀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모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
뛰어놀고 싶은 가야금의 곡조와 대비되는 그녀의 표정은, 절개를 지키는 기생다웠다.
사실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조선으로 가는 사신으로서 우리의 문화와 비교도 하고, 학문도 배우고 싶었으나
지금 이 상황은, 그런 그의 목표와는 확연히 달랐다.
사신이라고 했더니, 사치스러운 행동만 하지 않는가?
장위안은, 그녀의 모습이 자신의 처지와 참으로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높은 사신의,
수청을 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운명을 알까?
그리고 내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
정상은 가야금을 연주하는 내내 사신 한 명이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눈길을 느꼈다.
그 눈길을 차마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 가야금을 타고 있는 손에만 눈을 두었다.
저 사람이 오늘 내가 수청을 들어야 할 사람인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 슬퍼지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대략 술자리가 끝난 후, 능글맞게 생긴 사신 한 명이 자신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아까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이가 아니다.
그럼 그 사람은,
왜 나를 그토록 빤히 쳐다봤을까.
그리곤 자신의 손을 끌고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반항해보았자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생각하며 가만히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갔다.
"…윽!"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손을 끌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떠 보니
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쉿."
그리고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로막으며 등 뒤에서 자신을 안은 어떤 이가 안은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갔을까, 다다른 곳은 명월각에 있는 깊숙한 정원이었다.
그녀를 안은 이가 조심스레 내려주어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바로잡으며 선 정상이 뒤돌아 그 이를 바라보니,
방 안에서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 그 사신이었다.
"…!"
"놀라지 말아요.
난 그저 당신을 구해주고 싶었어요."
"……."
'구해주다'
라는 표현을 쓴 그는 그녀의 상황이 위험했다는 것을 느낀 걸까.
게다가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말투도 아니다.
"조선이 걱정된다면 괜찮아요. 내가 잘 말하면 되니까."
"……."
"…그리고……."
"슬픈 표정으로 그러고 있으면 조선 천하 제일가는 기생이 아니잖아요?
울지도 말고, 그런 표정 짓지도 말아요.
그럼 저는 이만."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그녀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이만 가겠다며 고개를 까닥, 숙이고는 돌아섰다.
"…아, 저기!"
정상은 이곳을 벗어나는 그를 급하게 불러세웠다.
"존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그녀는 아무것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름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다시 못 볼 사이일테지만,
제 이름은 장위안입니다.
한국식으로는 장옥안."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이름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자마자,
저 멀리서 행수가 그녀를 발견하곤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사라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픽션임을 주의하세요!
결말은 열린 결말~
인데 망한 듯...☆
전 글에서 기다려주겠다고 한 정들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ㅠ 알러뷰 워아이니 아이시떼루 쥬뗌므♡
짤은 로빈으로 마무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