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빠르게 유도복을 갈아입은 백현은 제 앞의 캐비닛을 닫았다. 그리고 잇따라서 백현의 오른쪽에서도 찬열이 캐비닛을 닫고 약간 삐뚤어진 유도복 차림으로 백현을 돌아봤다. 백현은 넌지시 웃으며 찬열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연습 도중에도 많이 엉망으로 되긴 하지만 연습 전의 모습만큼은 똑부러지게 정갈해야 할 것 아니냐며 백현은 찬열에게 느긋하고 다정하게 핀잔을 주었다. 찬열은 백현의 투박한 손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대답도 놓지 못 하고, 어느 요정처럼 커다란 눈동자만 껌뻑껌뻑 거릴 뿐이었다.
“추워 뒤질 일 있어? 안에는 티셔츠 입지도 않았네.”
유도복 사이로 찬열의 넓다랗고 근육으로 딴딴하게 다져진 가슴이 살구색의 속살을 훤히 내비추고 있었다. 찬열은 백치마냥 알지 못했기에 서둘러서 캐비닛을 다시 열어 젖히고, 수북히 쌓인 옷들 사이로 티셔츠를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백현은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다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찬열의 팔을 붙잡고 제지시켰다. 됐어, 임마.
“섹시하고 보기 좋네.”
알아서 나와. 나는 먼저 몸 풀고 있을 테니까. 찬열은 벙찐 표정으로 백현의 돌아선 모습까지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굳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없었는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찬열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서히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 . 왜 자신은 제 여자친구한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백현에게서 느끼고 있는건지, 심란함에 허덕였다.
그것이 지금은 이미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백현과 찬열의 첫만남이었다.
청춘 다님길
w.바아몬데
백현은 정신이 들었지만 아득해지는 시야 때문에 차마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둥근 해가 뜰 때면 백현은 신 나게 기지개를 펴곤 했었는데 백현의 컨디션은 여느 아침과는 달랐다. 추를 매달아 놓은 듯이 눈꺼풀이 무거웠고, 온몸이 뻐근하고 저려와서 괴로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백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벅지에서 종아리까지 천천히 다리를 주물렀다.입으로는 김명수, 그 이름 석자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백현은 어젯밤에 명수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서있었다. 끝내 명수는 머리카락도 내비치지 않았고 백현은 뒤늦게서야 명수에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늘 자신이 제 집 앞까지 찾아와서 시간 닳도록 기다린다는 것을 명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겠지. 백현은 한없이 서운한 마음에 어렵게 발걸음을 뗐었다. 답답하고 숨이 텁텁 막혀오는 심정에 백현은 내일이 되면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오직 메치기 연습에만 전념하기로 힘차게 다짐을 했었는데.
이게 무슨 몰골인가. 이제 외사랑을 하며 홀로 남겨진 백현으로서는 김명수를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고 또 그를 탓하며 아픈 몸둥어리때문에 끙끙 앓을 따름이었다. 이래서는 유도장을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목에서는 시어빠진 쇳소리밖엔 나오질 않았다. 어제 침대 시트를 마구 내려치며 엉엉 울어버린 탓에 목도 나가버렸다. 백현은 이 모든 것들이 서럽기만 했다.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고 반쯤 감긴 눈으로 메시지를 찾아 눌렀다.힘겹게 문자를 보내고 나니 다시 눈이 자연스레 감겨왔다.
[아픈데 좀 와서 간호해주면 안 돼?]
[김명수 이 개새끼야]
눈 뜨자마자 김명수만 찾는다니. 백현은 안 봐도 비디오 마냥 뻔한 제 초라한 모습을 한탄하였다. 아 참. 사범님께도 못 간다는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백현은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 .”
백현은 두 눈을 지긋이 내려감았지만 잠은 쉽사리 청할 수 없었다.저를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슴 아픈 기억들과 장면들. 그리고 익숙하고도 멀게만 느껴지는 김명수의 음성. 아직도 백현의 귓전에서 어른어른, 맴돌기만을 반복했다.
‘내가 너를 좋아할지도 몰라.’
그런데 백현은, 나는 아니라고 제 앞의 명수에게 고개를 내저었었다. 하지만 명수는 재차, 좋아한다는 간드러지는 말을 속삭이며 백현을 껴안아왔다. 백현은 자신은 뼛속까지 이성애자인 줄 알았지만 명수 덕에 자신은 동성애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 그런데 너를 좋아하게 됐어.’
자신은 양성애자라며 솔직하게 고백해오는 명수에 백현은 차마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조곤조곤, 오직 제 두 눈만을 낯 뜨겁게 바라보고 사랑 노래를 부르듯 온몸이 자지러지게 만드는 부드러운 음성때문에 백현은 명수의 아름다운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었다. 이토록 제 가슴을 후벼파는 존재가 되리라고는 백현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괴로움에 마구 발버둥을 치고 싶었다.어떻게든,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매번 저의 목을 옭아매는 매혹적인 덫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느릿하게 닫히면서 철컥,무거운 철제문 소리가 적막한 집 안을 울렸다. 백현은 동시에 깊은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저벅저벅, 긴 거실 복도 위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지만 백현에게선 아득해져만 갔다. 저벅저벅. 끼익. 저벅저벅. 부스럭. 말 한마디도 없고 그저 고요한 소리. 정적만을 일깨우는 사람 소리. 제 심장 박동 수에 맞춰지는 알 수 없는 평온함에 백현은 그만 곤히 잠들었다.
*
“사범님께는 제가 대신 말씀드렸어요.”
백현의 집 주소를 알고 비밀번호까지 아는 것은 -자신을 제외한-단 세 사람이었다. 김치와 여러 반찬거리를 담아오시는 백현의 어머니.
“김명수라는 사람이 선배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백현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이 놀러 오곤 하는 발칙한, 같은 대학교 후배 오세훈. 한 손에는 늘 안줏거리와 소주 병을 담아놓은 검은 봉투를 쥐고선 해맑게 웃어 보인다. 왜 또 왔냐고 백현이 사납게 닦달을 하면 세훈은 그렇게 애교를 피우곤 한다. 제가 술 사 왔다구여.
“그 사람이 대체 뭔데 선배를 아프게 해요.”
실은 세훈과 찬열은 매우 친한 사이였고,찬열도 자연스레 백현의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알게 되었고 같이 백현의 집에서 술파티를 벌인 적이 두 번 정도 있었다. 그렇다면 백현에게 찾아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백현의 어머니? 대학 후배 세훈이? 지금쯤이면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찬열이?
‘오늘 크리스마스 이븐데.’
‘그랬냐?’
‘예.선배는 내일 시간 되세요?’
‘이런 골 빈 녀석. 넌 네 여친이랑 놀아. 나는 고등학교 동기랑 술 약속 있으니깐... ... .’
‘아, 그래요?’
‘그래, 임마.’
못내 아쉽다는 듯 백현에게서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었다. 잔뜩 울상이 된 찬열의 얼굴을 살펴보며 백현은 다시 입을 열었었다. 아주 가볍게 던지는 농담과도 같았다.
‘미련하기는. 넌 내가 그렇게도 좋냐?’
‘예.’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되려 백현은 당혹스러웠었다. 무슨 소리냐며 얼굴을 붉히거나 사내답지 않게 쑥스러움을 잘 타곤 했던 찬열은 없었다. 올곧게 백현의 두 눈을 마주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진지한 눈빛에 백현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었다. 그 이후로는 유도장을 나오기까지도 둘은 서로 오가는 대화가 없었다.
짙게 가라앉은 언성. 무언가에 화난 것 같은 차갑고 낮은 음성이었지만 전혀 남을 질책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백현을 더욱 어르고 달래주는 따스함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화난 게 아니라 오로지 걱정만을 담은 진심 어린 목소리이었음을. 백현은 그제야 눈을 천천히 떴다. 제 시야 앞에 드러나는 찬열을 느릿하게 올려다봤다.
“여친이랑 스키장에 가 있을 애가, 여기엔 왜 왔어.”
백현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 애틋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찬열이 의아했다. 간호해달라고 자신이 불렀던 건 분명 김명수였는데. 제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찬열이었다. 백현은 명수에게서 온 답장은 없는지 서둘러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고 메시지 함을 열어봤다. 황당하게도... ... .
“죽이 식었으니까... 다시 데워올게요.”
먼저 자리를 뜨는, 혹은 제게 시선이 닿기를 피하는 찬열을. 백현은 고개를 돌려 바라볼 겨를도 없었다. 발신자는 백현이 맞았지만 수신자는 달랐다. 백현의 의사대로 내던진 메시지는 그 방향을 틀어서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던 것이었다. 틀림없는 명백한 백현의 실수였다.
박찬열 <010****####>
[아픈데 좀 와서 간호해주면 안 돼?]
[김명수 이 개새끼야]
백현은 어느새 미열만 남은 축축 미지근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주뼛주뼛 뻗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앞머리가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었다. 백현이 자는 새에 찬열이 물수건을 올려주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백현의 이마는 옅은 물기를 머금고 있고 축축하기도 하였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한 결 가벼워진 기운 덕에 찌뿌둥하던 기분은 없어졌다. 차고 딱딱한 바닥에 맨발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그리고 침대 옆에 어느 한 부분만 유난히 따듯했다. 찬열이 내내 백현의 옆을 지키고 앉아있었는지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백현은 방 문을 열어 젖히고 찬열이 있을 부엌으로 향했다.
마침 죽을 약한 불에 적당히 데우고 그릇을 식탁 위에 차려 놓는 찬열과 백현은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부스스해진 백현의 머리칼은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예쁜 오렌지 갈색을 띄었다. 백현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머리색이었다.
“무슨 죽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야채죽으로 골라왔…”
“좋아해.”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백현의 수저를 가지런하게 놓아주던 찬열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의미심장하고 미묘한 말에 찬열만 가슴이 간지러웠는가. 찬열은 백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끝내 백현은 찬열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묵묵히 죽이 담긴 그릇에 숟가락을 휘저으며 죽을 한 술, 두 술 떠먹었다. 백현의 맞은편에 앉은 찬열은 조용히 턱을 괴고 백현이 죽을 남김없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찬열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백현의 집에 오기 전에 들린 약국에서 처방받았었던 약을 상기시켰다.
“다 먹고 약도 먹어야 돼요.”
백현은 시선을 죽그릇에 파묻은 채 입안 가득 죽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끄덕임과 함께 백현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런 백현을 지긋이 바라보며 찬열은 어렸을 적에 영화에서 봤었던 염소 한마리를 떠올렸다. 순둥순둥한 게,꼭 지금의 백현과 겹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폭풍우 치는 밤에. 그 영화 속, 늑대 가브는 염소 메이를 지켰다고 한다. 찬열은 늑대 가브의 역을 받들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말이다.
*
“선배 자는 것만 보고 갈게요.”
백현은 차마 찬열을 말리지 못 했다. 찬열의 두 눈에서는 수심이 깊다 못 해 바닷물이 넘실넘실 흘러넘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백현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백현은 달큼한 로션 향을 풍기며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수를 하고 나서 꼼꼼히 바른 로션이었다. 그것은 바로 빼빼로데이 때 명수가 백현에게 선물해주었던 것이었다. 백현은 이 로션을 내다 버릴까 고민을 하다가 마지못해 발랐고, 찬열이 백현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을 썼다며 말 한마디를 건넨 덕에 백현의 기분은 다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개화하는 어느 꽃 한 송이처럼, 싱그럽게.
“...사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 ... .”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었거든요.”
왜? 백현은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오는 궁금증을 눌러 담았다. 백현은 그저 두 눈을 내려감고 잠자코 찬열의 목소리를 들었다.
“제가 아무래도 선배를... ... .”
자장가 같은 음성을 들으며 백현은 찬열에게로 몸을 틀었고 깊은 잠을 청하였다. 가득 내리쬐는 달빛을 받고 생기 가득한 입술이 반짝거렸다. 촉, 찬열은 말을 다 잇지 못 하고 그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그것도 아주, 많이.
더보기 |
개미 머리 편 = 상편 = 1편 ㅋㅋㅋ... 즉, 개미는 머리와 가슴과 배로 총 3개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청춘 다님길도 상중하로 총 세편을 연재할 예정인데요... ㅋㅋㅋㅋㅋ ㅠㅠㅠ... 네... 이 글 아무도 안읽는다 해도 꿋꿋이.. 저는 마이웨이를 걸을 겁니다.... 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