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라 그런가 바깥의 햇살은 쨍쨍했다. 김밥이 담긴 검은봉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백현이 한숨을 폭 내쉬며 땀방울을 슬쩍 닦아냈다. 며칠 후면 몸무게 검사를 한댔는데, 뚱뚱한 편은 아니었지만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습관적으로 썬칩에 손을 대며 바스락거리며 과자를 입에 담는 모양이 철없는 대학생이 맞긴 맞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바나나우유를 들이키던 백현은 요란스레 떠드는 티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모나게 비틀며 리모컨을 손에 들었다. 벌써 토요일이 이만큼 흘러가버렸다. 벌써… 한 시야. 신경질적으로 김밥을 입 안에 쑤셔넣은 백현은 그제서야 배가 불러오는지 랩을 쓱쓱 말아 치우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 경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앞에 있어선 안될 존재가 지금 제 앞에 서 있었다. 도경수. 백현은 작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이게 현실이 맞긴 한건지 이리저리 고개를 저어보았다. 억세게 꼬집은 볼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꿈이 아님을 알아챈 백현은 경수의 뺨을 매만졌다. 여전히 보드랍다. 영국에서 온 고생을 다 하며 지냈을텐데, 뽀송뽀송한 피부와 맨들거리는 입술만큼은 여전한듯 하다. 백현은 고개를 작게 떨궜다. 자신 때문에 한국에서의 가수활동을 접고 영국으로 나간 경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물론 영국에 가서 더 성장하긴 했다만. 경수는 조심스럽게 백현의 턱을 들어올렸다.
“…왜 왔어? 나 보기 싫댔잖아, 나 싫댔잖아. 근데 왜 왔어? 짐도 안 풀고 왜 첫번째로 우리 집에……”
“…”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네킹처럼 딱딱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몇년 만이지, 족히 2년은 되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동안 시간이 시작되는 그 곳으로 가고싶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번에 열리게될 올림픽도 안 볼 작정이었기에, 새는 전기세가 아까워 티비도 끊을 예정이었는데. 모든 갑갑함이 한번에 스르르 풀리는 듯 했다. 그 동안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서 혼자 속앓이했던 그 시간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 했다. 오로지 도경수 하나만으로. 백현은 톡하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애써 경수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곧 떠나버릴 경수에게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경수였지만, 왠지모르게 얄상한 입술 선이 호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 이 모든게 자신의 상상 속 일부라 할지라도, 벅찬 행복감에 휩싸인 백현은 뭐든 좋다는 표정으로 경수를 소파에 앉혔다.
“영국은 어때? 사실 너가 영국에서 성공했단 얘기 듣고 되게 좋았어. 물론 넌 충분한 실력이 있으니까 당연할 수도 있지만.”
“…”
“말 하지 않아도 되. 힘들지? 주스라도 먹을래?”
어쩔 줄 몰라하는 백현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젓던 경수는 백현의 손목을 저지하며 자신의 옆에 다시 가지런히 앉혔다. 따듯하다. 우연히 자신의 손목에 스친 경수의 손은 따듯했다. 그래, 진짜 경수야. 안심하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눈이 너무나 앙증맞고 예뻤다. 그 전처럼 똑같이 키스하고, 안기고 싶었다. 모든 게 이젠 추억의 한 조각일 뿐이고, 다시는 실현되지 않을테고 실현되지 않아야할테지만. 떠나버린 연인인 경수가 자신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갈색빛이 도는 머리를 찰랑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순간 제 귀를 의심한 백현이었지만, 되물을 새도 없이 경수는 제법 강하게 백현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남자치고 작은 체격에 속하는 경수였지만 그래도 남자는 남자였는지 억세게 백현의 어깨를 붙들고 중얼거렸다. ‘용서할 맘은 없었는데… 보고싶었어.’ 라고. 백현의 두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백현의 대답보다 눈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지 경수는 미간을 찡긋거리며 따듯하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전부터, 백현이 우는거라면 지독하리만큼 싫어했던 경수였으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네가 우는 건 너무 예뻐서 안되, 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백현은 경수의 어깨에 기댔다. 아, 행복해.
“다시 영국으로 가는거야? 이대로 내 곁에 있으면 안되? 돈은 많잖아, 여유롭잖아…….”
“…… 안되, 돌아가야 해.”
“…… 그치……? 넌 공인이니까.”
다 아는 사실인데도 애처럼 떼를 쓰는 것 같아 백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쯤 그만뒀다. 벽면 한쪽을 가득 차지한 창문에선 눈부신 햇살이 한가득 퍼부어졌다. 예쁘지 경수야? 백현이 눈물이 살짝 묻어나 반짝이는 눈가를 깜박거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경수는 여전히 다른 것엔 관심이 없어보였다. 오로지, 촉박한 시간을 백현과 함께 보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미친듯이 백현의 온 몸을 두 눈으로 탐하고 있었다. 2년 동안, 수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가는 곳마다 백현이 없어 크게 상심했다. 백현은 자신을 잊었을거라고 합리화 시켰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변백현이라는 수갑에 채워진 작은 아이처럼 끙끙대며 그렇게 2년동안…… 슈퍼스타 도경수는 그를 앓았다.
“언제쯤 가는거야? 우리집에서 자고갈래? 물론… 방은 따로 쓰고.”
“…… 같이 자자.”
백현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뒤었다. 물론, 같이 자자는 의미가 섹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 침대 위에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백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색한 기류가 오묘히 둘을 감싸고 있을쯤, 내내 수동적이던 경수가 적극적으로 백현의 손목을 붙들고 침실로 향했다. 백현 특유의 라벤더 향이 가득 담겨있었다. 좋다. 경수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백현의 트레이닝 복을 대충 갈아입었다. 뭐해, 안 잘거야? 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낮인데…, 더군다나 일어난지는 3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경수는 뭐가 그리 급한지 백현을 자신의 옆에 뉘였다.
“좋다, 그치? 근데 너 잠 안오잖아. 사실은 나도 안 와.”
“근데 왜 눕자고 한 거야…….”
“이게 제일 해보고 싶었거든, 영국에 있었을 때.”
또 한번 가슴이 아릿해지는듯 해 백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살짝 상체를 들어올려 백현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맨들거리는 검지손가락으로 백현의 입술선을 살짝 매만졌다. 어… 부드럽다.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장난기 가득한 어린소년처럼 한참을 백현의 아랫입술을 매만지던 경수는 긴장을 머금은 백현이 꼴깍 침을 삼키는 것을 눈치채자 마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백현의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올리듯 한참을 미동없이 서로의 입술로 서로의 체온을 교환하던 둘은 자연스레 키스로 이어갔다. 부드럽고, 심히 달콤한 키스였다. 아마 경수가 떠나고 2년이란 시간이 똑같이 더 흘러도,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똑같아 그치? 너 여전히 너무…… 맛있어.”
“……”
“그리고 예뻐, 백현이.”
경수는 그 말을 끝으로 살짝 드러난 백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 향, 너무 좋아. 낮게 중얼거리는 경수의 입이 벌어지자 그의 거칠어진 숨결이 맨살에 고스란히 닿았다. 민망함에 슬쩍 경수를 밀쳐내려는데, 경수가 그보다 강하게 백현의 쇄골을 입에 담았다. 하…으……. 애써 참는듯한 백현의 소리에 경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강제적으로 신음소리를 듣고싶은 마음은 없는지 백현의 흰색 티를 벗겨냈다. 아. 아까 티셔츠와 별 차이가 없어보일 정도의 살결을 보고 감탄을 내뱉은 경수는 앙증맞은 백현의 유두를 살짝 튕겼다. 재밌어.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경수를 보고 울먹거리던 백현은 그저 경수의 윤기흐르는 머리칼을 이리저리 헤집을 뿐이었다. 한참을 백현의 몸을 가지고 놀던 경수는 다시 백현에게 옷을 입혔다. 이대로 관계까지 맺을 줄 알았는데, 의아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씁쓸함에 정말 변태야 변백현, 이라며 자신을 자책한 백현이 불그스름해진 얼굴을 정돈시켰다.
“뭐라도 먹을래? 과일 깎아올게, 여기 앉아있어.”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경수를 소파에 앉힌 뒤 부엌으로 들어섰다. 아, 부끄러워. 사실 연애할 때는 그보다 더한 음담패설도 자주 나누었고, 스무 살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범히 서로를 탐했는데. 2년이란 시간이 헛되게 흘러간 것은 아닌지 둘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행복했다. 경수가 자신을 아껴줬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백현은 살풋 웃음을 터트리며 경수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사과를 들었다. 잘 익었네, 맛있겠다. 사각사각, 예쁜 모양으로 사과를 다 깎은 백현이 휙하고 거실을 향해 돌아섰다.
“…… 경수야?”
경수가 없어졌다. 이곳저곳, 집안 샅샅히 뒤져도 없었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비싸보이는 운동화도 사라졌다. 가버린건가……. 허탈함에 사과 하나를 입 안에 담으며 티비를 틀었다. 마침 나오는 연예뉴스에선 [ 가수 디오, 런던 콘서트 성황리에 마쳐… ] 라는 문구의 기사가 뜨고 있었다. 백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변백현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허탈함이 너무 크다 못해 자신을 뒤엎을 것 같았지만, 그런대로 행복했다. 햇살은 여전하게 백현을 감싸고 있었다. 여전히 경수는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백현은 미소지으며 액자 속 웃고있는 경수의 사진을 매만졌다.
<작가의 말>
텍파나눔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네요, 시험 끝났다고 폭풍으로 글 많이 올리긴 하는데
반응은 그 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제 곁을 지켜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화이팅!
오로지 텍스트 파일을 목적으로 댓글 달고 파일 받으시고 도망가시는 분들은 싫어요;
지금부터라도 제 작품이 마음에 드신다면, 깡총이와 함께 해주세요!
이메일주소와 함께 암호닉을 꼭 작성해주세요, 없으신 분들이라면 만들어서라도 작성해주세요!
한여름밤의 꿈 텍파나눔을 제외한 다른 작품에서 안 보이시는 분들은 다음 텍파나눔에서 제외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