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찬열은 자주 백현의 병실을 찾았다. 늘 한결같이 옅은 미소만을 띄고 있는 백현이었지만, 찬열은 늘 새로운 빛을 띄는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미묘하게 바뀌는 그 표정의 변화를 놓칠까봐.
지방에 생긴 자잘한 일거리를 처리하러 내려가기 전 오늘도 어김없이 백현의 병실문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제 손잡이는 이제 많이 닳았다. 문을 열고, 성급하게 고개를 들이민다.
늘 그를 반기던, 알 수 없는 온기로 둘러싸인 그 빛을 만나기 위해.
하지만 오늘, 그를 맞이하는 것은,
백현을 닮은 하얀, 하얀, 침대.
텅, 텅 비어있는 병실.
공허한 공기.
그렇게 현실을 자각하고 그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뛰어온 길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절박하게. 변백현, 변백현. 미친 사람처럼 되뇌이면서.
지나가던 의사와 간호사들과 부딛혀도 개의치 않는다. 숨이 턱 끝 까지 차올랐을 무렵, 눈 앞에 번뜩이는 붉은 불빛.
수술중, 이라는 팻말.
알수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백현이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확신할 만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는 왠지모를 섬뜩한 의심의 한 자락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때마침 간호사 한 명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찬열을 불렀다.
"거기 누구세요? 그 수술실 접근 금지 붙은 거 안 보이세요?""
찬열은 천천히 뒤돌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간호사는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보호자분도 접근 안되세요. 1등급 보안 수술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저 안에서 수술받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죄송합니다. 알려드릴 수 없어요."
"몇 년 만에 보는 동생 찾으러 왔습니다. 알려주세요. 부탁입니다."
"곤란한데...."
간호사는 얼굴을 붉히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차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변 백현 분이시네요. 스물 두살. 심장사혈수술 중이시구요."
"...."
"동생 분 맞으세요?"
"....그런 것 같네요."
"힘내세요. 워낙 사망률이 높은 수술이라...여기 환자분 상태도 쇼크상태라고 나와있네요."
"....사망률이 높다,고요?"
"네. 아무래도 심장을 열어서 거기서 직접 피를 뽑는 수술이니까요. 이 환자분은 똑같은 수술을 정기적으로 받으셨네요."
"....."
"수술중에 쇼크사 할 수도 있는 케이슨데...여기 병명이 나와있질 않네요. 그럼 휴게실로 이동하셔서 기다려주시겠..."
찬열은 그대로 간호사의 품에서 차트를 빼앗아 들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조차 차오르지 않을만큼 빠르게.
그렇게 달려서 도착한 곳은 대령의 집이었다. 쾅. 무너지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찬열은 곧장 그의 서재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지방에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니?"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한 손에는 고급스러운 금테 장식의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찬열은 탁자 위로 차트를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가지런한 갈색 물결을 일으키던 커피잔이 심하게 흔들리며 그의 손등에 쏟아졌다.
"...예의가 없구나."
"이게, 뭡니까."
"뭐 말이냐."
"백현이, 수술, 이라니요."
그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는 코끝에 걸친 안경을 곧쳐 세우고 차트를 집어들었다.
"...언제, 피를 심장에서 뽑는다고 했습니까."
"심장에서 뽑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지."
"....당신, 도대체..."
"박찬열. 네 GT를 생산하기 위해 피를 뽑는다는 사실에 동의했지 않나. 왜 지금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군."
"......"
찬열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편협하고 더러운 논리에 찬열은 이를 갈았다. 지금쯤 수술실에서 심장을 봉합하고 있을 백현이 떠올랐다.
두근두근, 제 박자에 맞춰 울리던 그의 심장소리가 생각났다. 순식간에 그곳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꽂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네 임무로 돌아가."
"....."
"변백현은 죽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눈을 뜨지도 않겠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
그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찬열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눌렀다. 코끝이 징하게 울렸다. 응어리진 독한 염분은 목을 통해 터져나왔다.
"...살려준다고."
"뭐? 똑바로 말해라."
"...살려준다고. 백현이,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아직도 그 소리냐? 썩 돌아가지 못해!!!"
"살려준다고, 약속했잖아!!!!!"
폭포의 끝자락처럼 거센 파편을 튀기듯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고함은 이상하게도 축축했다. 불같은 고함이었지만, 슬프게 건조했다.
"내가, 내가 다른 거 바란 적 있어? 나 살 수 있게, 그 애 심장, 계속 뛰게 해달라고 했잖아요. 그거만, 해달라고 했잖아요. 죽지 않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예전처럼, 날 보면서 미친듯이 뛰지 않아도, 그냥, 조용히, 뛰게만 하기 해달라고...."
"....."
"제발....."
고함의 끝은 나동그라진 작은 파편. 거미줄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길게 끌렸다. 찬열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내가, 부탁했잖아요."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찬열을 반군으로 이끈 사람이기도 했고, 백현을 잘 보살펴 주겠노라 약속한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 백현을 업어들고, 울며불며 애원했다. 살려만 주세요, 뭐든지 다 할게요. 그런 그의 눈물을 슥 닦아주며 그러마, 인자하게 웃었던 사람이었다. 찬열은 이제 쓸모없는 과거를 반추했다.
"...당신들이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었어."
"....."
"당신들이 그렇게, 쥐고 흔들, 그런 마음이 아니었어."
"......"
"나한테는 사랑이었어.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
숨 쉴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부족한 마음이었어.
마지막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었어."
"..안됐구나."
안됐구나. 그 네 글자에, 찬열은 다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울분을 느꼈다. 안됐구나. 백현과 함께 이곳으로 온 4년, 그를 살리려했던 그의 욕심이 그를 죽여갔던 그 시간을 담아내는 안됐구나, 이 네 글자에.
천장이 도는 것을 느꼈다. 찬열은 가까스로 제 시야를 찾는다. 한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듯이 문질렀다.
"딱, 내 숨같은 사람이었어."
그의 말마디가 끝나자마자, 진동하듯 온 몸의 피가 끓었다. 그동안 숨죽이고 잇던 그의 모든 힘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손끝에 땀이 맺혔다. 눈두덩이가 불에 덴 것처럼 아뜩했다.
하얀 알약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힘이 쌓여갔다.
코 끝에 희미한 향이 스친다.
젖은 백합의 향.
아, 백현아.
찬열의 흔적은 불에 그을린 듯한 검은 흉터로 남았다. 붉은 털실로 짜여진 카페트 위에는 복구될 수 없는 흉터가 크게 자리잡았다.
그는 힘의 여파로 깨진 안경을 벗어 가지런히 접어놓으며 말했다.
"쫓아가."
다시 같은 길을 달렸다.
다른 마음으로 달렸다.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조직과 그에 대한 믿음이 산산히 부서져, 발밑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나동그라져 있었지만, 찬열은 달렸다.
발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핏물은 걸음마다 진득한 자국을 남기며 길을 만든다.
발밑을 쿡쿡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적어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살아있지 못한 백현을 생각한다. 찬열은, 차마 고개를 들고 달릴 수가 없었다.
"변백현....!"
다시 백현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약 그가 지방의 일을 끝내고 찾았더라면, 볼 수 있었을 그 고요한 병실의 분위기는 여느때처럼 백현과 잘 어울렸다.
"변백현, 일어나. 변백현....!"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울음 속에서 터지는 흠뻑 젖은 사람의 언어는 백현의 마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현은 여전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잘못이 없었다.
찬열의 손길이 점차 멎어갔다. 심하게 떨리는 두 팔은 힘없이 백현을 다시 내려놓았다. 하얀 얼굴에 비친 투명한 미소.
티 하나 잡을 수 없는 무결(無缺)의 순백을 담은 찬열의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다시 침대에 가지런히 누운 백현을 찬열은 잠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그는 백현의 환자복을 붙잡고 뜯어내기 시작했다. 얇은 소재에 단추가 달려있는 병원복은 쉽게 찢어졌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백현의 갈라진 왼쪽 가슴을.
봉합된 실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튄 핏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아 쓰다듬던 손가락에 묻어나는, 백현의 갈라진 마음을 보았다.
"아, 아아...."
그는 마침내 무너졌다.
털썩. 4년 전 그에게 백현의 생을 약속해달라고 울부짖던 그날 이후 처음으로, 뿌리를 잘린 나무는 마침내 쓰러졌다.
잘린 나무는 숨쉴 수 없다.
찬열은 억억, 심장을 뜯어버릴 것 같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퍽퍽 내리치면서, 울음인지 고함인지 목소리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언어로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백현아, 백현아, 미안해. 사랑한다, 미안해, 백현아.
눈을 떠.
심장에 파고들어 검은 흉을 남기는 죄책감이 그를 옥죄었다.
찬열은 백현을 안아들었다. 어깨와 무릎 밑을 부드럽게 감싸 받쳐서, 그의 머리를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혹시, 들린다면.'
찬열은 생각했다.
'들린다면. 아직도, 여전한 너처럼, 늘 그랬듯이 너를 보면서 쉬지 않는 내 심장을 느낄 수 있다면, 백현아.'
알고 있어.
너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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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제일 마음에 안차는 편 기록 갱신했네요. 할 말이 없습니다ㅠㅠ제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는 중이에요
연재를 하고 여러분께 글을 보여드릴 때는 늘 최상의 글을 써야하는데ㅠㅠㅠ아정말 스트레스받아요 왜 마음대로 안써지지./...?
그리고 다음화에 카디 상봉시킨다던 작가가 누구였더라.....(궁금)
아참그리고 불맠 기준이 정확히 뭐죵 진한 키스도 불맠 달아야 되여???ㅠㅠㅠ
그렇다면 다음화가 불맠이 될 가능성이 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