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found the paradox that if I love until it hurts, then there is no hurt, but only more love.
-Mother Teresa
체리블로섬
[4화]
백현아. 너의 곁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 두 달을 넘어 석 달을 바라보다, 벌써 넉 달째다.
너를 떠나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자만이었는지 너를 떠나온 지 하루 만에 그런 생각은 사라져버렸다.
아무런 말없이 떠나는 날이라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공항을 둘러보는 도중에도 너와의 추억은 떠올랐다. 대학생의 첫 방학 때는 둘 다 같은 레스토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뛰고, 평일에는 과외로 아르바이트를 뛰던 것. 그 돈으로 겨울방학에 함께 배낭여행을 오느라 온 공항이 그곳이었다. 그렇게 매년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그곳으로 왔고 너와 내 가족이 그곳 공항에서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 일로 출장을 가는 너를 배웅하러 나왔던 나, 출장 가는 나를 배웅 나왔던 너, 사내 직원끼리 단체로 가던 여행을 갔을 때. 모든 기억이 떠오르더라.
비행기를 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어폰을 끼는데 그 이어폰은 네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제작 주문했다며 짝으로 맞춘 거니까 잘 보관하라면서 주던 네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이팟도 네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잃어버렸다며 하나 사는 김에 내 것도 함께 샀다면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던 내게 기분이 상해 집에 돌아갔지만 네가 잃어버린 것을 알고 내가 사다가 네 방에 놔둔 것을 보고는 다시 쪼르르 달려왔던 네가 기억나더라. 결국, 아이팟이 두 개가 되었다며 어떡할까…. 하며 고민하다가 씩 웃더니 내가 준 것을 가지고 네가 산 것을 기부한 것도 알고 있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아이패드도 너와 같이 산 것이었다. 일을 보기 위해서 산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것을 사러 갈 때면 네가 따라왔고 네가 살 때면 내가 항상 따라갔었다. 그리고 그렇게 휴대전화도 아이팟도 아이패드도 노트북도 태블릿 PC도. 모든 물건이 너와 내 것이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네가 일부러 그렇게 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너는 웬만한 물건은 나와 같은 것이었다. 그제야 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 생각에, 네 고백에 코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노래에 집중하기 위해서 눈을 감은 것이지만 노래를 들으니 눈가가 뜨겁게 느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느끼며 눈을 떠 아이팟을 내려다보자 재생목록에 들어있는 노래들은 모두 너와 내가 즐겨듣던 노래다. 네가 좋아하던, 내가 좋아하던 노래. 그리고 종대와 찬열이가 좋아하던 노래. 대학 동아리에서 특히나 친했던 너와 나, 찬열이, 종대를 포함한 10명이 좋아하던 노래. 함께 불렀던 노래들이다. 그때의 기억이 그립다.
지금 재생되고 있는 노래를 듣자 정말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까만 안대를 썼다. 언젠가 내 생일 때 모든 파티가 끝이 나고 뒷정리까지 끝내고 모두가 다 돌아간 뒤. 나를 테라스로 부르더니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한 달 동안 찬열이에게 구박받으며 배운 것이라며 서툰 솜씨로 기타를 튕기며 불러주던 노래. 듣는 편지. 그 날 따라 그 가사가 나를 울렸다. 너무나 달콤한 노래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무엇보다 쓴 노래였다.
저 별을 가져다 너의 두 손에 선물하고 싶어
내 모든 걸 다 담아서 전해주고파
Sometimes I cry 널 잃을까
Sometimes I feel 내 품에 잠들어 있는 너
I promise you 첫눈이 오는 날에
I promise you 너와 함께
두 손을 마주잡고 그날을 거닐며 외쳐
I love you 잡은 두 손은 흐르는 세월 모르길
그 자리 니 온기 하나하나 담아두고 싶은걸
내 맘이 그래 오래도록
Sometimes I cry 날 잊을까
Sometimes I feel 살며시 눈감아 주는 너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미국에서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다.
하루는 너의 곁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또 하루는 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또 하루는 그렇게 너의 기억이 사라지 줄 알았다면 더욱 잘해줄 것을 그랬다고 또 하루는 나와의 모든 기억을 잃은 너를 원망하다 너를 원망하는 나 자신이 미워서 울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끝내 버리지 못한, 끝내 두고 오지 못한 너와의 사진들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진들에 눈물 자국이 생길까 봐 눈물을 참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앨범에 넣고 또 눈물을 흘렸다. 앨범을 끌어안고 울기도 했고, 앨범을 들여다보며 울기도 했다
그저, 울다 지쳐 잠이 들고 또다시 일어나서 씻고 나와 너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있다 눈물을 흘리고…. 속이 아려오면 제때 밥을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너의 환청을 들으며 상을 차리고 먹다 또 울컥 눈물을 쏟고…. 차가운 얼음이나 수건으로 찜질하면서 또 옛날을 회상하곤 했다.
밥을 잘 챙겨 먹지 않는 나로 인해서 전국 곳곳의 맛집을 찾아 주말이나 쉬는 날 나를 이끌고 가던 너, 어린아이에게 하듯 아이~ 맛있다~ 맛있겠지? 하며 먹어보라던 너, 숟가락으로 퍼서 비행기다 붕~ 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내 입에 넣어주던 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 나에게 울상을 지으며 안 먹을 거냐고 하던 너, 억지로라도 먹으면 환하게 웃고 다 먹고 나면 후식을 먹자며 카페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화장실에 갔다 온다면서 근처 약국으로 뛰어가 소화제를 사오던 너.
청소할 때면 귀찮다며 양반다리를 한 채 베개를 끌어안고 나중에 하면 안 되냐고 칭얼거리던 너, 안된다고 빨리 비키라던 나를 보며 입꼬리를 밑으로 내리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너, 한숨을 내쉬며 혼자 청소를 하기 시작하면 툴툴대면서 이건 내가 할 테니 너는 쉬운 거나 하라던 너, 무거운 물건을 들 때면 에에~ 힘도 없느냐? 하며 놀리면서도 우리 힘없는 경수는 가벼운 거나 드세요~ 하며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들어오려 옮기던 너, 둘 다 손이 안 닿는 곳에 있을 때면 괜히 머쓱해 하면서 자기가 키가 작은 게 아니라 저게 높은 곳에 있다고 투덜대며 의자를 가져오던 너, 그에 작게 웃으면 너는 나보다 더 작으니까 웃으며 안된다며 투덜대던 너, 청소를 끝내고 나면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고 장난스럽게 음흉한 표정을 짓고는 도망가는 나에게 같이 씻을까~? 하고 달려들던 너.
혼자 영화를 보다가 슬퍼서 울 때면 그게 뭐가 슬프냐? 하며 나를 네 품에 안던 너. 그러다가 슬퍼서 둘 다 울게 되면은 눈물을 보이기 싫은지 천장을 보면서 눈물을 참던 너, 안 슬프다며. 울어? 하고 놀리는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형 놀리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던 너, 영화가 끝났으니 집에 가봐야 하는지 않으냐는 내 말에 오늘은 늦게 들어간다고 말했다며 가방에서 운동복을 꺼내 내 방에 들어가 갈아입고 나오던 너, 바닥에 이불을 깔아줬지만, 같이 자자며 기어코 내 침대에 올라와 나를 끌어안고 자던 너.
회식할 때면 술에 약한 나를 알고 너의 옆에 앉혀두고 다른 사람이 술을 못 주게 막던 너, 이런 회식보다 나와 둘이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게 좋다던 너, 이런 분위기도 가끔은 좋지 않으냐는 내 말에 급히 말을 바꿔 생각해보니 가끔 이런 것도 괜찮은 것 같고…. 하며 말끝을 흐리던 너, 분위기가 어느 정도 과열되면 항상 신 나서 최신가요를 부르던 너, 나에게도 한 곡하라며 내가 좋아하고 네가 좋아하는 팝송을 틀던 너, 그래놓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예쁘고 멋있게 부르면 어찌하느냐며 투덜대던 너, 빨갛게 물들인 얼굴로 뭐라는 거냐고 투덜대는 나를 보다가 찬열이나 종대에 카드를 쥐여주고는 집에서 연락이 와서 데리고 먼저 들어간다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서던 너, 급하게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짙은 입맞춤을 하던 너.
아마도 너와의 추억들은 끝내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근데 백현아.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우고 나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들더라. 정신이 드니 그 사이 왔던 수많은 연락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 부모님과 형, 그리고 너희 부모님께도 연락이 왔었다. 준면이 형도 민석이 형도 려욱형도 연락을 남겼었다. 물론 다른 형들과 동생들도, 동기들도 연락을 남겼다. 너만이 알지 못하는 우리 둘의 사이를 알던 모든 이들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그리고 너만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더라.
괜찮으냐는 말도 있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있었고 잘 지내란 말과 행복하라는 말도 있었다. 근데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준면이 형의 시간이라는 약이 너의 상처를 덮어줄 때까지 기다릴 테니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다는 말이다. 과연 내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문득,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아마도 잘 지내고 있을 터인데 나 혼자서 이렇게 울고불고 청승 떠는 것은 매우 웃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먼저 네가 봤다면 돼지우리냐고 놀렸을 정도로 나답지 않은 집을 보고 청소를 했다.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키며 이리저리 널려있는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굴러다니는 술병들도 치웠다. 이불도 빨고 청소기를 돌렸다. 밥도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씻고 나가 재료를 사왔고 외국인밖에 없는 동네가 어색했지만 수월하게 마트를 찾아가 주문을 했다. .
그렇게 나는 네가 없는 곳에서 새로 적응해나갔다.
백현아.
26살의 겨울의 마지막 날이 눈앞에 다가왔던 것처럼
27살의 여름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다.
"도!"
"해리엇. 무슨 일이야?"
이곳에서 적응하는 걸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이 해리엇이다. 백현아. 너를 닮은 듯한 이 남자의 성격조차도 너와 판박이다. 그래서 네가 생각나서 그를 보기 싫지만, 또 한 편으로는 너를 닮았기에 그를 밀어내지 못한다. 너와 다른 점은 훨씬 큰 키와 회색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겠지. 행동, 말투, 외모 어찌 그리 너와 똑 닮았는지 네가 옆에 없지만 네가 옆에 있는 느낌이다. 내 이름이 어렵다며 연습하다 결국에는 성을 부른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름을 불러달래서 이름을 불러주고 있다. 어차피 한국인들은 성보다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하니까.
"오늘 루나네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갈 생각이야?"
"나는 파티 같은 곳에 잘 안 가는 거 알잖아."
"오, 이럴 수가. 도! 가면무도회라고. 무려. 가면무도회!"
너를 똑 닮은 것은 나를 좋아한다는 점까지 같았다.
첫날 마트에서 무거운 짐을 옮기던 나를 보고 내 짐을 집까지 들어 다 주었다. 너를 닮은 외모에 부담스럽고 네가 생각나 끝까지 거부했지만,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며 장난을 치곤 웃었다.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 드러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이던 그는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만났을 때 커피나 사달라며 나를 설득하듯 말했고 너무 많이 산 짐을 혼자서 들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몇 번 만나다가 친해진 그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며 사귀어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너를 잊지 못했고, 아마도 평생 너를 잊지 못할 거라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다고. 그리고 그가 너와 너무나 닮아서 힘들었다고. 너와의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자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괴롭게 해서 미안하다며 너처럼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포근했지만 너와는 달랐다. 네가 아니었다. 익숙한 몸 냄새도, 합기도로 단련된 단단한 몸도 아니었다. 그리고 안기자마자 나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네가 아니라면, 찬열이와 종대 같은 친구들이 아니라면, 가족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털어냈고 그 후부터는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여전히 미련은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가면무도회건 가장무도회건 나는 안 간다고 전해."
그에게 통보하듯 말하고 다시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자 능글맞게 웃음을 지은 그가 두 장의 표를 내 앞에서 흔들어댄다. 무엇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가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내 팔을 잡는다. 한숨을 쉬며 내 팔을 잡은 그 손을 간단한 동작으로 뿌리쳐내자 신기한 표정을 지은 해리엇이 말한다.
"정말이지 신기하다니까. 분명 나보다 힘도 약하고 체구도 작은데 잘 빠져나가는 걸 보면."
"….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어. 해리엇."
그를 노려보자 신기한 표정으로 말한 그의 말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듯 말해주자 어깨를 으쓱인다. 미안한 표정을 짓나 싶었지만 금세 그가 히죽 하고 웃으며 또다시 들고 있던 두 장의 표를 흔들었다. 도대체 저게 무엇인가 싶어 태울 듯 노려보자 적혀있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루나의 집에서 하는 가면무도회의 참석티켓이었다. 루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의 외동딸로 해리엇의 소꿉친구다. 어찌나 둘이서 잘 맞는지 마치 백현이 너와 찬열이 혹은 종대를 보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도. 너에겐 미안하지만 이미 초대장을 받은 터라 어쩔 수 없어. 명단에도 이미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 가지 않을 셈?"
으드득-. 하고 이를 갈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다 내 턱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을 쳐냈다. 의도치 않게 힘이 세게 들어가긴 했지만, 인상을 일그러뜨리던 그가 한숨을 쉬더니 손의 방향을 틀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오늘 저녁 8시까지. 라는 말을 내뱉고는 가게 밖으로 나간다. 축 처진 어깨가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나와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술을 거하게 마신 그가 나에게 달려들어 억지로 범하려고 한 후로 그가 내 몸에 터치하려고 하면 소름이 돋는다. 호신술과 여러 기술로 인해서 그에게서 쉽게 빠져나왔지만, 누군가 나를 범 하려 했던 충격은 상당히 컸다. 나는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를 미친 듯이 그를 쥐어팼다. 그리고 쓰러진 그를 차마 내쫓을 수는 없어서 치료를 해주고 루나네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를 본 루나가 경악했지만 내 말에 더 패지 그랬냐는 말에 희미하게 웃기도 했다. 한동안 그는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술이 깨고 난 후에 기억이 났을 수도 있고 루나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내 눈앞에 띄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조금씩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미국으로 온 후 처음 사귄 친구였기에 독하게 밀어내기는 힘들더라.
그리고 한 편으로는 네가 떠올랐다. 술만 마시면 엉겨붙던 네가. 백현아. 너와는 달랐다.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도 애교를 심하게 부리며 나를 품에 안고 힘들었던 점, 기뻤던 점, 슬펐던 점, 즐거웠던 점, 행복한 점…. 이런저런 속마음을 털어놓던 너랑은 달랐다. 그는, 외모도 말투도 행동도 너를 닮긴 했지만 네가 아닌 남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고 단 한 번도 그와 너를 착각한 적이 없다. 그를 통해 너를 투영한 적도 없다.
백현아. 너에게 배운 호신술은 잘 쓰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일부러 시골 중의 시골로 찾아온 것이지만 그래도 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늦은 밤 혼자 다니면 달려드는 사람도 있다. 너에게 배운 호신술은 그런 곳에 잘 써먹곤 한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오고 난 후 함께 사격장에 갔을 때 나에게 총 쏘는 모습이 멋있다고 역시 백발백중~ 하며 놀리듯 말했지만, 진심이 담긴 존경의 말로 만약 내가 총을 소유하게 된다면 정말 잘 다룰 것이라고 예상하며 말했던 것처럼 나는 잘 다루고 있다. 특히,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좋으면 달려드는 비렁뱅이 같은 족속들에게.
백현아.
처음으로 네 곁이 아닌 곳에 있다.
홀로 낯선 땅인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백현아.
내가 너를 떠나고 난 후 그렇게.
벌써 가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