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대는 하루종일 얼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남아있던 수업을 겨우 마치고 청소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찬열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걸까 곰곰히 생각할 수 있었다. '종인쌤이랑 사귀어요?'라는 말이 포인트인 것 같긴 한데. 게다가 그 뒤에는 애인이 있냐니. 자기가 그 애인이면서 말이다. 그것도 반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종대는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하지만 찬열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찬열이 자신보다 훨씬 더 화가 나 보였으니까. 종대가 오늘 수업이 많이 없는 날이라서 망정이지 수업이 꽉 찬 날이었으면 분명 수업하는 내내 허공을 바라보며 입만 뻐끔거렸을 게 분명하다.
"종대쌤, 오늘 진짜 이상해요. 아까 정말 무슨 일이었어요? 얼굴이 완전 빨개졌었던데."
"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열이 조금 나서... 이제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요즘에 감기가 유행이라더니 진짜인가봐요. 몸조심해요."
"네, 고마워요."
옆 책상에 앉아있던 종인이 다정하게 물어오자 종대가 눈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종인쌤이랑 사귀어요?'... 자꾸 이 말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 학교에 종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학생과 선생 통틀어서 바로 종대의 옆에서 종대를 웃으며 바라보는 이 사람 밖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종인쌤이랑 사귀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확실히 종인은 종대가 학교에서 가장 친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찬열을 제외하고는. 종대가 1학년을 담당할 때부터 3학년 담당으로 올라올 때까지 우연찮게 언제나 옆자리였고 그로 인해서 안 친해질래야 안 친해질 수가 없었다. 의외로 성격도 잘 맞고 공감대도 꽤 있어서 종대도 종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종인이 스킨십에 대해서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뭐, 1학년 담당일때는 많이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익숙해졌고 가끔은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어, 세훈아!"
"네?"
종대는 자신의 책상에 멍하니 초점을 두고 생각에 잠기려다가 옆눈으로 지나가는 세훈을 발견하고는 급히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에요, 쌤?"
"저기 있잖아... 혹시 오늘 찬열이 무슨 일 있었어? 아프다고 조퇴한다고 듣긴 했는데... 아침 일이 좀 걸려서."
"아... 그게, 찬열이가 소문을... 들어버려가지고."
"소문?"
"그게, 그러니까... 그냥 소문! 소문일 뿐인데요."
"어떤 소문인데."
세훈이 옆에 앉아있는 종인의 눈치를 살피며 종대의 귀에 슬며시 말했다.
"선생님이랑 종인쌤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있어서."
"뭐?!"
너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종대는 무심코 소리를 내질렀다. 한 순간 적막해진 교무실에 죄송하다고 두어번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세훈을 바라봤다.
"그그그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저 쌤이랑?"
"그냥 소문이에요, 소문! 쌤들이 너무 친해보여서 어디서부턴가 퍼졌는데... 학교 애들은 거의 다 알걸요. 박찬열은 맨날 잠만 퍼 자니까 몰랐던거고. 꽤 오래됐는데."
종대는 이제야 이해했다. 찬열의 행동을.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자기 애인이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는 소문을 제 3자를 통해서 들은 것 아닌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애들 다 보는 앞에서... 아, 아직 찬열은 사춘기 고등학생이니까 그럴수도 있다고 해줘야 하나. 종대의 머릿속은 텅 빈 상태에서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찬열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가 가장 고민되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세훈아."
"선생님 근데... 박찬열이 선생님한테 좀 진심인 거 같던데."
"어...?"
"아, 아니에요!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쏜살같이 교무실에서 나가는 세훈이었다.
알고 있다. 찬열이 자신에게 진심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단 이따가 퇴근하고 가서 해명해야지. 종인과는 그저 친한 동료관계일 뿐이라고.
"찬열아~ 선생님 왔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종대는 의아했다. 평소에 음식은 모두 종대가 하는데.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는 조심스럽게 부엌을 살폈다.
"어, 선생님! 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아직 덜 됐는데... 조금만 기다려요!"
"찬열아, 지금 뭐하는...?"
"비밀이에요! 어서 옷 갈아입고 와요. 그 때 쯤이면 다 되어 있을거예요."
종대를 밝은 얼굴로 반기는 찬열이 후라이팬을 한 손에 들고는 인사했다. 너무나 밝은 찬열의 표정에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종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신에게 요리를 해 주려는 것일까? 대체 왜? 종대는 갈수록 아리송한 찬열의 행동을 추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갔다.
갈아입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침에는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으니까. 하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연인이 가만히 있을까. 아마 오늘 아침일찍 조퇴를 한 것도 화가 나서라고 생각했는데... 종대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던건가 싶었다. 일단 입고 있던 옷을 벗어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가려던 찰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약병이 보였다. 얼마 후면 히트싸이클이다. 원래 히트싸이클 억제제는 강도가 강해서 하루 전 정도에 한 알만 먹으면 되는데, 아무래도 신체리듬이라는 게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다보니 종대는 예정일의 2~3일 전부터 약을 먹는다. 종대는 달력을 확인한 뒤에 약병에 손을 뻗었다.
"선생님! 다 됐어요! 얼른 와요!"
종대가 약병을 따는 순간 찬열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찬열은 종대의 손에 들려있는 약병을 보고는 종대의 손을 잡고 내려놓게 했다.
"약은 이따가 먹어도 되잖아요. 모처럼 제가 솜씨를 부렸는데 입에서 약맛 나는 상태로 제가 만든 거 먹을거예요?"
"아니야! 갈게. 약은 이따가 먹지, 뭐. 우리 찬열이가 만들었다는데."
찬열이 덩치에 맞지 않게 배시시하고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종대는 그런 찬열이 너무 귀여워서 따라 미소짓고는 약병을 놓고 찬열을 따라서 부엌으로 총총총 달려갔다.
부엌 식탁에 놓여진 것은 두 접시의 오므라이스와 소세지 볶음 정도였다. 찬열의 입맛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메뉴구성이었다. 모양새는 그저 그랬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노력했다는 표시가 났고, 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요리같은 것을 한번도 찬열이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종대였기에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해줬다는 게 너무도 기뻤다.
"와... 찬열아, 이거 니가 한거야?"
"당연하죠! 제가 폰으로 레시피까지 나름 찾아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먹어봐요."
종대는 곧장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 바뀌었다. 이거! 더 많은게 선생님거예요."
찬열이 자신의 앞에 있던 오므라이스와 종대의 앞에 있던 오므라이스를 서로 바꾸었다. 더 많은 걸 종대에게 주려는 듯 보여서 종대는 찬열을 보고 미소지었다.
"잘 먹을게~"
말끝을 다정하게 흐린 종대는 숟가락을 들고 오므라이스를 살짝 숟가락에 담에 입에 넣었다. 맛은 그저 평범한 오므라이스 맛이었지만 종대에게는 다른 오므라이스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어때요?"
"완전 짱이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선생님은 니가 화난 줄 알고..."
아차. 무심코 나와버린 말에 종대는 당황했다. 찬열은 오므라이스를 우물거리며 웃었다. 종대는 이참에 그냥 해명하고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있지, 찬열아. 오늘 니가 무슨 얘기 들었는지 세훈이한테 들었어."
"그 소문이요? 됐어요, 해명이라면. 안 믿어요. 선생님은 나랑 사귀니까."
"그래도... 선생님도 오늘 처음 들었어! 종인쌤이랑은 그냥 친한 동료..."
"알아요. 아침엔 그냥 갑자기 좀 욱했던 거에요. 그래도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됐는데. 미안해요."
"어? 아냐! 사과는 내가 해야지."
"아뇨, 아침에 제가 너무 심했어요. 이건 나름 사과의 의미! 맛있게 먹어요."
찬열이 빙긋 웃고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종대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조금 이상한 느낌도 있었다. 찬열이 이렇게 속이 깊은 학생이었나...? 이번 일을 통해서 성장했나보다 하고 그냥 넘겼다. 내 남친, 이제 어른 다 됐네! 종대는 속으로 뿌듯해하며 다시금 오므라이스를 입에 넣었다.
오늘은 종대가 야자감독을 하지 않는 날이니 이제 곧 집에 돌아오겠지! 찬열은 종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이제 선생님은 진짜 내 꺼가 되는거야. 혼자서 웃으며 집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던 찬열은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서 전화를 받았다.
"쌤! 어디예요? 언제 도착해요?"
"아니 그게 찬열아! 오늘 쌤이 급하게 회식이 잡혀버려서... 아무래도 저녁 혼자 먹어야할 것 같아."
찬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늘? 지금? 설마. 안되는데?
"지금이요?"
"응! 이제 나갈거야.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하고 너한테 전화하는 거야. 오래 못해."
"안 돼요! 오늘은 절대 안 돼!"
"어?! 왜,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선생님 히트...!"
"히트...? 아아. 괜찮아, 괜찮아! 약을 두 알이나 먹었는걸! 내가 쓰는거 효력 엄청 쎈거 알잖아. 걱정 마! 냄새도 안 날걸."
"아, 쌤. 그래도 오늘은 진짜 집에 오면 안돼요? 오늘 회식 꼭 필요해요?"
"응. 이번에 새로 온 선생님들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자리라서 웬만하면 다 참석하랬어. 아, 이제 가려나 봐. 끊을게! 12시 전까진 들어올거야!"
"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기고 찬열은 멍하니 벙쪄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해야하지? 장소라도 물어볼걸. 어떡하지. 찬열은 일단 대충 옷을 챙겨입고 급하게 나가서 택시를 잡고는 학교 방향으로 향했다.
종대에게 화가 나서 아침부터 조퇴했던 날, 찬열은 화를 삭히지 못한 채 집까지 도착했다. 물론 소문을 믿지는 않지만, 종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찬열은 불안했다. 자신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찬열이지만 그 대상이 종대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종대가 딱히 얼굴을 보는 타입도 아니고, 바보같이 착해가지고는 자기한테 다정하게 다가와주는 사람한테는 헬렐레하고 경계를 풀 것이 뻔하다. 히트싸이클 약을 잘 먹고 있다고 하더라도 찬열과 한번도 관계를 나눈 적이 없어서 몸에서 찬열의 냄새가 나지도 않을 것이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라는 이야기이다. 찬열은 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종인이 알파인지 베타인지, 오메가는 아닐 것 같고. 여하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자신의 냄새가 몸에 스며들지도 않은 종대를 그런 환경에 노출시키는 것은 끔찍히 싫었다.
그리고 찬열은 한 가지를 결심했다. 종대는 계속해서 약을 주기적으로 먹어 히트싸이클을 막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종대에게 약 자체를 못 먹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억제제의 효력을 없애는 것'. 종대에게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억제제를 무력화시키는 약을 팔고 있다는 얘기를 아는 형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원래는 억제제를 먹은 상태에서 급하게 임신이 필요하거나 한 경우에 억제제보다 효력이 강한 무력화제를 먹어서 몸 속에서 억제제를 제거하는 원리인데, 그건 한번에 무력화제를 알약 단위로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약이라고는 질색을 하며 억제제를 제외한 모든 약물을 멀리하는 종대에게 그것을 그대로 먹이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오메가인 종대가 그 약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형은 현재 약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찬열은 그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뭉뚱그려서 물어보았는데, 그럴 때에는 알약을 가루로 만들어서 먹이는 대신에 그렇게 되면 응집력이 떨어져서 효력이 많이 줄어드니 반드시 억제제를 먹기 전에 무력화제를 미리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약사 형이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이런 지식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을때 찬열은 알 필요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는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달려가서 무력화제를 구입했고, 이를 어떻게 종대에게 줄까 강구하다가 종대에게 점수도 딸 수 있고 약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찬열이 대충 계산한 바로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종대가 히트싸이클이 왔어야 했다. 학교에 있는 종대에게 매우 위험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서 찬열이 냄새 제거제도 몰래 가방에 넣어 학교에 챙겨왔는데 어제 오늘 학교에서는 종대에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 형이 장난을 쳤나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제도 터지지 않았고 오늘 학교에서도 터지지 않았다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지금이다.
찬열은 택시에서 내린 뒤 곧장 교무실로 향했다. 역시나 비어있었다. 찬열은 다시 종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방비했지만 만약에 지금 터진다면 오메가가 없어 성욕에 굶주린 알파에게 그보다 맛있는 먹잇감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찬열은 자꾸 불안했다. 회식이라면 교사들이 대부분 참석했을텐데 그 중에 종인이 없을리가 없었다. 찬열이 보기엔 종인은 왠지 알파일 것 같았다.
"빨리 전화 받으세요... 빨리... 선생님..."
찬열은 몇 번이고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애타는 수화음만 찬열의 귓가에 울렸다.
-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제목 변경되었씀니당!
구독료는 몇 화 더 가서부터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