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간의 노력에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닿지 않으려 서로의 반대편으로 향해 봐도 결국 종점에서 다시 재회하는 이들이 있다.
허리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돌담길을 따라, 만개한 들꽃을 따라 걷다보면 세상의 모든 길은 이어져있다.
그게 설령, 헤엄칠 수 없는 바닷길이라도 언젠가 뭍으로 가게 되어있다.
나는 너와 어떤 길에서 만났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 앞의 울퉁불퉁한 길에서 너를 올려다보았던가. 숲을 둥글게 둘러싼 산책길에서 너의 볼을 쓰다듬었던가.
내가 눈에 담았고 손 끝으로 추억하는 너는, 그 어떤 이보다 눈부시게 하얀 사람이었으며 그 어떤 것보다 봄 같은 눈을 가졌다.
나는 이제 또 다시 길을 걸으려고 한다. 내 손으로 놓아버린 너를 되찾기 위해 가시밭길이라도 걸으려고 한다.
그런 내가, 염치없이 다시 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가. 아마 항상 웃기만 하던 너는, 내게 두 눈을 내어줄 지도 모른다.
나는 비가 되어버린 너에게로 간다.
모난 내 마음을 적어내린, 너를 위한 편지. 정작 너는 읽지 못할 나 혼자만의 편지.
너의 방 한 켠에 두고 나온 나의, 분홍편지.
[오백] 분홍편지 (수취인불명 번외: K) W. 리플(Riffle)
답지 않게 고요한 아침이었다. 나를 향해 등을 돌려 앉은 너였지만 나 또한 그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이 까마득한 어둠으로 시선을 내던지고 갈대처럼 방황한다하여 나 또한 길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너는 단단히 잡고있던 밥그릇에서 손을 떼내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한 줄기 줄어버리니 식탁 위에는 적막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애를 썼다.
더 먹지 않고, 백현아.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얄쌍한 손가락에 닿았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네가 딛고 일어설 식탁 한 켠에 있던 그릇을 치워냈다.
어색한 웃음이 뒤따라오고 나는 아주머니에게 눈웃음을 내보였다. 너는 손을 더듬거리다가 눈가를 작게 비볐다. 어제도, 울었나.
속상한 마음이 들끓었다. 꾸역꾸역 밀어넣었던 밥이 얹힐 것만 같았다. 나는 답답한 공기가 차오른 가슴팍을 세게 두드렸다.
너는 약했고, 여렸으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슬쩍 입술을 감쳐물었다.
너는 그릇을 치워낸 모서리를 잡고 체중을 실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이에서 원망의 빛이 감돌았다.
"잘 먹었습니다."
저 혼자 올라갈게요. 식탁을 빙 둘러 벽에 부딪힐듯 위태롭게 걷는 동선을 따라 내 고개도 덩달아 옮겨갔다.
아주머니는 그런 내가 익숙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네가 앉았던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따뜻했지만, 너는 따뜻함에 익숙해진 채 그 온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너가 내뱉었던 것처럼 작게 한숨을 흩뿌리고선 계단을 올라서는 작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너를 따라가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너의 등을 받쳐주었다. 조심해야지. 습관적으로 너를 향해있는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너는 뒤를 돌아보려다 급하게 튀어나온 나의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놀란 마음에 혀가 딱딱하게 굳어 숨소리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다시금 발을 내딛는 너의 손은 난간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등이 하얗게 질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네가 감춰두었던 날개를 펴들어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눈 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두 눈을 꽉 깨물었다.
결국, 끝은 이거였다. 떠나야한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엿듣고서 엉엉 울던 너. 멀찌감치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
그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거실에는 짐정리를 끝낸 가방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곧 있으면 떠나야 한다는 말을 대신 전해주려 몇번이고 입을 붙였다가 떼었던 아주머니에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2층에 올라선 너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슬리퍼가 부딪히는 소리가 멎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너는 방문을 바라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짓자락이 끌리는데 넘어지지는 않을지, 나는 이순간에도 네 걱정 뿐이었다. 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일부러 마주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백현아. 불러지지 않는 이름이 입 안에 맴돌았다. 너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내며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넣고 싶었고, 움츠러든 어깨를 끌어안고 다 괜찮다, 토닥이고 싶었다.
달큰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기대하며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 또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X O X O
나는 항상 네가 잠든 머리 맡에서 두 손을 모았다. 혹시나 곤히 자던 숨소리가 끊어질까, 몸을 뒤척일까 숨을 죽이며 너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이 온전히 두 눈에 담기길 기다렸다.
그러고보면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깨울 때는 침대를 흔들지 말 것, 잠이 올 정도로 나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것, 절대 언성을 높이지 말 것, 이름을 부를 때는 성을 붙이지 말 것, 스스로 일어나도록 옆에서 지켜봐줄 것….
전부, 너에 관한 것이었지만 되돌아보면 나는 너와 닮아있었다. 너의 웃음, 너의 얼굴, 너의 목소리. 모든 것이 나를 밝게 비추었다.
나는 원래부터 검은색이었으니 밝거나 어둡거나 하는 음영도 없지만 너는 아니지 않은가. 목소리가 메어와 파동이 짙어지면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깜깜한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너는 매일 이 어둠을 보고 살테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너와 닮기를 원했다. 네가 나를 보았으면 했다. 못난 얼굴에다가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너라면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향한 기도는 매일 반복되어 수도 없이 입에 달라붙었다. 내가 눈이 멀어도 좋으니 이 가엾은 이의 눈을 틔워주소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에게 닿고 나에게 되돌아올 때까지 손을 비볐다. 나는 이미 넓은 세상을 보았고, 수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으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너에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매일 입는 옷의 색깔이 무엇인지, 네가 살아왔을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도 혼자서 나가본 적 없다던 숲의 모습이 어떤지.
울컥,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에 눈물이 비집고 나올 때 나는 네 얼굴에 숨을 묻었다. 고른 숨소리가 향수처럼 퍼지고 조금씩 진정이 될 무렵이면 동이 텄다.
물감이 풀어지듯 하늘에 빛이 드리우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나는 네 방의 창문 너머 물음을 던졌다.
숲은 고요했다.
X O X O
나는 초조하게 계단 아래에 서있었다. 백현아, 백현아. 네 이름을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의 끝에서 너의 모습을 엿보았다.
너는 수척해진 얼굴로 얼굴을 비췄다. 요 며칠 사이에 나에게 제대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네가 어떤지 알 방법이 없었다.
마음 한 켠이 찌르르 울려왔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었다. 너가 지금 내 얼굴을 보았으면 좋겠다. 단지 이 생각 뿐이었다.
네가 내려오기 전에 나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너는 멍한 얼굴로 내 입술을 응시했다.
초점없는 눈빛을 마주하려 가까이 다가섰다. 백현아. 이마에 맞닿은 목소리에 너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많은 말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경수야"
울먹이는 목소리에 마지막 말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를 붙잡으려 길게 뻗은 손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한 걸음 다가와 연신 더듬거리다가 이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밥 투정 안 부릴게. 너랑 산책가자고 안 조를게.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가지마. 응? 가지마, 경수야….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목울대를 멈춰세우며 너의 손을 떼어냈다. 항상 따뜻하던 손이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나는 가야해"
엉겁결에 튀어나온 단호한 목소리에 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지만 너는 분명 울고있었다. 늘어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다가 독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너의 눈이 나에게 닿아있었다.
"네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백현아"
"나는 온통 눈이 먼 채, 나를 스쳐 지나가는 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서 있었겠지"
지금처럼…. 너는 어물어물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너의 들썩이는 등을 토닥여줄 담대함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여서 입술만 꽉 깨물 뿐이었다.
다 큰 어른도 아니고 다 자라지 못한 아이도 아닌 네가 견딜 아픔이 어떤지 나는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원망해도 좋다. 눈 앞에서 사라져 달라 소리 질러도 좋다. 나를 향한 마음을 지워내도 괜찮다.
너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희미해질테니, 바위의 옆을 돌아서 빠져나가는 물길처럼 흘러갈테니, 새하얀 구름 뒤 하늘처럼 파랗게 지워져갈테니.
다만, 내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백현아"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모습처럼 그 누구의 앞에서도 울지말고.
"두개의 선이 뜨겁게 얽히고 설키면"
껍질을 벗겨내지 않은 알맹이 그대로의 마음을 지켰으면 하는 것.
"결국 터져"
단지 그 뿐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