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0 (솔직한 마음)
얼마 동안의 폭죽 이벤트가 끝이 났고, 이벤트가 끝남과 동시에 시끌시끌하던 주변은 금세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해 고개를 돌려 김종인을 바라보았을 땐, 정말이지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녀석과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아버렸으니 말이다. 시선이 닿자마자 먼저 황급히 시선을 옮겨버린 건 김종인 쪽이었고, 그런 녀석의 모습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이젠 녀석의 시선을 느끼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하필 김종인은 누군가 말을 할 때면 그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김종인과 눈을 마주하기는 커녕 녀석의 시선조차 쑥쓰럽게 여긴 채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되진 않을까…. 그럼 참 큰일인데.
집에 혼자 갈 수 있으니 데려다 주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도 늦었다며 굳이 데려다 주겠다 고집을 부리던 녀석 탓에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같이 해야 했다. 오늘 아침 학교도 같이 가주고,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도 와주느라 고생했을 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지막까지 배려를 해주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이런 고마운 마음을 어떤식으로 표현해야 할지도 막막해 지나치게 상투적이면서도 식상한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시각인 지금. 항상 이 시각이면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끄적이거나 영어 단어를 암기하곤 했는데, 수능시험도 끝났으니 이젠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렇게 침대에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고 재미가 있었다. 수능이라는 하나의 큰 고비가 지나가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자유로워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수능이 끝났으니 매번 반복되던 생활패턴도 오늘부로 약간은 바뀌게 될 것이었다. 분명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상했다.
"……."
아마 내일부턴 단축수업을 하게 될 터였다. 수업시간엔 공부도 하지 않을 테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하는 광경이 바로 내일, 교실 안에서 펼쳐질 것이었다. 수능이 끝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과, 수능 탓에 다음으로 미뤄둬야 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리려 노력을 하면, 막상 그게 쉽게 생각나지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일단 이건 행복한 걱정이니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상관은 없었다. 오늘은 수능이 끝난 날, 김종인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고, 의도치 않게 폭죽 이벤트도 구경을 했다. 하루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서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잠은 일찍 자야…
"… 여보세요?"
하품을 하며 침대에 몸을 뉘이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이 요란한 벨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 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가 전화를 걸어온 걸까 생각하며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세 글자가 휴대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망설임없이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보세요.'라는 가장 일상적인 인사말 뒤로 그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선생님이야. 늦은 시간에 미안.
"아니에요. 괜찮아요."
- 음, 수능 보느라 수고했어. 이번 국어가 좀 까다로웠다네. 내가 보기에도 살짝 그렇고.
"그래도 선생님이 찍어주신 부분에서 많이 나왔어요."
- 등급컷은 확인해 봤어?
"아니요, 아직…."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바로 뜨는 게 등급컷이었지만, 괜히 기분이 우울해질 것만 같아 일부러 인터넷은 들어가 보지를 않았다. 등급컷은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는 것이니 오늘 하루는 수능에 대한 모든 것을 일체 잊은 채 기분 좋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로 인해 다시금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하면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 그래, 수고했다.
"네, 선생님도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수능이 끝났다는 건, 그와의 관계도 이제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과외수업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과외선생인 그를 만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안 좋았던 기억들보단 좋았던 기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와 헤어지게 된다 해서 몹시 섭섭하다거나 슬프진 않았다. 그냥 살짝 아쉬운 정도랄까…. 의도치 않은 첫 키스의 상대가 바로 박찬열이긴 했지만, 신기하리만큼 그에 대한 감정은 얄팍하기만 했다.
- ○○아.
"네?"
- 내일 학교 몇 시에 끝나?
"어…, 글쎄요. 아마 오전수업만 하니까 1시쯤엔 끝날 것 같은데…. 왜요?"
- 음, 수업도 아예 끝났고…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밥이나 좀 사줄까 해서.
"밥이요?"
- 응, 먹고 싶은 거 있어?
밥을 사주겠다며 먹고 싶은 게 있음 말해보라는 그의 말에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평소엔 먹고 싶은 게 많다가도 이렇게 누군가 갑작스레 물어오면 머릿속이 하얘져버리기 일쑤였다. 음…
"… 스파게티요."
- 하하, 스파게티?
"네. 스파게티…. 김종인이 좋아하거든요."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김종인을 위해 답했다. 사실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물으면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치킨이라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은 치킨을 사랑하다시피 좋아했지만, 간단히 먹을 수 있을 법한 음식을 정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래서, 길고 긴 고민 끝에 결정한 음식은 스파게티였고, 조심스레 그에게 대답을 건넸다. 그런 내 대답에 한참 동안 뜸을 들이는 것 같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종인이?
"네?"
- 음, 아니야. 그래, 종인이도… 같이 만나야지. 그치….
"… 쌤?"
- 내일 학교 끝나면 전화해. 알았지? 늦었는데 잘 자고, 내일 보자.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듯 내뱉던 그가 조급히 인사를 건네왔다. 그런 그에게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전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련없이 통화를 뚝 끊어버리는 그의 행동 탓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였을진 모르겠지만, 결코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
수능이 끝난 교실의 광경은 대충 이러했다. 일찌감치 학교에 와 잠을 자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저들끼리 모여 원카드 게임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어디서 갖고 왔는지 모를 공깃돌 다섯 개로 공기놀이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실 이러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거의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지각을 했다는 사실만 오직 놀라울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실감이 되는듯도 했다.
수능이 끝나면 할 게 없어 교실 바닥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학생들과 원카드 게임을 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생겨날 거라며 미리 예언을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상황으론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수능 끝나면 하려고 쟁여놓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공기놀이라니요. 말이 안 되잖아요.
"아, 미친놈아! 너 방금 하나 건드렸잖아!"
"뭐래. 살짝 스치기만 했거든?"
"스쳤다고? 원래 스치면 안 되는 거거든요. 병신이냐? 공기놀이 처음 해봐? 초딩 때 뭐하고 놀았냐? 이새끼 공기놀이 안 하고 고무줄놀이 했대요~"
"아씨, 다 닥쳐 봐. 남자새끼들이 왜이리 말이 많아. 됐고, 이제 내 차례임."
"지는 남자새끼 아닌가…. 어? 너 고비 아니야? 왜 그냥 함? 수고."
*
정상수업은 4교시까지였다. 그러나 3교시가 끝나갈 때까지도 등교를 하지 않은 학생은 대략 열 명 정도가 있었고, 그에 화가 나신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을 모두 자리에 앉힌 뒤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시기 시작했다. 겨우 수능 하나 끝난 건데 이렇게 자유로워도 되는 거냐, 수능이 끝났다 해서 몸과 마음이 해이해지면 안 된다, 너희들이 앞으로 겪어내야 할 어렵고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이러는 거냐, 그런 일들에 비하면 수능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식의 잔소리들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교실 안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선생님의 말을 집중해서 새겨듣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저들끼리 몰래 속닥거리며 휴대폰 게임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마 졸업식을 할 때까진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될 것이었다.
*
7교시까지의 수업이 끝나면 8교시나 마찬가지인 보충수업을 듣고, 거기에 야간 자율학습까지 추가로 참석했던 지난 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오늘, 학교에서의 일과가 벌써 끝이 나버렸다.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었고 집은 잠을 자는 용도로 통했었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의아해질 정도로 나도 모르게 하루만에 이러한 생활패턴이 익숙해져버린 듯했다.
오전수업만 하고 집에 간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것이었다. 학교생활 중 점심도 안 먹고 집에 가게 될 날이 있을 줄이야. 초등학생 때도 점심은 먹고 귀가를 했지. 물론 지난 여름 볼라벤이라는 태풍 탓에 2교시까지만 수업을 하고 귀가를 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귀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좋았다. 앞으론 오늘 같은 날이 계속 반복 되겠지. 어떡해. 진짜 좋다.
"참, 지금 연락할까?"
"뭘."
"찬열쌤한테."
"왜?"
"그야, 만나기로 했으니까."
"만나기로 했다고?"
금시초문이라는 마냥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물어오는 김종인의 모습에 덩달아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인상을 찡그리는 내 모습을 보곤 마지못해 인상을 풀던 녀석이 제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꾹꾹 눌러오눌러오기 시작했다. 인상 쓰지 말라 했잖아.
"박찬열이랑 약속 잡았어?"
"왜 모른다는 식으로 말해?"
"모르니까."
"선생님이 어제 너한테 연락 안 했어?"
"무슨 연락."
"……."
"너한텐 했어?"
"… 응, 오늘 밥 사주신다고 했는데…."
아마 김종인에겐 연락을 안 했던 건지, 약속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녀석에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일부러였는지 모르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어젯밤 김종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맺어졌다. 그게 조금은 찝찝하면서도 이상했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그의 의도를 추측해 보고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대신 전해주겠다 생각하고 그런 거겠지. 굳이 전화비 더 들게 연락을 두 번이나 했겠…
"만나게?"
"약속 잡은 건데… 만나야지. 너도 갈 거지?"
"과외도 끝났는데 뭐하러 만나. 내가 박찬열 얼굴을 왜 봐야 하는 건데?"
"……."
"너도 만나지 마. 밥 사준다 했다고? 밥 한 번 사주는 게 대수야? 그냥 약속 깨. 밥은 내가 사줘도 충분하잖아."
좋은 말을 듣지 못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도 과민 반응을 할 줄은 몰랐다. 역시 둘은 웬수지간이 맞는 듯했다. 이렇게 질색을 할 만큼 완강히 거부를 하는 걸 보면 녀석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약속을 깬다는 건 그에게 민폐를 안겨줌과 동시에 은근한 상처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설득하려드는 김종인의 말에도 그저 입술만 꾹꾹 깨물며 말을 아꼈다.
"……."
"야."
"… 응?"
"뭐해. 전화 오잖아."
묵묵히 말을 아끼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김종인이 턱짓으로 내 겉옷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여 주머니 속을 바라보았고, 제 위치를 알리기라도 하듯 부르르 떨고있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휴대폰 화면엔 어젯밤과 같은 세 글자가 띄워져 있었고,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선생님인데….
"네, 왜요? 저 이제 학교 끝났는데…."
- 쌤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만날 것 같거든. 미안, 어쩌지?
"아…, 그래요?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저희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래. 종인이한테도 미안하다 전해줘. 나중에 꼭 만나자.
"네, 감사합니다."
내 대답과 동시에 통화가 끊겼고, 팔짱을 낀 채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김종인이 천천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박찬열?"
"응,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만날 것 같대."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던 김종인이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천천히 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내 발걸음에 제 걸음을 맞춰 걷던 녀석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지금 너희 집 비냐."
"어? 응, 왜?"
"가게."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한결같이 무심하기만 했다. 평소 김종인이 자주 놀러오곤 했던 우리집이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내가 녀석에게 예전과는 다른 감정을 품게 돼버린 이상 우리집에 오겠다는 말이 꽤나 불편하게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싫어?"
"아니, 안 싫어. 근데 우리집에 뭐… 할 거 없는데."
"내가 매번 할 거 있어서 가냐."
퉁명스레 답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이곤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매번 할 게 있어서 온 게 아니면 도대체 왜 왔던 건데. 라고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 속으로 삭였다.
*
집에 도착을 하자마자 거실로 발을 내딛곤 소파에 털썩 앉아버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덩달아 소파에 살포시 앉았다. 이 시간에 TV에선 보나마나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사 프로그램을 방영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 TV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오세훈이랑 PC방 간다고 하지 않았어?"
"주말에 가지 뭐."
"오세훈한테 말은 했어? 맨날 네가 먼저 약속 깨지?"
"뭐, 대부분."
"… 멋지네."
반어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다며 씨익 웃어보이는 녀석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리곤 더이상 할 게 없어졌는지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곤 소파에 올려져있던 내 휴대폰을 가져가버리는 녀석의 행동에 작게 웃음을 뱉었다.
"비밀번호 뭐라 했지. 네 생일 거꾸로라고 했나."
"뭐 보려고? 내 휴대폰 볼 거 없는데."
돌려달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전하긴 했지만, 녀석은 들은 체 만 체 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숨길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했다.
"넌 내 이름을…"
"어?"
"김종인새끼가 뭐야, 김종인새끼가."
"… 아, 그건…."
"내 마음대로 바꿔놓는다."
"뭐라고 바꿀 건데?"
"나중에 확인해."
무심히 움직이는 손가락에 왠지 모를 힘이 실린 것도 같았다. 사실 언제 그렇게 저장을 해두었던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이름이었지만, 바꾸자 바꾸자 생각만 해놓고 실천은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게 조금은 미안해 어색히 웃음을 짓곤 최대한 말을 아끼려 노력했다. 곧이어 이름 수정 작업을 마친 건지, 녀석이 내 휴대폰을 두어 번 살피더니 다시 소파 위로 올려두곤 기지개를 쭈욱 켰다.
"휴대폰 글씨체 좀 바꿔라. 둥글둥글해서 이상해."
"내 글씨체가 뭐 어때서. 고딕체만 쓰는 너보단 낫지 뭐."
내 말에 어깨를 으쓱이던 녀석이 작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 손을 뻗어 녀석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분명 정없이 이름 세 글자로만 저장을 해두었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은근 궁금했다. 날 어떻게 저장해 놓았을까.
"… 아."
귀찮아서 잠가놓지도 않았을 줄 알았는데, 홀드를 열자마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뜨고 말았다. 순간 당황해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뱉어졌고, 졸음이 몰려오는지 지그시 눈을 감고있던 김종인이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비밀번호…."
우물쭈물거리듯 건네는 말에도 녀석은 아랑곳 않았다. 단순한 네 자리 숫자를 비밀번호로 지정해 놓았을 것만 같아, 단순한 숫자란 숫자는 모두 입력을 해보았다. 그러나, 자꾸만 아니라는 메시지가 떴다. 다섯 번이나 틀려 하는 수 없이 15초를 기다려야 했고, 신중히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설마 김종인 네 생일?"
"그래, 네 생일."
"뭐야, 되게 간단하… 뭐?"
"……."
"……."
"… 아, 뭐야. 내놔."
잠결에 그만 말이 헛나와버린 건지, 아님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버린 건진 모르겠지만,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던 김종인이 팔을 뻗어 내 손에 쥐여있던 휴대폰을 빼앗아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제 휴대폰 홀드를 열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자꾸만 궁금증이 커져, 괜히 침만 삼키며 갈등하다 넌지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너 비밀번호…"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내 생일이라며. 아니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라며 단호히 답하는 김종인의 모습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짓궂게 웃으며 녀석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게 웃기면서도 무서웠지만 그로 인한 재미가 너무나도 커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네 생일 맞아."
"……."
"생일 까먹으면 너 또 삐질까 봐 일부러 예전부터 해뒀던 거니까,"
"……."
"… 오해하지 말라고."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곤 휴대폰을 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뒤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아 잠을 청하는 김종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인정을 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녀석이 솔직하게 나와주자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무슨 이유였건간에 녀석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분이 묘했다. 마치 둥둥 떠있는 것도 같았다. 이런 기분을 매일 느끼고 싶다면 욕심이겠지만… 그만큼 좋았다. 둥둥 떠있는 듯한 묘하고 설레는 기분이. 김종인이.
*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날 것만 같던 김종인은 소파에 기댄 채 점심도 먹지 않고 몇 시간 동안을 잠으로 보내버렸다. 그런 녀석 탓에 난 혼자 방 안으로 들어와 무료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거의 어두워질 때쯤이 돼서야 눈을 뜬 듯한 녀석이 방문을 똑똑 두드려왔다. 노크소리에 살짝 놀라 방문에 대고 들어오라 말하자, 곧이어 문을 열곤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겨온다. 아직 잠이 덜 깨기라도 한듯 가늘게 뜨인 눈이 마치 곰돌이 같았다.
"… 깨우지."
천천히 걸어 내게 다가온 녀석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순간 몸이 굳는 것만 같아 잔뜩 얼은 채 천천히 입술을 떼 말했다.
"곤히 자는데 어떻게… 깨워."
김종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침대에 걸터앉는 듯하더니 바닥에 털썩 앉아버리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다 애꿎은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연락이 왔다거나, 다른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막만 감도는 고요한 분위기를 해결할 만한 나름의 방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잠잠하던 휴대폰에서 갑자기 요란스러운 벨소리가 울려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전화를 걸어온 것인진 모르겠지만, 화면엔 그의 이름이 떠있었다.
"여보세요?"
- ○○아, 어디야?
"저 지금 집이죠. 왜요?"
- 아, 다행이네.
"네?"
- 집에 없으면 어쩌나, 했거든.
"……."
-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
- 잠깐 나와 줄 수 있어?
집 앞까지 왔다는 사람을 그냥 보낼 순 없을 듯해 마지못해 알았다 답하곤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낀 채 겉옷을 걸쳤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김종인이 어딜 가는 거냐며 의아하게 물어왔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날이 어두워져 제법 쌀쌀해진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집 앞이라던 그는 제 것인듯 보이는 차에 기댄 채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용건으로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불안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머리칼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밝게 보였다.
"선생님."
"아, 왔어?"
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왔다. 왠지 오랜만인 것만 같은 그의 모습에 작게 웃어보이자, 그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덩달아 환히 웃어보였다.
"바쁜데 내가 불러낸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근데 왜요? 이렇게 집 앞까지…."
나보다 한참이나 높이 있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물음에 그가 작게 웃어보이더니 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기 시작한다. 짙은 빨간색의 작은 상자였다. 그가 가만히 상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엔 심플한 목걸이 하나가 담겨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 할 말이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상자 속에서 목걸이를 꺼낸 뒤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아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곧이어 그가 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와 섰다. 그게 조금은 어색하고 민망해 침을 꼴깍 삼켰고,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작게 소리내 웃던 그가 허리를 살짝 낮춘 채 내 목에 조심스레 목걸이를 걸어주기 시작했다. 꽤나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은근한 향수 향이 풍겨왔다.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는 그의 행동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미리 말하려 했는데, 수능 때문에 바쁘고 예민한 거 아니까 계속 참았어."
"……."
"○○아,"
"… 네."
"좋아해."
좋아해.
심장이 아래로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땐 무슨 말로 답을 줘야 하는 건지, 어떤 말로 최대한 상처가 되지 않게끔 대처를 해야 하는 건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솔직히, 정말 솔직 말하자면 나는 박찬열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 선생님, 저는…"
"……."
"태어나서 고백 처음 받아보는데요…."
"……."
"그래서… 모든 게 다 서툴어요."
"……."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
"… 죄송해요."
"……."
"… 아무것도 아닌 저를 좋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근데 전… 이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분명 나올 땐 추웠는데, 금세 더워진 듯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최대한 솔직히 내 마음을 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겐 어떻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
"……."
코너를 돌아 다시 걸음을 떼려 할 때쯤, 벽에 기대서있는 김종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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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화네요! 시즌 원 완결까지 쭉쭉 나가 보아요! 행쇼하는 그날까지.. 아..................러나ㅓㄴ아ㅣ룅ㄴ 저도 답답해 죽겠네요...... 후..... 언제쯤 행쇼할까요...... 참, 저번에 말씀 못 드렸는데.. 종인이 수시 합격했다니까 댓글로 합격 축하한다고 달아주신 분들.. 너무 귀여워서 혼자 끙끙댔어요........ 끙끙....... 그리고 우연히 독방에서 제 글을 추천해주시는 글을 운 좋게 본 적이 있는데,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던 거 있죠.. 심쿵.. 이게 뭐라고 추천씩이나..ㅠㅠㅠ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 댓글로 하트라도 달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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