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1 (마음앓이)
벽에 기대있던 김종인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가만히 내 눈동자만을 응시하던 녀석의 시선이 곧이어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 쪽으로 옮겨졌다. 박찬열과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인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녀석의 낯빛은 어두워 보였다.
"… 여기 서서 뭐해?"
"뭐 안 해.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
애꿎은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답했다. 누가 봐도 화난 얼굴에 화난 말투였다. 금방 돌아오겠다 해놓고 늦게까지 안 들어와서 삐진 건가 싶어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표정 굳히고 화낼 일이냐는 생각도 들어 한편으론 마음이 답답하기도 했다.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면서 쉽게 걸음을 떼지 않는 녀석의 모습 또한 내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참 침묵을 지키며 입술을 살짝 달싹이던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끝까지 닫혀있을 것만 같던 김종인의 도톰한 입술이 작게 벌어졌고, 녀석이 낮게 읊조리듯 말을 꺼냈다.
"박찬열이랑 사귀냐."
"… 뭐?"
"들었으면서 되묻긴."
퉁명스레 내뱉어진 말이 공중에 퍼졌다. 박찬열이랑 사귀냐는 물음에 순간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박찬열이랑 안 사겨. 사귀지 않아. 대답을 기다리는 녀석에게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왜 화가 난 건진 모르겠지만, 녀석의 표정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냥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버리기라도 한 건지, 녀석의 화난 표정마저도 좋았다.
"박찬열이 선물 고르는 센스는 있나 보네."
"……."
"목걸이 예쁘다."
"……."
"너랑 잘 어울려."
살짝 뜸을 들이듯 말을 끝낸 김종인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답답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박찬열이 아니라, 너야. 녀석의 면전에 대고 말하고 싶었다. 조금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서운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헷갈릴 만한 행동을 해서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놓고,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이런 마음을 하나도 몰라준다는 게 너무나도 섭섭했다.
"김종인."
"왜."
섭섭함과 동시에 궁금했다.
"… 우린 무슨 사이야?"
질문을 던지자마자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마치 썸이라도 타는 남녀 사이에서나 해야 적합할 듯한 질문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내뱉어버린 말이었으니 김종인이 그냥 웃어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괜히… 물었다.
"……."
"……."
"둘도 없는,"
"……."
"친구."
둘도 없는 친구. 맞는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던 건지 모르겠다. 애인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깝고 친밀한 사이? 애인이나 다름없는 애틋한 사이? 따지고보면 아니었다. 녀석의 대답처럼 우린, 그냥 친구였다. … 친구.
내가 고백을 못 하는 이유.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달라서. 좋아한다 말을 하면 네가 어디론가 가버릴까 봐, 이렇게 매번 삭이고 속으로만 고백을 해. 좋아해. 좋아해, 김종인.
*
갑작스레 전화를 받고 서둘러 나가는 모습에, 괜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전화통화 상대가 박찬열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밖도 어두컴컴한데 이 시간엔 도대체 왜 불러내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공기도 제법 서늘해졌을 테고, 아무리 따뜻하게 입어도 옷깃을 비집고 찬바람이 스멀스멀 통할 것이 분명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책임질 건가? 백이면 백,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은 언제나 한결같이 내 속을 벅벅 긁어대기만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궁금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집 앞으로 애를 불러냈을까. 무슨 할 말이 있길래.
'…….'
궁금증을 못 참는 성격이었던지라, 직접 나가서 확인을 해봐야만 했다. 저 깊은 곳에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치솟았고,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이 닿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엿 같은 감정이었다. 다신 느끼기 싫을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
대화를 엿듣고자 몰래 숨긴 했지만, 아쉽게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모습을 감춘 채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는 모습이 처량맞아 보이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저, 쌀쌀한 바람에 몸을 벌벌 떨고있을 작은 몸을 따스히 안아주고 싶다는 것 외엔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한 걸음 다가가 목걸이를 걸어주는 듯한 박찬열의 행동에, 안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욱더 복잡해지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좋아한다며 고백을 했을 것이었다. 이 시간에 집 앞으로 왜 불러냈겠어. 뜬금없이 목걸이를 왜 선물했겠어.
씨발.
*
'… 우린 무슨 사이야?'
갑작스레 물어오는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그걸 왜 묻는 거냐며 오히려 내가 이유를 물어 보고도 싶었지만, 애써 꾸욱 참았다. 우린 무슨 사이야? 그러게, 우린 무슨 사이일까.
'…….'
'…….'
'둘도 없는,'
'…….'
'친구.'
엄밀히 말하자면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는 게 맞았다. 우리가 연인 사이는 아니잖아. 연인 사이는 아닌데, 너를 알아온 대략 12년 정도나 되는 기나긴 시간을 '친구'라는 단어로밖에 정의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다. 왜 우린 친구일 수밖에 없는 거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 들어가라는 흔한 인사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을 법한 묘한 감정이 들어,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홀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박찬열이랑 사귀냐는 내 물음에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걸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꾸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박찬열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건 나름 안심이 되었다. 박찬열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저녁은 먹고 들어오는 거냐는 엄마의 목소리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말이다. 방문도 꼬옥 닫은 채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교복을 벗는 것조차 귀찮아 천천히 넥타이만 풀어내곤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하얀 천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욱더 하얀 것 같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박찬열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러나, 박찬열이 고백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꾸만 마음이 답답하고 찜찜했다. 이렇게 보니, 바보같이 좋아한다는 일말의 표현조차도 하지 못하는 나보단 박찬열이 백 배 천 배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 고백을 하기는 커녕, 솔직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박찬열도 하는 고백을 나는 결코 할 수가 없다는 것에서 열등감도 느껴졌다. 용기가 부족해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는 난, 아마 용기가 있더라도 이 모습 그대로일 것이었다. 용기가 충만해 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이건 마치 도박과 흡사했다. 고백을 해서 내가 바라는 최상의 결과를 맞이하거나, 친구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모 아니면 도. 결코 중간은 없었다.
수능이 끝나던 날, 함께 폭죽 이벤트를 구경했다. 큰 소리와 함께 팡팡 터지는 폭죽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너의 예쁜 모습을, 내 눈에 가득 담았다. 어린 아이라도 된 양 신이 나서 방방 뛰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것조차 벅찼다. 알록달록한 폭죽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커녕, 바로 옆에 있는 네 모습이 자꾸만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크나큰 폭죽 소리에 숨어 너에겐 들리지 않을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좋아한다고. 네가 듣지 못했을 것임을 알지만, 그러면서도 괜히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작게나마 네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것도 같았다. 태어나서 누구를 이토록 좋아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며 간접적으로 고백을 했던 적도 없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폭죽 소리에 숨어 용기 없이 전하는 고백이 아닌, 그 어떠한 것에도 감추지 않은 채 정식으로 용기 있게 전하는 고백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소심하게 진심을 전했으면 뭐해. 정작 네겐 닿지도 않았는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정말이지 위대한 것이었다. 하루를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는 건 기본일 뿐더러, 자신만의 생활패턴이 어느샌가 그 사람에게 맞춰져 있기도 하니 말이다. 짝사랑도 짝사랑이지만, 이건 참 중증이었다. 가만히 멍을 때리다가도 문득 네 생각이 났고, 애써 다른 생각을 해보고자 별 상관 없는 것들을 떠올리려 노력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네 생각을 덮기 위해 떠올려내는 온갖 다른 생각들마저 너에 관한 것들로 물들어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마치 짝사랑 말기에 접어든 것도 같았다. 옆에 없으면 보고 싶고, 옆에 있어도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었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놔버릴까. 좋아한다 말해버릴까. 매번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런 고민과 함께 보내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괜히 조급해지는 듯도 했다. 오래전부터 좋아해왔다는 내 말에, 넌 어떤 대답을 해줄 거야? 나를 내칠 거야?
내치지 마.
멀어지진 말자. 멀어지긴 싫어.
내가 네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눈앞에서 없어지지만 말아.
내 옆에만 있어.
*
꽤나 늦은 오전에 눈이 뜨였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당연하듯 학교는 쉬는 날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내딛었고, 잘 뜨이지 않는 눈을 손으로 비볐다. 자연스레 시계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고, 오전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곗바늘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 아씨…."
오세훈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진 대략 1시간 30분이 남아있었다. 늦게 일어나버린 이상,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아점을 먹어야 했다.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부모님은 이미 출근을 하셔, 집엔 나 혼자밖에 없었다.
- 종인아, 일어나면 빵 먹지 말고 밥 먹어라. 냉장고 안에 있는 반찬 꺼내서. -
식탁 위엔 엄마가 문구를 써놓은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대충 빵으로 끼니를 때울 생각이었지만, 포스트잇을 본 이상 그럴 순 없을 듯했다.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빵을 멍하니 바라보다 껍질에 적혀있는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마침 오늘까지인 유통기한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곤 굴러다니는 볼펜을 하나 가져와 포스트잇에 짧은 메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빵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라.. 죄송해요. -
*
샤워를 할 땐 정말이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치약의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칫솔을 가져다 대지 않나, 온도 조절을 잘못 해 차디찬 물로 샤워를 할 뻔하지 않나…. 심지어, 갈아입을 티셔츠 대신 바지를 두 개 가져와 웃통을 벗은 채 화장실을 나서야 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잠잠하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어 홀드를 열었다. 오세훈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야, 그냥 PC방 말고 카페로 와라. 버블티가 먹고 시프다^^]
문장의 마지막에 붙은 이모티콘 탓에 인상이 절로 쓰였다. 약속시간을 40분 정도 남겨둔 채 약속 장소를 바꿔버린 오세훈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PC방을 가든 카페를 가든, 지금 이 기분으론 그게 그거였으니 말이다.
*
제법 추워진 초겨울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벌써 도착해 버블티를 주문해 놓었다던 오세훈의 모습이 보였다. 홀로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 정신이 휴대폰에 팔려 맞은편 자리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어보지 않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벌써 반밖에 남아있지 않은 녀석의 버블티를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 건지,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뭐야. 왔으면 말을 했어야지. 내놔, 내 버블티."
내놓으라는 말에 일부러 한 모금을 더욱 길게 빨아들였고, 이젠 아예 바닥밖에 남지 않아 가벼워진 버블티 컵을 녀석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녀석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친…."
"……."
"3000원 내놔라. 네가 거의 절반은 마셨어."
"버블티가 6000원씩이나 해? 무슨 3000원이야."
"버블티 절반 값에 부가세까지 추가한 값이다, 인마.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어쩔 건데. 어? 존나 이기적인 새끼야, 이거."
발끈하며 투덜대듯 말하는 오세훈을 애써 무시하곤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쌀쌀한 바람에, 나무의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를 알게 된 이래로 맞는 열 세 번째 겨울이다, 벌써.
"야."
"왜."
"수능도 끝났는데… 뭐, 진전된 거 없냐?"
배싯 웃으며 오세훈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진전된 거… 있을 리가 없지. 여전히 유리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자 곧이어 작게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야? 아니, 아직 수능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이라면 이해를 해. 착각하지 마. 네가 아직도 수험생인 줄 알아? 수능도 끝났는데 뭐가 문제야? 지금이 기회야.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넌 그게 쉬운 줄 아냐."
"왜 쉽지 않지? 수능도 끝났겠다, 완전 황금 같은 시기잖아. 넌 이제 방해 될 게 없다고."
"……."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아님, 둘이 학교 땡땡이 치고 어디 놀러라도 가든지. 존나 로맨틱하지 않냐."
"퍽이나."
"… 별론가."
"안그래도 겨울방학 때 놀러는 갈 거야."
"둘이?"
"어."
"나는?"
"네가 왜."
"그야, 난 너희 둘의 큐피트이자…"
"헛소리 좀 그만 해."
"나도 같이 가면 안돼? 아무래도 둘이 가는 건 위험해."
"네가 제일 위험해."
단호한 말투에 상처를 받은 건지, 녀석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리곤 얼마 남지 않은 버블티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난 얼른 너희 둘 사이가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
"지켜보는 난 얼마나 답답한지 아냐. 그냥 속이 터져, 아주."
"… 나도."
"진짜 궁금한 건데, 너 왜 고백을 안 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이유가 있는 거야?"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오세훈이 물어왔다. 그런 녀석의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라기보단 뭐, 그냥…"
"그냥?"
"너도 알다시피, 나랑 걔랑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잖아."
"그치."
"십 몇 년을 친구로 지내오던 애가 하루 아침에 좋아한다 고백해 봐."
"……."
"기분이 어떻겠어."
"……."
"자연스레 멀어질 게 분명해. 내 얼굴 볼 때마다 불편할 거고."
"……."
"난 분명 그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닌데, 그렇게 될 게 뻔하잖아. 예전 같은 사이로 지내고 싶다 해도, 쉽게 그러진 못 할 거라고."
"그래서 계속 이렇게 속앓이만 하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
"……."
"다른 사람들 반응만 봐도 그래. 같은 상황에서 고백하고 잘 됐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
"지금 이런 사이를 깨기 싫어서라도 난 고백 안 해. 아직은 아니야."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하다는듯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오세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 말하기 시작했다.
"야, 너."
"뭐."
"원래 답답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알고 보니 엄청나게 답답한 놈이었구나."
"무슨 뜻이야."
"아니, 어이가 없잖아."
"……."
"너 겁쟁이야? 왜 해보지도 않고 아직 닥쳐오지 않은 결과를 걱정해?"
"뭐가."
"남들은 잘 될 거란 확신이 있어서 고백 하는 줄 알아?"
"……."
"일단 밀어붙이는 거야. 성공할 거란 보장이 꼭 있어야 고백을 하는 게 아니라고, 인마."
"알긴 아는데… 아씨, 몰라. 나도 존나 어렵ㄷ…"
"어쨌든 난 너희 둘의 연애를 응원한다. 그럼 즐겁고 오붓한 시간 보내도록."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늘어놓는 오세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다 마신 버블티 컵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의 모습에,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싶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세훈은 상황을 설명해주긴 커녕, 느끼한 윙크를 한 번 건네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뿐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헛웃음을 내뱉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이 모습을 바라보며 서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안, 나 엄마가 오래. 나중에 다시 만나자. 먼저 가볼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세훈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카페 문에 달려있는 작은 종에서 경쾌한 소리 또한 은은하게 들려왔다.
"… 김종인 너도 오세훈이 불러서 온 거야?"
"아, 난…"
"……."
"그러는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오세훈이 할 말 있다 해서…."
멋쩍게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살포시 앉는 모습을 바라보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서야 오세훈의 행동과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 PC방이 아닌 카페에서 만나자 한 것도, 엄마가 오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황급히 자리를 뜨던 것도. 어떻게든 둘만 있게 될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종의 노림수였다.
[니니~♡ 감동이지? 뭐 많은 건 안 바라구.. 피씨방비 일주일치만 니가 내주는 거면 난..ㅎㅎ]
오세훈에게서 온, 꽤나 재수없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였다. 답장을 보낼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휴대폰 홀드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것도 주문 안 했어? 핫초코 주문 할까?"
"아, 주문… 해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러 총총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연속으로 진동이 울렸다. 집에나 갈 것이지 자꾸만 문자를 보내오는 오세훈 탓에 짜증이 치솟았다.
[문자를 봤는데도 씹는 이유는? 이게 바로 읽씹이라는 건가..]
[너희 분위기 좋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바로 내가 만들어줬단 말이지.]
마치 이 모습을 훤히 보고있기라도 하는 듯한 오세훈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 아씨, 깜짝아."
다고 생각했지만,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자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보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 한심하면서도 애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젓곤, 녀석에게 보낼 답장을 입력해나가기 시작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내 문자를 확인한 건지,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내쪽으로 시선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유리창 너머 오세훈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고, 녀석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저 벙찐 표정을 짓다 살며시 웃어보이는 녀석에게 가라는 손짓을 해보이자, 굽히고 있던 무릎을 피며 제법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힘을 내라는듯 화이팅 제스쳐를 해보이며 능글맞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귀찮은 놈이다.
"핫초코 나왔다. 앗, 뜨거."
"조심해. 데었어?"
"아니, 괜찮아."
배싯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예뻤다. 박찬열이 준 목걸이를 하고 왔을 줄 알았는데, 하얀 목엔 아무런 악세사리가 걸려있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사람 마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드는 건지, 사소한 것 하나에도 기분이 좋았다.
"수능 끝나서 좋긴 한데, 막상 끝나고나니까 할 거 없지 않아?"
"할 게 없다니. 할 거 투성인데."
"PC방?"
"그럼."
"… 게임 좀 끊어 봐, 이참에."
"못 끊어."
"… 나중에 네 애인 될 사람은 무슨 죄야."
그러게. 넌 무슨 죄야.
예쁘다. 그냥 예뻐. 어디가 얼마나 예쁘다 쉽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그냥 예뻐. 화를 낼 때도 예쁘고, 토라질 때도 예쁘고, 심지어 울 때도 예뻐. 네가 나를 바라보며 웃을 땐 마치 세상의 모든 움직임들이 멈춰버리기도 한듯 감각이 없어져. 네 조그만 입술이 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난 왜이리 좋은지 몰라. 이 세상의 가슴 설레는 말들, 예쁘고 아름다운 말들, 모두 너에게 해주고 싶어. 가득 차고도 넘칠 만큼, 네게 해주고 싶다.
참 신기하지. 내 일상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네 생각인데, 전혀 질리지가 않아. 너무나도 소중해 건드릴 수도 없어. 손끝 하나라도 가져다대면 혹시 상처가 나진 않을까, 감히 만지지도 못해. 이거, 연애 감정 맞지. 그냥 미치겠는 거야. 네게 내 모든 걸 줘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 만큼, 네가 좋은 거야.
*
더보기 |
어째 서브 남주인 찬열이보다 세훈이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네요..
그러므로 다음 편은 찬열이의 이야기입니다 :)
스폰지밥/러블리/두부/종이니/기화/핫초코/공삼이육/네네스노윙/지블리/로운/똥잠/알콩/아가야/Paper/세젤빛/꽯뚧쐛뢟/얍얍/늘봄/종이페이퍼/고구마/도비/똥강아지/두둠칫/복숭아/윤아얌/불가/제인/스누피/나니꺼/엑소더스/가그린/남사친/다예/가락/너눈/XoXo/봉봉/댜니/하리보/사랑둥이/녹차라떼/요거트/달달이/주계열성/됴루/토끼/구구가가/완두콩/니니야/종인아사랑해/우유퐁당/니나니나/거뉴경/똥백현/로리나/이레네 님 ♡
사랑합니다.
/ 혹시 암호닉 신청했는데 빠지신 분 있으시다면 살짝쿵 댓글 남겨주세요!
암호닉 신청은 [ ] 요렇게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