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자집 세실리아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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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타르트
교실 창문에 빗줄기가 후드득 부딪히는 소리가 꽤나 리듬감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 비를 내렸나는 듯, 굉장히 환하고 맑다. 떠들석한 아이들 가운데 교실 한 구석에서는 백현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다. 자고 있는 폼새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하다.
"야 변백현! 이제 일어나!"
교실 뒷편에서 열심히 떠들던 경수가 백현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백현 얼굴 앞에다 대고 손을 이리 저리 흔들었다. 백현이 미동도 없자 경수는 그제서야 백현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아! 왜!"
백현이 양 미간을 찌푸리며 부스스 일어났다.
"야 너 얼굴에 빨갛게 도장 찍혔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임마. 그만 여기서 자고 집에가서 마저 자든지해라."
"아.. 지금 몇시야?"
"6시. 너 어차피 야자 안하잖아? 이제 그만 가. 괜히 담임 눈에 찍혀가지고 잡혀 있지 말고."
백현은 열어보지도 않은 책가방을 어깨 위로 매고는 창 밖을 내다본다.
"아.. 비 오네.. 도경수 너 우산 있냐?"
"응. 오늘 예보에 비 온대서 챙겨 왔지. 왜? 너 안 가져 왔어?"
"어.. 야 나 우산 좀 빌려주라."
"미쳤냐? 그럼 난 이따 뭐 쓰고 가라고. 밤에 더 쏟아 붓는다고 그랬어."
"싫음 말고."
백현은 자신의 머리를 한 번 털어내더니 교실 뒷문으로 나갔다. 학교에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도경수가 전부다. 백현 자신은 딱히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을 뿐더러,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이들이 많아서 학교에 와도 혼자 조용히 교실에서 자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것이 전부다. 백현은 학교 신발장 앞에서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저 없이 비 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좀 달리는가 싶더니, 지쳤는지, 터벅터벅 걸었다. 빗방울이 백현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가 이마 끝에 송글송글 맺힌다. 한참을 걸었을까, 백현은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갑자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씨.. 오늘같이 비 오는 날까지 말썽이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백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근처 들어갈 장소를 찾는 듯 했다. 그리고 백현은 조그마한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
차라락- 문에 달린 조그만 방울 소리가 울렸다. 백현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손으로 이마 위 머리카락을 털어내었다. 그러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 헤친채. 교복 바지는 먼지 투성이다. 자신에게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는 듯, 반투명한 문에 얼굴을 갖다대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머리에서는 빗방울이 계속 후드득 떨어져 백현의 어깨를 적시었다.
"어서오세요, 세실리아입니다."
인사 소리에 백현은 양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뒤를 돌아봤다.
"곧 다시 나갈거에요."
그러곤 교복 바지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낸다. 그 점원은 백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손수건을 내민다.
"이걸로 닦아."
백현은 점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수건을 잡아 채듯 가져간다. 그러자 그 점원은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백현은 접혀있던 손수건을 폈다. 손수건 가운데에는 검은 매직으로 '박찬열꺼'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백현은 그것을 보더니 어이가 없는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거 당신 이름이에요? 박찬열."
백현의 물음에 찬열은 괴고 있던 손을 풀고 다시 백현 쪽으로 다가왔다.
"응 맞아. 박찬열. 내 이름."
백현의 앳된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굵고 낮은 목소리였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백현은 작게 읊조렸다. 먼지를 다 털었는지 찬열에게 손수건을 다시 건네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하지만 찬열은 백현의 손에 든 손수건을 멀뚱히 쳐다만 볼 뿐,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현은 짜증이 나는듯, 손수건을 찬열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박찬열씨. 여기요."
"손수건을 빌려 썼으면, 세탁해서 갖다주는 것 정도는 예의 아닌가? 너 어디 고등학교 학생이야?"
백현은 예상치 못한 찬열의 대답에 순간 당황한 듯 했다.
"아니, 당신이 먼저 쓰라고 손수건을 줬잖아요. 그리고 먼지 조금 털었을 뿐인데, 그걸 갖고 그렇게 생색내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요."
찬열은 백현의 머리에 손을 지긋이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백현 가슴팍에 붙어 있는 명찰을 확인했다.
"변백현... 교복을 보니 이 근처 학교 학생이구나?"
"이 손 놔요. 이까짓 손수건, 빨아오면 되는거죠?"
백현은 신경질적으로 자신 머리 위에 올려진 찬열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가게 문을 열고 휙 나갔다. 3초 쯤 지났을까, 다시 가게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아끼는 손수건이면 직접 세탁해요. 내가 이거 다시 안 갖다주면 당신 그냥 손수건 잃어버리는 꼴이잖아요. 내가 진짜 순순히 세탁해서 가져다줄 사람처럼 보여요?"
촤라락- 문에 달려있던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두 번 울리고 백현은 모습을 감췄다.
"박찬열, 너 뭐하냐? 손님한테..."
루한이 갓 구워진 빵들을 진열하며 찬열에게 말을 걸었다.
"귀엽잖아. 재밌고."
"진짜 심심하구나 너 요새. 어디 여행이라도 잠시 다녀와라. 맨날 가게 구석에만 있다보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다. 보니까 고등학생 같던데.. 어린애 상대로 그렇게 놀리면 좋냐?"
"그런가봐. 맨날 가게에서 너랑 단 둘이 멍하니 있으니까 괜시리 심술이 더 나."
"내가 뭘.."
"너 남미 한 번 다녀오더니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졌는지.. 빵 굽거나 반죽하는 시간 아니면 멍하니 컴퓨터나 하면서 여행가서 찍은 사진들이나 보잖아. 남미에 애인이라도 숨기고 왔냐?"
"애인은 무슨... 말도 안 통하는 곳인데... 그리고 난 원래 말 없이 과묵한 성격이야. 같이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어이구, 그랬구나. 난 몰랐네 그려."
"박찬열, 빨리 재고 조사나 해봐. 내일 주문 얼마나 더 해야하는지 알아봐야되니까."
"예,예-."
가게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보통 가게는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오후 8시 쯤 닫는다. 대개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여자가 많고, 이들은 오후 시간대인 3시에서 5시 사이에 가장 많이 가게를 찾는다. 그리고 마감 시간에는 남아 있는 케이크의 수를 세고, 유통기한을 체크한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것은 주변 가게에 나눠주거나 많이 남는 경우는 기부를 한다. 어느덧 찬열과 루한이 가게 일을 한지도 1년이 되어갔다. 알바생도 없이 둘이서 눈코 뜰 새 없이 가게를 운영해왔다. 찬열은 거의 항상 가게에 상주해있었고, 대학생인 루한은 오전에 수업을 듣고 오후 바쁠 시간 때에 합류한다. 잘생긴 얼굴 덕에, 가게를 찾는 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루한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무시하거나 아예 여자들이 가게에 많을 때에는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 번은, 여자 손님이 케이크을 서빙하는 찬열에게 번호를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남자라면, 농담을 하며 넘어가거나 아니면 여자가 마음에 들 경우 번호를 교환할 법도 한데, 찬열은 무섭게 표정을 구기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들의 이런 반응에 둘이 게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심지어 그 둘이 애인 사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양과자집 세실리아의 케이크은 단연, 최고였으니까.
"오늘도 수고했어. 곧바로 집에 가?"
"아니. 학교. 써야 할 레포트가 두 개나 있어."
"루한 너도 진짜 대단하다. 안 피곤해? 그냥 나처럼 내려놓고 편하게 살아."
"넌 애초에 너무 일찍 공부를 내려놨잖아. 나는 지금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깝거든."
"그래 그래, 너 잘났다. 그럼 학교에서 밤 새는거야?"
"그럴 것 같은데.. 어차피 내일 1교시라 집에 들렀다 다시 등교하기에도 애매해."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 그럼 내일 봐. 재료 주문은 내일 아침에 내가 할게."
"그래, 조심히 들어가. 또 중간에 어디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라."
"알았어, 내일 봐."
******
루한은 곧바로 학교 중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도서관에는 밤새 과제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증을 찍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하 사물함에서 전공 서적을 한아름 안았다. '기업 재무', '생산과 운영관리' 굵직 굵직한 글씨가 쓰여져 있는 책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사물함을 닫았다. 그 때였을까, 한 사람이 루한을 보지 못 했는지 직진하다 루한이 들고 있던 전공 서적에 어깨를 스치며 넘어졌다. 그 때문에 루한은 들고 있던 책들을 떨구었다.
"괜찮아요?"
루한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닥에 넘어져 있는 학생을 툭툭 건드렸다. 그 학생은 넘어진 자신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섬주섬 땅에 떨어진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다. 루한은 쭈구려 앉더니 같이 그 학생의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여기요."
루한이 떨어진 연필 두 자루를 주워 그 학생에게 건넸다. 그제서야 그 학생은 고개를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봤네요."
한 동안 그 둘은 상대방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듯 했다. 루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 학생은 불쑥 일어서더니 사물함 사이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루한은 그 학생의 손목을 잡았다.
"김민석.."
민석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그 둘은 학교 도서관 안 엘레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향했다. 8층에는 학생들이 쉴 수 있도록 옥상에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커피 자판기도 여러대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뭐 마실래..?"
루한의 물음에 민석은 "카페라떼. 설탕 빼고." 라고 간결하게 답할 뿐이었다.
"너 50원 있어? 딱 50원이 모잘라."
그러자 민석은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100원을 루한에게 건네었다.
"자. 100원 짜리 밖에 없다."
루한과 민석은 옥상 카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너 우리 학교 학생이었냐?" 루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야말로. 난 네가 대학생인 것만 알았지, 설마 우리 학교 학생일 줄은 몰랐어."
"생각보다 너 똑똑하구나? 그래서 전공은?"
"문화인류학과. 너는? 경영학과?"
"어떻게 알았어?"
"네가 들고 있는 책 보면 알지."
"아.. 책.."
그리고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한국에는 언제 다시 돌아간거야?" 이번에는 민석이 물었다.
"작년 요맘때 쯤?"
"나랑 비슷하게 돌아왔구나."
"1년 만이네.. 한국에서 널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나야말로. 그렇게 매정하게 인사하고 훌쩍 떠나더니, 이렇게 만나네. 이러니까 사람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는거야."
"내가 그렇게 매정하게 떠났나?"
루한이 커피를 다 마셨는지 종이컵을 구기더니 눈 앞에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민석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석은 대답하려다 말고 루한의 눈을 피했다.
"갑자기 떠났으니까.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는데.."
*
루한과 민석은 1년 2개월 전, 페루 마추픽추에서 처음 만났다. 루한은 답답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휴식을 할 겸 페루를 찾았다. 갑자기 결정한 여행이기에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았다. 무작정 공항으로 달려가 남아 있는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그렇게 도착한 페루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스페인어라고는 "Hola, Gracias"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 뿐,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을 알 리가 없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영어로 손짓 발짓 해가며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눈 앞에 펼쳐진 고원의 모습에 맞딱뜨렸을 때, 루한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석을 만났다. 혼자서 루한이 유적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때, 바닥에 앉은 채 노트북을 꺼내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동양인 남자를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루한은 그 곳으로 내려갔다. 타자로 한국어를 치고 있는 것을 보니 한국인이 분명했다.
"뭐해요?"
루한의 물음에 민석은 화들짝 놀라 노트북을 닫았다.
"아..놀랐다면 미안해요. 난 여기서 한국인을 만난게 너무 반가워서..."
"아..아니에요. 여기 앉아서 오늘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적고 있었어요. 잊어버릴까봐."
"여행 온 거에요?"
"그쵸. 여행 겸 직접 보면서 공부 해 보고 싶기도 해서.. 당신은요?"
"답답해서 이 곳으로 도망왔어요."
"그렇구나.. 아, 제 이름은 김민석이에요. 반가워요."
민석은 손을 내밀었다. 루한은 그런 민석이 귀여운듯 씨익 웃더니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저는 루한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둘은 금새 친해졌다.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때부터 급격하게 친해지기 시작했다. 비용도 줄일겸, 숙소도 함께 알아봐서 같은 방을 썼고, 여행지가 비슷했기에 함께 움직였다. 여행 내내 민석은 루한에게 마추픽추, 남미의 역사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며 조잘댔다. 그리고 루한은 그런 민석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루한과 민석은 드넓은 고원을 배경으로 풀밭에 앉았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에 2주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루한, 근데 너는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어? 내 얘기는 많이 했잖아. 너는 항상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네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해준 것 같아."
"나? 글쎄...... 아무것도 없었어. 지금까지."
"어떻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어?"
"그럴 수도 있지.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거야. 과거를 떠올리면 그냥 검정 도화지야."
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루한을 쳐다보았다. 그런 민석을 보더니 루한은 민석의 볼을 톡- 건드렸다.
"...루한, 한국 가서도 우리 만날 수 있을까?"
루한은 대답하기 주저했다. 민석에게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루한은 솔직하게 대답해줘야 할 것 같았다. 자유를 찾아 떠나온 여행이었고, 자유의 땅 마추픽추에서 2주간 인생 이래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해 준 민석이었다.
"아니."
*
"그 때 무슨 생각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던거야?"
"정말 한국에서 널 만날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그런 루한이 얄미운듯 민석은 양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이렇게 널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루한은 민석의 볼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과제하러."
"또 만날 수 있을까?"
"응."
루한의 대답에 민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달콤한 사탕을 선물 받은 꼬마 아이같은 표정이었다. 루한은 민석에게 손을 한 번 흔든 후, 전공 책을 챙기고 옥상 카페 밖을 나섰다.
******
"밤 되니까 제법 서늘하네."
찬열은 한 손에 팔다 남은 케잌 한 보따리를 든 채 골목을 걸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밖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찬열이 살고 있는 곳은 가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신촌 근처여서 그런지 제법 자취하는 대학생들이 많았고, 집에 가까워질수록 삼삼오오 모여다니는 대학생들이 보였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찬열은 근처 마트로 향했다. 혼자 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음식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찬열은 익숙한 듯, 저지방 우유 하나, 시리얼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찬열은 계산대에 물건 두 개를 툭- 올렸다.
"계산해주세요."
"어서오세요.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음악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찬열은 이어폰을 뺐다. 그리고 계산하는 점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계산대 앞에는 백현이 서 있었다.
"너 여기서 알바하냐?"
"당신..여기 근처 살아요?"
"여기 주민인데. 10년 째.. 근데 넌 여기서 처음 본다?"
"오늘부터 일하는 거에요."
"근데 너 고등학생 아니야? 이 밤까지 일하는게 가능해?"
"주인 아저씨랑 아는 사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신경 쓸 일도 아니잖아."
"너 아까부터 교묘하게 존댓말 반말 섞어 쓴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처음 보자마자 말 놓던대?"
"야, 교복까지 입고 있는데, 거기다 대놓고 내가 꼬박꼬박 존대하리? 이래뵈도 나는 반말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라."
"그래봤자 나랑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카드."
"응?"
"카드."
그제서야 찬열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빼서 백현에게 건넸다.
"일시불로 해줘."
"그럼 고작 이거 두 개 사고 3개월 할부로 계산하려고 했어, 당신?"
"시끄럽고, 봉지나 줘."
찬열은 봉지에 우유와 시리얼을 담았다.
"수고해라. 손수건 돌려 주는 거 잊지 말고. 가게로 와. 난 항상 거기 있으니까. 그리고, 이거 팔다 남은 건데 쉴 때 먹어. 이거 하나에 만 원씩 팔던 거야. 프랑스에서 공부한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작품이니까, 감사하게 먹어. 언제 이런 것 먹어보겠냐. 달달한게 너같이 유치한 애들이 되게 좋아할 맛이다."
찬열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나왔다. 뒤에서 백현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찬열의 귀에 흐르는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찬열은 집으로 향하면서 계속 움찔거리는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입꼬리가 계속 슬슬 올라가더니 집에 도착해서야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귀여운 자식.."
찬열은 집에 도착해서 불을 켰다. 그러자 한 마리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와 찬열을 반겼다.
"아빠 없이 혼자 집에서 심심했지? 우리 뽀삐. 그래, 밥은 먹었어?"
찬열은 강아지 배를 긁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근데 뽀삐 너, 지금 보니까 아까 그 녀석이랑 좀 닮았네? 진짜. 닮았네! 자..이제 아빠는 씻으러 들어갈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뽀삐야."
찬열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었다. 찬열이 욕실로 향하는 방향 따라 옷들이 하나 둘 떨어졌다.
"지금쯤 감동하며 먹고 있겠지, 그 녀석."
*******
백현은 자신에게 케잌 봉지를 던져준 채 유유히 사라져가는 찬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그러고는 슬그머니 봉지 안을 열었다. 봉지 안에는 예쁘게 리본으로 포장되어 있는 케이크 두 조각이 들어 있었다. 아까 학교에서 급식으로 점심을 먹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백현은 입맛을 다시며 조심스레 그 케잌들을 꺼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싸고 있던 비닐을 벗겨냈다. 그러자, 싱싱한 딸기가 올려진 타르트가 그 모양을 드러냈다. 백현은 봉지 안을 다시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아.. 줄거면 포크도 같이 갖다주지."
백현은 주위를 두리번대더니 계산대 옆에 손님들이 자유롭게 가져가라고 놓여진 작은 요플레 숟가락을 발견했다. 그러자 금새 표정이 밝아지며 숟가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백현의 입 안에 달콤한 기운이 가득 퍼졌다. 입 안에서 톡-하고 터지는 생딸기의 상큼함에 백현은 눈을 감았다. 사실, 디저트는 계집애들이나 먹는 시시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먹어보니 왜 여자들이 달달한 음식에 환장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느덧 백현은 두 번째 딸기 타르트를 잘라 먹고 있었다. 한창 한가한 시간대라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백현이 있는 계산대로 다가오는 손님이 없었다. 아마, 백현이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손님들은 알아서 다른 계산대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문득, 백현은 찬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까 주머니에 쑤셔 박아두었던 손수건을 꺼냈다. 아까 빗물에 젖었던 손수건이 마르면서 생겨난 흙 먼지가 백현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빨아서 갖다 줘야되나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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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한은 키오스크에서 자리표를 뽑고는 도서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두리번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는지 재빨리 그 곳으로 달려가 앉았다. 아직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민석을 한국, 게다가 자신의 학교에서 만나리라고는 1%도 예상하지 못했다. 민석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몰래 아침 기차를 타고 페루 공항으로 향했었다. 분명, 민석이 서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 민석에게 정을 붙이는 것이 겁이 났다. 그 누구한테도, 이 정도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항상 모든 사람들은 루한에게 있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깊게 사귀면 자신에게 도움 될 것이 하나 없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막연하게 루한이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20여년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민석도 자신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은연 중에 민석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함께 여행을 다니며 흩날리는 바람에 어린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민석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치, 민석의 주변에만 행복의 꽃망울이 피어 오르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신나게 자신 앞에서 재잘대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털어놓는 민석을 보며 이 사람은 특별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환경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이 곳 페루에서 잠시 느끼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함께 있다가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루한은 아침 일찍 곤히 자고 있는 민석 몰래 숙소를 나왔다. 한 여름의 마추픽추에서 아름다웠던 한 장면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런데, 1년 후 민석을 다시 만났다. 그것도 학교 도서관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제, 민석은 너무나도 깊숙하게 자신의 가슴 안에 들어 앉은 것 같았다. 가게에서도 페루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민석을 떠올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자신이 떠난 날 아침, 자신의 빈 자리를 보며 민석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아직도 자신 주변에 환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민석을 오늘, 만났다. 1년 만이다. 루한은 믿어보고 싶었다. 정말, 자신에게도 '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뿌리 박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자라나는 그런 인연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지. 그래서, 믿어보기로 했다.
루한은 갖고 온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화면에는 마추픽추의 광활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찬열은 항상 자신의 노트북 배경을 보면서 아저씨 같다며 놀려댔다. 대학생이라면 응당 여자 아이돌의 사진 정도는 배경으로 설정해 놓아야 한다며, 자신 몰래 소녀시대, 씨스타와 같은 아이돌들의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그 때마다 루한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원래대로 배경을 돌려놓았다. 자신에게는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으니까.
"오늘 과제는... 망했다."
루한은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과제가 될 리가 없었다. 루한은 한숨을 짧게 쉬더니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가방에 전공책과 노트북을 챙기고는 앉은지 10분만에 다시 일어서서 나갔다. 도서관 밖을 나오자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었다. 비가 그치자,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이 느낌마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루한은 집으로 향했다. 아직 막차가 끊기기 전이었기에 서둘렀다. 유플렉스 지하 통로를 지나 신촌 역에 도착했다. 막차를 타기 위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전혀 불쾌하다거나 짜증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이 인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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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가토 쇼콜라 예고
"가나슈! 또 만나네. 수업 같이 가자."
"당신, 혹시 머리가 좀 모잘라?"
"변백현... 너는 꿈이 뭐냐?"
"루한, 나 초대해줘. 세실리아에."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한 가게가 아니야. 세실리아는."
안녕하세요, Cascade입니다. 15시간쯤 되는 비행 시간 동안 너무 심심해서 노트북을 꺼내 1화를 써내려갔습니다. :D 지금 이 곳은 점심시간인데, 한국은 깊은 새벽이겠네요. 모두들 달콤한 꿈 꾸세요 ^-^ 항상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정리되는 대로 올릴게요. 1화는 인물 간의 관계 위주로 풀어나갔습니다! 앞으로 회가 거듭하면서 굵직한 스토리가 드러나게 될 거에요.(그래야만 해요..)
Cascade 올림. cascade.ex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