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자집 세실리아 02
w. Cascade
#가토 쇼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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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백현은 밤새 덮어두었던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쭈욱 핀다. 그러자, 목 뒤편으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백현은 목 뒤로 손을 한 번 쓸고는 어기적 어기적 부엌으로 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반 쯤 감긴 눈으로 냉장고를 열어본다. 어제 먹다 남은 식빵 한 조각,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김치 한 통이 전부다.
"아..그냥 학교 매점에서 먹어야겠다."
백현은 대충 씻고 교복을 입고 어제 방 구석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는 듯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백현의 눈이 식탁 위를 향했다.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던져두었던 손수건이다. 백현은 손수건을 집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빨아야겠지..."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위에 올려진 빨래비누를 집어 손수건 위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손수건을 비비자, 진흙빛 거품이 일어났다. 물로 씻고 백현은 허공에 대고 손수건을 두 번 털었다.
"됐다...!"
손수건은 학교 가는 길에 말릴 심산으로 한 손에 손수건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가방을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안은 매우 고요했다. 백현은 뒷 머리를 긁적이며 집을 나섰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내일은 늦게까지 잘 수 있겠지. 백현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평소같았으면 버스를 타고 갔겠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이나 맑았다. 지긋지긋한 장마가 끝나가는지, 오늘은 습하고 눅눅하던 기운마저도 없었다. 백현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학교로 향했다.
*
"오늘은 일찍 등교했네! 변백현!" 백현이 교실로 들어서자 경수가 반겼다.
"응. 오늘 금요일이잖아."
"너 아직도 요새 알바하냐? 전에 신문 배달하던거는 지금도 해?"
"아니. 때려쳤어. 아침에 못 일어나서 몇 번 펑크 냈더니 잘렸어. 요새는 그냥 마트에서 알바한다."
"너 집 근처 마트? 나 나중에 놀러갈래!"
"마트가 무슨 놀이터냐, 놀러오게. 창피해. 오지마."
"야 그래도 친구가 알바한다는데 한 번은 인사하러 가야지. 너 모의고사 준비는 하고 있어?"
"모의고사?"
"응, 곧 9월 모의평가잖아. 너 저번 6월 모의평가는 보기는 했어?"
"아니. 그 날 학교 안 갔는데.."
"야, 그래도 시험 보기라도 해라. 또 모르지... 공부 안하고 봤는데 잘 나올 수도 있잖아."
"9월이면 아직 두 달 좀 남았는데 벌써 준비하냐?"
"수능이 코 앞인데.. 미리미리 해야지."
"어차피 난 대학 안 갈거야."
"그럼 뭐 먹고 살게 나중에!"
"알바"
"너 그렇게 밤에 알바하면 안 피곤해? 제대로 밥은 먹고 다니냐?"
"어. 근데 어제 알바하는데 어떤 미친놈을 만났어."
"왜? 진상 손님?"
"아니... 나한테 케이크를 주고 가더라고."
"야...! 우와! 여자? 이뻐? 몇 살이래? 연상?"
"남자."
"뭐야... 재미 없게..
"그치..."
"변백현, 뭐야 뜬금없이. 아 조회 시작하겠다. 내 자리로 가볼게. 카톡해."
백현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 지겨운 학교에서의 하루가 시작됬다. 똑같은 담임의 아침 조회, 가르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나른한 수업 시간, 1주일은 굶은 사람들마냥 급식실로 뛰어드는 점심시간, 식곤증으로 깨어있어 본 적이 없는 오후 수업, 그리고 하교. 이 똑같은 삶을 12년 째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입고 있는 이 교복이 족쇄같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가... 백현은 담임이 들어오자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느 순간부터 담임도 백현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수능을 코 앞에 둔 고3 교실이었고, 백현이를 신경쓰기에는 다른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백현은 엎드린 채로 주머니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젠 한창 재미있던 게임들도 시들해진 참이었다. 카톡창을 켜고 경수에게 말을 건다. 기다렸다는 듯, 경수가 답장을 한다.
그렇게, 백현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
"김민석! 김민석! 민석아! 야!!"
캠퍼스 한 가운데에서 루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제히 등교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루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 앞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걷고 있는 민석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그러자, 민석은 깜짝 놀라며 이어폰을 빼고 루한을 쳐다봤다.
"아 깜짝이야! 이제 등교하는거야?"
"응!"
"의외네. 루한 네가 계절학기 수업도 다 듣고."
"졸업하려면 학점이 너무 부족해서 들어둬야되거든."
"그렇구나."
아침부터 한 껏 격양된 목소리의 루한을 보며 민석은 웃음지었다.
"루한 너 수업 몇 교시야?"
"3교시 시작!"
"근데, 왜 이렇게 일찍 등교해? 지금 8시 30분인데?"
"그냥... 민석이 너는?"
"나는 1,2교시 수업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일찍 왔지."
"그럼... 나도 그 수업 같이 들을래!"
"무슨 소리야? 너 수업 3교시라며."
"그냥 가서 앉아있으면 안될까?"
루한은 바삐 걸어가는 민석 옆을 따라 걸으며 환히 웃는다. 그런 루한을 보니 민석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던지. 대형 강의니까 뒤 쪽에 앉자. 교수님 안 보이게."
"아싸!"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보이지?"
"그런가? 비가 안 와서 그런가봐."
"다 왔다, 백양관. 들어가자."
민석과 루한은 백102로 들어섰다. 교실 안에는 아침부터 일찍 등교한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석은 한참을 두리번대더니, 기둥 뒤 쪽 자리를 발견하고는 루한을 끌고 그 곳으로 가 앉았다.
"대신 수업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돼."
"당연하지! 근데 무슨 수업이야?"
"통계방법론."
*
"루한! 일어나! 수업 들어가야지 너!"
어느덧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부리나케 짐을 챙겨 하나 둘씩 교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루한은 민석 옆에서 가방을 끌어안은 채 곤히 잠 들었다. 루한을 이리저리 흔들던 민석은 안되겠는지 루한의 양쪽 귀를 한껏 잡아당겼다.
"아악!"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쉬는시간이야?"
"아니. 수업 끝났어. 도대체 수업은 왜 따라온거야.. 퍼질러 잘 거면서.."
루한은 눈을 비비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밥 먹자. 배고프다."
"너 수업 간다며"
"오늘 휴강이야."
"그럼 학교는 도대체 왜 온 거야?"
"너 보러."
루한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 대답을 하자 민석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민석은 노트북을 챙겨 가방 안에 넣더니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루한이 따라갔다.
"뭐 먹을래?"
"밥."
루한의 간결한 대답에 민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곧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걸어갔다.
"학교에서 밥은 자주 먹어?"
"응. 거의 학교에 살다시피하니까. 루한 너는?"
"사실 학교 와서 한 번도 밥 먹어본 적 없어."
"뭐? 진짜? 그럼 항상 신촌 나가서 사먹어? 돈도 많다 넌.."
"아니. 그냥 안 먹고 있다가 수업 끝나면 일하는 가게에서 먹어."
"너 그러다 속 버린다. 학교 밥도 은근 맛있어, 싸고. 학생회관 가서 먹자."
아직은 이른 점심시간이라, 학생 식당은 한산했다. 루한과 민석은 밥을 받아 한 쪽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루한 너 무슨 가게에서 일한다고 했지?"
"세실리아."
"카페야?"
"양과자집. 커피도 팔지."
"의외다. 양과자집이라니.. 케이크 좋아해?"
"응 좋아해. 달콤한 걸 먹으면 모든 걱정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거든. 그리고 그냥 그 달달한 냄새도 좋아. 오븐에서 갓 꺼낸 빵 위에 설탕 시럽을 뿌릴 때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향이 정말.. 민석이 너는 학교 다니는 거 말고 또 뭐 하는 것 있어?"
"딱히. 지난 학기까지는 동아리 하다가, 요새는 공부만으로도 벅차서.. 나중에 세실리아에 한 번 초대해줘. 나도 맛있는 케이크 먹고 싶다."
"그냥 집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먹어. 창피해.."
"창피하기는... 근데 어쩌다가 양과자집에서 일하게 된거야? 사실 되게 네 이미지랑은 안 어울리는데.. "
민석의 물음에 루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싶어서.... 그러고보니 김민석 너 가나슈 닮은 것 같아!"
"그게 뭐야?"
"있어, 가나슈라고.. 이참에 가나슈라고 핸드폰에 이름도 바꿔야겠다!"
어느덧 새벽 안개도 사라지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
"루한 너 오늘 휴강이라며. 혼자 가게 오픈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찬열이 루한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투덜거렸다. 아침에 각종 배달오는 재료들을 일일이 나르고 재고 조사를 하느라 피곤한듯 식탁 위에 거의 기대듯 누워있었다.
"미안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제부터 내가 남은 거 할게. 장부 좀 줘봐."
"이미 다 끝냈네요. 가서 가토 쇼콜라나 만들어놔. 보니까 어제 다 팔리고 없던데."
"오케이!"
루한은 혼자 앞치마를 능숙하게 두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기에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평소보다 손님들이 많이 올 것이다. 찬열은 의자에서 일어나 진열대 앞에서 오늘 팔 케이크들을 하나 둘 점검했다. 모양이 비뚤어진 것들은 밖으로 빼 놓고, 좀 더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 있게 위치도 재배치했다. 그 때,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울렸다.
띠리링-
"어서오세요, 세실리아입니다!"
찬열은 거의 자동반사처럼 인사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백현을 보고는 놀란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당신? 귀신이라도 봤어? 자. 손수건. 빨았어."
백현은 찬열에게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아직 덜 마른 듯 손수건은 아직 축축했다.
"이거 세탁한 거 맞아? 왜 이렇게 또 축축해?"
"오늘 아침에 직접 내 손으로 빨았어. 됐지? 이제 간다."
백현은 찬열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뒤돌아섰다.
"야!"
"왜? 또 뭐? 다시 빨아 올까?"
찬열은 진열대에서 빼 놓았던 케이크를 식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이거 먹고 가. 모양이 좀 이상해서 손님한테는 팔기 그래서 따로 보관한거야."
백현은 빤히 식탁 위에 놓여진 케이크를 쳐다봤다. 내심 그냥 나가기 아까운 듯 백현의 시선은 그 까만 케이크에 고정됬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찬열은 실실 웃었다. 찬열은 백현의 어깨를 잡고 의자 위에 앉혔다.
"어차피 먹을 사람 없으면 버려질 불쌍한 케이크야. 먹어줘."
찬열은 포크를 백현 앞에 내밀었다. 백현은 주저하는 듯 싶더니 가만히 포크를 집었다.
"이 아까운 걸 왜 버려? 그럼 먹어야지.. 버릴거면.."
백현은 케이크 한 쪽 귀퉁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어제 밤에 먹었던 딸기 타르트와는 또 다른 달콤함이었다. 상큼함보다는 굉장히 진하고 강렬한 달콤함이다. 입 안에서 톡- 터지는 초코렛 시럽이 혀 안을 감돌았다. 찬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백현 앞 의자에 앉았다.
"가토
쇼콜라."
"응?"
"네가 지금 먹고 있는거. 가토 쇼콜라야, 이름이."
"무슨 이름도 참 어렵다."
그리고 백현은 다시 먹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루한이 머그잔에 커피를 들고 나오다 백현을 보고는 다가왔다.
"못 보던 손님이네. 많이 달텐데, 이거 마셔요."
"아..감사합니다.."
"야 무슨 애기한테 아메리카노야? 어차피 써서 마시지도 못해."
찬열이 루한이 건넨 머그잔을 빼앗았다. 그러자 백현이 찬열의 손에 든 머그잔을 잡아 끌었다.
"마실거야. 줘!"
"그거 원래 루한이 나 주려고 내려 온 커피란말이야. 그치 루한?"
루한은 찬열을 내려다보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밀었다.
"이거 마셔라. 내가 보기엔 박찬열 네가 더 애 같다. 내 커피는 다시 내려 먹어야겠다." 루한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
"그렇게 맛있냐? 고맙단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먹네."
"어차피 버릴 거였다면서?"
"야..그래도 데코레이션 버젓이 다 되있는 케이크야. 이거 얼마 하는 줄 알어? 한 조각에 9000원이야!"
"예..예.. 이렇게 비싼 케이크를 먹게 되서 영광입니다."
그러고 백현은 다시 접시 바닥에 부스러진 케이크 조각들을 포크로 모아 입 안에 넣었다.
"너는 뭐하고 사냐?"
"나? 고등학생인데 뭐.. 공부하고.."
"공부를 하긴 하냐? 학생이 밤에 마트에서 알바나 하고.."
"남이사. 돈이 필요하니까 벌지."
"그럼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데?"
"아..진짜 오늘 아침부터 다들 왜 나한테 진로 상담이래.. 몰라! 크면 어른이 되겠지."
찬열은 식탁 위에 턱을 괴고 백현을 뚱하니 쳐다본다.
"정말 뭐 하고 싶은 일이라도 없어?"
"몰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럴 여유도 없고."
찬열은 백현 입 주위에 묻은 검은 빵가루를 무심하게 오른 손으로 툭툭 털어내었다. 그러자 백현은 찡그리며 얼굴을 뒤로 뺐다.
"내가 알아서 닦을게. 그럼 당신은?"
"나?"
"그래. 당신.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이 뭐야?"
"하고 있잖아. 세실리아. 그냥 달달하고 입 안에 텁텁할정도로 짜릿한 그 느낌이 좋아서 시작했어."
"변태."
백현의 말에 찬열은 웃음이 터졌다. 찬열은 백현의 머그 잔에 아직 가득 남아 있는 아메리카노를 자신의 잔에 옮겼다.
"써서 남길 거면서 고집 부리긴."
"난 이제 알바가야겠다. 잘 먹었어. 손수건은 돌려준거다? "
백현은 의자 옆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고 가게 밖을 나섰다.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또 울렸다. 띠리링-
*
다시,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울렸다. 찬열이 황급히 뒤를 돌아 봤지만,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민석이었다. 민석은 쭈뼛대며 가게 안을 살폈다.
"저... 혹시 여기 루한이 일하고 있지 않나요?"
이 말에 주방에 있던 루한이 나왔다.
"너 여기는 어떻게 알았냐?"
"검색창에 이름만 치면 위치 다 나오던데? 보니까 인기 많더라. 여기 블로그 후기글만 수백개던데? 케이크 글보다 알바생들 후기가 더 많은 것 같았지만.."
민석은 둥그런 식탁에 앉더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과제 좀 하다 갈게. 아무거나 추천하는 메뉴로 부탁해!"
루한이 주방에 들어가 갓 구워진 가토 쇼콜라를 들고 나왔다.
"방금 만든거라 진짜 맛있을거야."
케이크 위에는 초코렛 시럽이 흘러 보는 사람의 입맛을 더욱 입맛을 돋구었다. 민석은 냉큼 포크를 집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랫만에 맛 보는 달콤함인 듯 민석은 눈을 찡그렸다.
"우와...진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다 이건!" 민석은 신이 난 듯, 순식간에 눈 앞에 케이크를 다 먹어치웠다. 찬열도 그런 민석이 신기한 듯 멀뚱히 쳐다봤다. 민석이 찬열의 시선을 느낀 듯 찬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이런 가게를 열게 된 거에요? 그것도 남자 둘이."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서 손님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당신처럼 케이크를 먹으면서 짓는 다양한 표정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이런 소소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루한 말로는 사람 사는 걸 느끼고 싶어서 그랬다는데.. 왜 하필이면 양과자집이에요? 그냥 식당을 열어도 되잖아요."
"찾는 사람들이 달라. 단 것을 찾는 손님들이랑, 그냥 하루하루 버릇처럼 먹는 밥을 찾는 손님들이랑. 보통 이렇게 단 것을 찾으러 가게를 오는 손님들에게는 사연이 많거든."
"사연이라... 되게 재밌네요!"
찬열과 민석이 한창 대화를 하고 있을 즈음, 종이 울리고 하늘색 양복을 멀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가 들어섰다.
"여기 치즈 케이크 두 개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루한! 여기 치즈 케이크 두 개요~" 찬열은 주방 안으로 들어간 루한에게 말했다. 곧, 루한은 주방에서 나와 치즈 케이크 두 개를 접시에 이쁘게 담았다. 그리고 그 손님들이 앉아있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여기 나왔습니다."
"El estaba en Peru y conozco a el."
"Por que el trabaja aqui? No ha trabajo para ..."
루한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 둘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루한은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한국 분이 아니시군요. 맛있게 드시다 가세요."
이어 왁자지껄한 여고생부터 직장인 여성들까지 손님들이 연달아 세실리아를 찾아왔다. 민석은 과제를 하다 방해가 될까 걱정되어 루한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나갔다. 정신없는 저녁을 보낸 루한과 찬열은 가게 마감을 준비했다. 어느덧, 몸에 익숙한 일들이라 금방 금방 끝났다. 가게 문을 닫고 루한과 찬열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세실리아에서의 하루가 끝났다.
******
"계산이요."
"뭐야? 당신 여긴 또 왜 왔어?"
"아니 이젠 내가 하루 먹을 장 보는 것도 네가 뭐라 하는 경지에 이르렀냐?"
"하필 왜 이 계산대를 이용하냐는 거야 내 말은."
"소량 계산대잖아 여기가."
백현은 찬열의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확인하고는 머쓱한 듯 바코드를 찍었다.
"당신은 시리얼을 하루에 한 통씩 먹어?"
"남이사."
"8400원입니다 손님."
찬열은 봉지에 물건들을 담고 카드를 받았다. 하지만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멀뚱히 백현 앞에 서 있는다.
"왜? 계산 잘못 됐어?"
"너 어디 사냐?"
"집은 또 왜 물어봐.. 바로 이 근처야."
"그럼 같이 가자."
"미쳤어? 나 아직 알바 끝나려면 멀었어. 가던 길 가세요."
찬열은 백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계산대 근처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신나게 게임을 하는지 연신 실실대며 액정을 두들겼다. 그런 찬열을 백현은 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꽤 많았다. 찬열에게 신경 쓸 틈도 없이 정신없이 2시간이 지났다. 백현은 서둘러 하루 일을 정산하고는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찬열의 존재는 까마득하게 잊었는지 혼자 계산대를 나섰다. 찬열은 정신없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떠나는 백현을 보고 서둘러 일어났다.
"야! 같이 가자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가야되는데?"
"나도 이 근처 사니까."
"그래서?"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얘야."
"도대체 당신 몇 살이야? 진짜 기껏해야 나랑 동갑이든지 1살 위 정도로 보이는데.."
"알 것 없어. 이렇게 밤에 혼자 다니면 큰일난다. 알바 때려쳐."
"돈 벌어야 된다구요. 누구는 이게 재밌어서 하는 줄 아나..혹시 당신 머리가 좀 모잘라?"
티격태격 하는 사이 찬열이 살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디까지 따라오려고?"
"나 여기 사는데?"
"뭐?"
"자! 여기 오른쪽 집이 우리 집이야."
백현은 찬열을 째려보는 듯 하더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길 왼쪽 집으로 슉하고 인사 없이 들어갔다.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살고 있었다니.. 백현은 일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들어가 창 밖으로 찬열이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정말 장난이 아니라 그 곳에 사는 모양이었다. 백현은 창문에 커튼을 치더니 방 안에 불을 켰다. 고요한 적막만이 백현을 반겼다. 그리고 맞은 편 찬열의 집에도 불이 켜졌다. 고요한 금요일 밤이 지나간다.
******
"루한, 가게 일은 어때?"
"재밌어. 전에 하던 일보다 훨씬 적성에 맞는 것 같아. 타오 너는?"
"나는 최근에 도장 하나 차렸어."
"도장? 야~ 좋다. 너 애들 가르치는 것 되게 좋아했잖아."
"응응 다행이야. 그래도 좋은 사람 만나서 건물도 구했고.. 그래, 너도 잘 살고 있는 것 보니까 나도 기쁘다. 공부는?"
"복학했어. 요새 수업 듣는데, 오랫만에 들으려니 힘들더라.."
"그래도 내 친구 중에 대학생은 너 밖에 없다. 꼭 졸업 무사히 해라. 나도 친구 덕 좀 보자."
"친구 덕은 무슨... 찬열이는 잘 지내?"
"아주 잘 지내지. 가게에서 추근대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야."
"물 만났네 박찬열. 난 이제 가봐야겠다. 도장 청소를 아직 안 했어."
"그래 그래 어서 가봐."
"아, 페루 갔다 와서 별 일 없었어?"
"별 일?"
"..아니다! 나 갈게! 또 연락하자."
타오는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버블티를 손에 들고 가게를 나갔다. 밤이었지만 카페에는 젊은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루한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민석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듯 했다. 메세지를 보내고 10분 정도 기다렸지만 답이 오지 않자 루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었다.
'가나슈'
"응 루한! 왜왜?"
"메세지 못 봤어?"
"메세지? 아 나 지금 친구랑 술 한잔 하고 있었어. 왜?"
"심심해서."
"아까 세실리아에서 봤잖아! 지금 혼자 있어?"
"응. 방금까지 친구랑 있었어."
"지금 어딘데?"
"학교 앞 망고세븐."
"지금 어차피 곧 파할 것 같은데 거기로 갈까? 좀 만 있어!"
민석이 전화를 끊자 루한은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1년 전 마추픽추에서 민석이와 이 곳 저 곳 다니던 날들이 생각났다. 지금 창 밖의 거리는 그 때와는 180도 다르다. 마추픽추에서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양 떼들과 좁은 길을 구비구비 올라가던 사람들, 푸르른 식물들이었다. 여행 중에 갑자기 비가 내려도 비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민석과 뛰어다니며 신나했다.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신촌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루한은 그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민석이 옆에 있었기에...
"루한! 오래 기다렸어?"
민석이 달려온 듯 숨을 헥헥 대었다.
"아니! 너한테서 고기 냄새 난다."
"페브리즈 뿌렸는데.. 많이 나?" 민석은 자신의 옷에 코를 갖다 대고는 킁킁 댔다.
"괜찮아 괜찮아~"
"밖에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놀자!"
민석은 루한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직 루한에게는 낯설기만 한 신촌 거리였다. 민석은 사람들을 피해 이리 저리 걷더니 작은 사격장 앞에 도착했다. 커플들이 삼삼오오 모여 풍선을 터뜨렸고, 그 옆에는 상품처럼 보이는 인형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었다.
"오랫만에 한 번 해볼까?" 민석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돈을 내고는 장난감 총을 집었다. 루한도 민석을 따라 옆에 총을 집었다. 민석이 먼저 10발을 쏘았지만, 10발 다 풍선을 빗나갈 뿐이었다. 민석이 다 간 발의 차였다며 울상을 짓자 루한은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사격하는 위치로 이동했다.
탕탕탕.. 총 쏘는 소리가 울리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한에게 향했다. 아니, 루한 앞에 놓여진 풍선들을 향했다. 10개가 모두 정확히 명중했다. 가게 주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 루한을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민석 만한 인형을 끌고 나왔다. 루한은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민석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 루한이 너무 웃긴듯 민석은 소리내서 웃었다.
"너 진짜 대단하다! 주인 아저씨 표정 봤어? 오늘 장사는 끝이구나...하는 표정이었다니까 진짜! 넌 정말 못하는게 없구나?"
민석의 칭찬에 머쓱한 듯 루한이 뒷 머리를 긁적였다. 루한은 주인 아저씨가 건네 준 커다란 곰 인형을 민석에게 건넸다.
"너 가져. 난 인형은 별로..."
"야 집에 이렇게 큰 인형 둘 곳 없어. 그리고 집 가면 가족들이 이 인형보고 또 이상하게 쳐다볼라. 네가 얻은거니까, 루한 너네 집에 갖다 놔! "
둘은 내내 웃고 떠드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야구 게임장에 가서 야구도 하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막걸리를 파는 아저씨를 만나 즉석에서 시원하게 막걸리도 들이켰다. 어느덧 거리에 사람들도 뜸해지는 새벽이 되었다.
"아 진짜 오늘 배 찢어지게 웃었다. 조심히 가 루한! 차도 끊겼는데.. 택시 타야겠다.."
"그래그래! 너도 조심히 가 김민석."
루한은 자신 몸집만한 하얀 곰인형을 끌고 택시에 탔다. 택시 아저씨는 거울을 통해 루한을 빤히 쳐다봤다. 다 큰 청년이 인형을 끌어안고 타니 그럴만도 했다. 루한은 그런 아저씨의 시선이 부담되는 듯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엔진 소리가 울리면서 택시가 출발했다. 루한은 조용히 눈을 감고 웅웅대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루한은 오늘 민석을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은 새벽까지... 온통 민석 생각 뿐이었다. 하루 종일 민석을 옆에 두면서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이 인연이 루한에게 있어 독일지, 아니면 루한을 외로움과 어둠 속에서 구원해 줄 금덩이일지... 항상 고독하게 지내왔던 루한 인생에 있어 이렇게 떠들석한 하루가 있었을까... 그 때도 그랬다. 민석의 주변에는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그리고 한국에서 다시 만난 민석도 그랬다. 확신이 섰다. 분명, 이 인연은 그 꽃봉오리들이 루한 가슴에 뿌리를 박고 환하게 꽃을 피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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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 일찍 나왔네 루한!"
"어제 오프닝 못 도와준게 미안해서.."
"기분도 좋은데, 음악이나 틀자. 무슨 노래 듣고 싶어?"
"아무거나."
"그럼 나 아이돌 노래 틀어버린다?"
찬열의 도발에 루한은 성큼성큼 노트북으로 다가가더니 자신의 재생 목록을 재생했다. 은은하고 조용한 노래가 퍼져나왔다. 오랜 시간 함께 하다보니, 어느덧 찬열에게는 루한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감이 생긴 듯 했다.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울렸다. 이른 주말 아침에 손님은 드물었는데, 이 날 만은 달랐다. 멀쑥한 키에 굉장히 잘생긴 얼굴의 손님이었다. 찬열은 그 손님을 보자마자 작게 중얼거렸다.
"어쩐 일로, 사연 많은 손님, 오세훈이 오셨네. 이 곳, 세실리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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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부쉬 드 노엘 예고
"말했잖아, 세실리아는 평범한 가게가 아니라고."
"힘들면 찾아오라며."
"내가 왜 당신이랑 살아야 되는데?"
안녕하세요! Cascade입니다. 3화 분량까지는 미국으로 가는 길에 어느 정도 완성을 해 둔 상황이어서, 호텔 와이파이를 빌려 2화를 업데이트 합니다. 겨우 연결이 됬네요 ^-^
이번 글을 연재하면서, 몇번이고 케이크를 먹고 싶던지... 항상 감사합니다. 양과자집 세실리아는 '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일화들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3화부터 본격적인 본문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다음 화는 가게를 찾은 세훈이, 그리고 찬열이와 백현이 중심으로 서술될 예정입니다. 물론, 루한과 민석이도 등장하지만 다음화 전개상, 비중이 좀 적을 수도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댓글은 항상 저에게 큰 힘이 되요 하트.
Cascade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