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과 찬열이 같이 지낸지도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찬열은 이제 기본적인 말하기듣기실력은 갖춘 정도가 되었다. 180이 넘는 키에 변성기가 섞인 목소리로 어눌한 말투를 구사하며 5살짜리 수준정도로 말하는 찬열은 가끔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줘." 찬열이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밥을 달라는 찬열의 표현이었다. 백현은 찬열이 점점 자신에게 적응하면서 유해지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 들어갈 엄두는 나질 않았다. "안되! 밥 먹은 지 얼마나 됫다고." "줘!!줘!!" "쓰읍- 찬열이 혼나!" "줘!!!!" "찬열이 자꾸 땡깡 부리면...." 백현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찬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백현을 쳐다보았다. 뽀로로 안 보여 줄거야. 찬열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역시 뽀통령이지. 백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또 떼 부릴거야 안 부릴거야." 찬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로 대답해야지. 그러자 찬열이 어눌한 말투로 아니요..하고 대답했다. 백현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웃었다. 요즘 찬열은 5세용 ㄱㄴㄷ배우기 책을 공부중이었다. 하지만 백날 백현이 유리창 밖에서 떠들어봐야 찬열은 관심조차 없었다. 백현이 답답한 마음에 잔뜩 볼을 부풀리고 유리를 탕탕 치면 그때서야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기어오는 찬열이 백현은 야속하기만했다. "찬열아, 이게 뭐라고?" "............" "어제 했잖아. 그치? 응?" "............" "ㄱ이라고...제발..." 첫글자부터 모르면 난 어쩌라는 건데. 백현이 찡찡거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내가 무슨 유치원 교사도 아니고, 백현이 책을 패대기 쳤다. 낭랑 18세 변백현...이게 무슨 고비인거니... 백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현의 스트레스의 원인인 찬열은 여유로워 보이기만했다. "기억!!!!기억이라고!!!!" 백현이 유리창에 기억을 미친듯이 쓰기시작했다. 찬열이 갸우뚱거리며 백현의 손을 따라 눈을 굴렸다. 정말 들어가는 수 밖엔 없나...백현이 아련한 눈빛으로 자물쇠가 굳게 걸린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한테...뭔 한글이야. 그치 찬열아?" "응응" "나랑 프리토킹이나 하자 너도 좋지?" 찬열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찬열은 백현이 울었다 웃었다하는 모양새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 건너의 백현은 찬열을 앞에두고 원맨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찬열아...너 이름이 뭐지?" "찬열." "나는?" "백현" 아구구, 기특하다 우리 찬열이. 백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춤이라도 출 기세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아씨...그럼 뭐해..글도 못 읽는 데..." ".............." "이거 기억이라고!!!" 찬열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데체앞에 앉아있는 이 인간의 어느장단에 박자를 맞춰 북을 쳐야할지 방구를 뀌어야 할지. 찬열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왜...내 옆에...찬열이가 있는 거지? 백현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옆자리에서 잠든 찬열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처럼 문이 열려있었다. 어제...내가 문을 언제 열었더라... 백현이 잔뜩 얼어있는 표정으로 찬열에게서 떨어졌다. 찬열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되..내 침대..." 백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런거지? 이런 칠칠이...백현이 원망스럽게 자물쇠를 보았다. 도어락이라도 달아줄것이지. 저런 자물쇠같은 거나 달랑 달아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찬열이 눈을 떴다. 백현이 영혼없이 웃었다. " 차, 찬열아..깼구나..이제 다시 일루 들어가자..." "싫어..." "얼른...자..여기가 찬열이 집이에요..." "여기서 잘래." 짧고 서툴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는 찬열 때문에 백현은 땀이 삐질거리는 듯 했다. "박찬열 밥 안줄거야!" "치사해!!" 솔직히 치사하긴 했어...백현이 뜨끔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찬열은 절대로 즐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침대를 감싸고 안았다. "안가!! 절대!!" 백현은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 하나님..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제가 돈을 밝혀서 그런 건가요? 하나님 제발 저 늑대자식이 다시 들어가게 해주세요, 제발.백현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뒤 다시 찬열에게 말했다. "찬열아..." "싫어!!" 백현은 찬열의 넓다란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왜 엄마가 자신의 등짝을 후려쳤었는 지 백현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엄마, 지금까지 불효자였던 아들을 용서해 줘요... 백현이 자꾸만 찬열의 등을 향해 뻗어나가는 손을 억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