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빙의글
아주 가끔은 흔한 소재가 더 슬프다
아마 너랑 나랑 헤어진 날은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비가 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유독 신나고, 기분이 들뜨는 날이었다. 분명 난 그랬다. 내가 신났으니 너 또한 신났을 거라 생각하고 난 오늘 밤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우산을 들고 이 곳 저 곳 명동 거리를 거닐며 무엇을 살까 꽤 고심하면서 선물을 골라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그만큼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애틋하고 넘쳐났기 때문이라고 지금의 난 생각한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굉장히 예쁘다. 듣기 좋은 투둑 거리는 빗소리에 괜시리 신이 나 너에게 문자를 해서 이 말을 해볼까, 저 말을 할까 굉장히 고심했지만. 뭔가 굉장히 뜬금없이 하는 문자에 너가 황당해할까 싶어서 그냥 보내지 말고 너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생각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사람의 느낌적인 느낌이란 것이 오늘은 굉장히 혼자서라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고 싶어서 화장도 너를 만날때 만큼이나 공들여서 하고, 친구들에게 나 어디 나갔다온다며 필요도 없는 카톡들을 하나씩 보내며 그렇게 명동 거리로 나왔다. 친구들에게 답장 온 걸 확인하면 무슨 이런 날 명동을 가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명동 거리로 확정을 해놓아서 친구들의 핀잔 따윈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괜히 너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핸드폰 알람을 제일 큰 소리로 켜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오늘따라, 연락이 안오네 "
연락이 안오는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한숨을 푹, 쉬며 홀더를 눌러 핸드폰을 꺼놓고선 명동 거리에 널려있는 옷들과 시야에 들어오는 화장품 가게에 애써 신경쓰이는 태형이를 잠시만 생각하지 않기로 자기 위안을 하며 눈에 들어오는 옷가게들을 둘러보고, 들어도 가보았다. 이런 것을 보면 나도 여자긴 한 것인지 이렇게 보이는 옷들이 그냥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도, 구매를 한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헤프게 웃은 것 같기도 하다. 아…. 혼자서 웃으면서 옷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또 집에 있거나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것 같은 태형이가 생각났다. 밥은 먹었는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되서 옷가게를 나가면서 우산을 다시 피면서 그냥 내가 졌다 이런 심정으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술 한잔해요. 날씨가 쌀쌀하ㄴ, '
꽤나 슬픈 것 같은 컬러링이 몇초가지 않고 끊어져서 당연히 너가 받은 줄 알고, 태형아. 라면서 전화 건너편의 너에게 안부를 물었다. 태형아 일어났어? 지금 오후 4시인데 설마 지금일어난건 아니겠지. 말하다가 괜시리 웃겨서 혼자서 피식 웃으면서 말했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당황스러운 여자 목소리였던 것 같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당황하면서 명동 한복판에서 혼자 서있었던 것 같다. 그냥 혼자서 가만히 서있는 여자애 사람들은 힐끗힐끗 쳐다봤을텐데, 난 그냥 순간 멍해졌던 것 같다. 대체 누굴까 태형이에게 누나가 있었던가 아니면 여동생이 있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사촌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도 들어서 핸드폰을 들고 계속 듣기만 했다. 건너편에서는 내가 전화를 받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건지는 둘째치고 그냥 황당하고 당황했다.
과연 내가 듣고 있는 이 음성이 태형이가 맞을까 싶으면서도 저 여자는 대체 누구길래 태형이와 저리도 다정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내가 바보인것인지, 병신 머저리인 것인지, 너가 바람을 피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기가 싫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좋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전화기를 고쳐잡고 다시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을 하면서 태형아라고 다시 한 번 불러보려고 할때, 난 울고 싶어졌다.
' … 태형아, 너 지금 여친 어떻게 할거야? '
' 어떻게 하건 말건할게 어딨어. 난 이미 걔 질렸는데. '
' 아아, 난 어중간한거 싫단말이야.
다른 선배들은 다 그 언니가 오빠 여친으로 알고 있잖아. '
' 정리할게, 오빠가 조만간 정리할테니깐 기다려. '
' 으응…. 알았어 기다릴게. '
' 나 핸드폰 좀 '
' 거기 오빠 침대 옆에 있는데? '
' 씨발. '
누군지 모를 여자와 태형이는 태형이의 집인지, 그 여자의 집인지 가늠도 못할 곳에 있는 듯 했고 꽤나 거친 태형이의 음성을 듣자마자 난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느새 우산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반대쪽 어깨를 벗어나있었고 그 어깨에 있는 옷들이 다 젖어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바로 우리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잡았다.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내가 잘못 들은 거 였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거짓이였으면 좋겠다. 그 정리한다는 것이 내가 아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여자아이가 나대신 태형이의 옆자리에 있게될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에서 흐르는 액체가 눈물이 아닌, 비에 맞아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태형이는 절대로 날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랑 사귄건데, 그런 태형이가 바람을 그랬을리가. 괜한 억울함이 쏟구쳐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결국 오늘 명동을 와서 산건 너의 옷뿐인 쇼핑백의 끈을 꽉 쥐었다.
" 도착했습니다. 5700원입니다. "
" 아…. 여기요. "
택시 아저씨에게 돈을 건내며 땅만 보면서 집으로 갔던 것 같다. 진이 빠지는 듯한 느낌으 받았다. 분명 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생각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지금 난 무엇부터 생각해야할지도 모르겠고, 태형이와 어떻게 해결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가진 여유에 이젠 너랑 나랑 둘이서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나에게, 넌… 지금 대체 누구와 있는건지,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지금 난 너때문에 당황스럽고 갑작스레 힘들어진 것 같은 느낌에 그런 원인인 너에게 난 기대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난 바보같다.
' ○○○. … 미안해. 내가 다 설명할게. '
태형이였다. 너였다. 지금 내가 보고 싶은 너였다. 난 너라는 말에 바닥에서 일어나 자동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지 못하며 들어오는 너에, 나 또한 고개를 숙여버리고 먼저 들어와서 앉아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던 것 같다. 분명 그 전화를 내가 걸기 전까지만 해도 난 비가 오는 소리에 기쁘고 명동까지 가서 선물을 샀는데 사람의 기분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지금 난 너에게 먼저 물어보고 싶지 않다. 너가 나에게 먼저 해명하고 날 어제처럼만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될지라도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난 내 주변에 남자인 친구라곤 너밖에 없어서 지금 딱 이런 상황에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모른다. 지금 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입술만 깨물고 있는 것인지 난 불안감에 다시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그냥 분위기 자체가 무섭기도 하고 그냥 이런 분위기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다면 이미 울었겠지만 그래도 내 앞에 너가 있어서 아직은 눈물을 참을 만 했다.
" 미안해. 난 지금 너에게 할 말이 없어. 너가 어느정도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충격도 클 거라고 생각해. 내가 미안해 정말 …. "
" … 그게 다야. 태형아? "
" … 어. 더이상 너에게 내가 해줄 말이 없을 것 같아. 너도 지금 생각이 많잖아. "
" 난 그 여자아이가, 너에게 무슨 존재인지, 난, 아직도 감이 안와, 태형아. "
결국 내 울음은 그 자리에서 터져버렸다. 안그래도 내 앞에서 숙여졌던 태형이의 고개가 더욱 숙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난 너에게 그 순간 들었던 감정들을 풀어버렸다. 화를 낸 것도 아니다. 그냥 너가 나에게 이만 헤어지자 라고 할 것 같은 느낌에 날 놓아주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얘기였을 뿐.
" 근데 난 그 사람이 나 대신 너의 옆자리를 가져갈 사람은 아니였으면 좋겠어. … 진짜. "
" 근데 ○○(아)야. 이렇게 까지 된 상황에 난, "
" 그 말안하면 안돼? "
진심이었다. 너가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나도 비참해지는 기분에, 여태까지, 사촌이겠거니, 누나나 동생이겠거니 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니 정말 미칠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말은 결국 너랑 내가 마지막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으니 너와 내가 말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설레는 마음에 갔다왔던 명동에서 샀던 선물들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리라곤 생각을 못했다. 그럴거면 아까 더 많이 사놓을걸, 너가 나를 잊지못하게, 너의 방에 내가 사준 선물들을 보며 나를 더욱 잊지 못하게 만들걸 이라는 못된 생각만 들었다. 너를 위해 샀던 선물들이 담긴 쇼핑백을 꽉잡으며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 너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봐주었다. … 널 외롭게 했던 것 같아 괜히 내가 더 미안하네. 분명 잘못은 너가, 김태형인데.
" ……. "
" 태형아, 오늘 내가 명동을 갔다와서 너를 생각하면서 산 선물들이야. "
" … 받고 싶지 않아. "
" 받기 싫어도 받아줘. 마지막 선물이잖아. 내가 주는…. "
너 또한 그런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는 것인지, 아니 후회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난 너가 나중에라도 너의 그런 행동들에 반성하여 다시 내게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정말 바람은 김태형이 폈는데, 왜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더 내가 나빴던 것만 같은지. 이렇게 생각하니 너에게 너무 미안하고 눈물이 더 나는 것만 같아서 그냥 너를 안아버렸다. 이제 너를 아무렇지 않게 안아버리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테니깐. 태형이도 이런 나를 안아주었다. 너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를 놓…, 아니다 그냥 생각하지 말아야지.
" ○○(아)야. … 사랑해. "
" … 나도. "
잘가. 태형아. 앞으로도 너는 내 기억속에 남을 것 같아.
그 여자랑도 오래가, 그러면서
나는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아직도 난 너를 … 많이,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