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너도 대단하다."
"내가 뭐?"
"어떻게 학원을 1년 가까이 다니면서 같이 다니는 애 얼굴도 모르냐."
지난 9개월간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자 너도 참 대단하다며 나를 타박한다. 그럼 어떡해. 내가 이런걸.
"걔 학교는 어디 다니는데?"
"넌 어디 다니는지에 되게 집착하는 거 같아."
"그래서 어느고 다니냐구."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까먹었다. 교복이...
"그.. 파란색 바지에 흰색 와이셔츤데... 파란색 카라 있는 학교."
"방탄고?"
"어! 그래 거기."
"친구 중에 방탄고 다니는 애 없냐?"
있을 리가요. 내가 남고생이랑 친할 일이 뭐가 있겠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주위에 남자라곤 아빠 밖에 없다.
"아니 도대체 물어봐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냥 한번 물어본다는 거지 뭐."
자기 일 아니라고 좋텐다. 한대 쥐어박고 싶은걸 억지로 참는다.
"근데 넌 여중여고면서 어떻게 주변에 아는 남자애들이 그렇게 많냐?"
"큰 학원 다녀봐, 옆에 널린 게 남잔데."
"그러면 막 니가 가서 말 걸고 그래?"
"내가 걸때도 있고 걔네가 걸때도 있고."
그 말에 감탄. 나로선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단다.
"내 친구가 걔 안대!"
"그래 잘 아시라고 해라."
사실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속으론 엄청 궁금했다. 조금 관심이 가기도 했고. 어떤 앤지, 그 애도 나처럼 학교에서 내 얘길 하는지,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 솔직히 친구 말대로 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꺼리가 없을 뿐. 그간 선생님한테 전정국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땐 누구나 다 겪는다는 중2병에 걸려 고생도 좀 했었단다. 그러다가 지금은 사춘기가 와서 원래 없던 말수마저 더 줄어들고 게다가 학원에 나름 여자랍시고 내가 와버려서 수업 이외에 사적인 대화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더라. 하루는 내가 아파서 학원을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선생님이랑 둘이서 즐겁게 수업을 했었다고 들었다.
"걔 학교에선 날아다닌데. 별명이 무슨 씨걸이래나."
"그래...?"
그 얘길 듣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학교에선 잘만 다니면서 학원에선 왜... 내가 싫은 건가...?
기말고사가 끝나서 방학 때까지는 보충, 야자가 없었다. 학원도 없는 날이라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갔다. 교복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그래도 고등학생인데 SNS 하나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페이스북 접속.
"전정국"
검색. 그리고 뜨는 건 전정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계정. 몇 번이나 찾아봤지만 방탄고 전정국은 없었다. 무슨 고등학생이 이래. 허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벌떡. 김탄소 미쳤어? 너 고2야! 한 학기만 더 있으면 고3이라고! 지금이 연애 아니
짝사랑할 때야? 공부나해! 하며 책상에 앉았지만 다시 핸드폰만 보고 있다. 내 신세야.
'카톡'
웬일로 시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나 했더니 친구의 카톡이었다. 내 핸드폰이 시계 말고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전화ㄱ'
후. 잘 참았어. 김탄소. 정말이지 욕이 비집고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아냈다. 얘는 내가 무슨 전화요정인줄 아나봐. 뭐 별수 있나, 요금 넘쳐나는 내가 전화해줘야지.
"왜."
"나 요금 다 썼어."
"알아. 왜 전화했냐고."
"학원 가는데 심심해서."
"혹시 살해당하고 싶니?"
안 그래도 전정국 때문에 심란한데 얘까지 이러니까 속이 부글부글거린다.
"넌 오늘 학원 안가?"
"오늘 아무것도 없어."
"우리 탄소 정국이 못 봐서 슬프겠네?"
"혹시 돌았니? 걘 그냥 학원 같이 다니는 애거든?"
"그거야 모르지."
제발 꺼리를 만들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 못해봤는데 뭘 어떡하라는 건지.
"말이라도 한번 걸어봐."
"그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해? 걔가 먼저 걸면 모를까."
"그냥 학원가서 인사라도 해."
"그냥 학원가서 9개월 만에 인사를 하라고? 못해."
그건 전정국이 아니더라도 못한다. 9개월 동안 말 한마디 안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하면 날 뭐라고 생각하겠냐는 말이다.
"바보다 김탄소."
"......"
"나 학원 다 왔어. 끊어."
"내일 봐."
진짜 바보다 김탄소. 남자가 뭐라고 말 한마디를 못하냐? 내일 또 학원가면 책에 얼굴만 쳐박고 있을게 분명하다. 말 걸기는 무슨, 얼굴 한번 보자고 고개도 못 들 거다. 숙제나 해야지 하면서 영어문제집을 폈지만 그 잘생겼던 것 같은 전정국의 얼굴만 아른아른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