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민] 둥둥 낭랑둥 01
W.냉동만두
고구려 최고 권위자인 대무신왕, 혹은 김준면이라 불리는 자에게는 윤현왕후라는 아내가 있었다. 혼인을 올린 지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자 결국 백아왕후를 새로 첩으로 들였다. 그런데 백아왕후가 첩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현왕후는 회임의 징조를 보이고 열 달 후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정확히 2년 후 백아왕후도 아들을 낳았다. 정실과 첩이 있으면 남편의 사랑을 두고 다툴 만도 하건만, 오히려 두 왕후의 사이는 돈독했다. 이유인즉슨 준면의 가문에는 세대마다 예언자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었다. 윤현왕후의 아들 민석은 첫째 왕후의 아들이었기에 준면이 죽으면 당연히 다음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아왕후의 아들 종대는 비록 둘째 왕후의 소생이었으나 민석에게는 없는 예언자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두 왕후가 다툴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두 왕후의 성품이 뛰어나 아들들 또한 사이좋게 지냈다.
"형님 오셨습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말을 낮추라고 몇 번을 말해야 들을래?"
"제가 형님게 어떻게 말을 낮출 수가 있습니까."
"그래? 그럼 형의 명령이야. 나한테 말을 낮춰."
"...알았어."
종대가 가진 예언자의 능력은 오래전부터 왕가 식구들만의 비밀이었다. 궁 안의 어떠한 사람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에게만 알려진 이 능력은 나라를 위해 사용되었다. 나라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예언자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왕에게 알려 나라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해왔다. 그 결과 고구려의 입지는 탄탄해지고, 예언자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신분을 숨기고 궁 안의 은밀한 공간에서 기거하며 비밀 병기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종대도 마찬가지였다. 종대는 숙정궁에서 홀로 생활하며 지냈다. 왕에게 예언을 알리러 갈 때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숙정궁 근처로 가지 못했으며 종대도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꺼렸다. 단 한 명의 예외,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백아왕후도 아닌 자신의 형, 민석이었다.
"화과 가져왔어. 나 혼자 먹기는 너무 심심해서."
"예쁘게 생겼네."
"그치? 너 이거 다 먹어."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다."
"에이, 이게 뭐가 많아!"
"나랑 같이 먹자."
민석은 종대에게 억지로 화과 하나를 물려주고 나서야 자신도 화과를 베어물었다. 민석이 움직일 때마다 샛노란 비단이 흔들렸다. 그에 맞춰 종대의 하늘색 비단도 흔들렸다. 달달한 화과의 향기를 맡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형제는 간간히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참, 그거 들었어? 요즘 옥저에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온대."
"난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형이 말하는 바깥 이야기가 나한테는 전부야."
"너랑 내가 왕자만 아니었더라도 맘껏 돌아다닐 수 있었을텐데. 너랑 같이 나가고 싶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오늘 밤에 나가. 오늘 밤은 감시가 덜할거야."
"진짜?"
"그럼. 그래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군사들을 데려가. 백성 옷으로 갈아입는 것도 잊지 말고. 형 이거 물어보려고 온거잖아."
"윽, 들켰다." 해사하게 웃는 민석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사들을 대동하라고 말했건만 이미 종대에게는 혼자 신나서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는 민석이 보였다. 그럼에도 종대가 큰 걱정을 하지 않은 이유는 민석이 무사만큼의 출중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석이 가고 난 자리를 정리하며 종대는 민석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나갈 위인이라고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우와아.." 그리고 고구려 최고 예언자인 종대의 예상대로, 민석은 혼자 짙은 풀색의 옷을 입고 옥저의 거리로 나섰다. 자신의 호위 무사인 백현과 경수는 잔소리가 너무 심했다. 그러한 이유로 함께 오지 않은 것이라 애써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민석이었다. 옥저의 거리에는 궁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물건들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동물, 신기한 문양의 비단, 새로운 먹거리, 오래된 골동품.. 수많은 물건들 속에서 민석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릇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붉은 머리를 한 사내였다. "그릇 하나에 얼마요?" "열 냥 주시오." "열 냥? 그 가격이면 거의 거저 주는 것과 다름 없지 않습니까. 제 눈에는 그릇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말할 수 없소." "어허.. 장사를 하는 자가 이리 물러터져서야.. 아무리 봐도 이것은 궁의 그릇임이 분명한데, 궁 출신이오?" "그릇을.. 알아보시는 것입니까?" "날마다 보는 것인데 당연ㅎ.. 아니, 내가 그릇을 만드는 일을 해서 조금이나마 얄팍하게 알고 있다만.. 실제로 보니 신기해서..."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민석을 보는 사내의 눈이 번뜩 빛났다. 민석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사내는 늘어놓았던 그릇을 챙기기 시작했다. "안..파실거요?" "팔 이유가 없는 듯 합니다." "어째서.." "곧 다시 볼 듯 합니다. 제 이름은 루한입니다. 기억해두시지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루한이 가는 길을 멍하게 바라보던 민석이 두어번 눈을 꿈뻑거렸다. 홀연히 사라진 모습에 혹여 귀신에 홀렸나 싶었다 하지만 곧 궁의 문을 닫을 시간이었기에 민석은 궁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