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Cliche 02
장마가 오려나ㅡ
유난히도 내리는 비에 가게 안에는 빗소리 외엔 그 어떤 것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인적이 드물이 마련이였다. 바짓자락 끝을 적시는 기분 나쁜 흙탕물, 피부로 와닿는 끕끕한 습기. 으, 생각만 해도 싫어.
원목으로 된 카운터를 검지 손가락으로 탁 탁 버릇처럼 치던 준면이 흘끗 시계를 보았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슬쩍 초조해진 탓에 애꿎은 아랫입술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빨간 입술이 더 붉게 부어올랐다.
5시.
보통 세훈이 학교를 마치고 습관처럼 가게를 찾아오는 시간이였다. 아무리 늦어도 십 분을 넘긴 적이 없는데.
우산이 없나, 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파란 우산을 들고 나서니 저 멀리 골목 끝에서 비를 다 맞으며 힘 없이 걸어오는 세훈이 보였다.
‘아니 핸드폰은 장식이야? 우산이 없으면 전화를 해야할 거 아냐!’ 하고 세훈을 혼내주겠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터벅터벅 세훈의 앞에 다가섰다.
“야, 오세훈. 너….”
전화도 안 하고 뭐했어, 라고 말해줄 참이였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세훈이 갑작스레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고 혀엉, 하고 어깨에 얼굴을 묻는 순간 잔소리는 커녕 놀라서 떨어트릴 뻔한 우산을 잡기에 급급했다.
손을 어디다 둘 지 몰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민하던 찰나에도 허리를 더 세게 안는 세훈에 숨을 흡, 하고 들이켜야했다.
무슨 일이야, 하는 말도 꺼내기가 어렵게 세훈은 점점 더 제 몸을 파고들었다. 이거 몸만 컸지 완전 애기구만ㅡ
우산을 잡고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세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감기 걸리겠다.
“왜 그래, 세훈아.”
“그냥….”
“그냥?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
“…성적표 받아서요.”
아아, 하고 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훈도 이제 고3이니 성적에 신경써야 할 나이였다. 수시에 정시에, 여러가지로 마음 고생할 세훈이 그저 안타까운 준면이었다.
저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세훈이 중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 질질 코를 흘리면서 제 옷자락을 꼭 쥐어잡고 같이 학교를 가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그새 이만큼이나 자라 내년이면 벌써 성인이 될 나이였다.
그 어마어마한 세월이 피부로 와닿아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너와 내가 이렇게나 오래 있었구나. 이렇게나 긴 시간을.
하지만 준면에게 세훈은 아직 그저 코흘리개 동네 꼬마로 보일 뿐이였다. 제가 업어 키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훈이 커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봐왔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감기 걸려.”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있어요.”
빗소리에 묻혀 세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잔뜩 울적했기에 그의 마른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성적 때문에 이렇게 속상해했던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때가 때이니 만큼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긴 하나보다.
그렇게 십 분 가량을 인적 없는 골목길 모퉁이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준면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세훈이 그제서야 조금 웃어보였다. 이제 됐어요. 충전 끝.
“팔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 이제 들어가자, 따뜻한 거 타줄게.”
“응, 우산 줘요. 내가 들게요.”
세훈이 왼손으로 우산을 들고 오른손으로 준면의 어깨를 꽉 끌어당겼다. 어깨 젖어요.
그에 또 숨을 들이킨 준면이 빨리 들어와ㅡ 하고 눈 앞에 보이는 가게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옷이 살짝 젖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얘가 오늘따라 왜이래, 사람 당황스럽게.
뒤따라온 세훈이 주방에서 마른 수건 하나를 꺼내어 잔뜩 젖은 머리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옅은 회색의 교복이 진한 먹색이 되어 있었다.
뭐 마실래, 코코아? 유자차? 하고 준면이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내 들었다. 코코아요. 달게.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채 카운터에 턱을 괴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는 준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어째 아까 꿈에서 보았던 그 뒷모습과 겹쳐 보여 다시 울적한 기분이 엄습했다.
성적 때문이라…. 같잖은 변명이였다. 어두운 속내를 들키기 싫어 대충 둘러댄 말이였다.
“…세훈아?”
어느새 부엌 안으로 넘어온 세훈이 코코아를 젓던 준면의 얇은 허리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귀에 닿는 젖은 머리칼이 차가웠다. 왜그래, 또. 준면이 뒤를 돌았다. 세훈의 입이 굳게 다물려져있었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세훈의 머리에 있던 수건을 집어 들어 양손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털어주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그 얼굴에 급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야 했지만 뒤를 도는 순간 언뜻 보았던 세훈의 눈동자는 분명 잔뜩 공허했다.
많이…힘든 건가.
“…형.”
“응.”
“내가, 귀찮아요?”
뭐?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훈의 눈을 마주했다.
자신이 하도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댔으니 귀찮은 건 오히려 세훈 쪽이지, 절대로 그가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따라 한참 풀이 죽어있는 세훈에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학교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짧은 꿈을 꾸었었다.
준면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애처럼 굴지마. 귀찮게 하지 말란 말야.’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얼음장같이 차갑고 매몰찼다.
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자신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 나가는 준면의 하얀 손을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가지마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또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기는 싫었다. 어린애마냥 달라붙는 제가 준면에게는 충분히 귀찮을 수도 있었다.
그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 뒷모습은 저만치 시야에서 벗어난 뒤였다. 아마 저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었다.
그래도… 가지 말지.
형 가면, 형마저 가버리면. 나는 아무도 없잖아요ㅡ
너무나도 생생한 탓에 꿈에서 깬 세훈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었다. 교과서의 페이지 한 쪽이 흥건했다.
안 그래도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 울적했는데, 그런 꿈까지 꿔버리니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준면이 그렇게 자신을 떠날 것 같은 그런 생각에. 왜, 슬픈 예감은 항상 맞다고 하지 않던가.
시선은 아래로 고정한 채 다정스레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는 준면의 양 손을 제 손으로 꼭 잡아서 슬며시 떼어냈다.
그제서야 겨우 눈을 맞추었건만, 살짝 얼굴을 가까이 하니 또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왜, 뭐….”
“잠깐 나 좀 봐요.”
그에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정말. 정말 코 앞에 세훈의 얼굴이, 아니 정확히는 세훈의 입술이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바싹 제 얼굴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 옅은 숨을 내뱉는 동안 그 숨막히는 정적에 준면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얘가 왜이래…!
파르르, 하고 미세하게 떨리는 그 속눈썹에 세훈이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살짝 거리를 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숨도 못쉬고 있는 준면의 얼굴을 보니 이러다간 그가 질식사라도 당할 것 같아 재빨리 그의 깨끗한 이마에ㅡ
“…야, 너….”
입을 맞추었다.
원래는 입술에 하려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제가 더 정신을 못차릴 것 같아 이마에서 그쳤다.
그 붉은 입술에 저의 입술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황홀경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샐샐 웃기만 하는 세훈을 멍하니 바라보던 준면의 얼굴이 귀끝까지 달아올랐다.
원체 피부가 흰 사람이라 얼굴이 발게지면 금세 티가 나는 바람에, 지금 그의 얼굴은 딱 보기 좋게 익은 새빨간 토마토였다.
“너, 오세훈 너…. 지금….”
“뭐. 말을 해요 말을.”
“너 형한테…!”
“많이 참은 거예요.”
하고 준면의 머리를 한 번 헤집고 부엌을 나선 세훈이다. 저 갈게요ㅡ 하는 목소리 뒤로 문이 닫히고 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준면은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더 있다가 테이블에 손을 짚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진짜, 미쳤어. 오세훈도 미쳤고ㅡ
나도 미쳤어.
I saw you… you in me.
나는… 내 안에 있는 널 봤어.
사담 :-) |
안녕하세요. 얼마 되지 않아 또 이렇게 똥글을 투척하고 가네요 하하하. 노래 듣고 계세요? 제가 진짜 진짜 좋아하는 노랜데... 오랜만에 듣다가 감성이 폭발해버려서 그냥 끄적여본 글이에요. 내일이면 또 제 글을 보고 이불 깨나 찰 것 같네요... 왜 항상 쓸 땐 괜찮다 싶다가도 다시 읽으면 손발이 없어지는지ㅠㅠ 아 그리고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핑크 클리셰는 연재물이 아니에요! 제목에 1편 2편을 달아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그냥 제목만 똑같은 에피소드 형식의 조각글입니다! 이야기가 전~혀 이어지지 않아요 허허허. 아 그리고 저번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알로에님, 매미님, 팥님, 둘리님, 당근님, 나비님, 휴지통님, 베이비슈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첫 편부터 너무 귀중한 독자님들을 얻었어요... 감사할 따름ㅠㅠ 나중에 텍파라도 만들어서 드려야겠어요 물론 이 똥글도 받아주신다면야. 아 항상 사담이 길어지는 건 왜때문이죠. 얼른 끝내야겠어요. 남은 주말 모두 잘 보내시고 행복한 하루 되시길! 다음에 또 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