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끈적한 눈빛으로 드림과 11명의 기녀들을 찬찬히 둘러보지만 꽤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여인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한다. “나으리, 제가 가락지를 찾을 수 있게 도와드리면 제게 무얼 해주시겠습니까?” “제게도 기회를 주시지요.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째 마님께서 저 아이, 화양이한테 주는 것을요.” “어머? 입술이 얇아도 말은 바로 하라 했습니다. 나으리 전 아닙니다. 뭐 정녕 궁금하시면 직접 찾아보셔도 상관 없습니다.” 옷고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야살스럽게 웃는 화양이의 표정에 엄한 김행수만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한다. 그러자 곧바로 화양이의 맞은 편에 있던 연화가 인상을 쓴다. 가세가 기울자 스스로가 기녀가 되겠다고 기방에 찾아온 연화. 그런 연화가 꽤나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입술이 얇은 게 아니라 입이 삐뚤어져도겠지. 자넨 어쩜 그리 한 가지씩 모자른겐가.” “흥, 여인의 몸으로 많이 알아 무엇합니까? 그저 뜻만 전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이 후에도 여인들의 이야기에 찬찬히 귀를 기울이던 영감에게 드림이는 웃으며 말을 건다. “자, 이제 영감님이 차례입니다. 가락지는 어디에 누구한테 있습니까. 기회는 단 3번 드리겠습니다.” 다 늙어가는 노인이라 한들 한양 최고의 상단 주인인 김행수도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기에 드림 역시 꽤나 긴장한 듯 보였다. 드림이의 남편은 김행수와 다르게 꽤나 다정했으나 결혼한 지 1년만에 8살이나 어린 신부를 두고 허망하게 명을 다했다. 그런 그가 준 귀한 가락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낸 영감은 그 귀한 것을 시아비가 보는 자리에서 숨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영감은 드림주의 단아하게 쪽 빈 머리를 풀게 했다. 화려한 기녀들의 머리 사이에서 더 눈에 띄는 드림이의 머리에 가락지를 숨겨 놨을 것이라 생각했다. 촤르륵 드림이의 머리카락과 함께 하얀 목덜미가 들어났지만 영감이 찾던 가락지는 나오지 않았다. “두 번 남으셨습니다.” 늙은 뱀의 눈이 쉴새없이 바빠졌다. 드림 머리에 숨겨놓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없다는 것이 꽤나 큰 충격인 듯 했다. 오랜만에 하는 이 놀이가 재밌다는 듯이 기대에 찬 웃음을 지닌 기녀들 중 드림이의 옆에 앉은 기녀가 눈에 띄였다. 태연한 척 하지만 치맛단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주름이 진 걸로 보아하니 가락지는 드림이의 옆에 앉은 기녀가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어디에 숨겼는지 찾아야 할 때였다. 차피 기녀인데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옷고름을 풀거라.” 멈칫한 기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영감은 곧바로 드림이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내색하진 않지만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기녀는 천천히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곤 저고리를 벗어던졌다.
“영감. 송구하게도 이 년에겐 가락지가 없습니다.” 기녀의 말대로 나와야 할 가락지는 또 나오질 않았다. “한 번 남으셨습니다.” 단호한 드림이의 목소리에 영감은 조급해진다. 이젠 승패를 떠나 자존심이 달린 상황이었다. 기녀들의 웃음소리는 금방이라도 영감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딱 좋았다. “이번엔 네 옷고름을 풀자꾸나.” “영감...!” 뒤에서 말 없이 지켜보던 김행수가 다급하게 영감을 불렀다. 제아무리 과부라 한들 죽은 제 아들의 처가 되는 윤드림이었다. 그렇기에 감히 제 며느리인 드림이 이런 기녀들과 똑같이 옷을 벗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제 행단과 자신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기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했을 뿐이었다. 제 시아비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생각하던 드림이는 방긋 웃는다. “그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영감은 이 내기에서 지셨으니깐 말입니다.” 드림이의 손은 옷고름이 아닌 버선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오른쪽 발 버선을 벗더니 그 안에서 영감이 그토록 찾던 가락지가 나왔다. 영감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재밌는 년. 한양바닥에서 굴리기엔 아까운 계집이라 생각했다. 감히 여인이 죽은 남편이 준 가락지를 시아비 앞에서 발에 둘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베짱 한 번 웬만한 사내들보다 더 쎈 계집이었다. “그럼 가격은 약조하신대로 가격은 저희가 제안한대로 맞추기로 하신겁니다.” 그 일 이후 드림이의 이야기가 더 널리 퍼지게 됐다. 이 일을 영 못 마땅하게 여기던 김행수 마저도 드림이 받아낸 어마어마한 거래가격에 더 이상 무어라 하질 못했다. 윤드림이는 기생들에게 놀이를 시작하기 전 은밀하게 약속했던 청나라에서 나는 고운 연지와 향낭을 선물했다. 며칠 뒤 한 사내가 행단에 찾아왔다. 피부는 검게 그을리고 키는 팔척이 넘는 큰 키를 가진 사내는 누군갈 찾은 듯 보였다.
“김행수의 둘째 며느리를 만나보려 왔다만.” 밑도끝도 없이 드림을 찾는 그의 생김새는 수상하기 그지 없었다. 얼핏 보아도 흉터로 가득한 손. 날카로운 눈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드림을 만나게 해줄 순 없었다. “그 아이는 몸이 안 좋아 쉬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그러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덕수아범은 아프지 않은 드림을 아프다 하며 거짓말을 섞어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 “뭐 한 가지 좀 확인하려 하네.” “오늘은 어려울 듯 하니 누신지 알려주시면 사람을 통해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녕 오늘은 안 되겠는가. 얼마가 되든 상관 없네. 내가 한양에 오래 머물 계획이 없어서 말이네.” “안으로 드시지요.”
갑자기 나타난 윤드림에 주지훈과 덕수아범은 흠칫 놀란다. 괜찮다는 눈짓을 보낸 드림이는 지훈을 데리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사랑채로 발길을 향한다. 뒤따라 걷는 지훈은 자신의 앞에 앞장서는 여인 때문에 자꾸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리 작은 여인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또한 감히 저 여인은 자신보다 앞장 서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의구심이 들어왔다. 이 작은 여인이 제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처음 보는 이 여인이 왜 이리 반가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