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GULAR 1
作. 페탈
또는
검은 바닥들에겐 나름의 소식통이라는 게 존재했다. 저들끼리는 팀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갱단인, 그 갱단의 순위가 이들의 주 관심사였고 소식통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인뉴스였다. 순위는 그 갱단의 수익으로 따졌다. 언제나 본인이 아니고서야 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당히 추정을 하며 저울질을 해댔다. 계훤은 검은 바닥에 얼마 들어오지 않은 신참 중의 신참이었다. 계훤이 들어간 갱단은 순위는 상중하 중 중하에 속하는 그저 그런 정말이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곳이었다. 덕분에 계훤이 이 바닥이 돌아가는 꼴을 잘 몰랐다. 그리고 잘 몰라야 했다. 알려고 더 파고 드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조금 늦게 발을 담그게 된 계훤은 오늘 처음, 광란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이 광란의 밤 마저도 숱한 감시를 피해 겨우 오게 된 일종의 파티였다. 한 달의 한 번 잠든 전 폐공장 위로 그들이 걸어 다녔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지만 완벽하게. 암묵적인 방침이었다. 정말이지 불량배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계훤은 목에 찬 금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마지막 순서였던 것인지 입구를 지나는 발은 더 이상 없었다.
도영의 눈이 계훤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도영은 사람을 유별나게 잘 기억했다. 주로 유흥가를 다니며 이곳저곳 찌르며 다니다 보니 인맥이 필수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이후로 머리가 터져나도록 사람을 저의 좁은 머리통에 욱여넣었다. 그 때문인지 도영은 사소한 것들을 자주 잊어버렸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파티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사람을 경매하고 술을 마시고 밀반입한 마약과 무기를 거래했다. 필요하면 여자도 불렀다. 공장 바닥을 덮고 있는 카펫 위에는 한 잔에 400만 원 하는 술들이 가뭄 난 땅에 물 뿌린 듯 축축이 스며들었다. 철없고 어린 것들의 어리석은 과시였다. 계훤은 나이는 많았지만 철은 없었다. 아까운 술은 입 대신 꼬질꼬질한 카펫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도영은 손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읊조렸다. 모계훤. 멍청하며 허세가 가득함. 멍청하며 허세가 가득함. 멍청하며 허세가 가득함. 외우는 건 무조건 말하면서 외운다. 도영의 신념이었다. 뭐 어차피 외워봤자 5시간 내로 도영의 머릿속에서 없어질 운명이었지만.
계훤은 술을 뿌리며 뛰놀다 어디로 들어와버린 건지 좁은 통로 끝에는 회전 등이 돌아가는 작은 이발소가 있었다. 정말이지 눈에 띄게 허름했다. 이상하게 묘한 분위기에 계훤은 뻑뻑한 문을 열고 이발소를 들어갔다. 녹슨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맑은 딸랑- 소리 대신 쇠들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계훤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어서 오세요."
"뭐야 진짜 하네?"
"어떻게 해드릴까요?"
이발 의자에 편하게 걸터앉은 태용은 고개만 돌린 채 인사했다. 계훤의 눈을 돌린 건 태용의 태도가 아닌 손이었다. 미용 가위를 검지 손가락에 끼워 빙빙 돌리고 있는 게 퍽 위험한 듯 보였다. 그런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거울 사이사이 벽에는 수십 개의 가위가 박혀져있었다. 계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발의자에 앉았다. 완전 간이 콩알만큼 작아질 걸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최선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건 곧 자기 합리화로 이어졌다. 내가 쫄은 게 아니라 그냥 놀란거라니까 그리고 안그래도 머리를 잘라야하기도 하고.
"그럼 여기 뒤에를,"
"손님 머리가 꽤 기셔서 뒤에는 깔끔하게 정리하고 앞은 이마를 가볍게 덮을 정도로만 자르는게 예쁘겠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친절하지만 딱딱한 웃음을 지은 태용의 표정을 본 계훤은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키도 고만고만하고 비리비리한 게 쓸데없이 깝치고 있었다. 저걸 그냥 확-. 이발도구를 준비하는 태용을 흘깃흘깃 쳐다보던 계훤은 흠칫했다. 태용의 손이며 목이며 온통 번쩍거리는 금품들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쟤는 대체 뭐하는 애냐. 솔직히 태용의 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 금품들로 둘러싸인 주먹에 약하게라도 맞으면 턱이 갈릴 것만 같았다.
태용은 가위를 좋아했다. 이유는 없었다. 서걱서걱거리면서 잘리는 느낌도 좋았고 차가운 금속이 손에 닿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도 좋았다. 얇게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칼날도 좋아했고, 가위 끝의 뾰족한 부분도 좋아했다. 이미 가위가 손에 익은 태용에게 이따금씩 좋은 무기의 역할을 했다. 벽에 박혀 있는 수 많은 가위 중 어떤 것이 누군가의 심장에 박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태용은 계훤의 머리에 물을 묻혔다. 생긴 건 드럽게 세게 생겨선 손끝은 또 섬세했다. 태용의 하얀 손이 은색으로 번쩍이는 가위를 들었다. 계휜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발소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울에 비친 이발소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태용의 옷에 시선이 머물렀다. 딱 봐도 나 명품이에요 를 광고하는 것 같은 벨벳소재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까 비슷한 옷차림의 남자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술잔을 들고 저를 바라보는 것 같긴했다. 아닌가, 내 도끼병이 또 도진건가.
"여긴 되게 깊숙한 곳에 있어서 찾기 힘드실텐데 용케 오셨네요."
"아, 뭐. 느낌에 끌려서. 아 근데 공장에 이런걸 왜 만들어 놓은 거지? 어차피 폐공장이라 쓸데도 없을텐데."
"그러게요. 쓸데도 없어서 만들었나봐요."
"완전 낭비네. 아 근데, 옷차림 때깔이 꽤 좋아서 하는 소린데 여기서 왜 이런 걸 하는거야? 얼굴도 엄청 반반해서 밖에 여자들한테 엄청 잘 먹힐거 같은데."
반말을 찍찍 뱉어내는 계훤의 말을 듣던 태용이 대답도 하기 전에 다시금 녹슨 종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태용과 같은 벨벳소재의 정장차림의 재현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헬멧이 다른 손은 와이셔츠의 맨 위 단추를 푸르고 있었다.
"어 재현아, 손님 계셔서 좀만 기다려."
"아 형 유타형 왔어요?"
"또 부셔먹었어?"
"간만에 열을 올리니까 버티기 힘들었나봐요."
계훤은 둘의 대화 사이에서 눈만 굴리고 있었다. 스펀지로 계훤의 얼굴을 살살 쓸던 태용은 계훤의 구레나룻을 매만지며 저의 얼굴을 옆에 들이밀었다. 계훤은 거울을 보며 흠칫했다. 태용이 계훤의 얼굴 옆에 본인의 얼굴을 들이민 그 순수한 의도까진 알 순 없었으나 일단 한 방을 먹이는 데에는 충분했다. 계훤은 태용보다 굉장히, 그것도 꽤 많이 머리가 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본인의 얼굴에 취하며 새롭게 바뀐 헤어 스타일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오직 태용의 얼굴 만으로 모든 기분을 잡쳤다.
"어떠세요?"
이미 기분이 묘하게 상한 계훤은 고개를 까닥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고 싶만큼 돈을 달라는 태용의 말에 지갑에서 오천원을 찾아 건네고 이발소 문을 열기 전 재현과 태용을 흘낏 넘겨봤다. 옷도 비슷하게 입은 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그냥 조금, 아주 조금. 그러다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매캐한 니코틴 냄새와 쓴 알코올 냄새가 계훤을 반겼다. 계훤이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재현은 이발소 벽면의 장식장을 옆으로 밀었다. 태용이 무심결에 올려둔 가위들이 땅으로 곤두박질 치면서 날 부분이 전부 휘었다. 태용은 잔뜩 울상을 지으며 가위를 하나씩 집어 올렸다. 재현은 태용에게 굉장히 미안해 했고 전부 새 걸로 바꿔주겠다는 약속까지 먼저 했다. 그리고 들어간 장식장 건너편에는 차 한대와 그 밑에 삐져나온 다리가 았었다.
"뭐야, 오 재현 와쓰?"
"유타형 치타 진찰 좀 봐주세요."
"그거 내가 얼마 전에 고쳐준거 아니야?"
"ㅎ... 맞아요"
"재현아, 너 진짜 죽고시퍼?"
유타는 멋쩍은 듯 그저 웃고있는 재현을 뾰로통하게 바라보다 다시 차 밑으로 들어갔다. 이 차도 아마 얼마전 재현이 고장낸 차가 분명했다. 태용은 유타의 공구함 옆에 앉았다. 유타가 コンビネーションレンチ콤비네에쇼 렌치를 주문하면 태용이 차 밑에서 쑥 나온 손에게 콤비네이션 렌치를 건넸고 ドライバー도라이바아를 주문하면 태용이 공구함을 뒤적이다 드라이버를 건넸다. 재현은 바닥에 널브러진 유타의 벨벳 자켓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다 공구함을 뒤적거리는 태용에게 물었다. …는요? 그러게 2층에 있지 않을까?
계훤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동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확히는 부러워하는 시선이지만. 얼빠진 듯 2층 계단을 보는 계훤의 어깨를 툭툭 친 건 계훤과 같은 팀의 진우였다. 그것도 경악에 찬.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너 씨발 진짜 단명하고 싶냐?"
"어차피 단명할 거 그냥 좀 즐기면서 살면 안되냐?"
"이 새끼 이거 돌았네 완전히."
"어떻게 해도 죽을 거 그냥 내 좆대로 할거니까 꺼져 새꺄."
진우를 향해 엄한 말을 쏟아낸 계훤은 1층에서 2층을 올려다 봤다. 2층에 있는 사람들은 펜스에 가볍게 기대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둘씩 짝지어 얘기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술이나 뿌리며 노는 이곳과 분위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윗층은 뭔가 더 고급진 느낌? 나랑 어울리게. 고개를 내린 계훤을 진우가 그냥 술이나 먹자며 바로 데려갔다. 폐공장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고급졌다. 대체 어떤 팀이 이번 파티를 개최한건지 어째 가는 길마다 죄다 명품이었다.
"야 그래서 이 휘황찬란한 건 누구 작품이야?"
"당연하지. 127이잖아. 너 설마 127도 모르고 있냐?"
진우는 경악하며 계훤에게 속사포로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잣집 아드님이라지만 이것도 모르는 게 말이 돼?
"와 저 이 새끼 진짜... 127은 고위급 간부들도 찾는다는 팀이잖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계약이 술술 들어온다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래도 진짜 유명해진건 실력. 아직까지 한번도 평크 낸 적 없고, 기간 어긴 적 없고, 발각된 적 없어서 정치인들이 엄청 좋아하고, 그래서 느이 아부지도 저기에 빌붙어 보려고 그렇게 난리시고. 그러니까 저기 윗층은 완전 프라이빗 룸이라고 병신아."
"우리 아부지도 절절 맨다고?"
"이야 넌 니네 집구석 굴러가는 꼴도 모르냐?" 대단하다 진짜."
어안이 벙벙한 계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파티 끝나고 보자는 진우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계훤은 들고 있던 술잔을 멍하니 바라봤다. 파티 개최 팀은 다트로 결정됬다. 지난 달 개최 팀이 던진 다트가 다음 파티 개최 팀을 결정한다. 저의 팀은 매달 다트가 저의 팀에 꽂히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했다. 뽑히면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겨우겨우 구질구질한 파티한 열었다. 그런데 뭐였더라 일리칠? 1위 팀은 얼마나 남아 돌길래 고작 이 파티에 돈을 바르고 있는걸까. 그리고 어느 정도길래 아버지가 빌붙지 못해서 안달일까. 에라 모르겠다 비싼 술이라도 왕창 먹고 가자 싶은 계훤은 남아있는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곧이어 스피커를 타고 안내 방송이 울렸다.
30분 후 경매가 열립니다. 1층 중앙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장소 착각하는 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가 늘 그랬듯 해결하실테니 최대한 즐기고 가자 싶은 계훤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향했다. 아 술을 너무 많이 마신건가. 계훤은 황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화장실 안에 들어선 계훤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어린 남자 애에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줬다. 이상하게 오늘 비슷한 옷이 눈에 많이 띄였다. 저 어린 놈이 입은 옷도 아까 이발소 걔네와 심하게 비슷했다.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조금 달라보이는 게 따라입은 건가 싶은 계훤은 곧바로 의심을 풀었다. 아무리 많이 쳐도 성인은 안돼 보였다. 그 만큼 한참 앳되 보였다. 원래 이맘때 즈음이면 다 멋도 부리고 싶은 법이다, 고로 저 어린 놈은 그저 흉내내기 식으로 따라입은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린 계훤은 해찬에게 슬쩍 말을 던졌다.
"그런 옷은 도대체 어디서 다들 구하는거야?"
핸드드라이어에 손을 넣어 물기를 말리던 해찬의 고개가 계훤에게로 돌아갔다. 해찬은 머리가 좋았다. 아이큐 적인 부분의 머리는 잘모르겠으나 하여튼 잘 굴러갔다. 그리고 상황 판단력 역시 뛰어났다. 초면에 반말을 뱉은 계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해찬은 계훤의 장난 가득한 시선을 온전히 느꼈다. 이래서 멍청한데 몸은 잘 쓰는 놈들이 성가셨다.
"뭐, 그냥 만들어 입죠."
별일 아니라는 듯 남은 물기는 핸드 타올에 닦으면서 말하는 해찬을 바라보던 계훤의 눈엔 확신이 가득히 들어서 있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므찐 형아들 따라한답시고 집에서 난리를 쳐가며 옷을 만들었을 게 눈에 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찬의 말은 팩트였다. 해찬이 아주 좋아하고 또 해찬의 말에 따르면 본인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누군가가 오늘을 위해 원단까지 손수 골라가며 만든 옷이었다. 그 말인 즉슨 계훤이 지금 건드리면 안될 부분을 건드리려고 한다는 얘기였다.
"그럼 짭이네 뭐. 옷 때깔은 좋아보이는데 짜가라니까 좀 아쉽겠네. 팀에서 옷을 안사서 입나봐? 바지는 츄리닝인데 위에는 또 와이셔츠라니 너무 없는 티 내는 거아니냐. 요즘 애들 패션이 더 구려 하여간."
해찬은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웃고 말았다. 뭐 저런 머저리가 다 있는건지. 해찬은 유명인사였다. 이래저래 유명새를 탔다. 정부에 갇혀있을 땐 잘 몰랐지만 그곳을 뛰쳐나오자마자 비로서 본인이 어딘가 특출난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이곳 저곳 열심히 쏘다녔더니 본인이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얼굴은 잘 몰라도 특이한 목소리 덕에 다들 누군지 한번에 알아차렸다. 그냥 이쪽에 발만 살짝 담그다 곧 뺄 계획인 계훤이 이 사실을 알리 만무했다. 저를 깔보는 말에 옷 지적까지.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지? 해찬이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뭐야... 지금 너네 형들 부르는거야?"
깝치길래 되게 큰 쪽 사람인줄 알았는데 작다 못해 그냥 소규모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갱단 소속에 이 바닥의 신참이었다. 뭐야 이 새끼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스크롤을 쭉쭉 내리던 해찬은 맨 마지막에 쓰여있는 글을 읽고 빙그레 웃었다. 아아.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느닷없는 웃음아닌 웃음에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계훤을 두고 해찬은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기분이 찝찝하니 윗층에나 올라가야겠다.
한편 계훤은 태블릿을 쓱쓱 넘기고 저를 쓱 훑다가 한 번 피식 웃고 사라진 남자애가 있던 자리만 바라봤다. 뭐지 저 싸가지는?
계훤은 화장실을 나와 1층 중앙으로 갔다. 무대 위에는 키가 큰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와씨 저 옷 아까 화장실 걔랑 똑같은 옷... 둘을 관계를 생각하던 계훤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금방 무대 위로 집중했다. 미치겠다... 무대 위에 마이크를 들고 있는 놈도 똑같은 옷이었다. 돌겠네. 술을 너무 많이 마신건가? 계훤은 눈을 비볐다. 검은색 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쟈니는 마이크를 들고 경매를 붙이고 있었다. 쟈니가 직접 경매를 붙이고 있진 않았고 쟈니가 늘 끼고 다니는 전문 경매사가 경매를 붙이고 쟈니는 사람들을 부추기는 식이었다. 도영이 사람과 사람을 컨택하는 중개인이라면 쟈니는 물건과 물건 또는 물건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중개인이었다. 굳이 쉽게 풀어쓰자면 도영은 유흥가 큰 손이었고, 쟈니는 블랙마켓 큰 손 정도랄까.
경매는 시작됐고 쟈니와 경매사는 바쁘게 움직였다. 경매 번호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1층뿐만 아니라 2층에서도 값을 올렸다. 계훤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번호판이 올려시는 모습을 구경했다. 주로 시선은 2층에 머물렀지만.
"3억 8000만원에서 더 부르실 분 없으십니까? 열을 세도록 하겠습니다."
쟈니가 서 있는 무대에 스크린은 커다란 보석을 비췄다. 와 저건 대체 어디서 캐는 거길래 크키가 무슨 주먹만하냐. 1층 무대 가까이에 앉아18번 번호판을 든 사람은 의기양양한 채 보석을 받기 위해 양복을 가다듬고 있었다.
"칠, 육, 오,"
"4억."
양복을 가다듬던 남자의 표정이 뒤틀렸다. 2층에선 붉은색으로 번쩍이는 원피스를 입은10번 번호판의 사람이 말했다. 그에 18번 남자가 다시 번호판을 들어올렸다. 몇차례 가격을 주고받으며 올리다 지루해진 10번은 자신의 가격 흥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스청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번호판을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10억."
"10억 보다 더 부르실 분 없으십니까?"
계훤은 의문의 10번을 보며 입을 벌렸다. 10번의 옷은 노출이 많은 옷이었다. 나시로 되어있기도 하고 가슴도 워낙 많이 파였고, 짧고 몸에 딱 달라붙었다. 와 근데 존나 이뻐. 계훤은 2층에서 내려와 무대에서 보석을 받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보석을 받아가면서 살짝 허리를 숙였는데 가슴골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라곤 말하진 못하겠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키도 어지간히 큰 편인 것 같았다. 다리 길이가 와. 계훤은 10번이 스청과 2층 안쪽을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찐득한 눈빛을 쏘아댔다. 그 뒤로 갖가지 것들이 나왔지만 경매가 끝이 보이는 지금까지 코빼기 한번 비추지 않는 그 여자 때문에 계훤은 입맛을 쩝 다시며 경매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도 마지막 경매는 참여할 생각이에요. 저 대신 진행을 해줄 분이 곧 올 테니 조금만 양해해주세요."
일반 경매장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였다. 물론 이 경매 자체가 일반적이지가 않지만. 슬슬 길어지는 경매에 흥미를 잃고 신발 코만 바닥에 내리찍던 계훤은 쟈니의 말에 고개만 삐딱하게 돌려 무대를 바라봤다. 그때 계단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그 여자가 긴 흑발 머리를 넘기며 앵클 부츠를 또각거리면서 내려왔다. 짧은 치마가 신경쓰이는 모양인지 치마 끝자락을 손으로 잡은 채로.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은 10번이 인사를 하려고 입을 떼었을 땐 쟈니가 벗어준 겉옷을 이미 위에 걸친 후였다.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인사를 한 후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사방에서 환호와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능숙하게 관객을 향해 웃음 지어보였다.
"안녕하십니까. 127의 퀸입니다.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릴 건 석궁입니다. 제가 흑수당에서 직접 가져온 상품입니다. 그럼 경매사님 시작해주세요."
10번 그니까 퀸은 엄밀히 따지자면 일종의 직책 이름이었다. 계훤을 제외하고 이 공간에 같이 있는 모두는 알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맨 위에 군림하고 있는 건 127의 그 누구도 아닌 퀸이었다. 127의 심장이자 머리. 비꼬는 말로 개미들의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왕이라는 그 근본적인 사실은 변함잉 없었다. 127의 남자들을 어떻게 삶고 구웠는지는 몰라도 모두가 퀸의 한 마디면 절절맸다. 설마 사랑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모두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원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유지가 되는 법. 퀸이 무언갈 던져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지? 왜 다들 저렇게 퀸의 옆에서 때깔 좋은 고양이나 충견이라도 되는 양 구는건데. 글쎄. 그걸 알면 누구든 퀸에게 모든 걸 주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퀸은 이름을 시시때때로 바꿨다. 퀸과 거래를 했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퀸을 기억했다. 한국식 이름부터 영미권식, 일본식, 중국식, 라틴식과 같이 온 지구촌의 이름을 다 쓰는 듯 그 종류도 다양했다. 지금은 큰 계약을 따낸 바로 직후라 사람들은 암암리에 유다희라고 알고 있었다. 그 계약서가 어찌나 유명한지 그냥 무제한 복제되서 온 동네를 떠돌아 다녔다. 계훤의 눈은 다희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한게 곡 여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부적처럼 만진 계훤은 자세를 고쳐앉고 다희를 바라봤다. 암만 봐도 예뻤다. 무대 앞 쪽에 선 쟈니는 다른 사람들의 흥정만 물끄러미 구경했다.
"35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4 billion."
쟈니가 마지막 쐐기로 40억을 부르면서 석궁은 쟈니의 품 속으로 들어갔다. 다희는 쟈니 대신 석궁을 챙겨 곧장 2층으로 올라갔고 남은 경매는 다시 쟈니의 진행으로 이어졌다. 계훤은 술에 알딸딸하게 취해 달아오른 얼굴로 다희가 올라간 2층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존나 이쁘다.
술에 얼큰하게 취해 정상적인 사고 범주에서 한참 멀어진 계훤은 입구컷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단이나 밟아보자 싶어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은 멀리서 봤던 것보다 비실했다. 얇은 철로 만들어졌는지 힘을 들이지 않아도 흔들렸다. 계단 앞부분은 뚫려있어서 꽤 높이 올라왔을 땐 밑이 바로 보여 어지럽기까지 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철제 계단의 난간을 동아줄 삼아 올라가니 막상 자신을 제제하는 사람은 있지도 않았다. 아니 누가 이곳에 올라온 것 자체를 신경쓰지 않았다.
계훤은 일단 주변을 살폈다.
다희는 2층으로 올라온 계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본인 명을 본인이 단축시키는구나. 나야 편해졌지만. 다희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굳이 담배를 입에 빼내지 않고 연기를 뱉었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계훤이 어른거렸다.
"다희 실망이에요."
스청은 꽤 서운한 표정으로 다희에게 투정을 부렸다. 스청은 중국에서 꽤 알아주는 콜렉터였다. 웨펀 콜렉터. 어떤 건 쓰는 방법조차 몰랐지만 그저 어마무시한 외관에 이끌려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런 스청에게 방금 다희가 경매에 내놓은 석궁은 #다희가 흑수당에서 뺏어올 때부터 눈독 들이던 예비 베이비였다. 근데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경매에 홀라당 넘긴 다희에 스청은 단단히 뿔이 났다. 쟈니가 저걸 도대체 얼마나 바가지를 씌워 자신에게 팔아넘길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아마 계훤이 1층에서 올려다 본 정겨운 모습이 아마 저 석궁에 관한 얘기가 분명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심각한 비즈니스 얘기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다희의 일방적인 석고대죄였다.
"미안... 내가 더 예쁜 애기로 구해줄게. 요즘 봐둔 거 없어?"
"다희"
"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마요."
다희가 스청에게 무릎까지 꿇을 태세로 사과하고 있을 때 건너편 오락실에선 내기가 한창이었다. 말이 오락실이지 그 내막은 카지노였다. 오락실 분위기 좀 내보겠다며 옆에 인형 뽑기 기계를 가져다놨지만 인형 뽑기 기계 안에는 정상적인 솜뭉치 대신 도대체 시가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는 금품들로 가득했다. 악세사리로 삼기 위해 한번씩 시도를 해보는 사람들 사이에 언제 올라온건지 태용도 홀린 듯 집게발을 내리고 있었다.
카지노 한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졌다. 그 중심엔 마크가 조용히 칩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크는 처음엔 카지노나 헤짚고 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다니는 포지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자신이 카지노에서 자주 쓰는 뒷통수 때리기처럼 목표를 맞출 때도 가장 먼저 뒤를 노렸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곳을 노리는 게 한방이라면서. 그리고 그런 마크의 맞은편에 앉아 패를 살피는 사람은 정우였다. 주황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단연 사람들 사이에서 톡 튀었다. 비단 머리색 뿐만이 아니라 굴러다니는 머리도 상당히 좋았다.
정우는 마약을 다뤘다. 단속에 걸리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해 들여오는 경로를 짜는 게 무기와 마약 딜러들의 골칫거리였는데 정우는 매번 다른 경로로 항상 빠르게 손에 쥐었다. 기록조차 남기지 않아 팀원들 마저 그 경로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패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더니 이내 패를 내려놓고 양손을 들어올렸다.
"오이~ 형 오늘 되게 좋았는데,"
"너가 늘 좋지, 그래도 꽤 버틴거야"
졌음에도 해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크와 자리를 뜬 정우는 2층을 살피더니 마크에게 물었다.
"태일이형은 어디있어?"
"어? 형 없어요?"
정우와 마크가 애타게 찾던 태일은 계훤과 마주쳤다. 계훤은 눈에 띄지 않으려 가장자리만 훑으며 뱅뱅 돌다 태일의 옆에 멈춰섰다.
"여기는 사람 단속 안하나, 이러면 아무나 막 들어오겠네."
태일이 계훤을 향해 천천히 말을 뱉었다. 딱봐도 싸구리 신발, 싸구리 바지, 윗도리, 도금 금목걸이. 태일은 단번에 계훤을 잡아냈다. 구석진 곳이라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계훤은 곧바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조심해."
"이...!"
"지금까지 있던 손가락 없으면 되게 허전할걸."
태일의 목을 움켜쥐려고 뻗은 손은 태일이 턱 가까이에 비스듬히 붙인 나이프에 멈춰섰다. 순하게 생긴 인상이라 고작해야 컴퓨터나 만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칼을 꺼내들을지 몰랐던 계훤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대로 굳었다. 이정도 반사신경이면 정말 손가락 잘리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은 느낌이 든 계훤은 곧바로 손을 내렸다. 평소였다면 계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손가락이 걸려있다니까.
"그냥 조용히 놀다 가."
"......"
"어차피 놀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계훤의 옆을 지나가며 태일이 작게 말했다.
태일은 주머니에 나이프를 행거치프인 양 고이 접어 넣고 당구대로 향했다. 태일은 자신이 나이프를 빼들었을 때 계훤의 표정이 생각나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사람들은 태일을 자주 무시하고 깔봤다. 아무리 표정을 굳히고 정색해도, 그저 무표정으로 있을 때 태용이나 해찬이 같이 살얼음같은 분위기는 나오지 않는지라 일부로 표정을 만드는 것 대신 자연스럽고 편한 인상을 만들었다. 덕분에 순둥순둥해 보인다며 저를 갖고 노는 장난감쯤으로 생각한 것들이 다가와서 시비를 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다 태일에게 손가락이 잘린 것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렇다보니 태일은 지뢰탐색반을 도맡았다. 현장에 가야하는 일이 생기면 태일이 천천히 산책을 다녔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저를 쓰러뜨릴지는 모르는 일이라 계훤이 주춤한 반사신경 정도는 생명보존에 필수였다.
태일이 현장을 나갈 땐 꼭 마크가 뒤따랐다. 태일의 산책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 꼭대기나 건축물에 자리를 잡고 태일을 저 멀리서 지켜봤다. 태일이 나이프를 꺼내서 직접 동맥을 끊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전에 마크가 알게 모르게 통수를 가격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총성이 울리면 총기소지가 불법인 이 땅덩어리에서 골머리를 앓을 일이 여러 개 생기기 때문에 소음기를 달은 총에 총알과 같은 모양으로 특수제작된 마약을 넣어 한발 한발 쏘아 넘어뜨렸다. 그동안 산책을 하면서 일어날 법한 왠만한 산전수전은 다 겪어본 태일이기에 목을 움켜쥐기위해 나온 계훤의 손 따윈 귀여운 장난에도 못 미쳤다.
"와 역시 이해찬 미쳤다..."
사람들의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해찬이 큐대를 목 뒤로 넘기고 씨익 웃었다. 재현이 큐팁에 쵸커를 바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사람들의 시선이집중되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지자 태일과 그런 태일을 찾고 있던 마크와 정우도 얼이 빠져있던 계훤도 다희와 스청도 게다가 저 멀리서 뽑기를 하고 있던 태용까지 당구대에 몰려들었다. 당구대 이곳저곳에 서 보며 각도를 재던 재현이 자세를 잡으려고 숨을 크게 내쉬자 그제서야 많은 인파가 몰렸음을 알았다. 재현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다희와 눈이 마주치자 다희는 손을 들어 작게 인사했다. 다희의 인사에 재현은 알듯말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자세를 잡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당구대를 둘러싸고 있는 탓에 계훤은 몸을 기우뚱거리며 사람들 틈 사이로 시야를 확보했다. 사람들의 어깨와 목 사이로 언뜻언뜻 공과 큐대가 보였다. 아 저 새끼 포켓볼 할 줄 모르네. 저 각도로 때리면 너무 얇아서 안들어간다니까. 계훤은 늙은이같이 혀를 끌끌차며 중얼거렸다. 재현이 큐대를 앞 뒤로 두어번 움직이고 공을 쳤다. 계훤의 말대로 재현의 공은 홀 주변에 멈춰섰다.
"아 형 배웠다매요"
해찬은 재현의 플레이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 듯 툴툴거리며 바로 공을 쳤다. 어, 저 놈은 좀 칠 줄 아는 놈이네. 그래 저렇게 두껍게 때려야 공이 들어가지. 계훤은 여전히 사람들 틈을 파고들며 겨우겨우 당구대만 보고 있었다. 방금 말한 좀 칠 줄 아는 놈이 화장실에서 본 싸가지인 줄은 모르고 방금 전 해찬의 플레이를 곱씹으며 칭찬을 퍼부었다. 꽤 어려운 공이었는데 말이야. 센스가 있네.
"저 이겼으니까 형이 이번에 들고 온 다이아 저 주세요."
"아직 안 끝났어 동, 아 해찬아."
재현이 해찬의 말에 대답하며 공을 쳤다. 대담한 포부를 담은 답에 비해 재현의 공은 홀을 지나쳐 벽에 튕겼다. 재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해찬을 향해 말했다.
"다이아 줄게. 그럼 이 다이아 걸고 볼링 치러 가자."
"아 형~!!!"
해찬이 재현의 말에 장난인듯 진심인듯 짜증 아닌 짜증을 내며 마지막 공을 홀에 넣고 경기를 마무리 시켰다.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흩어졌고 다희는 옆에 있던 스청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네 명을 데리고-태일,태용,정우,마크- 큐대를 정리하고 있는 재현과 해찬에게 다가갔다. 다희는 빠르게 단어만 말했다. 다트, 애프터, 목표, 2층. 다희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한 두번 듣나.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신이 난 다희의 목소리가 어벙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는 계훤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다희가 재현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날 것 같다.
1층은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분위기였다. 도영이 1층 중앙에 다트를 배치시켰다. 도영은 사람들이 다트에 몰려들자 그 무리를 잽싸게 빠져나와 쟈니를 찾았다. 대부분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쟈니를 쉽게 찾아 끌고 왔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이 들어 쟈니를 윗층으로 보냈다. 다희가 이번에 꼭 다트를 던지고 싶다고 말했던 터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트에 더 신경을 많이 썼다. 우리 여왕님이 만지고 하는 건 모두 최고이고 모두에게 주목 받아야 하니까. 도영은 이번에 준비한 다트판을 보며 어깨를 폈다. 이번 다트 판은 유독 예쁜 것에 대한 기준이 높아도 너무 높은 다희의 맘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쟈니는 계단은 두 칸 씩 올랐다. 다희는 그새를 못 참고 또 담배를 태웠다. 태일이 들고 있던 담배를 빼았아 담뱃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머리가 띵한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해찬의 얼굴에 연기를 뱉으면서 재밌어했다. 담배를 다시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쟈니가 재빠르게 손가락 사이에 얌전히 있는 담배를 뺏었다. 한창 재밌게 니코틴을 주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담배를 뻿긴 다희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평소에 잘 신지 않는 구두를 신어서 그런가 키가 큰 쟈니와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안 그래도 키 큰 애가 구두까지 신은 탓이었다. 그 구두도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담배를 다시 찾아오려는 다희에 쟈니가 담배가 들린 손을 위로 쭉 뻗었다. 쟈니는 허우적거리는 다희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트려 밟았다. 쟈니가 구두로 담뱃불을 지지자 다희가 짧게 탄식했다. 아. 다희의 짧은 탄식이 분노로 바뀌기 전에 쟈니가 한 발 더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도영이가 다트 던질 시간이래. 손목이 풀린 다희가 손바닥으로 쟈니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빴어. 그리고 쟈니 다음으로 키가 큰 정우와 재현을 방패막 삼아 둘을 양 옆에 세워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해찬은 다희의 뒤를 졸졸 쫓았다. 쟈니는 다희의 장난에 웃으면서 마크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태용은 태일과 스청을 챙겨 밑으로 내려갔다. 제일 큰 거물들이 밑으로 빠지니 윗층에 있던 모두가 따라 내려갔다. 계훤은 맨 마지막이었다.
다희가 밑에 내려오자 계단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영이 재현과 정우 사이에 낀 다희를 단숨에 채갔다. 재현과 정우 사이의 공백을 해찬이 메우며 다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연스럽게 길을 텄다. 이번 파티의 드레스 코드가 블루라더니 정작 주최자들은 빨간색 옷을 맞춰 입었다. 마치 푸른 물결들 사이에 요동치는 핏빛 파도 같았다. 다희는 도영이 정해둔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뒤로 127의 멤버들이 둥그렇게 감쌌고 그 다음 외곽을 다른 이들이 감쌌다. 계훤은 사람들 사이를 겨우 헤쳐 다희의 맞은편에 섰다. 한 쪽 골반에 무게를 실어 짝다리를 짚은 채로 구불구불 길게 굽이치는 완연한 검정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는 다희를 보면서 계훤은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곧게 뻗은 하얀 다리와 검정 머리칼 그리고 새빨간 레드립. 남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미인상이었다.
다희가 도영에서 다트를 받아들었다. 오른쪽 다리를 뒤로 보냈다. 옆으로 선 다희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오른쪽 어깨를 세게 앞으로 보내면서 다트를 던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다트판에 콰직 소리를 내며 다트가 박혔다. 일순 모두가 긴장했다. 긴장감에 침묵이 감돌았다. 다트판이 서서히 멈추자 대부분은 환호하고 다트가 꽃힌 팀만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음 번 파티의 주최측이 된 팀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와 다희와 가볍게 악수했다. 다희의 형식적인 웃음에도 많은 이들이 초점을 잃었다. 그 모습을 가장 빨리 알아챈 도영과 해찬이 다희를 데려갔다. 그리고 또 다시 빨간 파도가 겹겹이 쌓였다. 퀸은 늘 엄호를 받았다.
폐공장에 모두가 빠져나갔다. 불이 차례차례 꺼지고 어두워졌을 때 스위치 앞에 있던 다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옷 갈아입어!"
같이 스위치를 내린 마크가 다희의 지퍼를 내렸다. 다희의 원피스가 몸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마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니 다희가 옷을 입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는 소리, 자켓에 팔을 넣는 소리. 어느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게 없었다. 눈을 감은 마크를 본 다희는 떨어진 원피스를 줍고 질끈 감긴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크가 눈을 뜨자 다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눈 떠도 돼."
마크가 재빨리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켰다. 마크의 옆에 찰싹 붙어 따라가자 차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뒷자석에는 이미 얌전히 눈치를 살피고 있는 계훤이 있었다. 운전석에서는 재현이 손으로 인사했다. 흐물거리는 원피스를 마크의 가방에 대충 구겨넣은 다희가 차 문을 열었다.
"안녕, 아까 봤지?"
다희가 뒷자석에 안고 마크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계훤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진우를 찾아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목 뒤를 세게 친 것 같았다. 그 힘에 잠깐 기절했고 눈을 뜨니까 이 차 안이었다. 손과 발이 꽁꽁 묶여 무슨 수를 쓸 수도 없었다. 다희는 차에 타서 귀걸이를 바꿔꼈다. 목걸이도 바꿨다. 계훤이 불안한 시선으로 다희를 바라봤다. 이렇게 잡혀와서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는 이 상황에 심장이 마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한테 얼른 연락을 해야 했다.
"아버지한테 연락하려고?"
정곡을 찔린 계훤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을 본 다희는 실소를 흘렸다. 바보같은 자식.
"불쌍해서 어떡해. 니네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텐데."
다희의 말에 계훤이 거세게 몸부림쳤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말이 막힌 입에 다시 계훤의 안으로 들어갔다.
"너도 안녕. 오늘 재밌었어."
다희가 수술용 장갑을 끼고 나이프를 잡았다. 다희의 뺨에 피가 튀었다. 아이 진짜 화장 엄청 열심히 했는데.
내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중간중간 바뀐 부분들이 있으니 꼼꼼히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