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아 뭐 그런거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우지호에게 있어서 '연애'라는 건 그냥 타이틀일 뿐. 그렇다고 해서 사귀는 사람이 악세서리같은 폼이냐고? 그런 것도 아니다. 사겼으면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물론 쌍방향으로-. 그런 의미에서 최근 들어서 표지훈은 우지호와의 공기가 미묘해졌다는 것을 저도 모르게 언제부턴가 눈치채고 있었다. 우지호가 바람피냐고? 아~니. 제 애정이 식은 거냐고? 아~니.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바꼈다-라는 것 정도. 그런 건 알 수 있었다.최근 우지호의 생활은 스튜디오-집-스튜디오-집-스튜디오-집. 수면은 어디서 하냐? 그거야 작업량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지 뭐. 덕분에 표지훈은 최근 우지호의 집에서 눌러앉아있기 보단 제 집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아졌다. 표지훈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 사실은 굉장히 불편한 일이다. 아니 내가 집을 어지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게임하다가 어 이게 모야? 하면서 지 작업물 건들 것도 아닌데 그리도 싫단다. 집을 어지르는 게 싫은 걸까 싶었는데 것도 아닌 것 같고.
며칠 째 통 연락이 안되면서 시큰둥해진 지훈이 수업시간에 집중은 하지도 못하고 내내 공책에다가 우지호의 뒷담만 적어내려 갈 뿐이다.우지호 병신 우지호 개새끼 우지호 니미놈 우지호 우지호 우지호 우지호 우지호 우지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냥 저주내리는 거 같아서 괜히 속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표지훈의 표정이 묘하게 찡그려지며 입술을 비죽 내밀고 괜히 투덜거렸다. 아마 지훈이 생각하기에- 제 연인, 우지호는 혹시 저한테 권태기가 온 게 아닐까 라고 상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지훈은 혼자서 결정하는 것을 잘 하는 놈이니까 충분하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며칠동안 집을 비우는 건 알았지만, 최근은 연락도 안하면서 거의 한 달을 비우고 있었다. 그렇게 금시하는 집안에의 출입이었기에 표지훈이 우지호의 집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다. 지호의 주변인들이 지훈에게 소식을 묻는 경우만 수두룩했지만 결국 지훈도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저도 몰라요'. 그도 그럴 것이 지호의 부모님은 미국으로 이민갔고 형이라던 태운이 형 역시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 그쪽이 왜 무소식인 지는 묻지마라. 똑같은 대답 나온다. 항상 입고다니는 재킷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자 잡히는 쇠를 꾹 쥐었다. 동그란 링. 반지. 은(銀). 커플링. 아직 지호에게 주지 못한, 주머니 속 두 개의.
띡,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
말이 되냐고 이게. 이젠 핸드폰마저 일 주일 전 부터 꺼져 있고. 전화를 끊고 소파에 축 늘어져 누운 채 천장을 응시했다. 바보같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세본 적도 없지만 느낌 상 근 한달 간 계속 그랬던 것 같다.
"형."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표지훈을 반기는 건 여전히 찬 공기였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들어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고선 거실로 들어섰다. 벽을 더듬거려 형광등 스위치를 눌러도, 손을 좀 더 옮겨 보일러 온도를 높이기 위해 위로가는 화살표 버튼을 여러 번 눌러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훈의 입 안이 쓰리다. 집 안은 해가 진 탓에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깜깜하다. 집이 남향인 것도 아니라 햇빛의 기운이 남도는 따뜻한 곳 따위도 없었다.
익숙하게 이를 부른 표지훈의 목소리만 울린 집 안은 여전하다. 시선을 굴리며 둘러봐도 가구 중 어느 것 하나 위치가 바뀐 것 하나 없다. 헛웃음이 지어지며 괜히 머리칼을 흐트렸다. 가능 할 리가 있나 참. 눈을 감아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있던 것도 잠시, 발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맴돌자 지훈의 눈이 떠지며 놀란 표정이 주변을 살폈다. 보일러 온도가 올라갔다고?
-띡. 띡, 띡, 띡, 띡, 띠리리.
익숙한 음이 들리자 휙 고개를 돌리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 표지훈의 표정이 놀란 그대로 멈췄다.
"뭐하냐?"
"……."
"멀뚱히 서서 뭐하냐고. 표숭아."
짜증이 섞인 말투가 그를 노리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린 큰 비닐봉투를 식탁 위에 놔두고 다시 그의 몸이 지훈의 방향으로 돌아가 섰다. 넋이 나간 듯 지훈이 멍하니 우지호를 응시했다. 마주친 눈이 서로를 담고 있던 것도 잠시, 먼저 인상을 쓰며 뭘 봐, 라고 하는 우지호에 지훈이 씩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했다. 한 걸음, 둘, 셋 다가가 잡은 손은 차갑다가도 따뜻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지호의 마음과도 같았다. 여전히 지훈의 입가에 어딘가 불안한 듯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꿈일까 환상일까. 헛 것이면 어쩌나. 만감이 교차해 결국 지훈이 입을 열었다. 형, 갑자기 뽀뽀받고 싶어요.
"뭐?"
"뽀뽀받고 싶다고요."
"…제정신 맞지?"
"왜 멀쩡한 사람 병신처럼 봐요?"
"그냥."
"게다가 이런 말 자주 하는 거 알면서. 아 빨리요 형."
실실 웃는 모습 누가 거부를 할까. 우지호의 얼굴에 장난끼가 서림과 동시에 씩 웃으며 양 손으로 지훈의 뺨을 잡아 고정시키고 있는가 싶더니 양 뺨을 꼬집어 당긴다. 아, 아 아 아 아아파요! 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지호의 손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었다. 아 누가 뽀뽀해달랬지 꼬집어달라 했냐고요. 인상을 쓰며 투덜거리던 지훈이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다시 우지호를 봤다. 아프다고? 그럼 이게 꿈이 아닌가? 진짜로 우지호가 온 건가? 어?
"아까부터 미쳤나 이게. 왜 이래?"
"지호 형."
"오글거리게 부르지 말랬지 내가."
"형."
"그래 왜."
"……진짜 형이죠. 그쵸. 진짜 지호 형 맞죠."
"내가 지금 꽤 자리 비웠다고 꿈이라도 꾸는 줄 아나보네."
응. 꿈 꾸고 있는 것 같다. 한달 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눈 앞의 사람을 갑자기 예고없이 맞이했는데 눈 앞의 사람이 꿈이 아니면 어떻게 믿을까. 지훈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서려 흐흐, 하고 웃음을 지었다. 우지호다. 지호 형. 진짜 좋아하는 지호 형. -병신아 입이 귀에 걸릴라 한다 좀. 우지호의 말에 그제서야 표정관리를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오늘 아침에 인터넷에서 심심하던 차 눌렀던 포춘쿠키에서 뭐라고 했더라. 갑자기 이렇게 복이 찾아오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목 안에서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에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집 안을 배회하는 우지호가 어느 편으로는 신기했다. 하긴 제 집이니까 당연한가? 아무도 없으리라고 믿었던 집 안으로 들어온 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자주 하던 짓인데 오늘따라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제 뺨을 꼬집어도 아팠다. 보통 꿈 꾸면 꼬집어도 안 아프다잖아? 다시 멍하게 허공을 보는 표지훈의 앞으로 우지호가 서서 이마를 꾹 눌렀다. 너 그러다가 중심 잃고 넘어지면 난 모른다, 병신 표지훈. 아 알았어요. 꿍얼꿍얼.
"온 김에 밥이라도 해놓고 가."
"내가 밥셔틀이에요?"
그래요 내가 대접받을 거라곤 기대는 안했지만 오랫만인데 이건 좀 심하지 않아요? …라고 목구멍에서 차오르는 걸 꾹 눌러내렸다. 털썩 식탁 의자에 앉아 뚱하게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미는 습관이 튀어나왔나보다. 우지호가 다가와 다시 그의 양 뺨을 꾹 누르며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넌 키도 멀대같이 큰 새끼가 하는 짓은 꼭. 꼭 뭐요. 철 덜 든 꼬맹이 같다고. 나 아직 19살인데? 그러니까 꼬맹이지. 아닌데... 눈을 마주치고 하는 대화가 고작 이렇다. 이제서야 일상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훈이 다시 입가에 웃음을 걸쳤다.
"표지훈."
"네?"
포춘쿠키가 뭐라 했으면 어때 오늘은 기분이 꽤 좋다. 집에 들어와서 처음 듣는 듯한 제 이름에 저도 모르게 대형견마냥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드니 지호가 조금 당황을 한 듯 멈칫했다. 왜요? 그의 질문에 괜히 헛기침을 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지호가 의자 뒤로 등받이에 양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추위 탓에 튼 것 같은 입술에 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굴렸다. 밖이 그렇게 추웠던가? 깊어지는 입맞춤에 다시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손이 위로 올라가 우지호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아까처럼 뽀뽀만 바랐는데, 가볍게 입술만 대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가 기울어지고 그 사이로 서로가 오가며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혹 좀 더 꽉 잡으면 모래처럼, 먼지처럼 부스스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이 문득 들어 입맞춤을 나누는 와중에도 어딘가가 불편했다.
"근데요 형."
"어?"
"당분간 일 쉬면 안돼요?"
"나 먹고 살기는 해야지."
"아니 그러니까……."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네가 이제 나를 찾지 말아야지.-
헉.
눈을 번쩍 뜨니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 저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져서 꿈을 꾸고 있었다. 한참을 넋이 나간 채 있다 일어나 앉아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곳은 제 집이었다. 답답한 느낌이 들어 괜히 목을 쓸어보니 그새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이게… 악몽인가. 괜히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만났는데, 입도 맞췄는데. 멍한 시선으로 눈을 느릿이 깜빡이니 괜히 깊은 한숨이 나왔다.
천천히 일어나 머리를 흐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그의 가구, 몇몇은 다른 집 가구. 정확히는 제 연인의 가구지만. 괜히 입이 쓰렸다. 방금 전까지 입을 맞췄는데. 생각해보면 없는 사람한테 입술이 부드러울 것을 바라면 안됐던 걸지도 모른다. 방으로 들어가 제 책상 위에서 충전 중인 또다른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ㅡ표지훈 넌 항상 보면 말야.
ㅡ네?
ㅡ꼭 새벽마다 전화하더라.
ㅡ아 그거야.. 형 심심할까봐 그러죠.
ㅡ꼬박꼬박, 2시마다.
ㅡ그래도 받을 땐 받아주잖아요. 지호 형 작업하는데 심심할까봐. 흐흐.
잠금을 풀고 액정을 켜 보니 1시 55분. 밤마다 잠이 들어도 이상하게 이 쯤이면 깨게 되더라. 아마 이런 짓을 하라고 억지로 누군가가 깨운 것 처럼. 거실에 걸린 벽걸이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집안에서 울려퍼지고 고개를 숙인채 대기시간 초과로 다시 까맣게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지훈이 다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58분. 다시 off. on. 59분. 느릿하게 전화부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물론, 전화는 걸리지 않지만. 그래도.
"……."
거실에 놓인 지훈의 핸드폰은 울리지 않는다. 이미 핸드폰은 요금도 내지 못한 채 정지한 지가 오래니까.
"듣고 있어요?"
너 없는 하루도, 잡지 못할 순간도, 이제 오지 않는 너의 새벽전화도내가 없는 일분 일초도,그저 지나는 새벽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