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남녀 反戰男女
Episode 00. 반전남녀를 소개합니다
글쓴이. 명란젓코난
A. 김제인은 집순이
이름은 김제인. 나이는 올해로 스물 둘. 내년이면 벌써 졸업이다. 아, 취미는 집에서 로맨스 영화 감상 혹은 소설 읽기.
친구들은 곧 졸업이라며 뒤늦게 대외활동이다, 스터디다 하기 바쁘지만 제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제인을 '아웃사이더'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녀는 '아웃사이더, 인사이더' 이런 것을 굳이 따지지도 않았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우선이었고, 제인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을 아예 안 만난다거나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꺼려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제인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을 뿐이다. 어쩌다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잡혀도, 절대 밤을 새지 않았다.
열두 시 전이면 꼬박 짐을 싸 집에 가는 제인을 보며, 친구들은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 니가 무슨 신데렐라야? 열두 시 땡 치면 집에 들어가게.
- 얘들아, 있잖아.
나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이 우리 집이 아니면 너무나도 불행할 것 같아. 친구의 행복을 위해 지금 놓아주는 게 어때?
집순이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는 대사에, 다들 허를 내두르며 얼른 가라는 듯 훠이 손짓을 했다. 그제서야 제인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 지겹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 집순이가 황금같은 휴일에 여기까지 나온 건 진짜 사랑이야.
- 그래... 그건 맞다. 너같은 지독한 집순이가 휴일을 우리한테 반납하다니. 아주 영광입니다요.
그럼 난 이만. 집으로 향하는 제인의 발걸음이 왠지 아까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B.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고, 연애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아, 본격적으로 제인의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의 오해를 풀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인은 '로맨스 영화/로맨스 소설'의 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애에 관심이 없다' 뭐 전에는, 그녀에게 연애 생각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비커밍 제인'의 제임스 맥 어 보이를 보고
푹 빠졌을 땐 그와 같은 남자를 만나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 야, 이 치마가 그렇게 이상해? 우리 오빠가 입지 말래.
- 남친이 열두 시 안에 집으로 들어가랜다.
- 와... 내가 자기 허락 없이 머리 잘랐다고 그렇게 성을 낼 수가 없어.
참, 연애라는 건 이해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친구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자신이 원하는대로 옷 입히기를 하질 않나. 술자리에 참석한 여자친구에게
30분마다 연락을 하며 안위를 확인하기 바빴다. 연애인지 육아인지 분간 안되는 '짓'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제인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저런 게 연애라면 하지 않겠어.
그때부터 남자 생각, 연애 생각은 고이 접어둔 채 솔로 생활을 유지 중이었다.
- 김제인, 니 또래 애들은 휴일이면 다 집 나가서 남자친구랑 데이트하고 그러던데. 언제까지 집에서 퍼질러 누워만 있을래?
- 엄마, 엄마 말고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엄청 많거든.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연애는 젊은 이들의 특권이다, 어쩐다 하는데. 이렇게 할 일 없이 한가로이 누워 있는 것도 내 젊음의 특권이야. 다들 나한테 연애 좀 강요하지 마.
저렇게 생긴 남자 있으면 하지 말라 해도 할 테니까.
그리고 제인이 가르킨 것은 비커밍 제인 포스터 속 자리 잡은 '제임스 맥 어 보이'의 얼굴이었다.
C. 사랑꾼이거나 개자식이거나
주한대학교에서 '이재욱' 이 세 자를 모르면 간첩에 속했다. 3보 1인의 남자 (세 걸음만 가면, 아는 사람을 한 명씩은 만난다는 뜻) 사람들은 재욱을 그렇게 불렀다.
재욱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랬다. 굳이 자신이 사람을 갈구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람들이 꼬였다. 그럴만도 한 것이, 지나칠 때마다 한 번쯤은
뒤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준수햇다. 단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매너도 좋다는 게 함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술자리나 모임에 재욱은 불려가기 일수였다. 본인도 딱히 그런 자리를 꺼려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그렇게 많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알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애를 할 기회 또한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재욱의 연애는 항상 짧다는 게 흠이었다. 본인 역시도
여자친구를 사귀고 헤어질 때 큰 미련을 두지 않은 게 한몫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재욱의 모습을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재욱은 미련을 두지 않았을 뿐,
연애 기간에는 상대방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남자친구로서 해야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달까.
여기서 한 가지 오해는,재욱이 상대방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재욱, 너 그거 아니? 남들은 니가 날 사랑해 준다는데. 난 그게 하나도 안 느껴져
- ...
- 너랑 만나면 꼭 시리랑 연애하는 것 같아. 내가 해달라는대로 최선을 다해주는데, 감정은 하나도 없는 거. 너 나 왜 만나?
-...
- 이게 그렇게 망설일 질문이야? 개자식
커플링을 던진 채 여자가 사라졌다. 재욱은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럴만도 한 게,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해서 사귀는 게 아니라, 여자가 먼저 재욱에게 호감을 표시해 왔고, 재욱은 그 마음을 받아줬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연애에 소홀하게 대한 적은 없엇다.
어쨌든 이렇게 또 한 번의 만남이 마무리됐다.
아마 지금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이때쯤 질문 하나가 생길 것이다. '그럼 이재욱은 여자를 왜 만나는데?'
그리고 재욱은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 그냥, 허전해서. 누가 내 옆에 있어 줬음 좋겠어.
지금 다들 표정 구겨진 거 안다, 이재욱은 개자식쪽에 더 가깝다.
D. 로맨스를 잘 알지만 연애는 하지 않는 여자 vs 로맨스를 잘 모르지만 연애는 주구장창 하는 남자
<현대사회의 성/사랑> *성,사랑,결혼 아님 주의. 많은 1학년이 성사결 수업인 줄 알고 신청했다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재욱과 제인이 만난 것은 한 교양 수업이었다. 이번 학기에 복학한 재욱은 아주 처참히 '수강신청'에 실패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남은 교양 하나를
수강신청함에 담았다. 학교 커뮤니티를 보니, 해당 강의의 수강평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이거라도 안 잡으면 첫 복학 학기에 13학점 듣게 생겼어요.
(참고. 주한대학교의 한 학기 최대 이수 학점은 20학점이다).
반대로 제인은 수강신청이 시작되자마자, 해당 교양 수업을 1순위로 잡았다. 남들은 교양치고 전공만큼 빡센 교양은 처음이라며, 불평하기 바밨지만 제인은 교수님이 좋았다.
교수님의 교양 강의만 두 번째.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빡센 교양은 맞았으나, 교수님의 강의력/수업 퀄리티 모든 게 좋았다. 그리고 꼬온-대 같지 않는 면도 좋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교양 강의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수업 첫날, 앞자리에 앉은 제인과. 가장 뒷자리에 앉은 재욱이. 수업 시작 20분만에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20대, 꼭 연애를 해야 하는가?>
첫 수업부터 조별토론이라니, 다들 얼굴을 찌푸리며 각자 자리로 모였다.
PPT에 띄워진 오늘의 토론 주제를 보며 재욱과 제인이 차례대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 저는, 뭐 강제할 순 없지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연애는 젊은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하잖아요.
재욱의 말을 듣자마자 제인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여기서도 젊은이들의 특권 어쩌고 하네.
구겨진 제인의 표정을 본 재욱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말을 끝내자마자 저렇게 표정을 찌푸리다니, 처음 보는 무례함이었다.
- 글쎄요, 전 특권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지던데.
연애라는 거 행복하자고 하는 건데. 다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연애 강박처럼요.
- 연애를 의무처럼 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니까 하는 사람이 더 많죠.
- 진짜요?
정말이라는 듯 자신의 물음을 던지는 제인에, 재욱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지만 그토록 모순적일 수가 없었다.
정작 연애를 의무처럼 하고 있는 사람은 본인인데, 사랑하니까 하는 거라니. 하지만 저 무례한 여자에게 괜한 오기가 생겼다.
- 네, 진짜요. 아직 진짜 사랑 안 해 보셨나봐요.
- 네, 안 해봤어요. 앞으로도 당분간은 딱히 할 일 없을 것 같고.
묘한 둘의 신경전에 남은 팀원들이 더 안절부절 못했다. 다행히도, 교수님이 급한 용무가 생겼다며 OT를 부랴부랴 마무리했다. 수업이 끝난 후,
재욱은 사범대로 가는 왼쪽길을. 제인은 사과대로 향하는 오른쪽길로 갈라졌다. 둘은 아마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 재수없네.
그리고 그 재수없는 만남이 앞으로 쭉 계속될 거란 사실은 둘도 몰랐을 거다.
-
아이고, 처음 글을 남겨 보는 거라 그런지 익숙하지가 않네요! ㅠ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다들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