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처음 마주쳤던 그 날, 우리의 낯설고도 미묘하게 익숙한 감정이 흐르던 운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느 낯선 공간 아래 너와 나는 처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췄다. 그 때 우리는 그렇게나 수줍어 했었는데. 지금의 우리는 어디까지 와버린 건지 그 시작은 이미 저 멀리 끝에서 우리를 동정하며 조롱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세월을 훌훌 털어버리련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지금 너에게 간다. 우리, 헤어지자고 말하기 위해. 지난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러니 다시 시작할 수 없을 바에야 끝내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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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고 제대로 된 옷차림을 갖춘다. 마지막이니만큼 그동안의 모습은 전부 잊으라는 나름의 뜻이 들어 있었지만 성규는 달랐다. 성규는 아침부터 늘 그렇듯 행복하게 일어났고 우현을 위해 옷을 몇 번이나 갈아 입었으며 오늘은 양치를 세 번이나 하고 오는 길이였다. 하지만 성규는 모를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세 번 양치한 보람이 없다는 걸. 그리고 매일 같이 타던 버스를 오늘도 탄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은 오늘도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성규는 또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 웃음은 약 10분 후면 싹 가실 것임을. 눈물만이 자신의 곁에서 감싸줄 것임을.
'응, 우현아. 오늘은 왠일이야? 이렇게 말끔한 얼굴로 다 나타나고.'
'할 말이 있어서.'
'에이- 뻥치시네! 오늘 무슨 날이지? 맞지? 그치? 말해봐 남우현-'
'응, 오늘 무슨 날이긴 한데, 좀 안 좋은 날이야.'
'응? 무슨 안 좋은 날? 안 좋은 날인데 왜 이렇게 입고 나왔어!'
'마지막 추억을 좀 쌓아두고 싶어서, 이제 다신 보지 못할테니까.'
'...말하지마 우현아.'
'아니, 말할게.'
'하지마.'
'아니, 오늘이 아니면 평생 못할 지도 모르는 그런 ㅁ..'
'하지말라고! 내가 하지 말라잖아. 하지 말라는데 왜.. 왜. .. .왜!'
'우리 그만하자 김성규.'
'..'
'이제 우리도 그만해야할 때가 온 것 같아.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이별을 미뤘던 것도 3년이 지났어. 우린 이제 서로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우린 그동안 너무 이기적인 삶을 살았어. 남들이 안된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우기면서 된다고 생각해왔고, 남들이 우릴 조롱할 때 서로를 미친 듯 감싸 안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내가 왜 그랬었는지 이해가 안 가. 어차피 우린 끝내야 할 사이라는 걸 시작할 때부터 강조 했었는데 왜 내가 너를 그렇게 감싸 안아야만 했었는지.'
'...우현아.'
'이젠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남우현.'
'부르지 마. 나 이만 갈게. 앞으로 마주칠 일도 별로 없겠다. 혹여나 마주치게 되도 우리 그냥 서로 모른 척 하자.'
'아니, 난 못 해. 내 마음이 어떤지 넌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넌 지금 나를 외면하려ㄱ..'
'아니? 난 늘 외면하고 살지 않아. 다만 네가 현실을 부정하는 것 뿐이지.'
'...뭐?'
'맞잖아. 안 그래? 간다.'
성규는 어쩔 줄 몰라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었고, 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가워진 눈초리로 성규를 흝고는 그대로 카페 안을 빠져 나갔다. 성규는 뒤늦게 절규했고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은 성규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규는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곧 눈물을 훔치고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남우현...'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온통 우현이 있었고 우현의 흔적이 닿지 않았던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성규의 집, 아파트 근처 놀이터 마저도 모두 우현과 함께한 흔적들이였고 성규는 결국 근처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아쉬운 사랑의 흔적은 조각이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은, 이별을 한 후엔 흔적조차 남아서는 안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