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우리반엔 웬일.
지수) 교과서가 없을 일은 없을테고.
정한) 없을리가 없지.
민현) 가는 걸로 해.
정한) 어딜.
지수) 님 생명동아리로 다시 감?
민현) 맞을래? 끔찍한 소리 하고 있어.
제주도 가는 거로 하라고.
정한) ..뭔소리야.
민현) 못봤어? 공금 계좌로 내가 돈 넣어뒀는데.
정한)...부족한 금액을?
지수) 니가?
정한) 그 큰돈을?
지수) 너 진짜 부자새끼구나?
정한) 니가 왜?
민현) 내가 가고싶으니까. 나 다음 음악이라 간다.
아, 비행기표 지금 예매해, 금액 올라.
민현이 반을 빠져나가고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지수와 정한이었다. 정한이 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어 은행 어플을 켰고, 지수가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바라봤다. 지문인식을 한 뒤 잔액조회를 하자 지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oh my god.
정한) 미친놈.
지수) 제주도가 그렇게 가고싶었나.
잔액조회
3,775,000원
승관) 파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하고호~
명호) ...시험 잘봤어?
승관) 그럴리가. 내 점수 보고 이번 시험은 50점 만점인가 싶었잖아.
찬) 너도? 나도 ㅋㅋㅋㅋㅋㅋ
한솔) 뭘 새삼스레. 중간고사 때도 50점 만점이냐고 그랬으면서.
기말고사 마지막 날 마지막 시험까지 끝마치고 나온 2반 아이들이 들뜬 채 복도를 거닐었고, 승관은 곧 다가오는 여름방학 휴가에 신이난듯 한껏 빵댕이를 흔들어댔다.
마지막 시험 날 까지 푹 잠을 잔 민규와 행동이 느린 여주 덕에 느릿하게 반을 나선 5반 아이들이 그런 2반애들을 마주치고, 석민이 승관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석민) 야 보기 흉해!!ㅋㅋㅋㅋㅋ 왜이렇게 방댕이를 흔들어 대!!!
승관) 야 짜씍아! 우리 이제 비행기 타고 주제주제주도 가잖아아-!
석민) 아 맞지 맞지!!!!! 혼자왔수꽈?!!?
승관) 어서옵서예!!!!!!으하하!!!!
민규)...두고가자.
명호) 그래.
여주) 근데 시험 끝나고 안노니까 뭔가 어색하네.
한솔) 그러게. 가기전까지 돈 아껴야 된다고 모임 전날까진 안만난다니. 신기해.
여주) 우리 동아리 실에서라도 있다갈까? 뭔가 아쉬워서.
찬) 그럴래? 우리가서 보드게임 하자.
명호) 좋아.
시끄럽게 떠드는 석민과 승관을 뒤로한 채 아이들이 방향을 틀었고, 아이들이 거의 멀어져 갈 때 즈음 석민과 승관이 어디가!!! 같이가!!! 하고 외치며 뒤를 따랐다.
아 같이가자고!!!!!
여주) ...뭐야.
원우) ..하이.
여주가 동아리 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건 소파에 앉아 닌텐도를 하고 있는 원우와, 티비 밑 러그에 담요를 덮고 잠에 빠진 순영, 그리고 원우 맞은 편 소파에 누워 자고있는 지훈이었다. 잠든 둘에 여주가 뒤를 돌아 산만한 아이들에게 쉬이-.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고, 그 행동을 따라하던 석민부터 끝에 있는 민규까지 동아리 실로 발을 들였다.
소파를 하나 다 차지한 채 잠에 든 지훈에, 몇몇 아이들이 방석을 가져와 소파 주위에 앉았고 몇몇은 노트북이 놓여진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았다. 원우 옆에 앉은 민규는 원우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민규) 왜 왔어?
원우) 애들이 졸리대서.
여주) 나머지 오빠들은?
원우) 최승철은 입시학원갔고, 문준휘는 혼자 집갔어. 3반애들이랑 민현이는 모르겠네.
아마 윤정한은 휴가 준비때문에 바쁠걸. 홍지수는 그거 도와주고 있을거고. 황민현은.. 시험 끝났으니까 끌려갔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원우에 민규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팔짱을 끼더니 곧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나도 좀 잘게.
승관) 여주야 부루마블 낄래?
석민) 나랑 팀하자! 부승관이랑 명호랑 팀한대.
여주) 난 빼줘, 조금만 쉴게.
석민) 그래. 최한솔! 부루마블 하자!
한솔) 오케-.
여주가 석민에게 말하고서 원우의 게임기를 들여다 봤다. 지훈과 순영의 취침에 부루마블 하는 아이들이 거진 음소거 수준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만함은 가려지지 못했다. 거진 사십분 가량이 흐르고 햇빛이 은은하게 비춰지자 더움을 느낀 석민이 선선하게 에어컨을 틀었고,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서 이것 저것 파일들을 살폈다.
“........”
여러 파일을 뽑았다 집어넣었다를 반복하다가 원하던걸 발견한 여주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뒤 다시금 책장에 꽂아넣고, 시험지 밖에 든게 없는 가벼운 제 가방을 들고 조용히 동아리 실을 빠져나갔다. 잠에 든 민규와 게임에 정신 팔린 석민의 휴대폰에 여주의 메시지가 짧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나 어디좀 들렀다가 갈게. 먼저 집에 가. -여주학
7월 초, 핑크빛 벚꽃이 지고 초록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무성한 시기였다. 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동복 체육복 겉옷을 입은 여주는 누가봐도 더워보였고, 스스로도 더움을 잘 알고있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꽤 먼 곳에 내린 여주가 휴대폰을 쳐다보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여주) 부자라더니, 진짠가보네.
교 주변 아파트들과는 차원이 다른 동네였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던 부잣집 주택가였다. 신기함에 이리저리 둘러보던 여주가 여러번 길을 헤매고, 이마에 땀이 맺힐 때 즈음 여주가 자신보다 훨씬 큰 검은 대문 앞에 멈춰섰다. 명패에 적힌 주소와 제 휴대폰을 번갈아보던 여주가 곧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여주) 여기구나.
휴대폰을 끄고 제 윗옷 주머니에 넣은 여주가 대문 사이사이로 고개를 기웃거렸고, 푸른 마당밖에 보이지 않자 담벼락에 쪼그려 앉았다. 손목시계가 한시 반을 가리키고, 여주는 제 무릎에 얼굴을 기대더니 멍하니 길가를 바라봤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정한) 무슨 생각으로 이 큰 돈을 보냈어?
지수) 부잔거 자랑해?
민현) 그렇다 치자. 자랑했다고 쳐.
정한) 야.
민현) 가고싶다고, 제주도.
정한) 너만 가고싶어? 우리도 가고싶어. 근데 이 돈 어디서 구했냐고.
민현) 용돈으로 탄거야. 불쌍한 척 좀 했어.
지수) 널 팔았어?
민현) 전혀.
정한) 진짜 써도 되는거야?
민현) 그럼. 그거로 예산 다 짜.
카페에 모여 앉은 셋의 대화 주제는 다름아닌 민현이 어디서 돈을 구해왔냐는 것이었다. 우회적인 추궁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 앎에도 불구하고 민현은 웃는 낯짝을 한 채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를 아는 지 적당히 묻다가, 아 몰라. 니가 준거니까 우린 그냥 쓴다. 하고 볼펜을 딸깍 거렸다.
민현) 비행기는 예매 했어?
정한) 했어. 방학식이 7월 9일이고, 자꾸 빨리가자는 부승관 재촉에 7월14-15일.
민현) 몇시 비행기?
정한) 아침 7시 45분. 도착해서 짐 풀고, 뭐하고 하다보면 열시 될거니까 아침먹고, 아쿠아리움 조랑 바닷가 조, 승마 조 따로 움직일건데.. 애들은 다 정했지?
지수) 어. 1학년 2반애들은 바닷가가고 5반애들은 아쿠아리움. 1반애들은 승마 2반애들도 승마. 우리 셋만 정하면 돼. 참고로 난 바닷가.
정한) 난 아쿠아리움, 그럼 황민현 승마로.
민현) 아 왜. 나 아쿠아리움 가고싶어. 제주도 아쿠아리움 엄처 예쁘대.
정한) 아 다섯 다섯 다섯으로 맞추려면 너도 아쿠아리움 가야겠다. 됐어, 그럼 이렇게 하고 마지막 날엔 자유시간이지?
지수) 어. 근데 식당은?
정한) 그건 다 승관이가 정리해오기로 했어. 걔가 주변 맛집을 다 안다나 뭐라나.
그럼 일단 예산을 짜보면 아쿠아리움 입장권이 31000원인데 할인가를 붙여서-...
정한의 주도하에 아이들이 펜대를 굴려대며 예산을 짜고, 옆에 자리한 음료수는 줄지 않았다. 지수와 정한이 한창 대화를 나눌 때 귀기울여 듣던 민현이 반짝 빛나는 제 휴대폰 화면에 느릿하게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본 순간 카페에 에어컨 바람이 시원함에서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집에 왜 안오니. 시험지 가지고 서재로 와.’
민현) 부른다.
지수) 뭘. 너 뭐 시켰어?
정한) 케이크 시켰냐?
지수) 캐롯 케잌? 그거 맛있어 보이던데.
민현) 서재에서 부른다.
정한) ..몇개 틀렸는데.
민현) 한 과목당 다섯개씩 틀렸지.
지수) 미친놈 계산해서 틀리는거봐, 겁나 얄미워.
정한) 동아리는.
민현) 동아리는 아직 몰라.
지수) 오늘의 무기는?
민현) 아마 재떨이 그 이상? 야 나 어떡하냐, 다리 부러져서 제주도 못가는거 아냐?
정한) 개소리하지마. 근데 부러져도 수영 할 수 있지 않아?
지수) 할 수 있을걸? 너 물에 뜰 순 있지?
민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한) 아 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셋이 펜을 집어 던지고 한참을 웃더니 민현이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야,
정한) 왜.
지수) 아 나 배아파. 너무 웃었어.
민현) 같이 가주라.
지수).......
정한).......
지수) ....너 여동생이 있었나?
민현) 무슨소리야. 형 밖에 없는데.
지수) 그럼 저건 뭐지.
민현) 누구-...뭐야?
정한) 어, 잠깐만 저거 여주 아냐?
언덕을 올라오던 셋이 민현의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주를 발견했고, 셋은 발걸음을 재촉해 여주 앞에 섰다. 네시 반을 향해 달려가는 시각,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에 졸린 듯 눈을 감고 있던 여주가 인기척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맞물린 시선에 여주가 멍청하게 탄식을 뱉어내고, 일어나려다 다리가 저린 듯 다시금 주저 앉으며 머쩍게 웃어보였다.
여주) 왜 같이와? 같이 있었어?
정한) 너 왜 여깄어?
여주) 난 또, 끌려간 줄 알고..
지수) 민현이 네 집은 또 어떻게 알고.
여주) 동아리 개인 정보 서류에 손 좀 댔어. 미안해.
민현) ...왜 왔는데?
여주)아,
원우오빠가 오빠 끌려갔을지도 모른대서. 나 여기 좀만 앉아있다 갈게. 다리가 저리네. 헿
민현).. 끌려가긴 뭘 끌려가. 별소릴 다했네, 애한테.
정한) 반은 맞지. 문자 받고 지금 왔으니까. 들어가봐.
민현) 데려다 줘서 고맙다.
정한) 데려다 준 거 아닌데?
민현) 그럼 뭐야?
정한) 너랑 저녁 먹을거야. 다 혼나고 나와. 밥먹게.
민현) ..그럼 기도해.
나 다리 하나도 부러지지 말라고. 간다.
씁쓸한 웃음을 보인 채 민현이 들어가고, 화려한 정원 사이에 처량한 민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정한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통해보였다. 금새 표정을 지워낸 정한이 여주 옆에 쪼그려 앉고, 지수도 그 옆에 앉았다. 하얀 담벼락에 셋이 나란히 기대 앉아있는 그림이 퍽 웃겼다.
정한) 걱정돼서 온거야?
여주) ..그렇지, 뭐. 근데 오빠들 있으니까 나 가도 되겠다.
정한) 어딜. 개인정보도 마음대로 열람하고.
여주) ...그건,
지수) 저녁이나 같이 먹고 들어가자. 민현이가 사줄거야.
정한) 우리가 이렇게 친히 데려다줬는데, 밥은 지가 사겠지. 밥 먹고 가, 여주야.
여주) .....그래.
어느덧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붉은 노을 빛이 셋을 비췄다. 여주가 피곤함에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고, 지수는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금새 잠이 든 지수가 여주의 머리 위에 제 머리를 기대고, 정한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주야,
여주) ..응?
정한) 내가 널 왜 동아리에 들였는 지 알아?
여주) ...급식실에서-,
정한) 그거 아니야.
정한의 말에 여주가 눈을 느리게 두어번 깜박거리다, 정한을 바라보려했고 곧 제 머리에 지수가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몸을 고정시켰다. 정한은 여전히 공허한 눈을 한 채 손장난을 치며 입을 열었다.
정한) 우리 누나랑 닮아서.
여주) ..내가?
정한) 응.
여주) 얼굴이?
정한) 처음엔 얼굴이 닮아서 눈이 갔지.
사실 그 날 주머니에 세탁비 있었는데 안줬어. 또 보고싶어서.
정한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여주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집에 가서 누나 보면 되지, 굳이 닮은 나를..
정한) 집엔 누나가 없거든.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우리 누나가 고등학교 3학년 이었는데 그 때 자살했어.
여주) .......
정한의 말에 여주의 입꼬리가 완전히 내려가고, 곧 어쩔 줄 모르는 듯 눈을 여러번 깜박거렸다. 숨막힌다기보다 조금은 어려운 정적이 공간을 채우고, 바람에 잎사귀들이 부딪혀 옅은 소리들을 만들어냈다. 정한은 목이 메이는 듯 침을 여러번 삼키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한) 근데 널 보니까 우리누나를 너무 닮은거야. 아, 또 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생각하다가 신발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신발 받으러 가려 그랬는데, 네가 딱 동아리 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거야.
엄청 놀랐다? 여자애들 안받는데 너만 받은 이유가 사실 누나를 닮아서였어. 미안해서이기도 했지만, 그걸 이유로 하긴 너무 사소하지. 세탁비만 물어주면 되는걸.
근데 들이고 나서 보니까 우리 누나를 더 닮은거야, 하는 행동이. 지수랑 원우가 너 보고 윤정한이 좋아 할 만 하다고 말한 적 있지? 그거 다 너 하는 행동이 우리 누나 닮아서 그랬던거야. 남들 모르게 시리얼을 사다두질 않나, 운동회 즐기지도 못하는 애를 즐기게 해주지를 않나. 잠든 사람 있으면 조용히 담요 덮어주고.
너 나 자는 줄 알고 담요 덮어줬었지? 그 때 이미 민규랑 승관이 싸우는 소리에 다깼었어. 그냥 눈 감고 있던 건데, 네가 딱 담요 덮어주더라. 우리 누나가 나 책상에서 잠들면 그렇게 담요 덮어주고 가고 그랬는데.
너 민현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며. 어린 애 달래는 건 쉬운데, 어른 애 달래는 건 모르겠다고, 가끔 질 때도 있는 거 아니냐고, 사람인데. 민현이가 그 얘기 듣고 많이 변하고 있어. 비록 자기가 엄청 다치고 있지만.
항상 너한테 고마운게 많아. 특히 민현이한테 하는 행동들이. 우리 누나도 민현이 처럼 부모님한테 시달리다가 자살했거든. 그래서 민현이를 나는 놓을 수 가 없는데,
네가 민현이를 살리고 있어.
..우리 누나도, 옆에 네가 있었더라면,
아직 내 옆에 있을까, 싶어.
정한이 마지막으로 말하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회색 빛 도로에 정한이 흘린 눈물자국이 짙게 물들여지고, 여주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덧 노을이 다 지고 대문 앞 주변 가로등이 탁, 탁 순번에 맞게 켜졌다. 저녁이었다. 지수도 잠에서 깬 듯 했지만 여전히 여주의 머리에 제 머리를 댄 채 정한의 옅은 흐느낌을 들으며 울음을 삼켰다. 여주가 적잖게 침을 삼키다가 입을 열었다.
여주) ..옆에 있으면 무슨 말이 가장 듣고싶어?
정한).........
글쎄,
정한이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제 손등으로 눈을 박박 닦더니 고개를 들어 누렇게 빛을 내고 있는 가로등을 쳐다봤다. 조금은 긴 정적이었다.
정한) 그냥, 나 안보고 싶냐고 물어보고 싶네.
혼자 먼저가서 좋냐고. 왜 치사하게 나만 남겨두고 갔냐고. 잘 지내냐고, 보고싶다고.
정한이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고, 이번엔 더 짙고 크게 울었다.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고, 여주의 눈엔 어느덧 눈물이 차올랐다. 떨리는 목소리로 여주가 정한을 향해 입을 열자 동시에 여주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epilogue
2017년 9월 29일|
“.........”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교복을 정갈하게 입은 채 제 누나 납골당 앞에 서있었다. 그만가서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말은 듣는 채도 하지 않고, 모두가 납골당을 빠져나간 순간에도 정한은 우두커니 서서 유리관 속 제 누나의 사진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앙물었고, 두 눈망울엔 물기가 가득했다. 곧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부모님이 죽였다.
엄마가 죽였고, 아빠가 죽였다. 하나 뿐인 내 누나를 죽였다.
제겐 한 없이 따듯하고, 좋은 말만 하고, 사소한 걸 챙길 줄 아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다. 신은 아무래도 없나보다. 착한 사람만 자꾸 데려가는 것 같다. 이제 밤마다 공부에 시달리는 나에게 쉬면서 하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다. 이제 그정도면 잘한거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
..이젠 내 편이 없다.
미련이 남을까봐 였을까. 누나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고 눈물자국이 얼굴을 가득 채울 때 즈음 누나와의 마지막 대화를 곱씹어보니, 아마 그게 유서였나 싶다.
‘정한아 벌써 가을이다.’
‘..그러게. 이맘때면 별 엄청 잘보이는데.’
‘그치. 우리 작년에 별 보러 갔었잖아.’
‘맞아, 뒷산에. 다음엔 천문대가서 구경하자. 누나 수능 끝나고 다음 해에.’
‘..정한아,’
‘응.’
‘넌 맨 눈으로 하늘 봐도 무슨 별인지 다 맞추잖아.’
‘그치, 하도 많이 봐서.’
‘나중에 내 별도 맞춰봐.’
‘누나 별 있어?’
‘아니, 아직. 근데 아마 넌 금방 찾을걸?’
‘..그래?’
‘정한아.’
‘나 수능이 너무 보기 싫어. 어떡하지?’
‘.........’
‘쉬면서 해, 갈게.’
‘..응, 누나도 쉬면서 해.’
별이 된다는 말을 멍청하게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누나가 사소한 것 마저 알아차리는 반면에 나는 참 무지했다. 수능을 보기 싫다는게 평소와 다른 의미인 줄 몰랐다. 그게 이런 건 줄은 몰랐다.
몸과 마음에 피멍을 가득 안고서 떠났다.
정한) 일단 좀 닦았어. 내가 수업 끝나고 종례시간에 내려갈게. 이름이 뭐야?
정한) 아냐!
정한) 여주는 받아.
**
정한이의 스토리가 풀렸네용. 제가 제일 싫어하는 화요일입니다. 내일은 오일의 중심 수요일이져. 다들 피곤하실텐데 푹 쉬시고 예쁜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