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시선은 민석에게 고정 한 채로, 루한은 민석을 잡아끌어 매점으로 향했다. 빵과 우유를 한 가득 사 민석의 품으로 던져 준 루한은,민석을 의자에 앉히고 다시 민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담스러운 그 시선에 민석은 괜히 머리를 만지며 이쪽 저쪽으로 시선을 피했다.
"김민석"
저를 부르는 나긋한 목소리에 민석은 시선을 들어 루한을 바라봤다. 루한의 표정은, 마치 다섯 살 난 아이가 사탕을 뺏긴 듯 잔뜩 심통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왜. 너……."
할 듯 말듯, 입술만 달싹이던 루한은 곧 고개를 두어 번 휘젓더니 다시 얼굴 가득 그 나른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변화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민석은 먹으라며 우유를 뜯어 제 앞으로 내미는 루한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루한은 그저 멍하니 바라 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민] 봄은 있었다.
C
w. 르망
그렇게 루한의 알수 없는 행동은 그로부터 쭉 계속되었다. 입시를 위해 밤 늦도록 학원에서 날을 지새어 아침이면 비몽사몽 제 몸을 가눌 힘 조차 없이 졸리워 하는 민석의 책상위엔 매일 아침 대용의 빵과 우유가 올려 져 있었다. 나는 피자빵이 좋아, 하고 지나가듯 얘기 한 취향을 100% 반영하여. 그리고 매 아침, 그 곁에선 루한이 민석이 빵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점점 민석의 주변은 잠잠 해 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민석이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언제나와 같이 민석은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왔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운동장을 열 바퀴 돌아야 할 뻔 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고르며 시선을 떨구었을 때. 민석은 제 책상위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의 내용을 확인 한 민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굳어가기 시작했다. 한 장의 종이 속에는 사내 둘이서 난잡하게 얽혀있는 그림이 적나라케 나와 있었고, 빨간 매직으로 그어 진 문구는 민석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게이새끼]
종이를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 한 채 민석은 하얗게 굳을 얼굴을 하고 숨 쉬운 것조차 잊어버린 듯 작게 몸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이걸 어쩌면. 나는, 나를. 복잡한 머릿속이 상황을 이해하려 급하게 돌아갔다. 주위에서 민석을 향한 웃음소리가, 민석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민석의 시선은 불안하게 이리 저리 굴러갔고 당황과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간헐적으로 숨을 내 쉴 뿐이었다.
“김민석, 김민석!”
민석은 토해내듯 숨을 내쉬었다. 눈물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민석은 몸을 일으켜 절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종인을 바라보았다. 집이었다. 민석은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괜찮아 진 것 같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 기억은 제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뭐?”
“돌아가고 싶어.”
민석은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댔다, 종인은 부엌으로 가 냉수를 한 컵 떠와 아직 멍하게 앉아 몸을 웅크린 민석의 손에 쥐어 줬다.
“먹고 정신 좀 차려라, 전화해서 비 맞은 개새끼마냥 낑낑대다 뚝 끊으면 어떡하냐, 사람 걱정 시키는것도 정도가 있지.”
그제야 민석은 멍하니 생각을 되짚었다. 루한의 집 앞에서 도망치듯 뛰어 나온 것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지, 이렇게 가다가는 조만간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민석은 그제야 늘 종인과 세트로 붙어 다니던 경수가 보이지 않는다는걸 생각 해 냈다.
“도경수는?”
“죽 사러갔다.”
“죽?”
민석이 의아한 눈으로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종인은 한심하다는 듯 민석의 머리를 툭 치고는 대답했다.
“니가 전화 와서 질질 짜다가 뚝 끊어서 얼마나 놀랬는지 아냐, 그대로 바로 도경수 들고 왔더만 땀에 눈물 범벅을 해선 자고 있고, 도경수가 너 일어나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죽 사러갔다. 야, 아무리 봐도 존나 예쁘지 않냐?”
제 걱정으로 시작해 애인 자랑으로 끝이 나는 김종인의 특이한 화법에 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고맙네. 건성으로 대답 한 민석의 머릿속은 다시 루한으로 가득 차올랐다. 얼마나 지났더라, 민석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하나, 둘, 셋. 4년은 지난 것 같다, 루한을 못 본 지. 4년 만에 제 앞에 나타난 루한은, 아이와 여자. 결혼, 결혼…….
‘루한, 너는 결혼 할 거야?’
‘아니, 안 할 건데.’
‘왜, 너 닮은 아이랑 토끼 같은 마누라. 그게 꿈이라며’
‘글쎄, 왜 안 할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민석을 조여 왔다. 눈물이 날 듯 코가 시큰거렸다, 다 거짓말, 아이가 루한을 꼭 빼 닮은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거기까지 생각 했을 무렵, 요란하게 문이 열리고 동그란 머리통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민석형, 일어났네, 왜 아픈데 혼자 끙끙 앓아요!”
경수는 가쁜 숨을 내 쉬며 아직 따듯한 죽 통을 내밀었다. 민석의 일이라면 물 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경수가 고마웠다, 민석이 아프다고 헐레벌떡 뛰어 다녀왔을 경수를 생각하니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숨을 가쁘게 내 쉬는 경수의 곁에 종인이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제 애인이라고 챙기기는 더럽게 챙겨요. 입을 삐죽이던 민석이 죽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맛있네, 고마워 도경수.”
“뭘 이런 걸로, 말만 해요 형, 내가 다 해 줄수 있다니까?”
자랑스레 웃으며 제 가슴팍을 툭툭 치는 경수를 보며 민석은 힘없이 웃었다.
“경수야,”
“예?”
“진짜 다 해 줄수 있어?”
경수는 의아한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왜요 뭐 필요한거 있어요 형?”
“어, 아. 아니야.”
민석은 웃으며 다시 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수는 그런 민석을 바라보다 종인이 건네주는 물 컵을 받아들며 종인에게 짧게 입 맞추었다. 힐끗 그들을 훔쳐보던 민석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한 마디를 꾸역꾸역 죽과 함께 속으로 집어삼켰다.
경수야, 루한 좀 데려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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