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자살시도를 했다.
듣기로는 손목을 그었다고 했다. 새벽녘에 홀로 욕실에 앉아 과도로 손목을 그었다고. 다행히도 그녀는 그녀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가정부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피가 번지는 손목이 따스한 물에 조금만 더 방치되었더라면 위험할 수 있었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집 안에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모두들 지은이 자살시도를 한 이유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은의 자살시도도, 처남과 매형과의 불순한 관계도, 용서받지 못할 단 하룻밤도, 모든 비밀들이 위태로운 모래성에 묻혔다. 비밀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희생이 따랐다. 그 희생의 방향성은 안타깝게도 윤기를 겨냥하고 말았다.
지민은 패닉에 휩싸였다. 누나의 자살소동으로 눈을 떴을 때, 윤기가 보이지 않는 것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연히 누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으리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매형이자 누나의 남편이었으니까. 지민에게도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은 있어 그저 누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근데 아침까지, 심지어 점심을 먹을 때까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화를 해도 그는 받지 않았다. 오히려 없는 번호라는 수신음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피하고 싶었던 사실이 명확해지고 말았다.
그가 사라졌다.
지민은 그 길로 은순에게 달려갔다. 은순은 막 지은이 입원해있는 병원에서 돌아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있었다. 다급하게 자신을 찾는 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나머지, 은순은 지민이 가해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지은의 어미이자 지민의 어미였기에. 우리 아들 왜 그래? 그녀는 손을 뻗어 이마에 달린 식은땀을 닦았다.
“엄마. 아저씨 어디에 있어?”
넋 나간 얼굴로 윤기부터 찾는 지민에 은순의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그게 할 말이야? 그녀가 따지듯 되 물었으나 지민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그가 덧없이 말을 이었다.
“응? 어디 갔어? 연락이 안 돼. 핸드폰 번호는 왜 바꾸게 했어? 아저씨 어디 있어? 어디로 보냈어?”
짜악. 커다란 마찰음이 방을 울렸다. 은순이 지민의 뺨을 거칠게 쳐올렸다. 분노에 사로잡힌 눈이 형형했다. 그녀가 소리쳤다.
“너 진짜 미쳤니? 네 누나 자살시도 했어, 그 더러운 짓 때문에! 너 내 아들이기 이전에 지은이 동생이야. 넌 누나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도 없어? 미안하지도 않아?!”
“나도 죽어. 엄마. 나도 아저씨 없으면 죽는다고. 죽고 싶어 미쳐버리겠다고!”
되돌아오는 대답에 은순이 멍한 얼굴을 했다. 사춘기 시절에도 속 한번 썩이지 않던 착한 아들에게서 악다구니를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지민은 계속해서 악을 썼다. 새빨갛게 질린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누나한텐 미안해. 죽어도 할 말 없어. 근데 나 못 견디겠어. 차라리 내가 정신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했을 때 데려가서 가두지 그랬어. 그때 그랬으면 안 이랬을 거 아냐. 아예 싹도 틔우지 못하게 잘라버리지 그랬어!”
그가 주저앉았다. 온 몸이 흐물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숨이 메였다.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지민은 무릎을 꿇은 채로 은순을 향해 싹싹 빌었다. 넋이 나간 얼굴이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지금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실제로 그는 이미,
“엄마. 나 아저씨 진짜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랑해. 안보이면 불안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
사랑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그러니까 제발 나랑 아저씨 떼어 놓지 마. 제발. 엄마. 내가 잘못했어. 아저씨 보게 해줘. 데려와.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이렇게 빌게. 엄마….”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下
w. 모나모
#6.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인터뷰로 시작을 알린 공연은 예술의 전당에서 총 삼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공연은 지금껏 대중성이 없었던 현대무용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파를 끌어들였다. 그 중 반은 티비에서 본 [천재 고등학생]이라 포장된 지민을 보기 위해서였고, 나머지 반은 공연의 관객 중 유명인사가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삼일 간의 공연이 전석 매진되었다는 건 대한민국의 현대 무용 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많은 예술계 잡지에서 이 일을 칼럼으로 싣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지민을 찾았다. 신예를 뛰어넘어, 그 ‘무언가’가 되어 있을 지민을 만나기 위해.
“아, 제발.”
지민은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다. 살갗이 둘러진 뼈가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음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똑. 똑-, 똑 하는 불규칙성이 공간을 울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귀를 덮으며 일어났다.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책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툭. 하며 울리는 소리가 소음으로 엮어들었다.
젠장 할. 욕지기와 함께 지민이 입술을 잡아 뜯었다. 새하얀 이가 예민한 살갗을 파고든다. 입술 위로 작게 핏기가 맺혔다. 현기증이 났다. 구토감이 몰렸다. 심장이 쿵쿵 뛴다. 그 순간 문 밖으로 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민의 목을 졸랐다. ‘지민씨, 안에 계시면 시간 좀 내주시지 않겠어요?’
“안 하겠다고 했잖아!”
지민이 끝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수많은 물건들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그것을 무작위로 집어 들어 던졌다. 많은 물건들이 문에 부딪히며 추락했다. 그 중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날카로운 소음이다. 유리컵이 제 형태를 잃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민아! 너 왜 그래!”
바깥의 소음을 들은 은순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순의 뒤로 많은 기자들이 서 있었다. 그 무수한 눈들과 눈이 마주쳤다. 번들거리는 시선이 난잡했다. 지민은 몸을 웅크린 채 소릴 질렀다. 엄마, 빨리 문 닫아. 빨리. 제발, 빨리!
문을 닫고 들어 온 은순이 다급한 손길로 지민의 얼굴을 쓸었다. 작은 얼굴에 핏기가 가셔있었다. 최근 그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갇혀 살기를 자처한 것처럼 독방에서 춤만 췄다. 은순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아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엄마. 내가 지민이 사랑하는 거 알지.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내가 맨날 안고 다니면서 동네에 자랑했었잖아. 그 애는 타고나길 사랑스럽게 태어났으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다면서. 엄마. 나는 항상 그 애한테서 누나 이상이고 싶었어. 그 앨 위해서라면 팔 한 짝을 내 줄 수 있을 정도로 그 앨 사랑했어. 근데, 엄마. 나, 지금은. 지금은 그 앨 용서할 수 가 없어. 용서가 안 돼…. 그 앤 여전히 내 사랑스러운 남동생인데. 용서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엄마.
어느 날 지은이 오열하며 그 말을 꺼냈을 때, 은순은 그 이후로 윤기와 지민을 떨어트려 놓았다. 은순이 일방적으로 끊어버리자 지민으로써는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연락할 수 있는 방도가 사라졌음은 물론, 그는 윤기가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너지려는 지민을 붙잡았던 것은 은순의 마지막 조건이다. 지민의 공연 날이 되면 윤기를 보게 해주겠다는.
그것에 지민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잠이 오질 않아 수면제를 삼키던 새벽에도, 연습에 지쳐 바닥에 등을 붙이고 헐떡이던 그 순간에도, 윤기의 냄새가 남아있는 그의 베개를 몰래 껴안고 자기 위안을 하던 순간에도, 홀로 레몬에이드를 시킨 채 앉아있던 카페에서도, 머릿속이 붕괴되기 직전일 지금 이 순간 마저. 그는 부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었다.
“엄마. 아저씨랑 통화하게 해줘.”
모든 순간의 끝엔 그가 존재했으니까. 꼭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붙잡았으니까. 지민이 느리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약속했잖아.”
갈라지는 목소리가 추했다. 은순은 지민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리곤 허겁지겁 전화를 거는 아들의 모습을 보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방을 나서버렸다.
“아저씨!”
윤기는 생각보다 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지민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곤 지레 놀라 입을 닫았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전달됐다. 그것에 윤기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넌 어느 순간이든지 귀엽구나. 낮게 웃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민은 그것에도 조바심이 났다. 목 안이 들끓었다. 그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저씨. 오늘부터 저 공연 시작되는 거 알죠.”
-응. 알아. 근데 오늘은 애매해서. 내일부터 갈게.
순간 손톱을 물어뜯던 이가 빗나가 살을 깨물었다. 핏물이 입으로 스몄다.
“오늘 오면 안돼요? 오늘 와요. 제발요. 나 사랑하죠. 아저씨. 나 사랑하잖아요. 오늘 와줘요. 애매한 일이 뭔데요? 누나 때문에 그래요? 아저씨. 나 너무….”
-아…, 지민아.
되돌아오는 윤기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혹여나 제가 한 말이 윤기를 숨 막히게 하지는 않았을까. 덜컥 겁이 난 나머지, 지민이 순간 숨을 참았다.
-방금 너랑 섹스하고 싶었어.
이어지는 문장이 문맥을 벗어나 있었으나, 그 색채가 지독히도 달콤했다. 지민은 그것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화장을 한 얼굴이 곧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해소할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 울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 갈게. 그러니까 울지 마.
자신을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에 지민이 고갤 끄덕였다.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핸드폰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고갤 젖혀 액정에 입을 묻었다. 유리의 맛이 짭조름했다. 수화기 너머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끊은 것은 아니니, 분명 그도 나와 같이 입 맞추고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만으로 뒷목이 뻐근해졌다. 황홀함에 목이 죄였다.
-나중에 보자.
지민은 젖은 눈을 감은 채, 한참동안 흐느꼈다.
#7.
“너 얼굴이 왜 그래!”
메이크업을 해주던 스텝이 경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지민의 얼굴을 닦아냈다.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되었던 터라, 수정 메이크업은 처음 받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메이크업은 장장 두 시간여 만에 끝났다. 지민은 장시간 앉아 있느라고 굳어졌던 몸을 풀었다. 어느 덧 공연이 시작되기 삼십분 전이었다. 아저씨는 지금 어디쯤일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 뒤편은 항상 시끄러웠다. 일말과 긴장과 기대가 물들어있는 공간. 그것이 기분 나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했다.
“지민아!”
그때 누군가가 지민을 찾았다. 메이크업을 해주던 스텝이었다. 그녀는 낯익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다. 무슨 일이에요? 지민의 물음에, 그녀가 사색에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민아. 윤기씨가 오…… 길에 ……사…로 ….”
허나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지민은 잠깐 고갤 갸웃대다 이내 등을 돌려 무대에 올랐다. 장막이 걷혀지며 공연이 시작됨을 알렸다. 눈부신 빛이 그를 환영했다.
#8.
피나 바우쉬의 대표작. 마주르카 포고는 짧게 빛나다 스러지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삶에 있어 가장 빛나는 순간들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순간들이 엮이어 순식간에 사라진다. 젊음은 색이 바래고, 아름다운 여인을 벌거숭이 노인으로 만들며, 찬란했던 꽃은 새까맣게 져버린다. 허나 이것이 삶의 허무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라짐을 긍정하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찬가다. 기쁨이면서 슬픔인 삶의 모순점을 구별해내지 못하는 덧없음에 대한.
사실상 오늘의 공연은 마주르카 포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마주르카 포고가 끝난 뒤 이어지는, 아주 짧은 무대를 위한 것이었다. 피나 바우쉬는 인터뷰에서 이 무대를 ‘한국을 소재로 만든’ 공연이라 언급했다. 사실 이 무대를 ‘지민을 소재로 만든’ 공연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내한을 결정하기 한 달 전, 그녀는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울 때 와인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협탁 위에 두곤 했던 와인을 찾으러 일어났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서 지민이 잡혔다. 그는 베토벤의 비창 2악장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무용을 창작하기에 앞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박자’의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무용가들이 감정과 기교를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선, 그만큼 부드럽게 움직이는 육체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무용가들의 가치는 ‘박자’를 몸에 지니고 있느냐로 판가름되기도 했다. 다행이도 지민은 춤에 있어서 선택받은 쪽이었다. 마치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났다는 수식어를 가질 정도로.
그때 그녀는 내한을 결심했다. 그리곤 춤을 마친 지민에게 덧붙였다. 방금 네가 춘 춤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일 거야. 이름도 곧바로 생각났어. 찬란하지만 아직은 미완의 단계였으니까. rough cut.
지민의 즉흥적인 춤으로 시작된 rough cut은, 지민의 독무로 그 시작을 알렸다. 다른 무용수들의 춤이 끝나고, 지민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무작정 무대를 가로질러 달렸다. 서 있는 사람들의 품에 안겼다가, 다시 벗어나 다른 이의 품에 안기는 것을 반복했다. 누군가에겐 사랑을 속삭이고, 누군가에겐 절망을 속삭이듯이. 애절한 소녀의 얼굴로, 또는 거리의 창녀의 얼굴을 한 채.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지민이 불현 듯 몸을 돌렸다. 무대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황량한 공간에는 지민과 중앙에 놓인 의자 뿐. 그가 몸을 돌려 무대의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에 놓인 의자를 집어 던졌다. 의자는 다리 한쪽이 부러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민은 그런 의자를 끌어안았다. 추모하듯 등을 구부린 자세가 숭고했다.
이것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허나 지민은 그때 객석에 앉아있던 윤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지민을 향해 입 모양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묻혔던 탓에 그 윤곽이 희미했다. 지민은 그를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욕구에 몸을 일으켰다. 예정에 없는 행동이다. 분명히 질타가 들어올 것이 빤했다. 그럼에도 지민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윤기와의 거리가 최대한으로 좁혀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지민아.
아. 그 순간 지민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9.
“오늘 너는 걸작이었어!”
피나가 무대를 마친 지민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곧이어 부드러운 볼에 그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Das war das Beste, was ich bisher gesehen habe!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최고였어! 평소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고양된 목소리다. 지민은 그런 그녀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Vielen Dank.
그는 쏟아지는 찬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각종 미사여구들이 마치 이 순간의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완벽했어. 아름다웠어. 질투심이 날 정도로 최고였어. 아저씨도 내게 이러한 찬사를 보내줄까. 지민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쓸었다. 쑥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렸다. 나중에 마주할 윤기를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내 커튼콜을 알리는 음악이 흘렀다. 다시 무대의 장막이 걷혔다. 웅장한 박수갈채 소리가 났다. 피나를 선두로 동료들이 하나 둘 씩 박수갈채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민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는 숨을 한번 삼켰다. 뭔가가 이상했다. 얼핏 본 객석에서 윤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저씨 어디 갔어요?”
지민이 스텝을 향해 물었다. 간단한 질문이었는데도 다들 대답을 주저하며 입을 굳혔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가 잠시 고갤 갸웃대며 말했다.
“화장실 갔나? 왜 이렇게 늦지. 곧 나 커튼콜인데.”
여전히 스텝들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만 있다. 눈치를 힐금 보는 것이 이 상황에 어울리는 대처가 아니었다. 굉장히 간단한 상황이었는데. 화장실 갔다 라거나, 주차된 차를 확인하러 나갔다, 담배를 피러 갔다, 라는 대답 따위를 예상했던 지민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공간을 잠식하는 이 어색한 침묵이 싫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 같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채, 다시 말을 꺼냈다.
“왜 말이 없어요. 아저씨 어디 갔냐니까요?”
“지민. 그만 해.”
잘 견디고 있다가 왜 갑자기 그래? 지민의 뒤에 서있던 모나가 그의 어깨를 돌려 잡으며 말했다. 마주 본 그녀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언뜻 동정심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것이 싫었다. 지민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뭘 그만 해. 아저씨 어디 있는 데?”
“지민. 그만하고 무대로 가. 곧 네 차례…”
“어디 있냐니까!”
결국엔 목을 비집고 비명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불안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덜덜 떨었다. 몸은 마비가 된 듯 경직됐다. 눈 밑이 따끔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손을 죄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박지민! 빨리 안 나가?! 그때 누군가 멍하니 서 있는 지민을 떠밀었다. 곧 지민의 차례였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객석엔 여전히 윤기가 없다. 무대에선 동료들이 박수갈채를 받으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눈부신 빛. 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지민은 불현듯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지민아. 윤기씨가 오시는 길에…
사실상 그때 지민은 명확하게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문장이 터무니없다 여겨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객석에 앉아있는 윤기를 봤으니까. 눈도 마주쳤었다. 그는 나를 향해 박수도 쳤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 웃어주기까지 했는데.
지민아. 윤기씨가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로…
그러니 머릿속에 울리는 그녀의 말은 거짓인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아저씨가 그 입으로 내게 사랑한다 속삭였는걸. 똑똑히 봤어. 그러니까 그녀는 거짓말쟁이 인 것이다. 우리의 영원을 질투하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러니까 그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어야 해. 그렇지, 아저씨. 아저씨 여기 있잖아. 여기 와서 나를 봤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지민아. 윤기씨가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확실한 거지…?
“지민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민이 바닥에 고꾸라져 속을 게워냈다. 상황은 곧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앰뷸런스를 부르려 전화를 하는 목소리와, 커튼콜이 부득이하게 취소된다는 말소리가 섞였다. 계속되는 소음이 지민을 괴롭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목구멍이 뜨겁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그 밑바닥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지금 벌을 받는 걸까. 영원히 구제받지 못하는 구렁텅이로 들어온 것은 제 스스로다. 탓하고 싶어도 탓할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를 더 비참하게 했다.
“세상에, 정신 좀 차려봐! 지민아!”
계속해서 속을 게워내던 그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났다. 굉장히 익숙하고도 독특한. 오로지 지민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이윽고 낯익은 그림자가 지민 위에 드리워졌다. 그는 불현 듯 고갤 들었다. 그곳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너무나도 갈망했던…
아아. 아저씨.
작은 탄식과 함께, 지민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0.
죽음은 단편적인 것이다.
윤기는 시간에 맞춰가기 위해 엑셀레터를 밟으며 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곧 서초 IC에서 내려야했기 때문에 차선을 변경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옆 차선을 달리던 화물트럭이 갑자기 그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경찰의 취조로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트럭기사는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다. 졸다가 깬 트럭기사가 놀라 핸들을 돌린 게 비극적이게도 윤기를 향한 것이다. 다급히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캐딜락이 그대로 화물트럭과 부딪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는 곧 형태를 잃었다. 그 현장을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윤기가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기적적이게도 그는 그때까진 살아있었다. 허나 깨진 앞 유리창이 윤기의 전신에 쏟아져 내린 뒤였고, 찡그러진 앞판엔 다리가 끼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는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을 추스르며 폰을 꺼냈다. 그러곤 한다는 것이, 시간을 확인하며 ‘조금 늦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따위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다 어리석어진다. 그는 고통을 뒤로 한 채 발끝을 겨우 움직여 엑셀레터를 밟았다. 바퀴가 헛돌며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이미 파열이 된 엔진은 굉음을 내며 연기를 내뿜는다. 차 안이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그래도 그는 멈춤을 몰랐다. 살갗이 익는 줄도 모른 채 그가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잡아당겼다. 지민에게 도착하기 고작 십 분 거리였다. 어떻게든 가야 했다. 아니. 가려 했다.
그러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젠장 할….”
그것이 마지막이다. 그의 숨은 그렇게 멎었다.
비통했지만 무정한 죽음이었다.
#11.
윤기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조촐하게 치러졌다. 많은 동문들과 회사 동료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오열하는 이는 드물었다. 고인의 빈소에서까지 매형과 처남에 대한 추문이 들끓은 탓이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걷잡을 수가 없어, 입에서 입을 타고 변질되어 어느덧 윤기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한 인물을 어느 누가 추모하겠는가. 호석은 그것이 우스웠다. 윤기가 그런 인물이 아닐뿐더러, 실제로 죽어 마땅하다 한들, 그것을 판단할 근거는 도대체 어느 누가 정할 수 있지?
호석은 삼일 내내 그의 빈소를 지켰다. 아침엔 출근하고, 퇴근하고 들어와선 장례식장 귀퉁이에서 잠을 청했다. 삼일 내내 울다 지쳐 고꾸라지는 윤기의 어머니를 대신해 윤기의 발인을 함께 하기도 했다. 여기서 놀라운 건, 호석은 윤기의 장례식 내내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윤기의 사망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십여 년을 같이 한, 형제와 다름없는 윤기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호석은 윤기가 살아있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아는 윤기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작 교통사고 따위로 죽을 인물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그는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
한줌의 뼛가루로 변해버린 그가 마침내 호석을 무너트렸다. 호석은 작은 유골함을 끌어안으며 고갤 숙였다. 차가운 단면위에 뜨거운 눈물들이 쏟아졌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제야 깨닫고 만 것이다. 윤기가 죽었음을.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음을.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윤기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민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그가 돌연히 사라져버렸다고. 이 자극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입에서 입을 타며 이야기엔 살이 덧붙었다. 대체론 지민이 에디트 피아프, 혹은 아르튀르 랭보의 행보를 따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터무니없는 가십에 불가했다. 그러자 어딘 가에선 그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 색채가 너무도 노골적이었던 탓에,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위치한 싸구려라는 악평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재빨리 식고 말았다. 그건 지민의 집안 영향이 컸다. 철저하게 입막음을 시킨 탓에 인터넷에 떠돌던 모든 글과 유언비어들이 일주일 내로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흥미가 반감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타인의 관심이라는 것은 냄비와도 같아, 대중들은 식어버리고 난 후엔 철저히 등을 돌렸다. 건망증을 앓듯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니까. 그걸 싣겠다고?”
그러니 지금의 입씨름도 당연한 것이다. 지민의 인터뷰를 싣겠다는 호석과, 반대하는 부장 사이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호석이 의견을 굽히지 않자, 나이가 지긋한 부장은 꽤 논리 정연하게 그것에 반대했다. 한 달 전에 빤짝했던 그인데다가, 지민의 집안에서 어떤 소송이 걸려올지 모르고, 이미 대중들의 관심 밖에 나버린 지민은 더 이상 상품가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실을 겁니다.”
“왜?”
호석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아이거든요.”
인터뷰가 실리고 나서 생길 추후의 문제에 대해 호석이 책임진다는 각서와 함께, 호석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usb에 잠들어 있던 그의 인터뷰 파일을 켰다. 꽤 인상 깊은 인터뷰의 내용과 함께 해사하게 웃는 지민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호석은 그것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앞서 언급했듯 지민에 대해선 여러 가지 추문이 있었다.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져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도 언젠가는 피아프처럼 예술로 승화시켜 돌아올 것이라는 것과, 랭보처럼 활동을 아예 끊고 갖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어딘가에서 죽어버릴 것이라는. 애석하게도 호석은 후자의 편에 속해 있었다.
13세기에 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을 비참한 환경 속에서 생각해내는 것만큼 큰 슬픔이 또 있을까. 호석은 단테의 말과 궤를 같이 했다. 인터뷰에 첨부된 해사하게 웃고 있는 지민의 얼굴에서 비극이 물드는 것 자체가 호석에게 곧 비극이었다. 어찌되었건 지민은 윤기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으니까. 지민의 슬픔을 보고 싶지 않아 그가 어딘가에서 편안히 안식을 찾았으면 바라면서도, 그의 춤이 사라진다는 것이 슬퍼 그가 죽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아이러니를 그렸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둘은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서만 공존하여 또 그렇게 기억되길.
호석은 잠시 미간을 매만지다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곧 파일을 넘겨주기로 한 시간이다. 그는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덧붙이며 창을 닫았다.
가장 아름다웠던 지옥 속 한 철에 박제되어버린, 그를 기리며.
지옥 속에서 보낸 한 철
Fin
〈fin>〈/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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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편이 열락과도 같은 이야기였다면, 하 편은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으로 썼어요. 호석이의 인터뷰로 시작돼서 인터뷰가 실릴 즘 끝나고 만 이 이야기는 po열린결말wer입니다. 고로 지민이가 살아있을지 아닐지는 개인의 몫! 개인적으로 저는 지민이가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지민이에겐 아직 춤이 남아있고, 그의 춤은 rough cut, 미완성이었으니까.. 윤기의 죽음으로 시작될때 바뀌는 브금이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이에요. 지민이가 즉흥적으로 춤을 췄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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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또 다른 후기를 남기고 싶은데, 공지 때문에 멘붕이 와서 까먹었어요. 8ㅅ8 감각의 제국 어쩌죠? 저 그거 아예 의심미로 떡을 치려고 찐 글인데... 애초에 센티넬 오메가 조합이면 말 다한 거지 않습니까? 엉엉엉... 아무튼 12월 1일까지 성실연재 해 볼게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인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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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 철, 이 글도 십이월 이후로 사라지고 말겠죠. 그냥 묻기엔 조금 아까운 글이기도 하고.. 제 흑역사를 널리 퍼트리자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메일링 할게요. 암호닉이든 아니든 상관없이요. 일단 투표로 수요조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링을 하게 된다면, 메일링 관련 공지를 따로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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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연두/몽몽몽/뽀뽀뽀/콜라곰/스토커/어항/땡땡/짐그래/연타/뿌조/인연/쿨밤/부랑이/짐짐/꾸꾸/#방치킨/플라이아데스/취향저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