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우림 - 있지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5
눈을 감으면 다시금 환상이 떠오른다. 후덥지근하게 덮쳐 오던 공기. 작게 멎어버린 목소리, 멍청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저 자신. 끝끝내 마주치지 않았던 두 눈동자가 허공을 맴돈다. 그 두 눈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눈이 마주쳤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이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고작 시선의 종착지가 무어라고. 그 찰나가 저 자신의 이유가 되었다. 절망의 코앞, 이제는 소리를 내어 절망을 유인하자고.
“부탁해. 아무도 모르게. 지민조차도.”
연화가 예양에게서 받은 찻잎이 담긴 상자를 넘기며 말했다. 청이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찻잎에 크라톰 성분이 섞여 있는지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청과의 인연은 대략 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청 역시도 지민과 비슷한 경우로, 개인적으로 받는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개인을 전담했다. 연화는 특히 갤러리와 연이 닿아 있지만, 청의 임무는 마약 관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청과의 인연을 계속 유지해온 것은 아니었다. 연화는 최대한, 그때 그 기억을 지우고자 관련된 이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순전히 지민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 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고작 며칠, 그리고 또 거래하던 당일. 그뿐이었다. 그의 일은 연화처럼 앉은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 테지만, 또 저 같은 그리고 지민 같은 조직원을 훈련 시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얼굴 빛이 좀 나아보이네, 연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래, 오랜만에 보자마자 하는 말이 부탁이라 나도 미안해. 청이 아니면 어디에 부탁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다른 건 몰라도, 청은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그 사람 때문이지? 박지민인가.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 연화답네.”
마지막 물음에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과도 같았다. 청이 상자의 겉면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연화의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제게 연락을 해올지도 몰랐으니. 청은 그대로 연화에게서 등을 돌리려다 말고 다시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제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연화가 있었다. 청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부탁은 들어주는데. 나는 연화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네.”
“그럼 부탁해.”
연화는 한 마디로 대화를 종결시켰다. 어차피 말해도 청은 모를 이야기였다. 제가 지민의 눈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청은 알 수 없었다. 지민이 저를 볼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연화는 알 수 있었다. 연화는 어쩌면 지민이 연화를 보아온 것보다 더 오래, 지민을 보아왔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차마 모를 사실 역시도, 연화는 알고 있었다. 제가 알아 온 지민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왜 지민을 데리고 있는지. 청은 모를 것이다. 제가 유일하게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청이 등진 유리로 되어 있는 벽면으로는 다른 고층의 건물들이 보였다. 연화가 청의 사무실로 들어올 때, 청은 그 바닥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연화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연화가 그대로 등을 돌려 청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휑했다. 손등 위로 길게 뻗어나간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던 셔츠 소매를 끌어내렸다. 청의 시선이 잠시 여기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연화는 꽤나 좌절스러웠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오랜만에 잡은 운전대가 익숙하지 않았다. 지민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다. 얼굴 위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것이 제 평범한 일상이었다면 어땠을까. 긴 운전과 함께 상념이 떠올랐다. 문득 옥경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향이구만. 동향 사람을 만나야 해. 옥경이 그리 말했었다. 저와 지민을 보고 한 말이기도 했고, 그녀와 예양을 두고 한 말이기도 했다. 동향이라는 말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제가 마지막으로 고향인 부산에 머물렀던 것은 열세 살 무렵이었다.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또한 제가 정확히 떠나온 시점도. 그냥 제가 태어났다는 곳. 그뿐이었다.
“우리 연화 왔어?”
“옥경.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아아, 그냥. 뤠이양한테 들었지? 고향 좀 다녀왔거든.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어쩜 싹 바뀐 거 있지? 그대로인 건 나뿐이더라니까?”
로비의 소파에 기대어 앉은 옥경이 앞에 놓인 커피를 들고선 홀짝였다. 손에 들린 것은 중국 여행사 광고 잡지였다. 그들이 여행사를 이용하지는 않을 테고. 귀퉁이가 찢겨 있는 모양새가 어디선가 옥경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주워온 것이 분명했다. 옥경이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옥경은 찻집에 함께 방문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예양의 거래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내뱉지 못할 의심을 가슴 한구석에 쌓아두는 것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도 뤠이양도, 은퇴할 때가 되면 고향에 가서 살려구.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떠나온 고향도 그리워하고. 그렇지, 연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연화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들이 은퇴할 때라고 정해진 것은 없었다. 가슴에 묻어두는 약속과도 같은 것임을 알았다.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해버리는 약속. 연화는 아직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았다. 곧, 저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을 알았다. 옥경이 무언가가 급하게 생각났다는 듯 잡지를 소리 나게 접었다. 제 검지를 펴들어 연화의 방 부근을 가리켰다.
“왔어, 우리 연화 아가.”
옥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도착한 것일까? 연화는 옥경에게 간단히 묵례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옥경도 그런 연화를 보며 손만 허공에 저을 뿐이었다. 연화의 마음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옥경이 한 말이니 사실일 텐데도 그가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라지는 상념들이 저 자신을 쉽게 통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없을 방, 문 앞에 서서 제 곁에 있지도 않은 그의 존재를 느끼려 애쓰던 숱한 밤을 떠올렸다. 연화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잘 있었어?”
열린 문틈 새로 지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화 앞에 선 지민이 더 문을 활짝 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그의 머리칼이 검었다. 그가 검은 머리를 했던 것이 언제인지 실은 너무 오래되어 앳된 얼굴만 떠오른다. 그 아래로 보이는 저를 내려다보는 눈. 입가에는 이미 딱지가 앉은 상처가 있었다. 연화가 손을 뻗어 지민의 상처를 건드렸다. 그는 이제 따갑지도 않은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피부가 거칠었다. 지민이 제 뺨을 건드리는 연화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연화가 지민의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안 다치고 잘 있었어?”
“응. 지민이 네가 그러라고 했잖아. 근데 너는 내 말을 안 들었네. 다쳐오지 말라고 했잖아.”
“어쩌다 보니.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미안.”
지민은 그대로 연화의 손을 놓아주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지민은 연화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연화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그의 검은 머리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떼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내뱉는 숨이 잘게 떨렸다. 지민은 연화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랐고,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연화의 얼굴만 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연화가 그렇게 제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지민은 연화를 몰랐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제 욕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민이 여실 제 상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연화의 다정함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상처 소독은 한 거야?”
“이제는 괜찮아.”
“검은 머리도 예쁠 거라고 했는데, 정말이네.”
“…응, 그랬지.”
그제야 지민이 연화의 손을 놓았다. 연화는 손에 남아있던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딱지가 앉은 것을 보면 이제와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지민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연화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안에 잠겨 들던 제 모습이 있었다. 순식간에 지민이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연화가 느리게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느리게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연화는 지민의 불안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화.”
“응.”
“내 이름, 내 이름 좀 불러줘.”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연화의 어깨 위에서 부서져 내렸다. 연화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지민이 그렇게 말하고서는 제 두 눈을 감았다. 그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이어졌다. 연화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아 그랬다. 그것도 제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싶었다. 연화가 알지 못하더라도, 설령 알았더라도.
“지민아, 박지민.”
들려오는 연화의 목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이름이었다. 제가 숱하게 들어온 이름. 그러나 연화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은 달랐다. 아주 많이, 지민에게는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다. 그 부름이 제게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고, 죽음이 될 수도 있었다. 연화가 어떤 의미를 담아 저를 부르든 지민은 그 뜻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제게는 연화, 그뿐이면 된다.
“연화, 내가 아무한테나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고 말했지.”
“그랬지.”
“나도 포함이야, 연화.”
지민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풀었다. 지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민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꾸만 지민의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연화는 그런 지민의 표정을 모르지 않았다. 제가 지민을 보아온 세월이 있었다. 연화가 다시 손을 들어 지민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민은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꺼내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제가 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연화가 먼저 지민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연화.”
목구멍을 태우던 그 어절이 기어코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모순적이게도 지민은 제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처음으로 내뱉은 제 거대한 진심. 제 절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은 결국 제 욕심이었다. 연화가 지민을 먼저 끌어안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연화는 그저 지민의 떨림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제 손등으로 눈물을 조용히 훔쳐낸 지민이 그대로 연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민이 너라면, 마음을 내어줄 수 있지.”
연화가 말했다. 지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연화는 지민을 안고 있는 제 팔을 풀지 않았다. 지민은 그렇게 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했다. 지민은 한참이나 숨죽여 울었다.
지민과의 만남으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 청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청은 예양이 자주 방문한다는 찻집까지 수소문해서 뒤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관련된 일까지 모두 제 손으로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청에게 맡긴 이유도 있었다. 옥경과 예양을 만나지 못한 것도 사흘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예양은 아마 합성 마약 제조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것이고, 옥경은 도박장에 있을 것이었다. 이미 보고를 받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 불유쾌했다.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연화는 제발 제 선에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이기를 바랐다. 제가 눈을 감아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연화는 먼저 옥경이 있을 도박장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근래 들어서 지민이 자리를 많이 비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 지민은 자리에 앉아 임무를 처리하는 저를 보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연화가 잠에 들 때까지 저도 잠에 들지 않았다. 일전에 그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연화는 지민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민은 그것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화는 이미 아주 이전에 그에게 마음을 내어주었다. 그 결심을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저 자신은 이미 죽었던 목숨이라 생각하면 그 어떠한 다짐조차도 어려울 것 없었다.
“옥경.”
“우리 연화 왔어? 안 그래도 피곤할 참인데. 이만 들어봐 가야겠네.”
도박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의자에 걸터 앉은 옥경의 옆 얼굴이 보였다. 옥경은 연화를 반갑게 맞이했다. 입에 물린 담배를 빼 들었다. 피어오르는 연기에 연화가 손으로 허공을 두어 번 저어 보였다. 맞은편에는 낯이 익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잘 생각은 나지 않아 구태여 아는 척하지 않았다. 옥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 번 비틀거렸다. 연화가 옥경의 팔을 잡았다. 옥경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약간 취해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내뱉는 숨결에서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옥경, 술은 많이 마셨어요?”
“이상하지, 딸 같은 건 뤠이양인데. 나를 이렇게 데리러 오는 건 우리 연화란 말이야.”
자리에서 비틀거리는 옥경이 말했다. 연화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 사이에 옥경이 있던 자리를 눈으로 한 번 훑었다. 아직 위스키가 남아있는 잔, 잔에는 붉은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옥경의 핸드폰, 어차피 도박장 내에서는 전파가 통하지 않아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옥경이 도박장에 있는 동안 예양과 연락했을 리는 없다. 옥경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잘 나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니,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누군가는 이를 기억할 것이다. 옥경이 없어도 패는 돌아가고 있었다. 옥경이 약한 힘으로 연화를 이끌었다. 칩을 현금으로 바꾸어 갈 심산인 듯했다.
옥경이 현금을 챙기는 동안 도박장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가드에게 걸어갔다. 연화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연화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옥경은 현금을 가방에 집어넣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대로 가드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얹어주었다. 그도 연화의 얼굴을 알았다.
“옥경이 온 게 언제쯤이죠?”
“아마, 나흘 전입니다. 경비는 교대로 서서 정확히는 CCTV 확인하시는 게 빠릅니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 옥경이 여길 나간 적은요?”
“없을 겁니다. CCTV 확인하던 동료가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 여자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고마워요. 비밀로 해주세요, 제가 물어본 것은.”
연화가 그대로 등을 돌려 옥경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연화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해 보였다. 옥경이 가방을 들고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연화는 웃고 있었으나, 꽤나 좌절스러웠다. 제가 옥경마저 의심하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어찌 되었건, 옥경이 도박장에 발을 들인 동안, 예양과의 접촉은 없었다.
“많이 땄어요? 기분 좋아 보이네.”
“아니, 많이 잃었지. 그냥 재미로 하는 거야.”
조수석에 앉은 옥경이 더운 듯 창문을 내렸다. 바람에 머리칼이 사정없이 날렸다. 그럼에도 옥경은 웃었다. 뒤늦게 취기라도 올라오는 듯했다. 연화도 창문 올리라는 말없이 그저 바람을 맞았다. 초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옥경이 제 가방을 뒤졌다. 웬 알약을 제 손에 털었다. 연화가 흘끗 보니 단순히 건강 보조제였다.
“옥경, 술 마시고 약 먹으면 안 돼요.”
“밥은 먹었어? 벌써 약 먹을 시간인데….”
옥경이 연화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그동안 제대로 취기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약을 건네는 상대가 연화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연화는 약을 받지 않았다. 옥경이 그대로 뭐라 웅얼거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연화는 이제 정면만을 응시했다. 옥경은 더 권하지 않았다. 피곤한지 그저 눈을 감았다. 지금 옥경이 저를 누구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연화는 모르는 체했다.
“옥경, 일어나봐요.”
“나 뤠이양이에요, 옥경. 들어가서 자요, 네?”
“…뤠이양?”
결국 연화는 예양을 불러내었다. 다행히 제 방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화의 부름에 한참이나 반응이 없던 옥경은 예양의 부름에 단숨에 눈을 떴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옥경이 손을 뻗어 예양의 얼굴을 쓸었다. 연화의 입안이 썼다. 예양이 옥경을 부축했다. 약간 비틀대는 것 빼고는 곧장 잘 걸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잠을 제대로 못 잘 성싶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연화는 불쑥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제 방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대로 걸어가 제 금고 앞에 앉았다. 다이얼을 돌렸다. 문이 열렸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부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금고의 문을 닫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거래 장부가 드러났다. 사라진 것은 거짓 장부뿐이다. 연화가 웃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저는 더 이상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에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문득 저 자신까지 믿지 말라 말하던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차피 정말로 누군가 훔쳐 달아난 것이라면 그는 알아야 할 일이었다. 지민은 금고에 있는 것이 거짓 장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진짜 장부가 서랍 속에 있다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었다. 제가 거짓 장부와 바꿔 치는 동안, 그는 제 뒤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민뿐이었다. 반대로 금고에 연화가 장부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지민뿐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간 연화가 지민의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연화는 습관처럼 그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그가 항상 착용하던 나비 펜던트 목걸이, 피어싱, 반지. 이제는 검은 그의 머리칼, 손등에 있는 나비 타투까지. 항상 연화는 그 모습을 보며 안정을 느꼈었다. 연화가 그를 가만 바라만 보고 있자 문이 더 활짝 열렸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연화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연화가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박지민….”
“네, 연화. 무슨 일이야? 어서 들어오지 않고.”
그럼에도 연화는 자리에 가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제게 사랑을 말하던 그 입술, 그 위로 보이는 눈, 가지런한 검은 눈썹까지. 연화가 말이 없자 그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연화가 제 입술을 씹었다. 연화가 지민을 보아온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어쩌면 지민보다 먼저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연화는 지민의 눈을 볼 때면 알았다. 제게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언제나 그의 시선의 종착지는 자신이라는 것마저도. 저는 지민의 눈동자를 보면 잠식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동자 속에 비치는 저의 모습이 두려움과 사랑이 한 데 얽힌 채로 일렁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연화는 그래, 감히 단언하자면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지민이 두려워한다는 것 역시도 알아서 제멋대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해 버리면 지민의 두려움이 죄책감으로 변질될까 두려워 그랬다. 나흘 전, 지민이 제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말하고야 확신할 수 있었다. 두려움과 얽힌 감정의 정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저를 믿지 말라고? 연화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다. 제게 그렇게까지 제 마음을 드러낸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까지 듣고 싶지 않은 경고를 한 사람이 없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화가 웃자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연화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 그런 것 따위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연화는 저 아래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인지, 불안인지. 그것이 어떠한 감정인지 연화는 쉽사리 정의할 수 없었다. 몸이 잘게 떨려왔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연화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이야.”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떨리는 제 몸을 주체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연화는 이 상황이 너무나 우스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연화는 다시금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민이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어 더 고통스러웠다. 연화가 그에게 한 걸음 가까워졌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연화의 가슴을 간질였다. 연화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사뭇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너, 박지민 아니구나.”
시선의 종착지는 언제나 그이였다. 제가 감히 정착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제 욕심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절망 앞에서 눈을 감지 않겠다. 죽음을 무기로써 맞서 싸우겠다고. 파도에 휩쓸린 저를 알아버린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내뱉어진 존재가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절절하게 달아오르던 제 감정, 부르짖던 실존의 증거를 발견해 낸 그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202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