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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The Sun

 

화이트 크리스마스 강미르 (미친미르) X 시크릿 가든 한태선 (썬)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총탄의 반동 탓이었다. 큰 충격에 휩싸여 굳어버린 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 중 하나가 무너지자 균형을 잃은 몸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힘없이 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제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복부와 허벅지 부근이 뜨뜻한 피로 젖어가는 것을 자각해서야 온몸을 흔드는 격통에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며 상처 부위를 움켜쥐었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완전히 관통상도 아니었고 복부 중심이 아닌 왼쪽 옆구리 쪽으로 치우친 편이라 출혈만 막으면 괜찮을 상처였다. 총상 자체가 원래 위험한 거긴 하지만. 여러 경험을 거친 본능은 벌어지려는 상처를 움켜쥐고 미약하나마 지혈을 하고 있었고, 사실상 내 몸은 상처를 움켜쥐고 일어나 내달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젠장.”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혼란이라는 거대한 사슬에 묶여버린 나는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오는 상처를 쥐었을 뿐, 별다른 행동을 잇질 못했다. 아팠다. 아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상처가 아닌 마음 깊은 곳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 한태선이 왜? 왜 날 쏜 거야? 이 나이 먹도록 배신을 한 번도 안 당해본 것은 아니었다. 이 일을 하면서 배신이란 아주 흔한 수법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그 격이 달랐다. 크나큰 충격에 제대로 된 사고와 행동까지 묶어버릴 정도로, 격이 다른 배신이었다.

 

 

 

아직 죽이진 마.”

 

 

 

웃음기가 담겨있는 오스카의 말이 끝나자 나를 향해 느리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혼란 때문인지, 잘게 떨리기 시작한 숨을 힘겹게 내뱉던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내 앞에 선 한태선과 시선을 마주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태선이다른 이들을 속이기 위해 몇 천 번, 어쩌면 몇 만 번을 연습 했을지도 모르는 무표정. 자신에게 제대로 속은 날 비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연민을 느끼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만 알 터였다.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치는 내가 살짝 시선을 내리자 다리를 구부려 나와 눈높이를 맞춘 한태선은 내 표정을 살피는 듯 하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주사기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무슨 종류의 약품일까. 그 날카로운 주삿바늘은 곧장 내 어깨의 피부를 찢어내며 그 속으로 들어왔다. 이물질을 거부하는 듯 뻑뻑한 느낌이 이어지는 그 부분에 숨을 멈춘 나는 기분 나쁜 약품이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다가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 다음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감은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 싶더니 곧장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 것. 기억나는 것은 그 뿐이었다.

 

 

 

 

**

 

 

 

 

갑자기 숨길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눈을 뜬 나는 거치 기침을 토해내며 기도로 넘어가려던 물을 다 뱉어냈다. 한참을 쿨럭이며 물을 다 뱉어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건 물론이고 출혈이 꽤 있어서 그런지, 차가운 물을 갑자기 맞아서 그런지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긴 또 어디일까.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다시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 전까지 잠깐 살펴 본 주변은 허름한 데다 곳곳에 쌓여있는 낡은 짐들의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걸로 봐서는 버려진 창고 쯤 되는 것 같았다. 시체처리 하기엔 딱 좋은 곳이지. 찾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바스락 거린 나는 의자 위에 앉은 채 손과 몸, 다리가 밧줄로 묶여 있다는 걸 깨닫고는 거친 기침을 뱉어낸 여파 때문에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죽여. 말할 거 없으니까.”

 

 

 

기억나는 것도 없고, 회사 사장이랑 친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내가 죽어도 이 넓은 세상에서 바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어차피 다 잃은 느낌이었다. 다시 살아날 방법도 없는 것 같고. 장소를 보니까 애초부터 죽일 생각으로 끌고 온 것 같은데. 그래도 잠시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머리가 좀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예전의 호기로움과 쓸데없는 여유로움을 되찾은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내 정면에 앉아 있는 오스카를 노려봤다. 저 새끼가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죽어도 말 안 할 생각이었다. 저 새끼 혼자 득보는 짓을 내가 왜 해?

 

 

 

말할 거 많을 텐데.”

많아도 말 안 해.”

, 그래?”

어차피 너도 포기할 때 됐지 않나? 그 잘난 회사가 두 동강이 났는데 살 구멍은 있고?”

별명이 미친 미르라더니. 진짜 미친 새끼잖아 이거?”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흔들어 보이던 오스카는 작게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 다음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돌아간 고개는 목 뼈 어딘가가 충격을 세게 입긴 한 건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런 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친절하게도 후속타가 반대쪽으로 들어와 겨우 고개를 정면으로 놓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굳게 다문 입 안에 비릿한 피 비린내가 퍼졌고, 주먹을 제대로 맞은 양 쪽 볼은 심하게 아려왔다.

 

 

 

그 쯤 되면 잘 알잖아?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

 

 

 

내가 입 안에 고인 피를 모아 바닥에 뱉어내자 잠시 주머니에 꽂아뒀던 봉투를 다시 꺼내 든 오스카는 그 안에 담겨 있던 무언가를 내 다리 위에 쏟아냈다. 기분 나쁜 금속성의 소리들. 조각낸 면도날들이었다. 내 다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린 그것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오스카는 바로 다리를 들어 올려 두꺼운 워커를 신은 발로 내 다리 위를 짓밟기 시작했다.

 

 

 

-!”

 

 

 

까드득 까드득-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내 피부를 찢고 들어온 면도날들은 말도 안 되는 극악의 고통을 자아냈다. 면도날 한 개라면 좀 참을 만 하겠는데 크기도 날카로움 정도도 각기 다른 면도날들이 일제히 다리 속으로 파고들자 빌어먹을 고통을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고문에 기상천외한 재능이 있다더니 진짜였네 이 새끼. 끝내 비명을 지를 것 같이 이를 악문 내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참아내려 용을 쓰자 작게 웃은 오스카는 내 어깨 한 쪽을 손으로 밀쳐 누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죽일 거라 봐주고 이런 거 없는 건 알아챘지?”

.”

근데 강미르. 그거 아나?”

크으윽.”

난 애초에 너한테 얻을 정보 따위 없어.”

 

 

 

그럼 이딴 짓은 왜 하는 건데. 그냥 죽여 이 빌어먹을 새끼야. 속으로 욕지거리를 줄줄이 뱉어낸 나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는 오스카를 노려봤다.

 

 

 

한태선.”

.”

그 놈과 같이 있었던, 몸을 섞은 죄라고 생각해. 그 대가로 끔찍하게 고문하다 죽여줄 테니까.”

 

 

 

나보다 미친놈이 여기 있었네. 고통을 참느라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순간 기절할 뻔했던 나는 내 다리를 짓밟던 오스카가 몸을 돌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테이블로 간 뒤 그 위에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고문 도구들을 살피는 것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내려 내 허벅지를 바라봤다. 검붉은 피가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거의 난도질 되어버린 다리. 젠장맞을. 과다출혈로 죽일 생각인가.

 

상처를 확인하고는 빈혈이 심해지는 건지 심각하게 흐려지기 시작한 시야를 살려내려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굴과 옷, 손에 피가 묻은 한태선이 급하게 들어오며 가쁜 숨을 고르지도 못한 상태로 말했다.

 

 

 

습격입니다. 수가 너무 많아요.”

뭐야, 벌써 왔다고? 예상보다 너무 빠르잖아!”

 

 

 

내 다리에 박혀있는 면도날을 일일이 빼낸 뒤 다시 박아 넣을 생각이었는지 켈리를 손에 쥐고 있던 오스카는 작게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로써 내가 죽을 방향은 한 길로 정해졌다. 과다출혈. 가볍게 시선을 떨군 나는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숨을 골랐다. 습격이 올 곳은 몇 곳 안 된다. 이 쪽 무리에 떨어져 나온 스파이를 이용해 위치를 알아낸 또 다른 팀 S거나 미친 듯한 정보력의 덕을 본 마담 I거나. 어느 방향이건 상관은 없다. 어쨌든 난 죽을 거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날 바라보고 있던 한태선과 눈을 마주쳤다. 배신을 당했다면 그 배신자가 끔찍하게 싫어지기 마련이었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겨 그 조각 하나하나를 씹어 넘기고 싶을 정도로. 그랬는데어째서인지 한태선에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단단히 미쳐버린 모양이었다. 그 흰 피부에 묻은 붉은 피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난, 이미 미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 누가 그러지 않던가. 충격이 크면 미쳐버리는 법이라고.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죽기 전에는 제정신으로 갔으면 했는데 미친 미르답게 미친 상태로 가는 구나.

 

 

 

강미르.”

 

 

 

그 때였다. 한태선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항상 부르던 그대로. 그 목소리에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는 한태선을 올려봤다. 한태선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제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상체를 숙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 다리를 힐끗 쳐다봤다.

 

 

 

날 죽여.”

 

 

 

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내 목소리에 시선을 옮긴 한태선은 내 흔들림 없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이라고. 어차피 죽일 생각이잖아. 그럴 거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죽이고 자리 떠.”

 

 

 

시간 더 지체하다가는 우리 회사까지 가세할지 모르니까. 뒷말은 꾹 삼긴 채 눈을 감은 나는 길게 숨을 뱉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거니까. 죽는 김에 한태선 손에나 끝나야지 뭐.

 

 

 

실망스러운데.”

 

 

 

갑작스러운 한태선의 말에 눈을 뜬 나는 미간을 작게 구기며 한태선을 바라봤다. 뭐가 실망스러운 거지?

 

 

 

후회되는 것도 없나 봐? 그렇게 쉽게 체념할 정도면.”

 

 

 

조금 실망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면 많지. 부모님에 대한 건 물론이고 밀린 외상 갚을 거에 꼭 사고 싶었던 차도 못 샀고이 일에서 손 떼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희망도 산산조각 났고. 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아프다고 봐주지 말고 그냥 할 걸 그랬다.”

이제 좀 마음에 드네.”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싱긋 웃어 보인 한태선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죽이기 전에 작별 인사라도 하는 건가. 그래, 마지막은 제대로 즐겨보고 가자. 잠깐 고개를 뒤로 빼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며 한태선의 입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고, 내 어깨 뒤로 팔을 감으며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오던 한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끈적한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고는 숨을 고르며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번에 내 이야기 해준 거 기억나?”

?”

복수를 위해 준비를 끝냈다는 그 이야기 있잖아.”

.”

사실 필요한 정보가 조금 모자랐거든. 근데, 그걸 방금 전에 다 모았어.”

 

 

 

자료를다 모았다고? 그 말에 순간 적으로 아까 전 한태선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떠올렸고, 일전에 한태선이 나에게 해줬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떠올리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한태선을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태선은 말없이 외투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새 탄창을 채우고는 안전장치를 풀어냈다.

 

 

 

이 방법 밖에 없었어.”

한태선너 이게 무슨 짓.”

 

 

 

그 때였다. 뭔가 분노에 찬 오스카의 목소리와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탕- 하는 소리가 사방을 울린 뒤 몸뚱아리가 힘없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놀라 시선을 돌리니 머리를 맞았는지 뒤통수에서 피를 뿜어내는 오스카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는 즉사한 모양이었다. 한태선은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와 작은 단도를 이용해 내 몸을 속박하고 있던 밧줄들을 다 풀어주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성씨한테 전화 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다른 놈들은 다 죽였으니까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던 한태선은 또 다른 충격에 벌어져 있는 내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는 작게 말했다.

 

 

 

미안해 강미르. 잘 있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 있으라니? 내가 뭐라 반문하려던 순간 갑자기 팔에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졌다. 한태선의 팔을 잡아채며 시선을 내리니 아까와 같은 액체가 담긴 주사긱 내 팔에 꽂혀있었다. 말릴 새가 없었다. 그 약물을 다 투여한 한태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런 한태선을 잡으려 손을 뻗대던 나는 의자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몽롱한 정신을 어떻게든 살려내려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어떻게 하려고.

 

 

 

 

**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천장이었다. 익숙하다. 너무 익숙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흐린 시야를 원래대로 회복하려고 눈을 깜빡이던 나는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저지되어 다시 뒤로 드러눕고 말았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 다리 실밥 어제 풀었다.”

 

 

 

최치훈의 목소리였다. 이 새끼가 웬일일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링거액을 조절하고 있던 최치훈이 들고 있던 차트로 내 머리를 소리 나게 때렸다. 환자 때리는 의사가 여기있네. 누가 신고 좀 해봐요.

 

 

 

한 주 동안 잔 소감은?”

내가 일주일이나 잤다고?”

수면제 양이 좀 셌거든. 출혈량도 심했고.”

엄청 오래 잤네.”

 

 

 

아픈 머리를 부비며 고개를 돌려 다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생각보다 빨리 흐려져 버린 기억 속에서 날 떠나던 한태선의 뒷모습을 기억해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현장엔나 밖에 없었냐?”

 

 

 

최치훈은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트에 무언가를 적던 최치훈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시신 15구 말고는 없었어.”

 

 

 

진짜 떠났구나. 대체 어쩔 생각으로. 눈을 가볍게 감고는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태선의 모습을 더듬었다. 잊으면 안 될 사람을 잊는 건. 진짜 끔찍한 일인데벌써부터 이렇게 흐리면 어쩌자는 건지.

 

 

 

S는 물론이고 마담 I까지 싹 쓸렸어.”

?”

 

 

 

높낮이와 감정이 없는 최치훈의 말에 당황하며 눈을 뜬 나는 무의식적으로 의사가운 옆을 잡아챘다.

 

 

 

그 놈들이 갑자기 왜?”

네가 발견된 다음 날. 익명으로 놈들의 비리와 행태가 모조리 담겨 있는 서류가 퍼졌대. 그걸 입수한 정부 쪽에서 다 쓸어버렸어. 그 김에 이쪽 일도 다 척결해 버리겠다고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고.”

.”

덕분에 우리 회사는 물론이고 다른 회사들도 몸을 숨기는 데에 온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

당분간은 쉬어라. 지시가 있기 전까지 조용히 숨어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끝내 성공했구나, 한태선.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나는 흰 구름이 떠다니는 맑고 푸른 하늘을 보며 작게 미소 짓다 그 미소를 거뒀다. 살아는 있는 걸까. 살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복수의 끝은 거의 좋지 않으니까.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며 해야 하는 것이 복수니까.

 

 

 

생각해보니까 내가 제일 많이 희생한 것 같긴 하네.”

 

 

 

죽을 위기를 그 짧은 기간에 몇 번이나 겪었던 건지. 죽어가는 사람도 살렸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고개를 젓다가 작게 한숨을 쉰 나는 자세를 고쳐 편하게 자리 잡고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살아있으면, 언젠가 마주칠 일이 꼭 생길 거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 원인 모를 확신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안도감에 휩싸인 나는 그대로 편하게 잠에 빠져들었고, 완전히 그 잠에 빠져 들기 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살아만 있어. 한태선.”

 

 

 

 

 

 

 

***

 

 

 

 

 

 

 

 

끝난 줄 알았죠?

 

 

 

 

 

 

 

[ Epilogue ]

 

 

 

 

그 일이 있은 뒤로 2년이 지났다. 아직 정부의 감시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뛰는 것은 최대한 미룬 채 해커 쪽으로 방향을 튼 나는 예전보다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리며 일을 할 수는 있었다. 화이트 해커로도 잠입 중이라 다닐 직장도 생긴 상태였다. 월급이 성에 차지 않긴 하지만 이 쪽 일도 썩 나쁘진 않았다. 나중에 손 털게 되면. 그럴 수 있으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 강미르. 거기 좀 해킹해 줘.

거긴 해킹해서 뭐하게. 득될 것도 없잖아.”

- 내 캐릭터 돈 좀 늘리게.

에라이, 게임 폐인 새끼야.”

 

 

 

그 개소리 왜 안 하나했다. 전화기 너머의 박무열에게 욕지거리를 줄줄이 뱉으며 장비의 전원을 끄려던 나는 유은성에게서 문자가 옴에 냅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끊어내려 냅다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유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진짜 고맙다. 게임 폐인한테 잡혀 있을 뻔했어.”

- 무열이?

.”

- 걔 원래 그러잖아.

귀찮아 죽겠다 진짜. , 그건 됐고. 무슨 일이야.”

 

 

 

 

**

 

 

 

 

갑자기 웬 현장일이지. 오랜만에 맞는 현장일에 귀찮음이란 귀찮음은 죄다 매달고 병원에 도착하니 밖에 나와 있던 유은성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충 주차를 하고는 차에서 내린 나는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조금 풀어내며 유은성을 향해 걸어갔다.

 

 

 

미르야.”

, 유은성. 너 살 좀 쪘.”

헛소리 집어치우고 의뢰인 찾아가. 엄청 기다리셨어.”

그렇다고 때릴 필요까지는어억어디 있는데.”

너도 잘 아는 곳.”

 

 

 

 

**

 

 

 

 

병실 문 앞에 선 나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왜 하필이면 여기일까. 너무나도 익숙한 그 문 앞에서 머리를 흩뜨리며 작게 신경질을 낸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긴 한숨을 뱉어냈다. 이제 겨우 잊어가는 중이었다. 매일 밤 아른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찾아나가고 싶은 것을 억누르느라 진이 다 빠질 정도였는데이번 의뢰인 진짜 마음에 안 드네. 투덜거리며 병실 문고리를 잡은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다듬은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병실 안을 바라봤다. 의뢰인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듯 등을 보인 상태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정말 말도 안 되게 너무 익숙해서. 부드럽게 내려뜨린 레드 와인색 머리칼과 여린 등줄기가 더 확신을 갖게 해서 제자리에 굳어버린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늦어서 쓰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젠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쩌면 숨을 멈춘 걸지도 몰랐다. 사고가 멈춰버린 머릿속에는 같은 물음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진짜, 진짜야? 정말 너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천천히 그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런 내 걸음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 사람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의 입 꼬리를 올려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강미르.”

 

 

 

 

- End.

 

 

***

 

 

끝났... 드디어 끝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드디어 14화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큷... 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제가 처음으로 쓴 중편이라 애정도 많이 가고... 처음으로 아꼈던 아이들이라 캐릭터도 잘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는데...

조금은 부족했죠? ㅎㅎㅎㅎㅎㅎ

잘 압니다. 큷... 잘 알아서 더 슬프네요... 더 잘 쓸걸... 더 재미있게 쓸 걸...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눙무리 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 예. 끝내는 재회하고 끝났습니다.

원래는 태선이가 그냥 사라지고만 끝나는 거였는데. 미리 내용을 안 지인 분이

결말이 왜 그따위냐며 저에게 욕 문자를 보내셔서 에필로그 추가했습니다.

헤헿

 

근데, 다들 알고 계셨을진 모르겠지만...

미르가 태선이보다 연하인 거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태선이가 27살 이었구요, 미르가 25입니다.

ㅎ..

ㅎㅎ...

2년 뒤에는 태선이가 29. 미르가 27이니까...

 

태선이가 계란 한 판 바로 앞이네요?!!!!

헐...

에이, 뭐 그래도... 미모는 여전하니까 풰에쓰.

 

자... 이로써 정말로 유혹이 끝이 났습니다.

유혹을 아껴주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셨던 독자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저는 또 다른 연재물과 단편들로 계속해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아, 간혹가다... 유혹의 외전이 나올지도 몰라요. 다시 재회하게 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근황이라도 좀 알려드릴 겸. 겸사겸사 올려볼 예정입니다. ㅎㅎㅎ

 

아이구, 너무 감격하다 보니 인사가 너무 길어졌네요.

 

그럼 전 진짜! 끝을 맺고! 다음 타자의 글을 쓰러 가겠습니다!

 

 

커밍 쑤운-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독자1
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끝이라니ㅠㅠㅠㅠㅠ너무 아쉽네요 다행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좋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에야ㅜㅜㅜ비록 유혹은 끝났지만 미르썬이들인 행복하길빕니다 감사합니당
11년 전
독자3
해피엔딩 아니었으면 잠도 못잘뻔했어요ㅠㅠㅠㅠㅠㅠㅠ밀썬을 이렇게 잘써주시다니..다른 작품들도 기대할게요!!!!
11년 전
독자4
삼개월지나고 정주행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11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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