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나 오늘 미팅 나가네."
"뭐? 미팅?"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캔음료를 뱉어버릴 뻔 했다.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너는 심드렁하게 뭐, 그렇게 됐다며 대답했다.
심지어 오늘 저녁에 간다고 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이제 본인 인생에 더이상의 미팅은 없을 것 같았다는 말에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그러고보니 얘는 한창 연애할 나이구나. 너무 나랑 붙어다녀서 나 이외에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미팅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반응에 좀 마음이 놓였다.
너를 알게 된 이후로 네가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너가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보는 게 오히려 어색해졌다.
그랬던 네가,
미팅 친구랑 밥먹음
내가 모르던 남자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팅에서 만난 남자애와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는 네 말에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분명 그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미팅이 끝났다며 나에게 온 너를 떠올렸다.
수업을 듣는 내내 신경이 쓰여서 네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너는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남자애가 너에게 밥을 먹자고 먼저 약속을 잡았다는 것.
묘한 경계심이 피어 올랐다. 남자의 직감으로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도서관에 있다가 너를 데려다 주었을 테지만, 그 날은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단둘이 밥을 먹으러 간다는 네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어깃장이라도 부리듯이 먼저 집으로 가 버렸다.
"아냐아냐. 오늘은 좀 피곤해서 집에 일찍 가려고. 전화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심심하면 전화해라~"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듯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너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 생각했다.
밤 늦게까지 오지 않는 네 전화를 기다리다가 그제서야 깨달았다.
너는 충분히 매력있으며, 다른 남자와도 얼마든지 예쁘게 연애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걸.
수업중에도 연락을 주고받는 네가 웃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황급히 노트 구석에 미팅친구 라는 네 글자를 적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네 눈빛을 보았지만 부러 너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시선을 교수님을 향해 고정했다.
수업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 속은 온통 너와 낯선 남자가 함께 있을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수업 내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곧 졸업을 앞둔 나이였고, 너는 휴학 한 번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보다 까마득한 후배였다.
어쩌면 앞으로 너를 볼 날이 얼마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감히 너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을까?
그 전에 너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보장도 없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너보다 나이도 많은 나는 함부로 연애를 꿈꿀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너에겐 또래의 남자가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는 내 마음에서 너를 놓아주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같이 있는 동안까지만, 조금만 더 잡고 있어야지.
그래서 술을 마시러 간다는 네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테니 파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너와의 겨울을 괜히 밀고 당기다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내 마음이 닿는 순간까지는 네게 내 마음을 다 해주고 싶었다.
* * *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책상을 두드렸다.
대학원에 진학한, 나와 꽤 친한 사이의 선배였다.
나오라는 손짓에 돕바를 챙겨 나왔다.
형은 담배를 피웠고 나는 옆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셨다.
커피를 마시다 문득, 다 늦어서 커피 마시면 잠 안 온다며 늘 나를 혼내던 너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뭐야, 졸업 아니냐?"
"네. 저 이번 2월에 졸업해요."
"근데 너 왜 계절 듣냐? 소문 쫙 났던데. 너가 조교님 괴롭혔다고."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돌다니. 혹여 네 귀에 들어갈까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 생겼냐."
"예?"
"너가 치인트의 유정도 아니고. 굳이 졸업 학점 다 채우고 계절 청강하는 이유야 여자 아니면 뭐냐... 걔지? 그 후배?"
"아, 형!"
어느새 또 다른 한 개비를 꺼내들어 불을 붙이며 형은 작게 웃었다.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온전히 너랑 함께 하고 싶어서 한 결정이었으니까.
"인성아. 근데 너도 이제 나이 생각하고, 미래도 생각해야지."
"..."
"걘 아직 학부생이잖아. 걔가 얼마나 부담스럽겠냐."
형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친한 동생의 사랑을 응원해주지 못 하냐며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꽤나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아는데, 너무 다른 상황인 거 잘 아는데 마음이 잘 안 돼요."
형도 꽤나 착잡한 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자신은 논문 작성때문에 바쁘다며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들어가면서, 암만 네가 언정과 킹카라고 넘어올거라고 자부하지 말고, 라며 장난스러운 말도 잊지 않았다.
다 마신 캔커피를 꾸겨 쥐었다.
차가운 밤공기에 한숨을 내쉬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네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나도 모르게 잠깐 고민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어~ 자리 파했어?"
- "여보세요."
"어.. 누구시죠?"
- "죄송합니다. 얘가 너무 취해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왜때문인지 단번에 그 애가 너가 말했던 미팅 친구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친구와 마시러 간다고 했었는데.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취했다는 너를 데리러 가야했다.
"거기 어디예요? 지금 갈게요."
* * *
너와 그 남자애가 함께 있다는 술집은 우리 학교 근처 학교인 A대 주변이었고 그덕에 그 애가 미팅에서 만난 애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애의 설명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테이블 위에 엎어진 너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너를 부축하여 일으키는데 옆에 와서 돕는 그 남자애의 표정에 걱정이 잔뜩 앞섰다.
남자의 직감이라고. 그건 네게 갖고 있는 일종의 관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혼자서 데려갈 수 있어요."
신경이 쓰인 터라 말이 제법 날이 선 채로 나와버렸다.
취한 너를 업고 나가는 동안 그 남자애는 나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등 뒤에서는 너의 온기가 느껴졌다.
업을 일 있을 줄 알아으면 가방 안 가져오길 잘 했네.
아무도 없는 밤중의 휘경동 골목길을, 너를 업고 걸었다.
늘 데려다 주어서 익숙한 그 자췻방까지 가는 내내, 자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술집에서 단번에 느꼈던 그 남자애의 미묘한 표정, 그리고 내겐 별 말없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신다며 잔뜩 당황한 듯 둘러대던 네 목소리...
아, 어쩌면 내 사랑이 네 연애를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늘 너를 집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지, 집 안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네 말에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엔 들어가는 게 아니라며 매번 밖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너의 자췻방 현관문 앞에 와서야 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취한 너를 조심히 흔들어 깨워 현관문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
다행히 깊이 잠이 든 것은 아닌지 웅얼거리며 네가 번호를 불러주었다.
집에 들어서서 너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침대 한 쪽에 걸터앉아서 한숨을 뱉어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순간부터 너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꽤나 오랫동안 현실을 부정하며 너를 붙잡고 있었다.
내일부터 수업에 나가지 않을 것이었으며 앞으로 졸업날 전까지 학교에 가는 날도 없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에 조금 드리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는데, 순간 네가 내 손을 잡아왔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 내 손을 잡은 네 손을 가만히 두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네 자췻방을 나왔다.
* * *
그 날 이후로 나는 열심히 너를 피했다.
다행히 너는 며칠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나와 멀어지게 되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웃으며 인사만 할 뿐, 더이상 대화를 나누지도 않게 되었다.
마음먹은 대로 성공했는데 더 기분이 슬퍼졌다.
졸업식 일정때문에 잠깐 과사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너를 마주쳤다.
"어.."
"... 안녕? 오랜만이네."
"응.."
꽤나 수척해보이는 얼굴에 걱정이 앞섰지만, 이제는 너를 더이상 걱정해서도 안되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아무런 말로 채우려는데 싸늘한 표정을 한 채 너가 그대로 나를 지나쳐 과사 안으로 들어갔다.
쿵.
과사의 문이 닫히고 그제서야 우리 사이도 이미 끝나버렸다는 걸 체감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정말 님에 점 하나 찍어서 남이 되어버렸구나.
그래도 네게 부담감을 주는 고학번 선배로 남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학교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졸업하면 볼 일도 없으니 그간 내가 했던 행동들 속의 진심을 들킬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너였다. 잠깐 고민을 했다.
"어, 무슨 일이야?"
- "어디야."
갑작스러운 네 반응.
"응?"
- "만나. 만나서 물어볼 거 있어."
다급한 목소리에, 저 멀리 버스가 오는 것을 보면서도 발걸음을 돌려 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정문이라는 내 대답에 너의 전화는 끊겨 버렸다.
분명히 포기했으면서도 물어볼 말이 있다는 네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너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의 불씨가 다시금 타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