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부부
5
Side M
남준이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쓰러지듯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윤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돌아간 문고리 뒤로 잔뜩 인상을 쓴 남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그래, 김석진. 한창 흥하고 있는 드라마를 통해 인지도를 높인 그의 얼굴을 구경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슈퍼스타야, 소속사 대표 앞에도 얼굴 한 번 안 비춰 주고, 하고 농담을 건네니 입꼬리를 올리며 윤기에게로 다가온다. 평온한 얼굴의 석진과는 다르게 남준은 영 어디가 불편하고 많은 게 못미더운 표정을 하고 있다.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윤기가 괜한 말들을 건넸다. 사람이 죽을 때가 다 되니까 통 못 보던 얼굴들을 다 본다, 야. 윤기의 입이 트일수록 남준의 얼굴은 굳어만 갔다.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계속해서 비트를 찍었다.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석진과는 그닥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미 주목 받기 시작하고 있던 상태의 배우 김석진을 데려다가 전 소속사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마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해 한가족이 된 것뿐이다. 그러나 그의 분위기 자체는 편했으며,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하게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 뚜껑을 열어 윤기의 앞으로 놔 주었다. 남준은 팔짱을 낀 채 윤기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러다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냥, 별 이유 없이, 오랜만에 웃어 보고 싶었다. 별 이유 없이,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만으로도.
책상 위에 놓인 숟가락에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윤기에 대해 한심함과 측은함 비슷한 어떤 감정들이 밀려와 남준이 혀를 끌끌 차며 윤기에게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몇 달만에 마주한 제 소속사 대표의 꼴은 처참했다. 자연스레 나이를 먹어가는 것뿐인지, 아니면 또 무슨 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칼을 혼자 헤집어 놓으며 남준이 책상 위로 엎어졌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윤기의 시선이 남준에게로 한 번 향했다. 그러다 모든 감각이 곤두서 작업실 곳곳의 풍경을 떠올렸다. 꽤 오래 사용해 온 장비들, 몇 달 전 새로 장만한 컴퓨터, 폭신한 감은 크지 않은 소파, 그 위에 놓여진 석진의 분홍색 쿠션, 널브러진 악보들, 녹음실 안의 콘덴서 마이크, 소파 위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는 김석진, 그리고 눈 앞에 엎어져 있는 김남준.
작업실은 일종의 회피의 공간과도 같았다. 그 사랑스럽던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윤기에게 신경질을 냈을 때도, 소리를 지르며 와인 병을 집어 던져 깨뜨렸을 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작은 연인에게 서서히 질려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에도, 작업실은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도망 치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잠시 아내의 생각을 지우기에도 참 괜찮은 곳이었고, 유일하게 아내보다 우위에 두어 왔던 음악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곳이었다. 종종 함께 작업을 하곤 했던 김남준은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남준은 말 없이 들어만 주었다. 윤기가 왠지 모를 새로운 설렘에 휩싸여 정신이 나가 버렸을 때도 남준은 섣불리 윤기의 편을 들지 않고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만 주었다.
아직, 당연히, 집사람 좋아하지. 볼 때마다 설레지. 근데, 그러니까. 우리한테도 시간이 온 것 같아.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사실 지금 만나는 사람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냐. 그냥 새롭다는 뜻이지. 이름이랑 연애할 때만큼 설레는 거, 그런 기분까지는 아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도 알아, 나 이런 맘인 거. 서로 그런 마음으로 만나는 거야.
가만히 윤기의 말을 듣던 남준이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 마음 아니면 헤어져요. 정리해요, 당장.’ 윤기가 얼빠진 표정으로 남준을 올려다 봤다. 아주 딱딱한 무엇이 머리통을 세게 갈기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남준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형이 좋다면 군말 없이 들어 줄 생각이었어요, 형수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근데 딱히 좋아서 만나는 것도 아닌 거면, 이게 누구 좋으라고 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는데요. 시간이 필요하면 혼자 시간을 가져요. 왜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다른 여자한테 퍼 주고 있어요? 그 시간 쓸어 담아서 얼른 생각 정리하고 형수님 마저 달래서 일으켜 세우는 게 형이 할 일이에요.
이름 씨는 요즘 좀 어때요? 그대로 엎어져 있던 남준이 말을 건넸다. 아주 잘 지낸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아주, 나보다야 훨씬 아름답게 지내고 있다고. 아이돌 하는 젊은 놈도 만나고 다니느라 바쁘다고, 아주 얼굴 폈다고. 그러나 지은 죄가 있어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혹은 훨씬 더 처참한 기분, 그래, 그랬을 테다. 적어도 지금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지금의 자신보다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은근히 알릴 데도 없었던 아내가 느낀 감정이 훨씬 더 외로움과 비참함으로 무장한 감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대답이 없는 윤기의 눈치를 살피던 남준이 윤기의 등을 몇 번 토닥이더니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석진의 옆으로 가 앉았다. 등을 두드리는 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켰다. 제 뺨을 몇 번 가볍게 내리쳤다. 살아 온 삶과 동떨어진 새로운 것에 취해 정신을 놓고 있을 때면 윤기에게 와 사람답게 살도록 그를 구제해 주는 것은 늘 남준의 몫이었다.
“김태형 아는 사람 있어?”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 보는 거야?”
“서로 아는 사이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과자를 까 먹던 석진이 대답했다, 그냥 적당히 알던 사이. 저, 마당발. 윤기가 눈을 흘기며 자신이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설사 그게 남준일지라도 모든 마음을 털어놓기에는 사람 자체가 솔직하지 못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남준이 옆에 있다 할지라도 속을 터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름이었다. 머리를 끙끙 싸매며 한참을 고민하다 정말로, 오해 받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의 질문을 건네기로 했다. 듣는 이가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질문. ‘어떤 친구야?’ 마음 속 깊은 화를 꾹꾹 누르며 석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석진이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고 초점 없는 눈으로 대답을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흔히들 말하는 흙수저. 악바리 같은 놈. 함께 데뷔를 준비해 온 멤버들 사이에서 트러블이 일어나 데뷔가 무산되었고, 이왕 투자한 거 하나만이라도 살려내 보자 하는 심정으로 돈을 쏟아부어 김태형을 데뷔시켰다고 한다. 잘 맞아떨어진 타이밍과 갖고 있는 끼 덕에 어쩌다 연속해서 대박을 쳤고, 회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석진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리저리 친분은 많은 놈이었는데 되게 외로워하더라. 사람 되게 좋아해, 뜨고 나서는 자주 못 만나서 연락은 끊겼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름이는, 동질감을 느꼈을 수 있겠구나. 단순한 연민, 정말 작은 동질감. 잠깐의 감정.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둘의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자신과 이름 사이의 그 깊은 감정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몇 번이고 다독였다. 마냥 그렇게 기도했다.
음악의 존재 여부를 제외하면 살아온 삶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능력을 눈여겨 보던 연예 기획사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고, 완전한 성인이 되자마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행복했고, 이대로 작업실에서 숨이 끊기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소속 가수들에게 곡을 주며 저작권료로 생활비를 벌었고, 작업물로 인해 조금씩 이름이 알려져 과거에 녹음했던 믹스테잎이 다시 한 번 주목 받기도 했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이 되어 돌아본 인생에 대한 소감은, ‘꽤 열심히 살았구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름을 만났다. 열아홉 살의 여자아이는 어른스러우면서도 영 어렸다. 세상물정에 관심 없던 윤기에게 이름을 소개시켜 준 지인이 그 아이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데뷔했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용감하네, 어린 친구가. 여섯 살 아래의 아이는 한없이 어려 보였고, 고백하자면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이는 내 주변에 널린 사람들에 비해 너무도 어렸을 뿐더러 나에게 큰 의미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지 못했다. 그게 아이와의 만남에서 얻은 첫 느낌이었다.
잠시 아이를 잊고 살아가던 중, 먼저 연락이 왔다. ‘혹시 곡 쓰는 일에 대해서 질문 드려도 돼요?’, ‘피디님 곡 정말 좋아해서’, ‘오빠한테 번호 물어봐서 연락 드렸어요.’ 두 번째로 이야기를 나눈 그 애에게서 받은 느낌은 안 그렇게 생겨서는 당돌한 친구네, 였다. 그 뒤로는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씩은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윤기 역시 대화를 즐기고 있었고, 한 번 생겨난 마음은 쉽사리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애, 사랑, 만남 등의 단어와는 담을 쌓고 지내왔던 탓에 간질거리는 그 마음이 생기는 게 익숙치 않았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그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작할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맞게 된 두 번째 생일, 그 말만 들어도 간지러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게만 느껴졌던 이름이는 어느새 윤기의 뮤즈가 되어 있었다. 아이에게서 모든 영감을 얻기 시작했고, 일상이 풍족해지기 시작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중하게 재고 잰 결과로 이름과 자신을 부부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 놓기로 했다. 식을 올리기 몇 달 전에는 회사로부터 독립해 연예 기획사를 설립했다. 프로듀서가 되겠다, 성공하겠다, 자신만을 위해 꾸었던 꿈은 어느새 이름을 행복하게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얹어져 사랑하는 이를 위해 꾸는 꿈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달콤한 꿈을 꾸었었다. 평범하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평범한 부부가 되어 행복한 삶을 함께하는 꿈을 꾸었었다. 꿈이 산산조각나 버린 지금, 아직까지도 그 단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직 단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그 꿈의 조각을 어떻게든 다시 맞추어 보려 하고 있었다.
처음엔 윤기만 나쁜 놈 만들더니 갑자기 불쌍한 사람 만들고 있죠 예 저는 민빠답이니까요 ;ㅁ;...... 애초에 처음부터 계획 없이 홧김에 적어 버린 글이라...... 껄껄 오늘 분량이 적나 싶어서 올려 봤는데 기분 탓이 아닌갑네요 끙 그치만 젤 오래 걸렸습니다 전 3인칭 시점이 너무 어려워오... 오늘 역대급 노잼 같지만 이해해쥬시떼........... 남준이랑 석찌가 나왔잖아요...... 다음 글에 꼭 남은 과거를 풀겠슴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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