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운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맞잡은 제 손이 어딘가에 둘러져 있었다. 그 따스함에 다시 눈이 감기려는 찰나, 덜컹거리는 몸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가까스로 다시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방 안의 물빛 장롱이 아닌 샛노랗게 노을이 진 어느 산 중의 풀들.
뒤척이는 몸 짓에 택운이 일어 났다는 것을 짐작한 상혁이 노곤한 말투로 물어 온다.
"깨셨습니까, 도련님."
"... 혁이?"
"예, 저 혁입니다."
아직도 어색하게 달라 붙는 존칭에 택운이 프슬, 하고 실없이 웃는다.
어딜 가는 것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어디래두? 도련님 훨훨 날아 보내러 갑니다.
택운이 별안간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따라 상혁의 태도가 이상스러웠다. 택운의 예민한 코 끝에 비릿한 향이 맡아 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피 냄새.
택운이 푸드득 떨며 상혁의 등에서 내렸다. 허겁지겁 상혁의 앞 섶을 확인 하는 택운의 모습을 보는 상혁의 눈동자에 공허함이 스쳤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른 체 눈을 감고 계셨다면.. 저를 원망 하는 것으로 끝 났을 텐데. 왜 고통을 자처 하시는지요.
알 수 없이 미소만 짓는 상혁이 답답했다. 일그러진 택운의 미간은 상혁의 앞 섶을 엉망으로 물들인 붉은 자욱을 향해 멈추어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를.. 누구를."
"당신의 날개를 무참히 꺾어 버린, 독거미를 죽였습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상혁. 좀처럼 표정이 없던 택운의 동공이 이번만은 예외로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게.. 도대체.
미소를 가장해 웃어 보이던 상혁이 이내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떠나 보내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미와 아비의 눈물을 비춘 망나니의 칼 끝 타고 뎅강, 하늘로 떠오르게 될까.
아니면, 한 평생을 어두컴컴한 지옥 문 안에서 썩어가게 될까.
사실,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더 이상 정택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다는 것.
사랑 하는 이를 홀로 떠나 보내야 한다는 것.
어쩌면 나의 이기적인 처사로 인해, 이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 것 일지도 모른다.
피로 물든 앞 섶이 아프다. 택운을 엎고 이까지 올 때까지는 축축한 감각 조차 없었건만, 택운이 떨어져 나가자 마자 차갑게 얼어 붙는 느낌이 묘하다.
너는 이토록 내게 큰 존재이다.
그것을 압니까? 도련님...
"이제 당신은 그 곳으로 다시 갈 수 없소."
"...뭐?"
"도련님, 이제 혼자 갈 길을 가셔야만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정택운."
"..."
"나도, 함께 갈 수 없어."
상혁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 택운의 가슴을 헤집었다.
이상하게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혁이 왜 이러는지, 왜 이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건지, 상혁의 앞 섶이 왜 피로 물들여져 있는지,
아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는 알 수 없다. 그 답답함에 택운이 방방, 가슴을 쳤다.
"누구를.. 죽였어?"
".. 알아서 득 될 것 없습니다. 중요 한 것은.."
"그 여자를 죽였니?"
"..."
"왜, 왜 죽였어, 왜!"
택운이 언성을 높였다. 그 목소리에 여러 것 들이 뭉쳐져 상혁을 스치고 지나간다.
슬픔, 괴로움, 죄책감, 미안함, 당혹스러움.
그리고 안타까움.
상혁이 꿈 결처럼 답했다.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슬슬 날아가셔야지요.
당신을 그럴 수 있습니다. 아마, 끝 까지 살아 남을거야. 그렇지...?
안 그러면, 내가 당신을 떠나서 평안하지 못할 것 같소.
"나는 돌아 갈 겁니다."
"..."
"이 산 길을 쭉 걷다 보면, 새 마을이 나올 거요."
".. 한상혁."
"그 곳으로 가시오. 더 이상, 당신을 배웅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오."
이대로 당신과 함께 떠난다면, 아마 당신이 버티지 못 할 거야.
정승의 아내를 죽인 죄인과 함께 의금부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다, 결국은 서로가 말라 비틀어지겠지.
그럴 바에.. 새로운 인연을 만드시오. 당신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택운이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모르는 이방인을 대하는 것 처럼 말을 해대는 상혁도, 노을이 져 가는 이 산 중 길도, 지금 자신이 앉은 흙 바닥도,
이 모든 상황도. 믿기지가 않았다. 전부, 다.
".. 또, 혼자 가라고? 나더러..?"
"..."
"또, 잃으라고?"
"..."
"왜.. 왜."
왜, 왜 그랬어. 그제서야 울분 섞인 신음이 택운에게서 쏟아져 나온다. 상혁의 입술이 지긋이 부딪혔다.
약한 모습 보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앞으로 웃으며 살아 가야 하니까.
"죽여도, 내가 죽였어."
"..택운아."
"나를 더럽힌 그 깟 인간들, 죽여도 내가 죽였어.."
"..."
눈물을 흘리는 택운에 가슴 한 켠이 죽을 듯이 아린다. 이러면 안 돼. 어서, 발 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느 새 상혁 자신을 쫓는 말 발굽의 소리가 이 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상혁이 미련 없이, 아니.. 미련 없는 척. 발 걸음을 떼었다.
어쩌면 영원 할 지도 모르는 이별인데, 그 실상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한 발짝만 떼어도, 서로를 보지 못 하는. 너무도 간단한..
"흑, 으."
"어서, 가."
"으. 흑.."
"곧, 따라 갈게."
"..."
"어떻게든 따라가서, 다시 곁에서 지킬 거야."
거의 불가능한 약조 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간절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를 묶을 수 있다면, 너무나도 간절 한 약조였다.
정말...?
꼬리를 길게 무는 택운의 울음 소리가 상혁의 등 뒤에 꽂혔다.
응, 정말.
상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간다.
홀로 남겨진 택운의 등 뒤에서 초록빛의 푸성귀가 나풀대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산 중에서, 그렇게 상혁은 뒤 돌아 떠났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휘청이며 일어난 택운이 이내 상혁의 뒤를 쫓아 정신 나간 사람 마냥 뛰었다.
이대로.. 이대로 보낼 수 없어. 홀로 남기는 싫어.
택운은 자리에서 멈추었다.
밧줄에 묶여 엉망인 상태로 끌려 가는 상혁의 모습이 두 눈에 한 가득 담기었다.
그 주위에서 죽어라 악을 써 대는 단하와, 상혁과 마찬가지로 엉망인 몰골로 눈물만을 흘려 대고 있는 그의 양친.
난장판이 된 원식의 가옥.
그리고, 그 주위에 우뚝 서 있는 택운.
상혁이 불현듯 택운의 쪽을 바라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택운은 그에 등을 돌려 다시 달렸다. 흘러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훔쳐 내며 달렸다.
'가세요. 뒤 따라.. 꼭, 갈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