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반존대를 써요/채셔
망개의 손에 이끌려 따라온 곳은 어떤 놀이터였다. 웬 놀이터, 하고 망개를 바라보자 대뜸 내 손을 잡고 미끄럼틀 안으로 들어간다. 아주 좁은 공간이었다. 앉으려는데, 망개가 제 남방을 밑에다 깔아주었다. 예쁘게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망개가 미끄럼틀 밑에 숨겨놓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눈을 깜빡이자 망개는 꽃다발로 제 얼굴을 가리며 '으아아, 부끄러워.'하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냥 호석이 형한테 물어보니까 여자들이 이런 거 좋아한대서. 준비해봤는데, 괜찮아요? 나는 꽃다발을 받아들고, 한동안 가만히 이 느낌을 즐겼다. 별로예요? 망개가 조심스레 물어오기에, 나는 천천히 망개에게 안겼다.
"고마워요. 너무 예뻐요."
감동에 찬 목소리로 말해주자, 망개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전생에 착한 일을 했었던가? 어떻게 이런 남자를 만나지. 나는 망개에게 안겨있다가 '다음은 어디예요?'하고 물었다. 망개는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메모장을 꺼냈다. 거기엔 딱 망개 같은 글씨로 끄적끄적 적은 메모가 있었다. 놀이터, 꽃다발. 그리고 마트, 자기 요리 먹기. 자기라는 말에 다시금 마음이 두근거린다.
"저번에 소원이었잖아요."
"응, 소원 이번에 들어줄게요."
망개는 주섬주섬 옷에 붙어있던 모래를 떼어내고 남방을 탈탈 털어 제 가방에다 구겨 넣었다. 나를 모래 바닥에 앉히기 위해 들고온 옷이었나보다. 새삼 거기에 감동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내게 손을 탁 내밀기에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을 잡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웬디를 이끌어주는 피터팬인 것만 같다. 정말 동화에서나 볼 법한 요정 같은 그런.
"그러고보니 아직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모르네에."
"어, 나도 망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요. 힝."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자기."
뜬금없는 끼 부리기 스킬에 푸흐,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웃자 망개도 따라 웃는다. 행복하다, 미친듯이. 회사도 다니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연애도 하게 되고. 겨울인데도 따뜻하다. 아니, 내 손을 꽉 잡아오는 손길에 녹을 것만 같다. 매일 술을 안 마시겠다고 말해놓곤 음주 문화에 찌들고, 남 몰래 쓰레기도 길거리에 버린 적이 있지만. 이번에도 뻔뻔하게 하느님에게 소원을 빌어본다. 하느님, 제발 이 남자와 오래, 오래도록 걷게 해주세요.
7. 뜻밖의 질투망개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달달한 카톡까지 마치고 나서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다음 날이 회사에 가는 날이다. 시밤. 얼마나 원했던 직장인데, 또 다니게 되니까 입장이 달라진다. 흐이, 피곤해. 망개는 작업 때문인지 새벽에 회사를 나가고. 혼자서 회사에 오니까 뭔가 재미와 설렘이 사라진 기분이다.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퍼블리시티만 다섯 개를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막내의 신분이므로 커피 심부름과 담배 심부름은 덤. 커피는 그래도 익숙한데, 담배의 세계는 정말 알 수가 없다. 말보로 라이트가 말보로 골드고, 에쎄 라이트는 에쎄 프라임이고…. 왜 뫼비우스는 마일드 세븐이고…. 왜 다들 다른 담배를 피는 거고….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던힐 라이트가 왜 던힐 1mg이 아니고 던힐 6mg냐는 거다. 어쨌든 기라고 하면 기어야 하는 게 직장 생활이므로 입을 꾹 다물고 시키는 것이나 하기로 한다. 잉잉.
"누나, 들었어요?"
"응? 아, 너 저리 가. 일하는데 자꾸 방해되게."
"이번에 랩몬스터 우리 회사로 온대요. 존좋."
"아, 그래? 드디어 계약한 거래?"
치, 나한테 일거리를 다 넘겼나보다. 팀장님이 저렇게 윤기 선배와 노닥거리는 걸 보니. 열심히 노트북에다가 퍼블리시티를 작성하는데, 갑작스레 내 어깨에 턱- 하고 팔이 걸쳐졌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하얗고 무심한 얼굴이 내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 이야, 우리 술떡이 열심히 하네. 응? 눈을 세모 꼴로 하고 윤기 선배를 노려보자 제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쿵 때린다. 어쭈, 까불어. 짐짓 무서운 얼굴을 하고 까분다고 말하기에 나는 입술을 내밀며 노트북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걸 언제 다 해서, 언제 기자님들한테 다 보내냐구.
"야, 술떡. 나 어제 너 봤다."
혹시 지민과 데이트하는 걸 봤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윤기 선배를 바라보았다. 에엥. 놀이터 밖에 안 갔는데. 어제 신나게 요리한 것 밖엔 없는데. 눈을 깜빡이자 윤기 선배가 '방앗간에서.'라고 말을 덧붙인다. 이 사람을 진짜. 뜬금없는 아재 개그에 저 혼자 빵 터져서는 꺽꺽거리는 윤기 선배를 가볍게 무시했다. 얼른 다 해야 퇴근할 수 있다. 아니, 퇴근할 수 있을진 모르는 거지만. 또 뭔가를 시킬 테니까. 엉엉. 내가 등을 돌리고 노트북에 시선을 쳐박고 있자 그제야 조금 민망해졌는지 윤기 선배는 다시 내 어깨에 제 팔을 걸쳐왔다.
"야, 술떡쓰."
"아, 왜 자꾸 불러여. 일하는데."
"자꾸 까불지, 엉?"
또, 또. 절대 화내는 표정이 아닌 걸 아는데 자꾸만 화난 표정을 짓는다. 내가 그래도 대학에 다닐 때부터 졸업하고 이제까지 나름 윤기 선배랑 친하게 지내왔던 사람인데. 선배, 저리 꺼져요. 훠이훠이! 웃으며 말하자 윤기 선배는 입술을 삐죽이며 제 주머니에서 망개떡을 꺼냈다. 박지민이 이거 전해주래. 그때 봤던 망개떡이다. 문득 망개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장난이고, 이제부터 이거 매일 줄 테니까 챙겨 먹어요. 나 망개떡 한 박스 시켰어, 우리 술떡 주려구.'
그게 또 감동이라서 망개떡을 부여잡고 울먹이는 표정을 짓는데, 문득 지민의 생각이 나서 윤기 선배에게 물었다. 지민 씨는요? 왜 선배가 이걸 줘요? 눈을 똘망하게 뜨고 윤기 선배를 쳐다보자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왔다. 걔 오늘 작업해야 돼. 난 다 끝냈음. 저렇게 세상 만사 귀찮은 표정을 지어도 또 대답할 건 다 해준다. 그러고보니 여기에 망개떡 심부름을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왠지 망개떡 심부름을 시킬 때 윤기 선배가 망개를 엄청 갈궜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를 갈구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괴롭혔겠지. 나중에 망개 만나면 오구오구 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망개, 오구오구.
"형, 이거 녹음 좀 잘못된 거 같은데요?"
"엉? 뭐?"
"몰라요, 파일 이상해요."
아, 썅. 윤기 선배가 이내 인상을 확 찌푸린다. 호석 씨의 말에 윤기 선배가 나무늘보 같은 걸음으로 질질 작업실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 나는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꽂았다. 으아아,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윤기 선배가 놓고 간 망개떡 포장을 뜯어, 한 입 베어물었다. 망개 생각이 남과 동시에 마음 속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샘솟는다. 생각이 많을 땐 망개떡이지. 멍하니 망개떡을 입 안에 가득 물고 우물거리는데, 복도에서 익숙한 주황 머리가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반가워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는데, 망개가 그냥 지나쳐버린다. 민망해진 손을 구부렸다가 머리를 매만지며 다시 앉았다. 뭐지? 분명히 날 봤는데.
살짝 본 망개의 입술이 어제 베고 잔 솜이불만큼이나 부풀어 있었다.
(번외) 냠냠, 맛있게 냠냠
방탄 빌 앞, 방탄 마트에서 이것저것을 사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새우도 사고, 버터도 사고. 요즘 쿡방이 뜨기에 요리 프로그램을 몇 번 봤는데, 그 중에서 제일 쉬운 요리를 하던 셰프의 레시피를 따라하기로 했다. 재료도 사고, 레시피도 메모장에 복사해두고. 손을 씻고, 요리 준비를 하려는데 앉아 있던 망개가 자꾸 일어나 소매를 걷었다. 내가 도와줄 거 없어요? 나 잘할 자신 있는데! 그렇게 앉아 있으라고 해도, 자꾸 안절부절이다. 망개를 겨우 돌려보내고 TV도 틀어준 뒤, 요리 준비를 끝냈다. 이제 칼질이랑 후라이팬만 잡으면 된다. 칼질에는 익숙지 않은데. 그래도 시도해보기로 한다.
탁탁탁탁.
오오, 은근히 잘 되는 것 같아 마늘도 열심히 썰고, 버섯도 썰고, 피망도 썰었다. 제각각 모양은 다르지만 어쨌든 상관 없다. 맛만 있으면 되는 거지! 후라이팬에 버터를 잘라 넣어두고 썰어둔 재료들과 밥을 넣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만 알려주는 비법이라며 알려주던 양념장도. 쓱쓱 비비다가 가장 중요한 걸 잊었다. 어쩐지 뭐가 허전하다 했어. 제일 중요한 새우가 빠졌다. 나는 불을 줄여두고 새우를 급하게 썰었다. 잉, 급하게 썰었던 게 문제였을까. 결국 날카로운 칼날에 엄지를 베여버렸다. 아! 하고 엄지손가락을 잡자 TV를 보고 있던 망개가 반자동적으로 부엌에 뛰어온다. 이이, 어떡해. 내 손가락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던 망개는 내 엄지를 제 입속으로 쏙 넣었다. 그러곤 피를 쪽쪽 빨아주는데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점점 내 손가락을 빨아주면 빨아줄수록……. 망개의 눈이 풀리는 것을 보다가 나는 서둘러 망개의 입에서 내 엄지손가락을 빼냈다.
"타, 타요!"
"으, 응. 타, 타요."
망개도 당황했는지 후다닥 제가 있던 자리로 뛰어갔다. 망개의 뒷통수가 새빨갛다. 나도 부끄러워져서 새우들을 서둘러 후라이팬에 집어넣고 쓱쓱 비볐다. 몇 번 뒤집어주다 위에 치즈까지 뿌리니 그럴 듯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그릇에 예쁘게 담아내고 망개를 불렀다. 바, 밥 다 됐어요. 아직도 얼굴에 붉은 기가 남은 망개는 손으로 제 얼굴에다 부채질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우와아, 맛있겠다. 이내 박수를 짝짝 치다 앉은 망개는 크게 한 숟갈을 퍼서 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빵빵해진 볼이 귀엽다. 몇 번 우물우물 씹으며 맛을 음미하던 망개는 곧 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마시써오. 석찌니 형보다 요리 잘해오. 웃으며 칭찬을 해주던 망개는 다시 숟가락에 가득 밥을 퍼 제 입 안에 넣었다. 이번에도 으음, 하고 탄성을 내뱉은 망개는 밥을 꿀꺽 삼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자기, 너무 마시써오. 나랑 혼인해오.
내 예쁜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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