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소야. ”
태형아.
“ 왜 대답 안해.. ”
요즘 내가 이상해.
“ 내가 진짜 싫어? ”
죽은 호석이가 자꾸만 보여.
「 여 름 밤 의 꿈 」
01
방학과 함께 못견딜 여름도 찾아왔다. 평소와 같이 강한 햇볕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약한 피부 위를 침투해왔다. 선풍기 앞에 죽치고 앉아 있어도 더위는 가시지 않아 결국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로 행하기로 결심을 마친 나는 슬리퍼를 신고 지갑을 챙겼다. 역시나 문을 열자마자 집 안과는 비교도 안되게 뜨거운 공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불과 1~2년전까지만해도 여름이 좋았다. 그 더운 날에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자전거 등뒤에 올라타 제법 선선해진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절로 봄이나 가을을 좋아하게 된다더니 나도 이제 그럴 나이에 가까워졌나보다. 새삼 피부로 느껴지는 실감에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망할. ”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썩 좋은 날은 아닌가보다. 3분도 채 안되게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땀이 뿔뿔 흐르는 내 앞에 가까워진 마트 문 앞에는 사정으로 오늘 쉰다는 문구가 걸려져있었다. 그냥 집에 갈까. 한참 고민 끝에 이왕 나온김에 이득이라도 보자 하는 마음으로 결국 조금 더 큰길 쪽에 있는 편의점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빨리 잔뜩 사고 집에 가자. 머릿속에 드는 아이스크림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고된 걸음 끝에 편의점의 위치가 빼꼼히 보였다. 사실 편의점에 들르는건 아직도 익숙치 않았다. 편의점을 딱히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매번 먹을거던, 심부름이던 전부 집 앞 마트에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의점을 애용하는 내 같은 반 여자애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쪽으로 향하는 큰 횡단보도는.
“ 어? 쟤 김탄소야냐? ”
“ … ”
편의점 문을 아무런 기척이 없게끔 조용히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채 라면을 먹고있는 남학생 2명이 보였다. 먼저 알아본 남학생 한 명이 입술 주위에 묻은 라면국물을 지우지도 않은 상태로 알은체를 했다. 그 옆에는 김태형.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그 두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쿨럭, 쿨럭. 야, 김태형! 왜그래! 잘못먹었어? 갑자기 사례가 든건지 기침을 하며 먹은 라면을 줄줄이 뱉어내는 김태형을 뒤로 하고 나는 망설임도 없이 편의점 문을 다시 열고 나갔다. 역시 여기 오는게 아니였다. 다시금 후회를 하며 소득 없는 빈 손으로 횡단보도를 다시 걸었다.
썩 마주치기 힘든 인물. 그게 나한테는 김태형이였다.
“ 야, 야! 잠깐만 좀 서봐! ”
어쩐일에선지 등 뒤에서는 아까 본 김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1년 전, 그 여름 이후로 우리는 만나도 알은체나, 반갑다는 인사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 간단한 안부인사조차 없었다. 전화번호를 바꿔도 먼저 말하는 적이 없었고 학교에서 우리 둘 얘기가 나와도 전혀 동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백기를 쌓았던 1년. 어째서인지 너는 이제와서 나를 다시 불렀다. 왜? 대체 무슨 이유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행여나 네가 나를 붙잡을까봐. 네가 나를 돌려세워서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자고, 그렇게 화해를 할까봐. 내가 그걸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다는걸 느낄까봐.
“ 김탄소 ”
“ … ”
“ 너 내말 듣고 있는거 다 알아. 좀 멈춰봐. ”
“ … ”
“ 탄소야. ”
미련하게도 내 이름 두글자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해가 조금 지기 시작했는지 불그스름한 햇빛이 저녁노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있던 내 뒤로 김태형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김태형이 가만히 멈춰서있는 내 팔을 세게 붙잡고는 돌려세웠다.
“ 아, 미안해. 아프게 하려는건 아니였어. ”
“ …할 말이 뭔데. ”
“ … ”
줄곧 상상해왔다. 이렇게 김태형이 내게 말을 거는 장면을. 김태형이 팔을 붙잡고 돌려세우는 바람에 나는 억지로 그를 마주봐야했다. 나에게 왜그랬냐며 윽박지르는 상상 속 김태형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은 내 팔을 세게 쥔거 하나가지고 되려 자기가 사과를 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고 시큼하고 따끔거리는 감정들이 머릿속을 요란하게 만들었다.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김태형 앞에서 말 한 마디도 힘겹게 나왔다. 공백 1년. 그 사이 김태형은 분명 잘 지냈어야하는데 오히려 오래만에 보는 그 얼굴엔 그늘이 져있었다.
“ 할 말 없으면 나 갈게. ”
“ 야, 아니 그게 아니라… ”
“ … ”
떨군 고개가 김태형의 손가락에 옮겨갔다. 여전하다. 불안할때면 엄지손톱을 튕기는 습관말이다.
“ 보충 좀! 나오라고.. ”
말끝을 흐리는 김태형이 내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한 손에 들고 있었던 검은 봉지를 내 손에 쥐어준다. 잠시 스쳤던 손길에 온기가 베어있었다. 그럼 나 간다. 김태형이 힘겹게 발걸음을 띄고 등을 보였다. 꼭 가라앉는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봉지 안에는 내가 아까 사려던 아이스크림이 들어있었다. 보충? 왜 자기가 나오라 말아야. 이제껏 인사도 한번도 안했으면서. 웃기는 자식이다. 아이스크림도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사왔는지 모르겠다. 늘 김태형에게 화나있어도 마음 한구석은 오롯이 미안하단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불편한 감정이 수면 위로 오르게 되는 날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1년 전 여름, 그 밤 이후로 우리가 왜이런 사이에 놓이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야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 탄소야. 할미 훈석이네 좀 갔다 온다. ”
“ 알았어. 조심히 갔다와. ”
“ 근디 얼굴이 왜이리 빨개. 이리 함 와봐. 열좀 재보게. ”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부모님의 얼굴은 이제 가물가물할정도로 못본지 오래되었다. 할머니 말로는 나를 여기에 맡겨두고 소식을 감추었다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라며 나를 항상 안심시키고는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에서 떨어져 자란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을 그리워하지 않았고 나서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라는 말이 익숙해져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집안 일을 척척 해내는 나를 보며 쭉 함께 지내온 마을 사람들은 철이 들었다고 칭찬했다. 다만 곁에 누운 외로움만이 항상 불쑥불쑥 끼쳐오는건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이렇게 집을 비울 때면 나는 완전히 혼자였으니깐. 그럴때마다 어떻게 했더라. 아마 집을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는 마을 뒷산에 작게 세워져있는 오두막에 가곤했다. 그곳에 가면 적어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벌써 옛날 얘기다.
“ 에구 쯧쯧. 감기기운있는것 같여. ”
“ … ”
“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 알았지? ”
“ 나 괜찮은데. ”
들어가서 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차까지 직접 끓여주려는 할머니를 간신히 설득해서 보냈다.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감기에 걸렸구나. 아이스크림을 꽤 많이 먹어서 그런가 개도 안걸린다는 그 여름감기를 내가 걸렸다. 하여튼 이래서 여름이 요샌 이래저래 마음에 안든다. 더울땐 끈질기게 더웠으면서 조금 열을 식히려고만 하면 감기가 불쑥 찾아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어지럽고 더운건 싫고.
결국 감기걸릴때 할머니가 해주는 차를 직접 끓여먹었다. 할머니는 차를 끓여줄때마다 아빠 얘기를 했다. 너도 애비 닮아 몸이 참 약하구나. 니 애비도 이렇게 열 펄펄 끓을때 내가 차 한잔 끓여주면 퍼뜩 나았어! 여름감기에 걸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타박하는 할머니의 눈에도 가끔 그리움이 실려있었다. 아빠 얘기를 할 때면 안그래도 짙었던 주름에 더 그늘이 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보고싶구나. 그럴때면 나도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져 밤새도록 아빠를 그려본다. 그리운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함께한 기억은 없었으므로. 할머니가 안보이니 오늘은 쉽게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쯤이라면 벌써 잠에 들어있어야하는 상황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인물이 떠올랐다.
' 보충 좀! 나오라고.. '
보충. 보충이라면 내일도 들어있었다. 김태형은 왜 그런 말을 한걸까. 핑계거리? 아니면 나를 진짜 평소에 지켜보고 있던걸까. 창문 밖은 벌써 여름해는 잠식되고 깊게 어둠만이 깔려있었다. 김태형 생각을 하니 머리가 더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윙윙 울리는 매미소리가 수면을 방해했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음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 탄소야. 탄소야. ”
“ 응. ”
“ 아프지마. ”
“ 응. 나 안아파. ”
“ 거짓말. 이렇게 얼굴빛이 안좋은데. ”
“ 아닌데. 나 멀쩡한데. ”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평생 잠에 들지 않을 것만 같던 매미들도 더이상 울지 않았다. 반쯤 되찾은 정신으로 실눈을 떴을 때 크고 하얀 손이 내 눈 앞에 왔다갔다 거렸다. 남아있는 기력으로 큰 손을 겨우 잡았다. 생생한 사람 손의 온기가 내 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몽롱한 느낌이 다분했다. 내 옆에 누운 사람의 얼굴 윤곽이 선명해졌다.
“ 호석아. ”
“ 왜. ”
“ 가지마. ”
“ 안 가. ”
“ 거짓말. ”
호석이였다. 호석이가 예전과 같은 얼굴로 예전과 같은 미소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마냥 좋아서 그게 마냥 행복해서 나도 그저 따라 웃었다. 뭐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계속 이러고 있으면 밤이 끝나버리면 호석이가 떠날것만 같았다. 다시 내가 영영 못보는 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의식 위로 다가오는 불안한 느낌에 호석이의 손을 꽉 잡았다. 평생 도망갈 수 없게 꽉 잡았다. 이거 안 놓을거야. 맘에 든 인형을 사주기전까지 꽉 잡고 안놓는 어린애같은 내 모습에 호석이가 한번 더 웃음을 띄었다. 큰 손이 다시 다가와 내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 포근한 느낌에 잠에 다시 들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으면 정말로 다시는 호석이를 못볼 것 같아 꾹 참았다.
얼른 자. 귓속으로 호석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나는 그 말에 놓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이런 내 단호한 대답에 픽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야해. 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호석이었다. 얼른 자야 학교가지. 학교라는 말에 얼핏 그 얼굴이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나쁘다가도 내 머리를 쓸고가는 편안한 느낌에 화가 누그러들었다. 그렇게 잠이 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을 때 호석이가 입었던 옷이 교복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슴께에 달린 명찰이 유난히 낡아보였다.
' 정호석 '
그걸 알아챘을 때 해는 이미 다시 뜨고 난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꽤 따스했다.
“ 꿈인가. ”
다만 손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이 생생할뿐.
*
호석이 글이 보고싶어서 찾아왔습니다 !
아직 이야기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태형이가 주인공같은 이상한 기분은 뭘까ㅎ